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127화
[참 이상한 질문이나 계속하는군요! 즐거웠냐고요? 당연합니다. 나는 모든 역할을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이너….]
“그러니까, 착한 친구라는 게 다른 역할보다 특별히 더 재밌지는 않았다는 거지? 하나도?”
[…….]
이자헌이 조종하는 김솔음의 몸은 미동이 태연하다.
거대한 TV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군.]
[솜이 든 따뜻한 봉제 인형을 움직여, 다시 당신의 착한 친구가 되어주길 원하는 겁니까? 하하하!]
[즐거운 착한 친구 역할을 계속해 달라!]
거대한 TV 속에서 토끼 인형 하나가 나타나 손을 흔들었다. 마치 한 달 전 어떤 순간처럼.
하지만 김솔음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 좋긴 했겠지. 그립거든.”
[오. 김솔음 씨.]
TV가 조롱하듯이 유쾌히 말한다.
화면 속 토끼 인형이 두려운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앉는다.
[안타깝게도 이 착한 친구는 이미 다 찢기고 재가 되었군요! 당신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지. 그건 너잖아.”
[……!]
“솜 인형은 외관일 뿐이야.”
그렇다.
결국 착한 친구라는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봉제 인형을 몸 삼아서 움직여 줬던 건… 눈앞의 사회자였다.
지금 저 토끼 인형을 화면에 보여주는 것도.
‘너지.’
스스로 직접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
김솔음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배우들도 인상 깊은 배역을 맡으면, 그 역할이 끝나도 배역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왜냐하면.
“그 역할이 아주 재밌거나 깊게 몰입하게 돼서 말이지. 끝나도 흔적이 남는 거 같아.”
[…….]
그는 아까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자신이 깃들었던 솜인형이 터져나가는 것을 보고 굳었던 사회자를.
‘솔직히 봉제 인형이 터진다고 내가 죽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건데.’
애초에 자기가 집어넣은 것 아닌가.
거기서 더 나아가자면, 토크쇼 사회자가 고작 출연진 하나 죽는다고 쇼에서 침묵이 흐르는 걸 방치하는 것 자체도 이상했다.
TV 머리에 우는 이모티콘이나 띄우고 애도하는 척하다가 그것도 다음 코너의 소재로 써먹을 존재였다.
그런데 잠깐이라도 당황해서 솜을 틀어막으려고 했다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 맞았다.
“너도 그런 건 아닐까 했어.”
[오. 저 위대한 사회자인 척하는 초라한 존재가 고작 몇 달 썼던 가면에 영향을 받을 만큼 어설픈 프로 의식을 가졌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게 왜 어설픈 건지 모르겠는데. 원래 위대한 배우들이나 배역에 동화되어서 힘들어하는 거잖아. 그만큼 생생하게 몰입했으니까.”
[그건….]
“맞지?”
이자헌이 무미건조하게 김솔음의 말을 계속 전한다.
“그리고 좀 다른 경우지만… 나도 네 ‘착한 친구’에 많이 위안을 받았어.”
[…….]
“고맙다. 힘든 상황에서 네가 친구라 많이 도움과 위로가 됐어. 그리고… 재밌는 순간도 많았고.”
김솔음의 목소리가 울린다.
“너는 그렇지 않아?”
[…….]
[이런.]
사회자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부끄럽지만 인정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아주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지요!]
[쇼의 창작자, 출연자로서의 출중한 재능은 흔하지 않으니, 당신의 행보를 지켜보고 참견하는 건 아주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래서 난 더더욱 토크쇼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차분한 목소리가 나온다.
“일단, 난 이 토크쇼가 좀 무서워. 재미없다는 건 아닌데, 솔직히 내가 일하긴 어려워. 너도 알잖아. 내 성격.”
사람 죽는 것만 생각해도 오싹했다. 여기서 그 일에 기여하는 것은 정말로 섬뜩했다….
게다가 김솔음은 알았다.
‘내가 설득하려 든다고, 갑자기 저 사회자가 윤리적 판단을 할 것인가?’
절대 아니다.
마치 김솔음이 김솔음인 채로 있는 한, 이 토크쇼 스탭으로 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실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도 큰 문제다.
세뇌든 오염이든 자아가 사라진다는 거니까.
“솔직히 네가 날 동업자라고 불러주긴 했어도, 내가 일방적으로 네 크루에 일원이 된 거잖아. 사회자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분위기라고.”
농담 같은 말에 뼈가 붙는다.
“그런 상태에서는 계속 친구로 있을 수 없어. 그냥 종속되는 거지. 나는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없어.”
김솔음이 시야 너머를 보았다.
“그럼 너도 금방 재미없어질걸.”
[…….]
“그러니까 난 돌아가야 해. …그편이, 너도 훨씬 재밌을 거야.”
TV 겉면으로 기묘한 광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래서 저 사회자도 자신을 최대한 온건히, 사고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토크쇼에서 근무하게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김솔음은 짐작했다.
가랑비에 물에 젖듯이 말이다.
‘그게 어느 정도 통하긴 했다만… 이대로는 아니지.’
이 섬뜩한 곳에 계속 남아 있을 순 없다.
그래도 말이다.
“근데, 그렇다고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곤 생각 안 해.”
[…!]
“혹시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친구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게 잘 안돼도 서로를 위해주는 거 아닐까.
-…대화하면서 말이야.
“꼭 같은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서로 일상을 공유하면서 충분히 친구로 지낼 수 있어.”
어차피 이미 쏟은 물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그가 소환한 저 존재와 알력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꼭 착한 친구가 아니어도 돼. 그냥 친구면 됐지 뭐.”
TV 속 봉제 인형이 이 말에 솔깃한 듯, 귀를 기울이듯 몸을 화면 쪽으로 기댄다.
김솔음은 미소를 짓고 싶었다.
“너만 괜찮으면, 이런 방식으로 지내는 게 어때.”
[호오.]
[하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면?]
TV 속 봉제 인형이 당황했으나, 거대한 사회자의 목소리는 더 부드럽고 교묘해졌다.
[이것 좀 보십시오, 솔음 씨. 당신의 야만적인 칼잡이가 세트장을 파괴한 꼴을. 스탭들의 땀과 눈물이 담긴 이 공간을, 방송을 방해한 무뢰배의 비용은….]
그때였다.
퉁퉁퉁!
거대한 TV 속 토끼 봉제 인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솜 든 손을 들어서 화면을 때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 말에 항의하는 것처럼!
[…! 맙소사, 이건…….]
TV가 황급히 꺼졌다.
거대한 사회자의 손은 마치 무언가를 조절하듯 안테나를 조정했다. 하지만 TV는 깜박이며 그 안에서 날뛰는 착한 친구 봉제 인형의 모습을 순간순간 보여준다.
결국 사회자는 학을 떼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군.]
깜박.
무대의 모든 조명이 잠시 점멸한 다음 순간이었다.
[좋습니다.]
사회자는 어느새 본래의 형상으로 김솔음의 앞에 서 있었다.
-…!
[그래… 당신이 무슨 활약을 할지 시켜보고, 참견하는 것이 퍽 즐거운 게 맞습니다.]
[내 가면이 성가실 줄이야….]
사회자가 정중히, 약간 포기한 듯한 어조로 말한다.
[이 브라운이 인정하지요.]
[당신의, 독특하고 창의적이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에 동행하는 게 아주 흥미롭고 재밌었다는 것을….]
[착한 친구 역할이 독특히 즐거웠다는 것을, 말입니다.]
“…….”
김솔음은 깨달았다.
TV 화면 속 봉제 인형을 움직이는 건 당연히 사회자 본인이다.
그러니, 아까 토끼 인형이 날뛰던 것은… 저 사회자의 존재 속 어느 부분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착한 친구의 흔적.
“…….”
토크쇼를 덮치던 성화 포격도 어느새 끝났다.
조명이 돌아와, 마치 반파된 것마저도 세트의 일종으로 보이는 세트장에서 브라운은 김솔음을 응시한다.
시야 너머에 있는 친구를.
[하지만 이제 솜 든 몸이 없군요.]
아.
[물론… 훌륭한 사회자에게는 언제나 플랜 B가 있지요.]
사회자가 장갑 낀 손을 마치 마술처럼 움직이자,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동전 하나가 나타났다.
은화 뱀.
-…!
김솔음이 착한 친구를 소환할 때 넣었던 동전 아이템이다.
인형과 함께 타서 없어진 줄 알았던 그것이 등장하자 김솔음의 인격이 저 너머에서 동요했다.
“분명 태웠는데….”
[하하, 훌륭한 엔터테이너는 마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법이지요. 별 것 아닌 소박한 재주입니다.]
찰랑.
브라운의 손에서 동전이, 김솔음의 정장 앞 포켓 안으로 떨어졌다.
본래 착한 친구가 항상 함께 있던 장소로.
손가락이 포켓을 툭툭 친다.
[가져가시죠! 그리고 전처럼 적당한 매개체로 한 번 더 나를 부르면… 내가 갈 겁니다. 노루 씨.]
-……!
놀란 김솔음과 달리, 이자헌은 태연히 그의 말을 구강으로 발음했다.
“그래.”
[오, 다만 그 친구는 전과 달리 착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착할 수도 있다는 뜻이구나.”
[…언어의 마술사처럼 구는군요, 친구!]
브라운의 TV는 여전히 검게 아무것도 띄우지 않았으나, 깨끗한 화면은 김솔음의 얼굴을 비추었다.
김솔음은 웃고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다시 보자.”
[후속 편성의 예고라!]
[나쁘지 않군요.]
사회자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자, 그럼 이 황홀하고 멋진 스튜디오를 벗어나서, 끔찍한 현실로 돌아가 도전하는 내 임시 크루에게 박수를 보내줍시다!]
와!!
김솔음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관객석은 여전히 차 있었고, 카메라에는 불빛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특별 편성 보너스 타임! 사회자의 비하인드 (민감한 신상정보는 검열됩니다)’가 떠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광고 중이었지….’
이것까지 송출되고 있던 모양이다….
‘진짜 쇼 좋아한다.’
부디 내 신상정보 검열이나 잘 해줬길 바란다.
김솔음은 한숨과 헛웃음을 둘 다 표출하고 싶었다.
[자, 퇴장이군요.]
사회자는 김솔음에게 악수를 요청한다.
김솔음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주는 용병에게 요청하여, 그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듣는다.
낮은 속삭임을.
[노루 씨.]
[당신이 장담한 만큼 재밌어야 할 겁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지켜보지요….]
-…….
김솔음이 몸이 있었다면 잠시 식은땀을 흘리며 굳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자헌 과장이 조종하는 그는 태연히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힘찬 걸음으로 부서진 게스트 문을 지나 뛰어나갈 수 있었다.
[그럼 즐겁게 나가시길!]
토크쇼 세트장을 나간다.
스치듯 보인 관객석의 면면에서, 전과 달리 평범한 사람이 아닌 기괴한 ‘시청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섬뜩한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가벼워진다.
와아아아!
뒤에서 유쾌하고 섬뜩한 토크쇼 사회자,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브라운의 심야토크쇼였습니다!]
* * *
“……!”
나는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는 어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내가 알던… 일상의 새벽이다.
‘…나왔다!’
“하.”
나는 큰 숨을 들이쉬며 바닥에 뻗었다.
나는 왜인지 이름 모를 공원 벤치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여기 둬준 건가.’
해방감에 미칠 것 같다.
내 몸을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좋고, 무사히 바깥으로 나온 것도 좋고….
어쨌든, 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후우.”
이자헌 조장은 제대로 돌아갔을까?
아니, 내 오염 상태는 괜찮은 걸까? 어떻게 이토록 후련하고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잠깐만. 혹시, 그 츄러스 먹고 토한 게…….’
음. 이건 아직 짐작일 뿐이니 넘기고.
중요한 건 이거다.
‘…한 달 만에 탈출이다!’
“하아아아…….”
나는 다시 대자로 뻗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회사 물건도 다 잃어버려서 꿈결 수집기고 사원증이고 가면이고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회사에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같….’
…….
……잠깐만.
내가, 지금 한 달간 무단결근을 한 건가?
그렇다면 설마.
‘퇴사 처리…?!’
그럼 내 포인트는?
찬물 맞은 듯이 몸을 일으켰다.
‘내 폰.’
당장 확인해야 했다.
피로고 해방감이고 나발이고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에 당장 연락책부터 강구하려던 순간이었다.
머리 위에서 반짝, 무언가가 빛난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묘한 현상.
[어둠탐사기록 리얼굿즈 박스]
-새로운 굿즈의 사용 권한 해금! (!)
“…!”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건….
툭.
나는 내 손에 담긴, 아직 계산용 바코드가 붙어 있는 굿즈를 보았다.
가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형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그 정교함에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던 굿즈.
금속 장식이 달린 실린더.
바로….
꿈결 수집기 (정예팀 전용)
그리고 그 실린더 안은 이미 번뜩이는 황금빛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홀로그램 같은 광채가 나오는 용액.
‘이건….’
A등급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