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326화
아쉽게도 브라운의 즉각적이고 순발력 넘치는 요청은 기각되었다.
말하는 주화를 버리기 전에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갑자기 말문이 트인 ‘1번 배심원 가루로 만든 주화’는 이 상황을 담백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예….
-묘하게 힘이 나고, 갑자기 의식이 돌아왔어요.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녹슨 은주화가 반짝인다.
말을 할 때마다 녹이 점점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
-그래도 다시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반갑습니다.
1번 배심원, 아침역에 남아 있던 호유원의 일부는 그렇게 다시 자아를 가지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튀어나올 뻔한 심장을 진정시키며 지끈거리는 머리로 추론했다.
‘남은 가루를 유쾌 주화로 만든 게 문제였을까….’
혹은 세광특별시 지하철에 다시 들어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일단, 저도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주화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혹시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십니까?’
-재난의 날 이전까지는 다 기억하지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
‘혹시…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도시에 모여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 노력하는 심리상담사입니다.
-그들의 지치고 상처받은 심정이 회복되어, 이 도시가 더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 되는 게 제 꿈이죠.
‘재난관리국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그곳 요원들과 친분이 있습니다. 서로 부탁을 들어주는 사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목소리는 온화하고 따듯했다.
여우상담실에서 만난 여우 상담사처럼.
-얼마나 더 대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이쪽은 세광특별시에서 난리가 나기 이전의 호유원인가….
어느 쪽이든 정말 놀라운 사태였다.
그리고 현재 내 앞 포켓에 꽂혀 있는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인 듯하다….
[그래요, 친구.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지요. 누구나 새 얼굴을 좋아한다는 그 사실!]
아주 고급스러운 손수건으로 과장되게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났다. 다만 TV 화면을 섬세하게 닦는 소리에 가까운 듯하다….
[이 솜 든 몸도 이제 쫓겨나겠군요. 노루 씨에게 전적인 지지를 보내는 유일한 친구 대신 저런 동전 쪼가리와 친분을 나눌 생각이라니….]
자연스럽게 상황이 비약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듣다 보면 화들짝 ‘그럴 리가’라고 외치고 자연스럽게 동전을 지하철 바깥으로 내던질 것 같다….
미치겠네….
[노루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지요?]
‘음.’
나는 식은땀을 흘릴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그, 게스트가 입장했다고 생각하면 어때?’
[해고하겠습니다.]
응….
[하하! 오, 친구, 긴장했군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어디까지나 내 농담 같은 충고지요!]
달래듯 말하던 사회자의 목소리가 급격히 훅 낮아졌다.
[설마 내 친구가 계약과 신뢰의 문제를 저버리겠습니까? 당신이 직접 이 브라운을 친구로 이 자리에 불러냈으며, 그 위치는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마음 깊이 명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짜 무섭다.
[그렇지요?]
‘그럼. 당연하지.’
착한 친구 괴담 무서워.
나는 식은땀이 뻘뻘 흐르는 기분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정보는 필요해. 대화도 해야 하고.’
[흠….]
‘작은 크기에 실시간 소통이 된다… 이런 기능적 특성에만 집중해서 브라운과 비교하긴 어렵지. 그럼 스마트폰도 해당되는 거잖아.’
나는 ‘그래요? 그럼 스마트폰도 두고 다닙시다. 친구!’ 같은 발언이 나오기 전에 황급히 덧붙였다.
‘네 위치랑 겹치는 일은 없을 거야.’
곧 약간 언짢은 듯하지만 수긍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의 있는 발언이로군요, 노루 씨.]
후우.
[좋습니다. 하지만 내 옆에 두진 마시길 바랍니다. 역병이라니.]
결국 나는 은주화를 꺼내 최대한 브라운에게서 멀어지도록 바지 포켓에 넣었다. 여기 깃들어 있는 ‘상담사’는 그다지 개의치 않은 듯했다….
-언변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상담사는 오히려 약간 즐거워하는 듯했으나, 곧 주변 환경을 보고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린다.
-여긴… 지하철 열차 안이군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그래. 1번 배심원은 세광특별시 재난관리국 출신으로 보였지.
‘여긴 청룡팀 요원이 만든 쉘터라고 합니다. …혹시 관련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곧 신중하게 고민한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재난의 날 이후 제 기억이 그다지 온전하지 않습니다만,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요.
-요원이 만들었다면, 아마 이 열차 자체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열차 자체를?
‘그렇다면 열차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곳에 흔적이 남았을 것 같은데….’
열차의 핵심 시설이라면, 결국 떠오르는 건 하나다.
‘기관사석.’
이 열차의 맨 앞 칸.
일종의 시스템 창과 다를 바 없는 구역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열차 쉘터가 앞 칸과 뒷 칸으로 세력이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 칸은 외부인들에게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며… 묘한 우월 의식이나 선민의식이 느껴졌다.
‘이제 보니 기관사석이 거기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흠.
나는 여전히 골치 아픈 기색으로 한숨을 쉬는 청동 요원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고, 다른 사람과 일단 조우했다.
“산양 씨.”
“노루 씨….”
고영은 씨는 다행히 지난번보다 안색이 좋아 보였다.
다만 내 안색을 살피는 것 같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는 건가요?”
“예? 아, 좋은 일, 나쁜 일 둘 다 있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요.”
몸 되찾은 건 좋고, 인신 공양은 나쁘고. 그런 거다.
하지만 고영은 씨는 의외로 내 반응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다.
“다행이네요.”
“네?”
“안색이 좀 안 좋으시긴 했는데, 좀 더 편해 보이셔서요.”
“……감사합니다.”
나는 고영은 씨와 잠깐 웃고 있다가, 진지한 얼굴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열차 쉘터 분들도 카지노 쪽은 가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약간 당황한 얼굴이던 고영은 씨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얼굴을 굳힌 뒤 빠르게 물었다.
“저야 어차피 그때 이후로 안 가긴 하는데… 언제까지 그러면 되는 거죠?”
“아마 며칠 내로 연락이 올 겁니다.”
나는 회상했다.
“마무리되면, 그쪽 팀에서 신호를 주기로 했거든요.”
* * *
해금 요원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불법도박장 입구처럼 생긴 문이 지하철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도박장 괴담들은 보통 극단적이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카지노거나,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허름한 도박장이거나.
이건 후자에 가까워 보였지만, 해금 요원은 섣불리 추론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경험자에게 관련 이야기를 싹 듣고 왔기에.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백일몽의 두 직원이 따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팀장님?”
깍듯하게 말을 거는 조랑말 가면의 젊은이는 보기만 해도 서글서글해 보였으나, 눈에선 욕망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재물욕!
-아이고, 처음 뵙는 선배님이시군요!
만나자마자 넉살까지 좋았던 이 직원을 돌아보는 해금 요원의 얼굴에는… 백일몽 주식회사식 가면이 덮고 있었다.
하얀 올빼미 가면.
본래는 하회탈, 그중에서는 중탈을 써볼까 했으나… 역시 굳이 요원 신분을 안 드러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낯선 가면 속에서 다음 사람을 훑어보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실 겁니까?”
나비 가면을 쓴 자는 칼같이 정돈되어 구김 한 점 없이 똑떨어지는 차림새였다. 그리고 번뜩이는 손톱과 고급스러운 구두까지.
그러나 장신의 호리호리한 체격 위, 화려한 가면 사이로 보이는 눈은 얼어붙도록 차갑고 옅은 짜증이 배어 있다.
자신이 이 임시 팀의 팀장으로 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초반에 서열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음. 좋아.’
정말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안면이 있었다.
해금 요원은 자신이 한번 유리 감옥에 넣어본 적 있는 나비 직원이 정예팀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감회를 느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일방적으로 신분을 감추는 건 이런 면에서 유리했다.
“입장하지.”
해금 요원은 즉각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포도 요원에게 받은, 신체 카지노의 코인 더미다.
이번 탐사의 군자금.
그녀가 반짝이는 코인을 하나씩 들어서 일행에게 배부한 후, 신체 카지노에 입성했다.
“그게 수행자금이군요?”
묵직한 주머니를 보는 조랑말 가면의 눈이 번뜩였다.
“하하, 물론 다 같이 한 팀으로 게임을 하는 그런 방식일 건 알지만….”
“아니. 그렇게 안 할 건데?”
“…예?”
해금 요원은 웃으며 그 자리에서 코인을 삼등분했다.
“자.”
“…!”
“하고 싶은 대로 맘껏 쓰면 된다.”
곧 주머니 안의 판돈이 각자의 손에 들어갔다.
해금 요원은 가면 사이로 눈을 휘며 둘을 보았다.
“단, 빚을 져도 구해주진 않을 거다.”
“잘 알겠습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지!
조랑말 가면은 눈에서 거의 섬광이 나올 듯한 기세로 희희낙락 돈을 받더니, 은근한 눈으로 나비 대리를 보았다.
“대리님, 혹시….”
“꺼져.”
“넵!”
그렇게 일행은 흩어졌다.
슬롯머신으로 달려가는 강이학과, 거침없이 딜러룸에 입장하는 진나솔.
해금 요원은 각자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그 모습을 묘한 미소를 띤 채 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각 김솔음이 열차에서 말하는 동전을 보고 기함을 하고 있을 때였다.
* * *
‘후우.’
지금쯤 카지노에 들어가셨으려나.
해금 요원님이라면 잘하고 계실 것이다. 여차하면 카지노에서 도망칠 수단도 꼭 마련해 두라는 말도 전해놨으니까.
나는 열차 쪽에 집중하자.
그 일환으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바로 고영은 씨의 고모, 일명 ‘역무원’이었다.
“열차에 정착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음. 어려우실 텐데.”
이미 둘이나 수용한 상태라, 더 받기 곤란할 건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예 쉘터 거주민으로 받아달라는 게 아니라, 8번 칸에 장기 숙박하고 싶습니다.”
물론 정식으로 숙박권을 구매할 거라고 덧붙이자, 역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한테 따로 말씀하실 필요도 없긴 합니다만.”
“아, 하나 요청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권한도 살 수 있을까요?”
“어떤 권한 말이죠?”
“7번 칸에서 저도 물자를 판매하고 싶습니다.”
“음….”
약간 고민하던 역무원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다만 항목을 보고 다시 이야기하시죠.”
“감사합니다.”
됐다.
‘항목이야 생각해 둔 게 있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결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저, 그런데 장기 투숙할 때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올 것 같습니다.”
“…변장하시겠다는 겁니까?”
“변장보다는, 좀 다른 신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때부터는….”
어차피 사람은 디테일보다 인상을 기억하는 법이다.
내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앞 칸에 없을 거다. 투시술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옷차림이나 가면만 기억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가면을 벗고,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안경 쓰고 몸을 수그리면 알아보기 힘들 거란 뜻이다.
“포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오랜만이다.
포도 요원.
나는 즉각 승강장으로 내려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파격적인 선택을 할 겁니까, 친구?]
[우리가 함께 겪었던 멋진 열차 에피소드가 하나 떠오르는군요. 내 친구는 아주 발칙하고 훌륭하게 교주 역할을 수행했었지요….]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극한의 환경에서 의지할 마음의 표식을 찾는 그들에게 진리를 알려주겠습니까?]
으으음….
내가 말을 고르던 그때였다.
-인형 선생님, 혹시 스스로 화법이 상대에게 지나치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 없을까요?
자, 잠깐만.
[오.]
[계속 말해보시지요.]
-선생님의 친구분도 원하는 삶의 방식이 있을 텐데, 자꾸 선생님의 눈치를 보는 게 꼭 만족스럽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선생님 스스로도 이런 분위기가 편안하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맙소사…. 싸구려 테라피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 같군.]
제발 그만해 주세요.
나는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얼른 끼어들었다.
‘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 애초에 제가 떠올린 방법도 브라운이 말한 방식이랑 유사해서요.’
[아, 과연!]
이건 ‘너 정말 정곡을 찔렀어’ 화법으로 괴담 사회자를 달래려는 빈말이 아니었다.
‘이런 고립된 작은 사회에서 컬트만큼 영향력 발휘하기 쉬운 게 없지.’
심지어 이미 탐라행 열차에서 한 번 써먹어보기도 했고.
그러나 이번에는 조건이 다르니, 외부자인 나는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생각이다.
‘근데 내가 교주는 아니야.’
[음?]
‘난 간신배 하려고.’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네?
‘1호 숭배자요.’
[노루 씨, 대체 누구의 간신배가 되겠단 겁니까? 이럴 수가, 내 친구가 누군가를 숭배하는 역할이라니. 그렇다면 교주는 얼마나 대단한 작자일지 한번….]
‘바로 너야.’
[오.]
그리하여 열차에 비밀스럽게 토끼 인형 숭배 사상을 퍼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