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76화
마법검 플레어가 가진 경천지동(驚天地動)의 위력은 동룡족 함대의 나머지를 순식간에 스모그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플레어의 잔광이 걷히는 것과 함께 화이트 나이트는 조용히 자신의 검을 거둔 뒤 북서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휀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화이트 나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띄웠고, 천천히 드래고니스 쪽으로 향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그랬나. 나도 잊고 있었군.”
………………….. . . . . . . . . .
“적 함대 괴멸! 소수의 잔여 부대만이 후퇴를 개시하고 있습니다!”
“화이트 나이트로 보이는 물체는 10초 후 레이더 반경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보고를 듣던 장로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좋아, 수고했네. 경보 발령은 청색 1호로 낮추고 두 시간 동안 아무런 이상 반응이 없으면 모든 경보를 해제하도록.”
장로는 상황실 밖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청색 1호 발령을 들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의 일이 오늘만은 없길 바라며….
※※※
모든 비상이 해제된 후, 회의실에선 바이칼과 장로, 그리고 가즈 나이트들이 모여 한참 회의를 하고 있었다. 사바신은 입에 담배를 문 채 장로의 얘기를 듣고 있었고, 휀은 말없이 위스키를 들고 있었다. 지크와 레디, 슈렌은 평범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 결과를 보아, 동룡족들이 아무래도 우리보다 워프 엔진의 보급화에 일찍 다다른 것 같습니다.”
장로의 말을 들은 지크와 사바신, 레디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고, 휀은 위스키를 입에 대며 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가진 함선 중에서 워프 드라이브가 가능한 함선은 단 하나, 드래고니스뿐입니다. 다른 함선들은 아직 차원 간 통과만이 가능할 뿐이지요. 예전에 리오님께서 혼자 싸우신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드래고니스 밖으로 나간 함선들은 드래고니스 워프 후 고스란히 전장에 남게 되는 탓이지요. 동룡족이 개발한 신형 전함들은 순식간에 우리의 레이더망 안에 나타났습니다. 초고속 이동을 하는 화이트 나이트도 갑자기 레이더망 안쪽에 나타나진 못합니다.”
“… 그럼, 언제 녀석들이 그 워프 엔진을 개발한 것이죠? 갑자기 떡 하고 개발하진 못했을 것 아니에요?”
지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장로에게 물었고, 장로는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 언제 어느 때 개발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달 전 동룡족의 전 함대가 대한민국 상공에 갑자기 나타난 일이 있었습니다. 전 그때 단순히 레이더 방해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오늘의 경우를 보니 그때부터 동룡족들이 워프 엔진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그럼 우리 보고 어떻게 싸우라는 소리야!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할아범!”
사바신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장로에게 소리쳤고, 장로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때, 휀이 위스키 잔을 내려놓으며 사바신에게 말했다.
“그렇게 신출귀몰한다 해도 약점은 있다.”
“뭐?”
사바신의 시선은 휀에게 돌려졌고, 휀은 귀찮은 듯 슈렌에게 눈짓을 보내 곧 슈렌이 그 이유를 대신 설명하기 시작했다.
“… 워프 드라이브라는 것은 마법의 텔레포트와 같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이동 방식이야. 동룡족이 왜 간편히 드래고니스 상공에 바로 나타나지 않고 수백 km 밖에서 나타날까.”
“모르지.”
사바신은 입에 문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부비며 중얼거렸고, 슈렌의 말은 계속되었다.
“워프를 할 땐 함선의 모든 동력을 워프 엔진에 집중시켜야 한다. 물론 드래고니스 급의 초대형 요새는 워프 전용의 동력이 따로 있으니 곧바로 워프 드라이브를 할 수 있지만, 전함급의 소형 물체는 워프 전용의 동력을 따로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없어. 결국, 워프한 이후 함선은 각 부분에 동력을 배분할 동안 딜레이 상태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드래고니스 상공에 곧바로 워프한다는 것은 동룡족으로선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야. 그런 이유로, 동룡족에 드래고니스 급의 거대 요새가 없는 이상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드래고니스를 공략할 수는 없는 거지. 오늘은 동룡족도 시범적으로 몇몇 부대를 이동시킨 게 틀림없어.”
“잉? 전함 같은 비싼 것들을 시범적으로 보냈다고? 게다가 타고 있는 사람들은?”
“마, 맞아!”
지크와 사바신이 한목소리로 따지자, 휀은 둘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과 같은 대단위 전투에서 병사와 물자라는 것은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이야. 병사 몇 명을 구하려고 부대 하나가 이동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바보 같은 행위다. 전쟁 시에, 병사 한 명이라는 것은 사바신 네가 피우고 있는 담배 한 개비에 불과하다. 오늘 동룡족의 습격은 워프 엔진이라는 병기의 시험을 위한 그들의 병사와 물자의 효율적인 소비다. 이제부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아.”
휀이 그렇게 말하자, 지크는 찜찜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 성격상 재미없군. 젠장….”
“… 오래간만에 심금을 울리는 소릴 하는군, 바람의 얼간이.”
레디는 똑같이 팔짱을 끼고 인상을 구긴 지크와 사바신을 바라보며 고뇌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 형제 같아….”
“… 바보가 하나 더 늘었군….”
바이칼 역시 지크와 사바신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댈 따름이었다.
……………… . . . . . . . .
회의가 끝난 후, 휀과 장로는 개인적으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바이칼을 포함한 모두에겐 비밀이었다. 휀의 얘기를 듣고 있는 장로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장로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설마, 진짜로 존재했다니…!! 하지만, 어째서 우리의 기술을 바탕으로…?”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어졌으니 한 가지 수수께끼는 풀린 셈입니다. 남은 건, 화이트 나이트에 사용되고 있는 드래고니스의 기술력 일부와 ‘듀얼 하이드로 레이저’의 설계도, 그리고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오리하르콘 결정이 어떤 방식으로 드래고니스 밖으로 나간 것인가… 입니다. 경비는 철저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아무리 ‘그분’의 힘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나중에 밝혀지겠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휀과 장로는 곧 각기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휀이든 장로든, 휀이 알아낸 정보는 둘 모두에게 상당한 비중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밀담을 마치고 제궁 밖으로 나온 휀은 제궁 앞에 처음 보는 네 명의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휀은 그 여자들 사이를 그냥 지나쳐 버렸고, 그러자 네 명 중 한 명이 휀에게 소리쳤다.
“이봐! 당신이 바로 빛의 가즈 나이트, 휀·라디언트인가!”
여자 치고는 거친 말투…. 휀은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 네 명의 여성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고, 그중에서 붉은색–정확히 진홍색의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이 야릇한 미소를 띄운 채 휀에게 말했다.
“… 이런 식으로 당신을 찾아와서 미안해요, 후훗…. 우린 당신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거든요? 제 이름은 아란, 데스 발키리죠. 뒤에 있는 다른 애들도 저와 같은 데스 발키리에요. 어때요, 조용한 곳에서 따로 얘기하는 건…?”
아란의 말을 가만히 듣던 휀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초저녁, 휀은 다시 아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 어른들의 시간이긴 하지만 네 명을 상대하긴 싫군. 그럼 이만.”
휀이 막 가려고 하자, 아란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검, 디스파이어를 꺼내 들었고 다른 데스 발키리들 역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제궁 호위를 맡은 전룡단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고 귀에 낀 마이크 폰으로 다른 전룡단들에게 연락을 하며 데스 발키리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때, 휀이 전룡단에게 손을 들며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라. 너희들이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러자, 전룡단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고 휀은 데스 발키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휀·라디언트 앞에서 무기를 꺼내 들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나.”
그러자, 아란은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아, 당연히 알고 있죠. 신계에서조차 철칙인데 설마 저희들이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을 뿐이죠. 뭐, 실수로 당신이 죽게 되면 더 좋긴 하지만… 후후후훗.”
“….”
휀은 말없이 데스 발키리 넷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띄는 여성은 넷 중에 두 명, 아란과 짙은 퍼플색의 웨이브진 커트 머리, 그리고 요기가 느껴질 정도로 어울리는 보라색의 립스틱과 차가운 표정…. 데스 발키리 중 최강이라 불리우는 ‘알테미스·슈크라드였다.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 휀은 곧 자신의 검, 플렉시온을 꺼내 들었고, 전룡단에게 물러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맞춰 전룡단들은 뒤로 물러섰고, 휀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데스 발키리들에게 말했다.
“조금은 봐주겠다.”
“… 뭐라고!!! 역시 소문대로 입이 더러운 녀석이구나!!!!”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토울 해머를 든 채 준비하던 레베카가 눈을 부릅뜨며 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휀은 차가운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며 플렉시온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을 본 레베카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휀에게 소리쳤다.
“흥, 갑자기 죽고 싶어진 거냐 휀·라디언트–!!! 그럼 소원대로!!!”
퍼엉–!!!!!
폭음과 함께, 토울 해머의 충격 지점에선 강한 뇌력이 일순간 발동되었고 주위에 있던 전룡단은 그 압력에 의해 움찔하며 뒤로 비틀거렸다. 레베카는 지면에 깊숙이 박힌 토울 해머를 바라보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헤헷, 리오라는 녀석보다 강한 가즈 나이트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별거 아니잖아? 한 방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떡이 되다니… 헤헤헤헷…!”
“즐거운가.”
“…!?”
레베카는 순간 움찔하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 휀은 왼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지면에 박혀있는 토울 해머의 위에 사뿐히 섰고, 레베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토울 해머를 다시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 사이, 휀은 플렉시온을 위로 치켜올렸고,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그나 소드, 열(熱). … 죽어라.”
“…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