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85화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몸을 굽히고 소파에 푹 눌러앉아 있던 리오는 자세를 바로하며 주위를 둘러본 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정신을 가다듬어 보았다.
‘냉정해 져라 리오…! 이렇게 정신이 흐트러져 있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자신을 다그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리오는 밖으로 나가 보기 위해 현관문으로 향하였다.
“아, 가는 건가 리오?”
자신의 방에서 나오던 버크는 리오가 현관문 가까이 있는 걸 보고 물었고 리오는 버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예, 신세 졌습니다 버크씨. 전 세이아 양의 집에 가 보겠습니다. 일행들에게 좀 전해 주십시오.”
버크는 수염이 텁수룩히 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리오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자네와 비슷한 일이 젊었을 때 있었다네. 여자의 ‘매달림’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걸 그때 느꼈었지. 결국 그 시절 나에게 매달렸던 여자는 지금 나에게 일을 시키고 있지, 하하하핫. 자네도 지금 위험할지 모르네, 그러니 조심하게. 그런데 내가 보기엔 세이아 같은 신붓감이 없단 말이야…?”
리오는 아무 말 없이 웃을 따름이었다. 촌장의 집을 나선 리오는 세이아 자매가 있는 빨간 지붕 집으로 터벅터벅 향하기 시작했다.
‘후우… 내가 요즘 왜 이러지? 이렇게 정신없이 행동하다간 마녀들의 수정 구슬에 바로 포착될 텐데….’
바람이 불어왔다. 리오는 하늘거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라앉히며 계속 걷기 시작했다.
“…역시 정신이 흐트러졌군요… 리오 스나이퍼.”
리오는 움찔하며 자신의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자리엔 녹색의 짧은 머리를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어, 어느새…?’
그 청년은 리오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려주며 남자 같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잃어버린 것 같이 보입니다. 당신이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당신의 일행들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리오는 놀란 표정으로 그 청년을 바라보았고 청년은 계속해서 말을 했다.
“당신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유는 당신 자체가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발 깨달으시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십시오. 아, 안심하십시오. 전 당신 편입니다.”
그 청년은 말을 마친 듯, 조용히 뒤로 돌아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바람과 함께 물방울이 사방에 튀었고 리오는 멍하니 물방울을 맞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랬었나. 후훗… 멍청한….”
리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방향을 돌려 빨간 지붕 집으로 다시 향하기 시작했다.
세이아의 집에 가까이 다가간 리오는 그 집에서 맛있는 향이 풍겨 오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는 수밖에… 없겠지.”
문을 두드리자 곧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라이아는 밖에 나간 듯, 세이아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아, 돌아오셨군요 리오씨. 식사 준비가 다 되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세이아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간 리오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계속 아무 말 없이 있었고 구워진 빵을 접시에 담던 세이아는 리오에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을 하였다.
“저어… 식사 드세요 리오씨.”
리오는 식탁에 접시가 놓여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며 세이아를 바라보았고 세이아는 리오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리오의 옆 의자에 앉으며 급히 물어보았다.
“리, 리오씨.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리오는 고개를 저으며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세이아 양은 자신이 이 레프리컨트 왕국의 국민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세이아는 리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다시 리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당연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죠. 저희 아버지께서도 왕국의 높은 신하들은 미워해도 국왕 마마와 이 왕국만은 미워하지 말라 하셨거든요.”
그 대답을 들은 리오는 세이아의 양 어깨를 살짝 잡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절 기다리셨죠… 이제 제가 부탁을 드릴 때가 왔군요. 세이아씨, 지금 왕국은 얼마 전에 벨로크 왕국에게 침공을 받았었고 지금 현재도 언제 침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왕국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세이아씨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헤어져야만 합니다.”
“…!!”
세이아는 갑자기 자신이 벙어리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2년의 기다림이 끝났다 생각한 지 한 시간 조금 넘어 그 기쁨이 깨져버린 것이었다. 리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할 말은 없습니다. 그저 죄송하단 말뿐….”
“…역시… 리오씨도 똑같은 남자군요…!”
리오는 놀란 표정으로 세이아를 바라보았고 세이아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리오의 손을 치우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라이아에게 들었어요… 리오씨가 이 마을에 돌아왔을 때 여자 세 명과 같이 왔었다고… 그때까지 리오씬 제가 아직도 소경인 줄 아셨겠죠. 그러나 제가 눈을 뜬 것을 보고… 역시 당신도 남자일 뿐이었어요!!”
세이아는 더 이상 리오가 보기 싫어진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고 리오는 말없이 눈을 감으며 고뇌가 담긴 한숨을 쉬어 보았다. 리오는 천천히 거실을 거쳐 현관을 나섰고 그 앞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달려오고 있는 라이아를 만날 수 있었다. 리오는 애써 얼굴을 펴며 라이아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라이아는 팔을 흔들며 달려와 리오에게 안겨들었다.
“어디 가시게요 기사님?”
리오는 자신에게 안긴 라이아의 등을 몇 번 토닥거려준 후 땅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조금 멀리 갈 것 같구나….”
리오의 말을 들은 라이아의 얼굴은 바로 울상이 되었고 달려오느라 약간 숨을 몰아쉬던 라이아는 리오의 망토 자락을 붙잡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언니가 기사님을 얼마나…!!”
리오는 몸을 숙여 라이아의 머리를 자신의 큰 손으로 몇 번 만져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은 라이아는 잡고 있던 리오의 망토 자락을 놓았다.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때의 리오의 표정을 본 즉시였다. 리오는 다시 일어서서 어디론가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고맙구나… 라이아.”
“흐윽…! 아아아앙–!!”
라이아는 더 이상 리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듯 집 안으로 울며 뛰어들어갔고 리오는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