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583화
“‥지크 녀석, 가정부가 필요했나‥?”
시에를 데리고 시장에 갔다 오는 길인 리오는 한숨을 푹푹 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도와달라며 애원을 하던 지크가 막상 도와준다며 OK를 하자 특수 호출기만을 주고는 며칠째 그를 레니의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치마까지 두르게 하면 그냥 가야겠군‥.”
리오는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계속 투덜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동안에도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시에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으로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리오는 결국 힘없이 웃으며 시에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제일 태평한 건 너구나, 후‥. 그건 그렇고 세이아가 왜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 신으로서의 능력을 봉인 내지는 제거당하며 기억마저 같이 사라진 것인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말씀을 주신께 들은 일이 없었는데‥?”
“몰라.”
시에는 별생각 없이 리오를 바라보며 별로 필요 없는 대답을 했고, 가만히 시에를 바라보던 리오는 실소를 터뜨리고는 시에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가 살짝 비비며 중얼거렸다.
“‥후훗, 그래. 그게 정답이겠지‥.”
리오는 다시 한참을 걸어갔다. 그렇게 급한 심부름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가도 별 상관은 없었다. 물론 시에 덕분에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긴 했지만‥.
“‥음!?”
그때, 리오의 어깨 위에 거의 걸쳐져 있다시피 한 시에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들의 왼쪽을 바라보았고, 그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리오는 눈을 깜박거리며 시에에게 물었다.
“시에‥? 왜 그러니?”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왼쪽을 바라보던 시에는 곧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리오의 어깨에서 내린 후 그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고, 시에의 돌발적인 행동에 리오는 황당한 듯 어깨를 으쓱인 후 오른손에 가진 봉투를 양손으로 꽉 감싼 뒤 시에를 쫓기 시작했다. 차도를 넘고, 건물 사이사이를 삼각 점프로 질주하며‥.
“저 애도 지크를 닮아가나‥. 그건 그렇고 베헤모스 답게 정말 엄청난 몸놀림이군. 밀가루, 오이, 고추장과 쇠고기 한 근을 든 상태에선 앞지르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윽고, 엄청난 질주를 하던 시에는 한 거리의 가로등 위에 멈춰 섰고, 곧이어 뒤따라온 리오는 그쪽 거리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곧장 건물 옆에 몸을 숨긴 후 거리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설마, 시에가 그 거리의 피 냄새를 맡았다는 소리인가‥? 그렇게 진한 냄새가 풍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음!?”
순간, 거리 위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누군가를 발견한 리오의 얼굴은 석화 상태에 빠져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말이 안 되는 일이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느낌에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육교 밑에 쓰러진 군청색 머리의 존재‥. 그리고 앞이 엉망으로 찌그러진 차와 멀리서 달려오는 앰뷸런스‥. 리오는 결국 일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가로등 뒤에 올라가 있는 시에를 내려오게 한 뒤 심부름 물건을 맡기고서 자신의 복장을 즉시 바꾸었다. 그리고 입가를 회색 헝곩으로 가리는 것으로 준비를 끝낸 리오는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사고가 일어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사고 지점에선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바이칼과,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젊은 운전자가 있었고, 앰뷸런스 역시 상당히 가까운 지점에 와 있었다. 리오는 우선 앰뷸런스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빠르게 오른손을 휘둘렀고, 적당한 공격력을 머금은 진공의 충격파는 앰뷸런스의 엔진 부위에 정확히 꽂혔다.
콰아앙–!!!
“으악!?”
충격이 일어남과 동시에 앰뷸런스의 자체 보호 시스템은 즉시 차를 멈춘 후 차내에 운전자와 승객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발포성 합성 수지를 세차게 뿜어 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앰뷸런스에 탄 병원 직원들은 발포성 합성 수지가 굳어감에 따라 잠시 동안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리오는 한숨을 쉬며 곧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다가갔고, 운전자는 리오가 온 것도, 앰뷸런스가 멈춘 것도 모른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바이칼을 계속 흔들어 댔다.
“아, 아가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아가씨!!! 전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이 있다고요!!! 그리고 오늘 신용카드 할부금을 못 내면 카드도 영영 잘리고‥엉엉엉‥!!!”
“아가씨라니 무슨 소리요, 이 녀석은 분명히 남자‥음?”
운전자의 말을 듣고 불쌍하다 생각하며 바이칼에게 다가간 리오는 순간 바이칼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리오는 그의 상태를 보기 위해 가까이 간 후 머리와 그 밖의 중요 부위를 손으로 진찰해 보았다. 뇌에 약간 충격이 클 뿐, 다른 부위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머리에서 나는 피도 그렇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리오는 바이칼을 옮기기 위해 그를 어깨에 걸쳤고, 갑자기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에 고개를 슬금슬금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 실연당한 것도 아니면서 술은 뭐하러 이렇게 많이 먹었지‥? 여자로 변해도 화끈하게 변했군‥쯧쯧쯧‥.’
“저, 저어‥그 아가씨와 일행이신가요?”
자신보다 훨씬 큰 리오를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던 운전자는 용기를 내어 리오에게 물었고,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긴 합니다만‥상황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어지간해서는 이 꼴이 나지 않는 녀석이기 때문에‥. 아, 걱정 마시오. 이 녀석은 보기보다 튼튼해서 당신 차나 걱정해야 할 거요. 그보다 설명부터‥.”
리오의 말에 안도감을 얻은 운전자는 자신의 찌그러진 차 본체 위에 걸터앉으며 넥타이를 푼 후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아, 아가씨가 술을 많이 드셨나 봐요. 천천히 운전하고 있어서 아가씨가 육교 위에서 비틀거리며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죠. 저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진짜로 떨어지더라고요! 겨, 결국엔 떨어진 다음 미처 정지하지 못한 제 차에 다시 충돌을 하고 말았죠! 하지만‥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전 집에서 절 기다리는 아내와 두 살 먹은 딸이‥!!! 으흐흐흑‥!!!!!”
“…….”
리오는 한숨을 후우 쉬며 그 운전자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곧바로 시에가 있는 쪽으로 사라졌고, 운전자는 리오가 어깨를 두드렸음에도 간 것도 느끼지 못한 듯 계속 흐느끼며 비극적 대사를 읊어 나갔다.
“이 차는 36개월 할부로 산 거고, 아파트는 방 한 칸짜리 싸구려 월세를 얻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고, 밀린 카드 할부금도 오늘 친구에게 겨우 꾸어서 갚을 정도로‥흑흑흑흑흑‥!!!”
눈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던 소녀는 갑자기 바이오 버그들 사이에 붉은 재킷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청년이 다시 소녀 옆에 돌아오자 내리던 눈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바이오 버그들 사이엔 수십 개의 검광이 어지러이 떠오르며 바이오 버그들의 육체를 자르고 갈랐다.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바이오 버그들의 사체는 비릿한 김을 뿜으며 천천히 녹아 사라져갔고, 지크는 무명도를 거두며 씨익 웃어 보였다.
“헤헷, 내리는 눈에 시선을 빼앗기면 그대로 죽음이지. 모두 검광으로 만들어내는 시각적 착각이지만, 바이오 버그 녀석들도 거기에 걸릴 줄은 몰랐는걸? 헤헤헷‥.”
지크의 옆에 서 있던 소녀는 감탄을 금치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정말 대단하시네요? 설마 그렇게 빠른 속도로 십여 초간 움직이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나중에 저 괴물들을 벨 때 조금 보이긴 하셨지만‥.”
“하핫, 당연하지! 이 몸은 BSP 중 최강이라 불리‥뭐라고!? 내가 보였다고??”
자신 있게 웃던 지크의 얼굴은 순간 일그러졌고, 지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빙긋 웃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잔상 정도였지만‥히힛. 제 눈이 좀 안 좋거든요. 죄송해요.”
그러나, 보였다는 얘기 말고는 지크의 귀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지크는 멍한 얼굴을 한 채 속으로 계속 심각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서, 설마!! 이 꼬마가 챠오 정도의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긴데‥!!! 아, 아니야. 아까 전에도 바이오 버그들의 위치를 느낌으로 알아냈으니 충분히 가능해. 게다가 ‘라이아’잖아!!’
지크는 곧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오른쪽 눈을 살짝 뜨고 소녀를 내려다보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가설을 세워볼까‥? 내가 와카루라면‥. 그 할아범은 예전부터 라이아를 실험 재료로 못써서 안달이었지. 표적이 된 소녀들의 나이도 라이아와 비슷한 나이들이었고‥. 설마, 지금까지 희생된 소녀들이 라이아 하나를 찾기 위한‥? 그럼 아직 라이아와 세이아에게 ‘능력’이 남아있다는 소리잖아!! 이거 원‥점점 복잡해지는군‥!!!’
“으아아‥!!”
지크는 나지막이 비음을 내며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고통스러워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소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지크의 재미있다면 재미있을 수 있는 행동을 말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좋아, 만약 내 가설이 맞다면 지금부터 바이오 버그들은 라이아를 향해 철저히 접근을 할 거고, 아니라면 내일이나 모레 정도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겠지!! 그 희생자에겐 미안하지만 며칠간 라이아의 보디가드를 하는 수밖에 없군!!!’
생각을 정리한 지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에게 말했다.
“좋아, 오늘은 학원 땡땡이친다는 기분으로 날 따라와.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말이야.”
그러자, 소녀의 얼굴엔 순간 화색이 돌았고 그녀는 손벽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우와, 정말이에요!!! 나이스 나이스–!!!!”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지크는 살짝 인상을 쓴 채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나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 망쳤다고 세이아 씨가 따지진 않겠지‥.’
지크와 소녀는 곧 옥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녀와 집에 함께 간 것은 지크가 아니었다. 지크가 한참 전투를 하는 동안 어느새 신고를 받고 소집된 동료 BSP들이 밑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진, 케빈과 함께 순찰차에 타던 소녀는 문을 닫은 후 케빈에게 양해를 얻은 뒤 창문을 열고 밖에 있는 지크에게 소리쳐 물었다.
“잠깐만요!!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전 ‘라이아·드리스’라고 하거든요?”
“…….”
소녀의 이름을 들은 지크는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았고, 소녀와 다른 BSP 동료들은 지크의 이상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진과 챠오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우오오오오오오오–!!!!!!!!”
순간, 지크는 머리를 감싸며 아스팔트 위에 꿇어앉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지면까지 주먹으로 펑펑 치며 알 수 없는 행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지크의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닌 케빈은 차를 출발시키며 소녀에게 말했다.
“후, 괜찮아. 저 녀석은 가끔 머리의 한계를 일으킬 정도의 생각이나 추억이 밀려오면 저렇게 자아가 붕괴되니까. 뭐, 거의 ‘오버액션’ 수준이지만‥하하핫.”
“네에‥.”
소녀는 놀란 얼굴로 창문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리진은 쓰디쓴 표정을 지은 채 덧붙여 말했다.
“‥예전에 교황께서 방한하셨을 때 공항에서 저랬다면 이해를 하겠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