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가즈 나이트 – 492화


“‥이 여신은 누구인가‥.”

신의 그림들이 전시된 주신전 안에서, 바이론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옆에 선 주신의 비서인 천사 피엘에게 물었다. 바이론에게 열심히 임무를 설명해 주던 피엘은 헛고생을 했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탈한 미소를 띄운 채 대답해 주었다.

“새벽의 여신, [이오스]님이십니다. 아, 바이론님께선 처음 보시겠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오스님은 이 초상화를 통해서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주신께서 어떤 일 때문에 또 다른 세 명의 여신들과 함께 벌을 내리셨습니다. 지금은 어떤 차원에 유폐되어 계시지요.”

바이론은 피엘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앞에 걸려진 유채 초상화에 손을 대 보았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일 뿐이었지만, 수백 년 전 자신이 잃어버렸던 무언가가 손끝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바이론의 옆모습을 본 피엘은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이론이 예전과는 다른 표정으로‥자신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한 표정으로 이오스의 초상화에 손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후, 바이론의 얼굴은 다시금 광기에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그림에서 손을 뗀 바이론은 나지막이 광소를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크크크크‥불쌍한 신이군‥.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까 하던 ‘임무’ 얘기나 계속 해 보시지, 비서 씨‥크크크크큭‥.”

“아, 예‥.”

그렇게, 바이론은 그곳에서 떠나갔고, 다시는 그 전시장에 돌아오지 않았다.

수백 년 뒤‥.

바이론은 지쳤다. 12신장 라우소의 공격으로 인한 상처를 급격히 재생시키느라 기력을 너무 소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이론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이 쓰러진다면 누구도 그녀를 지켜줄 수 없게 된다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의 회색빛 근육이 꿈틀거렸다. 신계, 인간계, 마계‥그 어느 누구도 막지 못했던 회색의 광기사(狂騎士) 바이론이었다.

그때, 그의 뒤에서 따뜻한 느낌이 밀려왔다. 빛의 느낌이었다. 빛을 소멸시키는 암흑의 투기를 내뿜는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몸에서 희미한 빛을 뿜고 있는 여성이 바이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바이론? 심하게 다치신 것 같은데‥」

그러자, 바이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양이가 쥐 걱정을 하는 것인가‥? 난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크크크크크‥. 빛과 어둠이라는 것을 잊으신 모양이군‥약하디 약한 엘프의 몸으로 살아와서 그런가? 크크크크큭‥.”

바이론의 말을 들은 그 여성은, 바이론을 향해 은은한 회복의 빛을 뿜어주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새벽이라는 시간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 개의 시간 중 시작의 시간‥. 전 어둠의 마음과 빛의 마음 두 가지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라 느끼고 있습니다. 가즈 나이트, 바이론‥.」

몸이 시원해진 느낌이 들어왔다. 이것이 신력인가‥. 바이론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짧게 중얼거렸다.

“‥헛소리‥크크크크크‥.”

며칠 후‥.

바이론은 배의 한구석에서 얇디얇은 모포에 자신을 의지한 채 새우잠을 자고 있는 라이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라이아는 추운 듯 조금씩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바이론은 천천히 라이아를 향해 걸어갔고, 자신의 몸에 비하면 작디작은 라이아를 안은 채 그 자리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마치 자신의 아이를 포근히 안은 아버지와 같이‥.

바이론의 체온 덕분인지, 자면서도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라이아는 차차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론은 창을 통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달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당신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얼마 후.

바이론은 지크들이 있는 집의 베란다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독소 때문인지, 그의 몸에 알코올이라는 성분은 흡수되지 않았다. 술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독특한 맛의 음료일 뿐이었다. 그날 오후에, 바이론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고 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소녀가, 악마들과 함께 자신들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멍청한‥크크크크크‥.”

바이론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이 정도면 취했겠지라고 생각될 정도로‥.


“‥힐린 언니는 어떻게 되신 걸까‥.”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티베는 탁자에 반쯤 쓰러진 채 옆에 있는 세이아에게 물었다. 세이아는 이상하게 취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알코올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아는 티베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으실 거야. 꼭‥.”

둘 사이에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티베가 다시금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힐린 언니는‥1년 동안 유일한 가족이었어. 가족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닌, 공간적으로‥보통의 힘으로는 절대 갈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것으로 떨어져 버린 나에게‥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나에겐 유일한 가족이 되어주신 분이셨어. 언니와 처음 만난 날‥언니는 나에게 짐을 풀라는 말만 하고서 다시 자신의 방에 들어가 PC로 소설만 썼지만, 난 기뻤어. 경계하지 않고, 진짜 가족처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으니까‥.”

“‥티베야‥.”

세이아는 측은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쓰러진 티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티베가 갑자기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일으키며 세이아에게 물었다.

“흐음‥네가 리오 씨 처음 만났을 때 얘기 좀 해 줄래? 상당히 궁금해서‥호호호‥.”

취중에 한 말이었지만, 세이아는 이상하게도 티베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세이아는 손을 모으고 조용히 눈을 감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난 그때 당시 소경이었던 탓에 지금에 비하면 살기가 상당히 어려웠었지. 마을분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가족은 동생 하나뿐이었고‥. 어느 날, 친척분을 배웅한 뒤 집에 돌아왔을 때, 촌장님께서 민박을 원하시는 분과 함께 우리 집에 와 계셨었지. 같은 또래의 마을 청년 목소리는 웬만큼 알고 있어서 남자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어색하진 않았는데, 자신을 소개하는 리오 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었지. 젊긴 하지만‥상당한 경험이 깃든 기분이라고 할까? 그리고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난 그 며칠 동안 한순간이라도 눈을 떠보고 싶었어. 리오 씨의 얼굴을 매일 보고 있는 동생 라이아가 얼마나 부러웠던지‥티베??”

세이아가 말하는 동안, 티베는 어느새 잠에 빠져 있었고 세이아는 고개를 흔들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사이, 챠오와 마키는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둘의 팔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고, 그대로 시간은 가고 있었다.

“‥꽤‥쎈데‥!!”

“흥‥작은 키에‥비해서‥상당한데?”

사실 마키는 키로 따지자면 챠오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살기 위해 힘을 길러왔고, 또한 최고의 암살자 칭호를 가진 스승에게 맹훈련을 받았으며 지크를 만난 후 그에게 틈틈이 무술지도를 받은 탓에 마키는 챠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챠오도 역시 그녀의 가문 여자 중 유일하게 유권과 강권을 둘 다 통달한 엄청난 존재였다. 그러나 둘의 사정을 모르는 옆 좌석의 청년들은 그녀들의 팔씨름이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

찌지직–!!!

순간, 강화 플라스틱 탁자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청년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녀들의 팔꿈치가 닿아 있는 탁자 표면이 움푹 들어간 것을 본 청년들은 곧 혀를 내두르며 다시 음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자정.

TV를 보고 있는 바이칼과 등을 맞댄 채 검을 닦던 리오는 곧 기지개를 켜며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옆으로 떨어뜨렸다. 약간 졸음이 온 리오는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봐, 나 잘 테니까 이제 의자에 앉아서 TV를 보시지.”

그러나, 바이칼은 리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리오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흐음‥하긴, 이 녀석도 피곤하긴 하겠지. 사람들을 태운 채 계속 초고속으로 날아다녔으니까. 어디 보자‥이 녀석이 잘 정도의 방이 남았을까‥?”

하지만, 방은 모두 여자들이 차지한 뒤였다. 아직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함부로 방을 사용하는 것은 실례였다. 리오는 소파 아래에서 침낭에 의지해 잠을 자고 있는 지크를 흘끔 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바이칼을 안고 일어서며 소파로 향했다.

“오늘은 소파에서 주무시지 용제님. 좀 불편할지도 모르겠지만‥.”

소파 위에 바이칼을 똑바로 눕힌 리오는 다른 방에서 이불을 꺼내온 뒤 바이칼에게 덮어준 후 자신은 반대편 소파에 앉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이 넘었는데‥?”

“‥바보 녀석‥.”

그때, 바이칼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고 리오는 그리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바이칼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이칼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입에 바보라는 말이 박혔군‥후훗‥. 그건 그렇고‥무슨 일이 있는 건가?”

리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