가즈 나이트 – 2화
레나는 오늘 아침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의 뒤를 보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몇 일 전의 리오에 대한 기억은 거의 잊은 듯했다. 그녀는 잠시 쉬려는 듯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물려준 왕국의 창건서였다. 말스 1세의 일부터 2세의 일까지 적혀있는 소설 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책을 반은 신용하고 있질 않았다. 이미 100년 가까이 된 일을 믿으려 하질 않는 것은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약간 쓰여있는 가즈 나이트와 드래곤 로드의 얘기는 실제로 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는 얘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책 맨 뒷장에 쓰여있는 [믿음]이란 단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으음… 아무리 봐도 멋있어, 생긴 모양새나 이름은 언급되어있질 않지만, 가즈 나이트란 사람은 아마도 멋있는 사람일 거야.”
레나는 책을 보며 혼자 그 책 속에 적힌 또 하나의 `레나’란 인물이 되어 감상에 젖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녀의 사인에 관해선 명백히 나오질 않았어…왜지?”
그 질문은 그녀가 그 책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신에게 물어왔던 질문 중에 하나였다.
“음, 알 수 없어. 아무도 모르니.”
그때, 누군가가 레나의 집 문을 두드렸다.
“응, 누구지? 코나가 벌써 왔을 리는 없고…?”
그녀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바깥엔, 그녀의 소꿉친구 바랜이 멋지게 차려입고 꽃을 든 채로 웃음을 띄우고 폼을 잡으며 서 있었다.
“어머, 바랜 거기서 뭐해? 어디 결혼식에 초대라도 받았니?”
바랜은 약간 실망스런 기분이 들었으나, 안면의 미소는 바꾸지 않았다.
“아니, 그렇진 않아.”
“그래? 그러면 잘가.”
레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소꿉친구 라고는 하지만 바랜은 전혀 그녀의 취향에 맞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좋은 옷을 입은 그 지방 최고의 부잣집 아들인 그를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놀았다. 바랜은 꽃을 집어 던지며 화난 얼굴이 되어 그의 집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레나 옆집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와서 같은 표정으로 사라지는 바랜의 모습을 보는 것에도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사라진 뒤, 조금 후 또 다른 사나이가 레나의 집 문을 두드렸다.
“어? 바랜이 또 왔나? 오늘은 질기네….”
그녀는 약간 귀찮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보통 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너하곤 용건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니! 정말 이러면….”
그녀는 말을 멈췄다. 딴 사람 이었다.
“아, 아니 당신은…”
“용건이 없으면 돌아갈까요?”
그 남자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 장발을 위로 묶어 올린, 큰 키에 커다란 헝겁 망토를 두른 사나이. 리오였다.
“리오씨! 돌아와 줬군요!”
그녀는 기쁜 나머지 그의 손을 잡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리오는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살결을 느낀 듯 얼굴을 약간 붉혔다.
“어, 어머. 죄송합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손을 뒤로 돌렸다.
“아니에요. 실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들어가서 말씀하세요, 서서 말할 건 아닐 것 같은데요?”
“아, 아닙니다. 저번에도 폐를 끼쳤는데 또 그럴 순 없지요. 나중에 가족분들이 돌아오시면 다시 들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럼 그때까지 저랑 시장에 가실래요?”
“…네?”
레나는 어떻게든 그를 잡아놓고 싶었다. 그런데 나온 말이 시장에 가잔 말이니… 그녀의 얼굴은 약간 붉어졌다. 자신이 부끄러웠다.
“…예, 그럼 그렇게 하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리오는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정말이세요?”
“기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엔 그렇지 않지만 레나 씨에게만은 그럴 수 없죠. “
레나의 얼굴이 더더욱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외출용인 듯한 모자를 꺼내 오며 리오와 시장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레나는 야채 가게로 가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루아 아주머니, 야채 새로 들어온 것 있나요? 유스라 잎은요?”
아주머니는 갑자기 말이 많아진 그녀에 대해 약간 의아한 생각을 했으나, 그녀를 옛날부터 보아온 루아에게 있어선 반가운 일이었다. 언제나 약간은 아픈 듯한 얼굴을 하고선 ‘아주머니, 야채 좀 주세요. 싱싱한 걸로.’란 말을 똑같이 해서 안쓰럽기까지 보였던 그녀가 오늘은 이상하게 활기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레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니? 오늘은 왠일…?!”
루아는 레나에게 물으려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가 가게 앞에 서서 그 가게에 들어오는 햇빛을 절반 이상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갑자기.
“어? 왜 그러세요, 아주머니?”
“저, 저저…”
앞에 나타난 큰 키의 사나이. 리오는 “아, 죄송합니다.”란 말을 하고선 뒤로 물러섰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분은 리오라는 떠돌이 기사세요. 몇 일 전에 거리에서 그루드를 물리친 그 기사님 말이에요.”
루아는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는 듯이 일어서서 리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 기사군요, 어머 실례했수.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멋있게 생겼수. 근데 미남은 아니야.”
“예? 아…하하하, 그런가요?”
“맞아요, 리오신 정말 남자답게 생기셨어요. 아주머니도 저랑 똑같이 생각하시네요?”
루아는 그녀의 말에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다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 오늘 네가 왜 그런가 했더니 다 이 젊은이 때문이구나! 맞지?”
“예! 아, 아니에요. 전 손님을 대접하는 것 뿐이에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리오의 팔을 붙잡고 얼른 돌아섰다. 리오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다녔고 아주머니는 그 모양을 보고선 더더욱 웃음을 터뜨렸다.
레나는 리오를 이끌고 광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연으로 생성된 분수대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약간 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아, 아주머니도 참. 그렇게 짓궂은 말을 하시다니, 리오씨, 상관하지 마세요.”
그러나, 리오는 인상을 찌푸리고 저쪽 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오씨…?”
리오가 응시하고 있는 거리에선 정규 기사의 복장을 한 몇 명의 사내들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수녀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레나, 저 녀석들 아시오?”
“저 사람들 이요? 알다 뿐이에요. 저도 몇 주 전에 저들에게 걸릴 뻔했다구요. 저들은 그루드의 부하 기사단 이에요. 그루드가 그 모양이니 그의 부하들이라고 별수 있나요. 거기서 거기죠.”
“그래요? 도대체 이 지방의 영주는 누굽니까? 누군데 자신의 부하가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데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단 말이에요?”
“이 지방의 영주 베르노아도 그루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착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 이 지방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저와 거의 같아요. 어! 리오씨!! 저들 좀 봐요!”
리오는 다시 수녀들 쪽을 바라보았다. 수녀 한 명이 그 엉터리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수녀들이 필사적으로 말렸으나 힘이 모자랐다. 끌려가는 수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직은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수녀였다.
“……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어, 어디 가세요! 저들은 저번과 같은 건달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마음은 건달보다 못한 것 같은데요?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하, 하지만…!”
리오는 다시 레나를 돌아보았다.
“날 믿어요.”
“리오…”
리오는 빠른 걸음으로 그 엉터리 기사들에게 걸어갔다. 그쪽은 모두 다섯 이였다. 그중에 한 명은 키가 어림잡아 2가론 (1가론=1미터) 은 족히 넘어 보였다.
`거인족인가… 상관없어.’
그 거인의 존재는 리오에겐 별로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저 힘만 있는 덩치로만 보였을 뿐이다. 리오가 오고 있는 걸 본 한 기사가 동료들에게 멈추라고 말했다.
“이봐, 저 긴 놈이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
“이봐, 지금까지 저런 놈들이 한둘 이었나? 어차피 파가로를 이기진 못해, 그렇지?”
“우웅… 후후후….”
자신의 이름을 들은 거인 기사는 흉한 웃음을 지으며 리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봐, 파가로! 적당히 하라구, 저번처럼 죽이지 말고!”
`죽여?’
그 말을 들은 리오는 그 자리에 섰다.
“이봐! 죽이다니, 누굴 말인가!”
기사들은 리오를 비웃으며 조롱하는 투로 리오에게 소리쳤다.
“누구긴 누구냐! 너 같은 멍청이지! 하하하!!!”
리오의 미간이 더더욱 좁아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냐 꼬마, 이 파가로님이 두려우냐? 후후, 죽이진 않을 테니 소변은 보지 말아라, 하하하!!”
퍼억!
순간 거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허어…!”
거인은 무릎을 반쯤 굽혔다. 너무나 고통이 극심할 때 나오는 인간적인 행동이었다.
“양민을 살해했다는 건가…?”
리오는 오른팔을 뻗은 상태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 주먹은 거인의 갑옷을 뚫고서 거인의 복부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아아…!”
“그러고도 기사인가.”
리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른팔에 힘을 주는 듯했다.
“기사의 철칙 제 9조를 아나?”
거인의 눈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고통에 겨워 입만 뻥긋할 뿐이었다.
“약한 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자 있으면 기사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그런데, 이 철칙을 거꾸로 행하다니… 용서 못 한다.”
리오의 오른팔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절정에 달했을 때 거인의 몸은 그 동료들을 향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위험해!”
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날아오는 덩치를 피했다. 수녀를 붙잡고 있던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꺄아악!”
수녀가 비명을 지르며 엎드림과 동시에 덩치는 벽돌로 된 집의 벽을 뚫고 하반신만 밖을 향하게 되었다.
“아, 아니…!”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믿었던 거인이 2가론이 약간 안되는 떠돌이 차림의 얼간이에게 집의 벽 장식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덤벼라. 너희들은 이 시간부터 기사가 아니니까 그런 짓을 해도 상관없어.”
리오는 그 자리에서 꿈적도 않고 그 기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검을 뽑을 자세는 아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쳇, 우리를 너무 깔보지 마라! 이래 뵈도 정규 훈련을 받은 몸이니까!!”
네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자세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받아랏 -!!”
한 명이 리오의 위로 뛰어서 공격을 시도했다. 적의 두상을 잡는 것은 승리의 지름길이란 걸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파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장 분수대의 하늘을 울렸다.
“어억!”
검을 내리치던 기사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땅으로 떨어졌다. 달려오던 동료 기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멈췄다. 1.2가론 가량되는 바스타드 소드 계통의 검이 어느새 리오의 손에 들려있었다. 보라색의 독특한 검날이 이상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맨손으로 싸울 순 없겠지. 그렇게 싸워서 이기면 이놈이 상심할 테니까.”
“으윽…! 한꺼번에 덤벼라!”
세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리오에게 덤벼들었다. 제각기 개성 있게 검을 휘두르긴 했으나, 펄럭이는 리오의 망토조차 자르질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리오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세 명을 알맞게 요리하고 있었다.
“우유나 더 먹고 오시지!!”
리오가 휘두른 검은 한 기사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생명을 노린 건 아닌 듯했다. 공격받은 기사는 본능적인 의해 그 공격을 검날로 받아내었다.
“어, 어라!”
검이 나쁜 탓일까. 보라색의 검날은 상대편의 검날을 나무 가지 자르듯이 간단히 잘라내었다. 리오는 검을 잃은 기사의 무릎에 로우 킥을 날렸다. 그 기사는 간단히 쓰러져 전투에서 물러났다. 다른 기사가 리오에게 검을 찌르려는 동작으로 돌진을 해왔다. 리오도 그에게 검을 밀어붙였다.
차앙!
검과 검이 교묘히 엇갈렸다. 기사는 검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쉽사리 풀려주지 않았다
“칼이 싸구려인데 친구. 이 기회에 바꾸는 게 어떤가…?”
리오가 기합성과 함께 그의 검을 비틀자, 기사의 철검은 산산조각이 났다.
“으아악!”
검을 파괴당한 기사는 또 다른 이상한 힘에 밀려서 뒤로 쓰러졌다. 리오는 검을 재빨리 돌려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눈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어, 어!”
기사의 판금제 갑옷이 나무껍질 벗겨지듯 기사의 주위로 흩어졌다. 이음새가 모조리 끊긴 듯했다.
“이봐, 친구.”
“예, 예!”
무장이 해제된 기사는 벌벌 떨며 리오의 부름에 큰 소리로 답했다.
“이 지방의 영주는 어디 살고 있나?”
“예! 그분은 한 달 전쯤에 왕국 수도로 가셨습니다!”
“뭐, 왜이지?”
“듣기로는… 왕위 계승 문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강하고 또렷한 발음이었다. 이것만은 군기가 잡혀있었다.
“그래서, 후임은 정해졌나?”
“예! 내일 모레면 그루드님이 이 지방의 영주가 되십니다!”
“흠…그래? 내가 너무 늦었나…?”
리오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검을 거두고 등의 칼집에 자신의 검을 넣으며 말했다.
“그루드에게 전해라, 새벽쯤에 내가 찾아간다고. 알았지?”
“예…?”
“못 들었나.”
리오의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벽에 박힌 덩치나 알아서 꺼내가. 꺼져라.”
리오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 기사는 동료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리오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일이 약간은 심각하군….”
그렇게 살짝 말한 리오는 벽에 기대어 쓰러져있는 수녀에게 가보았다.
“괜찮아요? 이제 안심해요.”
리오는 아직도 떨고 있는 수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검은 머리에 아직은 소녀 티가 나는 듯한 얼굴을 가진 수녀였다.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는 마치 흑수정과 같아 보일 정도로 맑았다.
“아….”
뒤에서 리오에게 다가오던 레나는 그 장면을 보고선 못마땅한 표정을 살짝 지어보였다. 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어엇, 이러시면….”
갑자기 쓰러져 있던 수녀가 리오의 품에 달려든 것이었다. 리오는 당황한 나머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질 뻔했다.
“으아아앙!”
다른 수녀들이 달려와서 리오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리오를 그녀에게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인지. 거의 반 강제로 리오와 수녀를 떼어 놓았다.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함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후에….”
제일 연장자같이 보이는 수녀가 리오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리오는 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듯 말을 했다.
“아닙니다. 할 일을 한 것일 뿐이지요. 제 이름은 리오 스나이퍼. 그냥 떠돌이 기사입니다. 그럼 전 이만….”
리오는 오른팔을 복부에 붙이고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레나가 기다리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리오에게 구원받은 수녀는 계속해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장 수녀가 부를 때까지….
“오래 기다렸죠. 자 어디로 가실 거예요?”
리오의 모습을 본 레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리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집에 돌아가요. 동생과 아버지가 오셨을 거예요.”
“예…. 그러죠 뭐.”
리오는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의아해 했지만 그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였다. 둘은 약간 거리를 두고 레나의 집으로 걸어갔다. 아니, 레나가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하지만 리오의 보폭이 워낙 커서 레나는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집으로 들어선 레나는 생각보다 일찍 온 아버지와 배고픈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나, 어디 갔다 왔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레나는 동생의 투정부리는 모습을 보고서 기분이 약간은 풀어졌다.
“응, 미안해. 아버진 오늘 일찍 오셨네요?”
“오, 그래. 벌목이 오늘은 일찍 끝났단다. ……..응?”
레나의 아버진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큰 키의 사나이를 보고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신은 누구요?”
“파르하 배자스. 이제야 당신을 뵙는군요.”
리오는 레나의 아버지 앞으로 가서 왼쪽 무릎을 꿇고 기사식 인사를 했다.
“아니…. 내 이름을 어떻게…설마 왕께서?!”
“예. 말스 3세께서 저를 당신께 보내셨습니다.”
레나와 그녀의 동생 코나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음…. 앉아서 얘기하세나. 레나, 코나를 데리고 밖에 좀 나가 있거라. 이분과 할 얘기가 있구나.”
“예, 아버지.”
레나는 아버지 파르하의 말에 따라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감이 안 잡혔다.
리오와 파르하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파르하는 물 한잔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말스 3세께선…. 상태가 어떠신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태자 전하께서 행방불명된 후에 병세가 악화가 되었다는 말은 들어본 것 같습니다.”
“그런가…. 큰일이군. 하아…어쩌다가 말스 왕국이 100년 만에 이 꼴이 됐을까…. 너무 익은 과일은 썩어서 떨어지게 되는 건가?”
“……레나님께는 이 일에 대해서 얘기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다네. 그냥 그애만은 평범하게 키우려고 애를 쓴 것뿐이야. 왕비님도 그걸 바라셨지만.”
리오는 손을 깍지 낀 후 입술을 가져가며 눈을 감았다. 고민이 있을 때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갑자기 이런 일이 닥치면 당황하시겠군요.”
“음…그러실지도. 그건 그렇고. 자네는 무슨 기사인가? 레나님께서 자네에 대한 얘기를 몇 일 전에 하시더군. 굉장히 강하다고 들었는데….”
리오는 눈을 뜨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예? 음…그냥, `떠돌이’기사입니다.”
파르하는 리오의 말을 듣고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소속이나 계급이 없단 말인가?”
리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말스 3세와 제가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 뿐입니다.”
파르하는 턱을 매만지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처음 듣는 말이군.”
“하지만, 명령이 아닌 부탁은 들어줍니다.”
파르하는 그 얘기를 듣고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가?”
“흠…. 들어보고요.”
“그럼 잠깐 기다리게나.”
파르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정의 한 부분을 밀어젖혔다. 그곳으로 파르하는 손을 집어넣어 헝겁에 쌓인 뭔가를 꺼냈다. 그는 먼지를 털어내고 헝겁을 풀었다. 헝겁 안에는 레이피어 계통의 소검이 들어있었다. 파르하는 그것을 들고 나오며 리오에게 말했다.
“이보게, 레나를 잠깐 불러주겠나?”
“그러지요.”
리오는 밖으로 나갔다. 리오는 집 앞에서 동생과 놀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나오자 그녀의 동생이 리오를 쳐다보았다.
“어, 그 형이다 누나. 얘기가 끝났나 봐.”
“응? 끝났나요?”
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들어가세요.”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나와 리오가 안에 들어갔을 때 파르하는 소검을 들고 서 있었다.
“어머? 아버지 그건….”
“음, 네 엄마의 유품이란다. 이제 너에게 전해줄 차례구나. 자, 이리 와서 들어보아라.”
레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그 검을 잡아보았다. 매우 가볍고 탄력이 있는 검이었다.
“자, 그럼…. 아, 이름이 뭐라고 했나 자네.”
“리오입니다.”
“음, 그럼 리오군, 여기서 자네는 정식으로 기사의 작위를 받는 걸세. 어떤가?”
파르하의 말은 레나에게 기사의 작위를 정식으로 받고 그녀를 주인으로 모셔달라는 얘기였다. 레나는 깜짝 놀랐다. 평민일 뿐인 자신이 검 한 자루 가지고 있다고 해서 기사에게 함부로 작위를 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 아버지. 무슨 말이세요?”
그러나 리오의 표정은 꽤 긍정적이었다.
“음…좋습니다. 그래야지 왕국의 수도로 가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겠죠. 그럼….”
리오는 레나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레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리오의 팔을 잡았다.
“리, 리오씨 일어나세요! 두 분 다 무슨 일 있으세요?”
파르하는 레나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주었다.
“괜찮아….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거다. 아버지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다. 못 들어주겠니?”
파르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레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예, 아버지. 알겠습니다.”
파르하는 그녀의 옆에 서서 작위식의 순서를 알려주었다. 레나는 솔직히 놀랐다. 목수인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일을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
“먼저…. 검을 리오의 왼쪽 어깨에 내려놓아라. 그리고는 말하는 거다. `주신 프로아자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레나는 지시에 따라 검을 리오의 어깨에 내려놓았다.
“주신 프로아자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금, 나의 앞에 있는 남자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리노라. 그는 일생 동안 나를 보호하고, 복종하며, 기사의 철칙을 따를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그의 기사 자격은 박탈될 것이고. 영원히 그 죄를 사하지 못할 것이다….”
“좋아, 그리고 오른쪽 어깨에 검을 놓고….”
레나는 파르하의 말을 정확히 이행했다.
“이를 나에게 맹세할 수 있는가?”
리오는 그 자세에서 엄숙히 말했다.
“예, 나의 주인이시여.”
레나는 검을 거두었다. 파르하는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고 검을 받아 헝겁에 다시 감아두었다. 반면에 레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미안해요 리오씨….”
리오는 옷을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을 위한 일이니까요.”
레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위한 일이라니….
“예? 저를 위한 일이요?”
“그래, 레나야. 이제 넌 집을 떠나야 한단다.”
그 말과 동시에, 레나의 표정은 굳어졌다.
“예?! 무슨 말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