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509화
입을 씰룩거리며 혼자 투덜대던 지크의 머리 위에, 갑자기 친근한 온기가 덮쳐왔고, 지크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에게 물었다.
“무슨…일이니? 하, 하, 하….”
“지쿠, 시에 답답해…!! 이런 옷 싫어…!”
처음 지크를 만났을때 보다 발음이 상당히 좋아진 시에였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건 그것이 아니었다. 지크는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일까 상당히 궁금해졌다. 과연 자신의 뒤에 앉아 있는 사람중에 몇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그리고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지크는 팔을 위로 올려 시에를 머리에서 내린 후,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이 비행선…꽤 빨리 가니까…참아.”
“…지쿠 무섭다….”
“….”
가만히 지크를 바라보던 시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급히 지크의 머리를 밟고 뛰어 올라 좌석들을 거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지크가 있는 객실 내부는 상당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지크가 안전벨트를 풀고 조용히 일어서서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 순간, 장내는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지크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험한 표정을 지은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크는 그 상태로 말을 계속 이었다.
“…어떤 꼬마가 제 머리 위에 앉아 있었거나, 머리를 밟고 여러분들의 좌석 위를 지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일이 전 이상하게도 기억 안나는군요…여러분도 그러시겠죠…?”
승객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지크는 자신의 오른손을 올려 가볍게 전기 스파크를 일으킨 후 다시 말했다.
“…기억 안나시죠…?”
지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지크는 고맙다는 듯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멀리서 지크를 바라보던 티베는 인상을 가볍게 쓰며 옆에 앉은 챠오에게 물었다.
“…저 인간이 오늘은 또 왜 저러는거지?”
챠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옆에 앉은 사람하고 친해졌나봐.”
한편, 바이칼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하여 비행선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날고 있었다. 바이칼의 등엔 어김없이 리오가 누워 있었다. 팔베개를 한 채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리오는 심심한 듯 바이칼에게 물었다.
“지크 녀석 괜찮을까? 좌석표를 건내주고 보니까 바이론 옆이던데….”
바이칼은 한심하다는듯 콧김을 내 뿜으며 중얼거렸다.
「…흥,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죄책감이 없군….」
리오는 누운 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물어볼 것이 또 떠올랐는 듯 그는 몸을 일으켜 앉은 상태로 바이칼에게 또다시 물었다.
“음…내가 그때 널 왜 껴안았지?”
바이칼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윽고….
「…척추 신경이 어떻게 된 탓인지 정신이 나간 상태더군. 하긴…맨 정신으로 날 껴안을 용기가 너에게 있을리 없겠지.」
바이칼의 그 말을 들은 리오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또다시 물었다.
“그래? 음…내가 안아주니까 기분이 어떻든?”
바이칼은 또다시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윽고….
「…기억 나는대로 죽여주지….」
※※※
5일 후.
포르투갈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배를 훔쳐타고(!) 4일간 항해를 한 일행은, 드디어 출발지라 할 수 있는 레프리컨트 왕국의 항구도시, 트립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평상복 차림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리오는 기분이 좋은 듯 배에서 내리자 마자 양 팔을 크게 폈고, 1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고향 대륙에 온 티베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오니까 괜히 또 싫어지네….”
모두가 그리 나쁘지 않은 얼굴로 있는 반면, 지크는 지금은 이름이 사이키인 자신의 동료에게 기대어 지겹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윽…또 환타지 월드에 왔어…TV 보고싶은데….”
프시케(사이키)는 예전에 하던 대로 지크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며 누나와 같은 모습으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생전 처음 환타지 월드에 도착한 넬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계속 둘러보았고, 역시 같은 처지인 챠오는 덤덤한 얼굴로 팔짱만 낀 채 서 있었다.
망토등을 완전히 걸친 리오는 일행들에게 가자는 듯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자아, 제가 아는 빈 집이 근처에 하나 있으니 그쪽으로 가시죠. 꽤 큰 집이에요.”
프시케에게 착 달라붙어 있던 지크는 리오의 그 말을 듣고 자세를 똑바로 한 후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노엘 아줌마의 집을 말하는건가…저녀석.”
그때 지크의 모습을 본 프시케는 감격한 듯 손을 모으며 지크에게 말했다.
“어머, 지크씨 너무 멋있어요….”
그러자, 지크는 한쪽 눈을 크게 뜨며 씨익 웃어보였다.
“헤헷, 진짜?”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넬은 인상을 찡그린 채 옆에 있는 챠오에게 물었다.
“…저 두 선배분들, 언제나 저러셨어요?”
“오늘은 괜찮은 편이야.”
리오는 그쪽 대륙의 말로 [미시오]라고 쓰여 있는 노엘의 집 정문에 가만히 서 있었다. 수많은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고원에서 별일 없이 나무 베기와 사냥으로 시간을 보내던 자신이 어느덧 다시금 이 집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문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 후, 기를 집중하여 안의 자물쇠를 열었고 천천히 문을 잡아당겼다.
뒤에서 리오의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칼은 리오가 문을 잡아 당기자 한심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흥…[미시오]라는 푯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가 보군….”
그러자, 리오는 뒤를 돌아보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훗…이 집 주인이 좀 괴짜거든. 너같이 순진하지 않다구.”
바이칼은 말 없이 리오의 뒤를 쏘아볼 뿐이었다.
“…음?!”
순간, 리오는 자세를 멈춘 후 뒤로 재빨리 물러서며 검을 뽑아들었고, 그 바람에 그의 뒤에 서 있던—바이론을 제외한—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전투 자세를 취하며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리오는 상당히 화가 난 표정으로 문이 열린 노엘의 집 안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집 안에있는 사람은 어서 나와!!! 10초 내로 나오지 않으면 들어가서 박살을 내 주겠다!!!!”
리오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세이아는 지크에게 개미와 같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저어…리오씨께서 상당히 화가 나신 것 같네요…?”
역시 진지한 얼굴로 무명도에 손을 돌리고 있던 지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녀석은 배가 고프면 흥분을 잘 하죠.”
“예에…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아의 옆에 서 있던 라이아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지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집 안에서 누군가의 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오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채 집 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빌어먹을…누구야 누구…!! 오래간만에 낮잠을 편하게 자고 있는데…!!!!”
“…세, 세상에…?”
그 순간, 리오는 손에 들고 있는 파라그레이드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