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97화
‘사과할 정도의 일은 안 했는데….’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아이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이들의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자아, 저와 같이 안으로 들어가요 여러분. 식사도 드릴게요.”
라키 일행은 동방 여자를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른들에게 동방 여자들은 그저 그렇게 생겼다고 들은 것과는 달리 레이의 모습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본 어떤 서방 여자들보다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를 지겠습니다… 으윽!?”
멍한 표정으로 여관에 들어가려던 머피는 라키가 자신의 덜미를 잡아끌자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고 라키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레이의 앞에 서서 인상을 가득 쓴 채 소리쳤다.
“미인계에 우린 속지 않아!! 그런 말을 하고 여관에 데려간 후 고문을 하려는 거지!! 너희들에게 안 속아!!”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가만히 라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라키는 레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끝을 알 수 없는 순수한 검은색의 눈동자가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약간 긁힌 라키의 팔에 시선을 돌린 후 주문이 담긴 손으로 라키의 상처를 만져 주었다.
“앗….”
라키는 순간 상처 부위의 쓰라림이 사라지고 대신 레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상처를 치료해준 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키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미인계를 쓸 줄 모른답니다. 하지만 간단한 치료는 해 드릴 수 있어요. 절 믿고 여관에 들어가 쉬세요. 아셨죠?”
리오는 그 말을 들으며 레이가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구나 생각을 해 보았다. 평상시엔 자신에게도 저렇게 얘기하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상당히 풀어진 듯, 라키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여자분을 믿어보자 친구들, 들어가는데 이의 없지?”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와 함께 아이들은 여관에 모두 들어갔다. 리오는 천천히 여관으로 향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상당히… 시끄럽겠군. 후후….”
아이들이 식당에서 열심히 식사를 하는 동안 리오는 식당 의자를 하나 빼 앉아 디바이너를 닦으며 마주 앉은 레이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레이씨 서방 언어가 상당히 늘으셨네요? 처음 뵈었을 땐 상당히 어색하셨는데 말이죠.”
레이는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리오는 빙긋 웃으며 다른 얘기를 하였다.
“수도에 도착하면 레이씬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계속 수도에 계시진 않을 것 같으신데 말이죠.”
레이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쓸며 대답해 주었다.
“전… 언니와 같이 서방 대륙을 더 여행해 보고 싶습니다. 원래 목적도 그것이었는데 노엘 선생님께 언어와 풍습을 대충 배우기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요. 하지만 리오씨 말씀대로 말도 늘었고 풍습도 대충은 알 듯하기 때문에 이젠 여행을 다녀야 하겠죠….”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여자분 혼자서 여행을 하시긴 서방 사람들이 좀 거칠 텐데요… 아, 잘됐군요. 저도 수도에 공주님을 모셔다 드린 후에 다시 떠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같이 다니시지 않을래요?”
리오의 악의 없는 말을 들은 레이는 다시 얼굴을 붉히고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을 머뭇거리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리오씨랑 단, 단 둘이 여행을 다닐 수 있나요, 괜찮습니다. 케이 언니도 함께 있으니 걱정 말아 주세요.”
리오는 다 닦은 디바이너를 칼집에 밀어 넣고서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절 믿지 못하시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정 불안하시다면 감시원도 한 명 같이 데리고 다니죠 뭐. 하하핫… 으윽?”
리오는 순간 자신의 목을 강하게 조이는 여자의 가는 팔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뒤엔 어느새 린스가 서 있었다.
“도망을 가시겠다…? 그것도 저 여자애랑 단 둘이?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시는군 이 애꾸 바람꾼…!!!”
리오는 아차 했지만 자신의 말은 이미 밖에 나온 상태였다. 린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감시원도 같이 데리고 다니시겠다… 좋지, 어차피 이렇게 다니는 것도 재미있어졌는데 내가 감시원 역할을 해 주지!”
리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레이라면 보디가드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이 안 먹혀도 좋지만 린스는 보디가드를 철저히 해야만 하고 털도 들어가지 않는 고집통이라 단 둘이 있는다면 상당히 괴로운 강적이었다.
“공주님, 잠깐 저 좀 보실래요?”
식당 문 쪽에서 노엘이 안쓰러운 얼굴로 린스를 불렀고 린스는 인상을 가득 쓴 채 노엘에게 걸어갔다. 리오는 목을 쓰다듬으며 씁쓸히 웃었다.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해야 하겠군요. 애들도 저녁을 다 먹은 듯하고…. 남자 애들은 저와 케톤의 방에서 재울 테니 여자애들을 부탁해요.”
레이는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애들을 방에 밀어 넣은 리오는 복도에 의자를 꺼내 놓고 앉아 자신의 망토를 위에 덮고 잠을 청하였다. 여관 주인 아주머니가 괜찮냐는 물음을 던졌으나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뿐이었다.
방 안에선 케톤과 아이들의 환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사 사관학교 출신인 케톤이 현재 재학생인 라키와 머피를 알고 있어서였다. 몇 번 대련도 한 일이 있어 그들은 매우 친하기까지 하였다. 닐스 역시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중이었다.
“하하핫, 너희들 정말 용감하다. 어떻게 리오씨에게 대결을 청할 생각을 다 했지? 하긴,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라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톤에게 물었다.
“케톤 선배님, 저 리오라는 사람이 그렇게 강한가요?”
케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라키 너에겐 미안하지만 네 할아버지 되시는 그레이 공작님도 리오씨를 이기시진 못할 것 같아. 전설로만 알려져 내려오던 12 신장 중 한 명을 간단히 처리했을 정도지. 한계가 어디인지 아직도 몰라.”
머피는 그 말에 혀를 내둘렀다.
“이야아… 어쩐지, 라키의 검이 한 방에 젓가락 부러지듯 부러져 나간 게 이상하진 않군요. 아, 그 동방 여자분은 뭐하시는 분이세요? 어른들에게 듣던 것과는 반대로 엄청 미인이던데….”
“음… 레이씨 말이지? 내 생각이지만 상당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해. 하지만 우리들 앞에서 아직 실력을 발휘한 적은 없어. 그리고 약간 부끄러운 말이지만… 레이씨의 언니 되는 케이씨의 칼 솜씨는 나보다 더 강한 듯해. 여왕님께 하사받은 레드 노드를 나 이상으로 잘 다루는 모습을 봤거든. 우리 일행 중에선 두 번째로 강할지도?”
라키는 한숨을 후우 쉬며 탄식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하아… 어쨌든 의외였어요. 린스 공주님이 그렇게 거친 성격을 가지셨을 줄은….”
머피와 닐스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케톤은 아무 말 없이 어색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자, 그만 자자. 내일 일찌감치 수도로 출발해야 하니까.”
세 명의 소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케톤 선배님!”
레이의 방에선 여자아이들과 레이의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원래 조용한 레이의 성격 탓인지 그리 신나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루시는 눈을 반짝이면서 레이에게 계속 곤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관계가 어떠냐는 등….
“근데… 그 리오라는 오빠, 오른쪽에 감긴 붕대만 아니면 꽤 괜찮은 얼굴인 것 같은데, 붕대 감기 전의 얼굴 보신 적 있어요?”
“그분은 다치신지 얼마 안 되었어, 몇일 전에 일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전의 얼굴은 계속 보았지.”
레이는 자신이 왜 이런 낯 뜨거운 답변을 해야 하나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워낙 상냥한 성격인 그녀여서 거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아~ 그래요? 그럼 언니랑은 무슨 관계에요? 키스는 해 보셨나요?”
서방 대륙의 말이 아직 익숙지 않은 레이라고 해도 ‘키스’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레이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한 채 발개진 얼굴을 아이들로부터 가리기 위해 애를 썼다. 루시는 헤린의 만류도 있었고 해서 레이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에헤헷, 죄송해요 언니, 이런 질문만 해서요. 근데, 그 오빠 좋아하시나요?”
“으, 으응!?”
결국 옆에 있던 헤린이 루시의 입을 막으며 대신 사과를 한 뒤에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레이 역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다음 날.
“으흐음… 오래간만에 의자에 앉아 잠을 자서 그런가? 허리가 또 아프네….”
리오는 일찍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각 관절을 풀어 보았다. 허리에서 들리는 우두둑 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사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그럼… 다른 사람 일어날 때까지 앉아서 명상이나 해 보실까?”
리오는 의자를 들고 여관 문밖에 앉아 아직 남색을 띠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리오는 그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한 것을 떠올린다.
‘리오씬 그렇게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볼 때가 가장 멋있어요….’
그리고 그 말을 떠올린 리오는 반사적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일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리오뿐이 아니었다. 흰 옷의 청초한 미인, 레이가 창문을 통해 하늘과, 그리고 리오를 살며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