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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36화


금줄을 넘어간 발이 땅을 디딘다.

게임으로 치자면 마치 특수한 필드 같은 것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지며 풍경이 제대로 드러났다.

근데….

‘…넓잖아.’

보름달 아래 산속의 밭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능선을 다 덮을 만큼 거대한 밭.

검푸른 달빛을 받은 고요하고 어두운 초록빛들이 흔들렸다.

다만 그리 평화롭거나 기분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불길하고 요요하다는 느낌이었다.

-기묘한 향이 나는군요.

그 말대로다.

게다가 흔들리는 초록빛 사이로 보이는 저 알알이 작은 빨간 열매는…… 자, 잠깐만.

‘…인삼?’

맞잖아.

여기 인삼밭이야?

잠깐만, 삼을 인위적으로 재배해서 키운 게 인삼인데, 이건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이 재배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산삼?’

이 많은 게 다 산삼이라고??

‘아니 설마….’

나는 황급히 밭을 둘러보다가, 외곽에 꽂아놓은 푯말을 보았다.

[千年]

“…….”

나는 당장 등을 돌려서 금줄을 넘으려 했다.

-노루 씨?

‘튀자.’

천 년 묵은 산삼?

친구한테 펜 좀 빌린다고 필통을 열었더니 펜 대신 골드바가 가득 찬 걸 본 기분이다.

그렇게 금줄을 넘으려던 순간.

[귀인!]

“…!”

[아, 귀인. 제발 가지 말아주세요….]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흑흑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목만 뒤로 반쯤 돌렸다.

[범에게 붙은 귀신이 절 서리하러 옵니다! 무서운 범이 제 사지를 끊어 씹어먹고 땅에 뱉을 앞날이 다가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밭에서 솟아오른 열매 하나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자신을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파리가 축 처진다.

[아아, 이제 제 차례입니다. 무참히 조각나 피륙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

몸을 돌려 해당 산삼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열매 다발이 열렬히 흔들렸다.

[사악한 범에게 물려가느니 차라리 귀인에게 먹히겠습니다! 절 데려가셔서 큰 무쇠솥에 푹 고아 드시면 만병이 고쳐지고 노쇠한 부모도 장정처럼 일어나 힘을 쓸 겁니다!]

그러고 보니 산삼은… 전부터 민담에 선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그려지곤 했던가.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

나는 열매를 흔드는 산삼을 향해 무릎을 굽혔다.

[귀이이인!]

그리고 산삼에게 손을 뻗…….

다가 도로 몸을 일으켰다.

[…?]

“거짓말.”

열매가 굳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듯 흔들리더니, 음산하고 갈라진 굵은 목소리가 솟구치듯 나왔다.

[눈치챘구나! 이 버러지 같은 것아!]

응.

‘여기 산군의 묏자리라며.’

귀신은 뭐든지 거꾸로 한다는 이야기 들어봤는가.

근데 귀신에게 홀려서 온 곳인 데다가 명칭이 무덤가라고?

‘이 동네에서 자라는 산삼이 정상일 리가.’

속성이 완전 다 반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꼴일 줄 알았지.

[이히히히, 히히히히!]

산삼이 꿈틀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이익!!

반쯤 튀어나온 몰골이 시퍼런 보랏빛인 게 진짜 무슨 좀비 미니어처가 따로 없다.

심지어 뭔가 검붉은 진액 같은 걸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무서워!’

[너도 묻히자! 너도 여기에 삼이 되어 묻히자! 도망 못 가게 손발이 잘려 썩자! 살아서 죽는 고통을 느끼자아아아아!]

주변의 이파리들까지 촉수처럼 뒤틀리며 같이 흙 밖으로 꿈틀꿈틀 뿌리를 뻗었다. 으아아아아!

나는 지체 없이 당장 허리춤에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배, 백설 사과!’

‘먹으면 바로 죽음 같은 잠에 빠진다’라는 기묘한 효과의 아이템이다.

근데 이걸 어쩔 거냐고?

‘안 그래도 긴급 상황에 사과 씹어먹긴 힘들 것 같아서….’

다 갈아서 즙으로 만들어왔지!

철퍽.

나는 백설 사과를 갈아 만든 사과즙이 담긴 밀봉팩 꺼내, 전방의 밭에 몽땅 흠뻑 뿌렸다.

산삼은…….

[끼히히히! 안 통한다! 안 통해! 어리석은 것아! 네 사지를 잡아 뽑….]

쿨.

기절 잠에 빠졌다.

“…….”

백설 사과… 효과 확실하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흙에서 반쯤 나온 징그러운 산삼은 여전히 바닥에 미동도 없이 실신해 있다.

바퀴벌레가 약 맞고 바닥에 뻗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개나 고양이가 푹 잠에 들어서 배를 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 무례했지만 꽤 재밌는 작자였습니다!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건 어떻습니까?

평소라면 미쳤냐고 했겠지.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산삼을 들여다보았다.

말하고, 감정을 표출하고, 날 속이려 들며 상황을 계산했다. 진액 같은 것도 속에 흐르고 있는 것 같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거….

‘지성체… 맞지 않나?’

찾았다, 희생양 대용.

* * *

“…그래서, 모든 재료를 다 구해왔으며 의식 준비도 마쳤고, 희생양으로는 이 이상한 산삼을 쓰면 된다……는 겁니까?”

“예.”

“…….”

‘김솔음(경비팀 사칭중)은 나가서 무슨 일을 겪었는가~’ 요약판을 들은 폐가 사람들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너무 요약했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설명할 수 없다 보니까 ‘아무튼 구해 옴’이 되어버렸거든.

‘산삼 캐온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하지만… 사람 하나 랜덤 뽑기로 죽이는 것보단 내 멘탈에 낫겠지.’

누구 밭인지는 몰라도 진짜 큰 문제 있으면 브라운이 알람 울려줬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최대한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입을 떡 벌리고 나와 준비물과 산삼을 번갈아 보았다.

근데 대충 통하긴 했다.

“여, 역시 경비팀…. 이런 것까지 하다니!”

아닙니다.

나는 괜히 찔려서 진짜 경비팀을 보았으나, 경비반장은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중학생들 사이에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언제 통성명했는지 애들이 붙어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형, 형 별로 안 세 보이는데요?”

“아냐… 나 완전 세.”

애들이 웃고 있다. 사람이 많아지니 조금 긴장이 풀렸나 보다.

이병진 과장은 준비물을 확인하며 얼굴이 밝아진 고선하와 나를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 그럼, 지금 다 같이 신당으로 가는 겁니까? 가서 의식을 하는…?”

“예.”

“…신당은 근처니까, 조심히 이동하면 될 거예요. 제가 신당에 있는 동안에도 별일 없었고….”

고선하가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그쪽, 나가셨을 때 신당도 가보셨나요?”

“예.”

브라운이 내 존재감을 없애준 김에 복숭아 나뭇가지를 태우고 왔다.

긴장돼서 세 번쯤 울 뻔했다.

“…그럼 더 쉽겠네요. 조용히, 소리 내지 말고 빠르게 걷기만 해요. 안개 속이니까 실수하지만 않으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신당으로 갑시다.”

때가 왔다.

우리는 잠시간 숨을 고르고 마음의 준비를 한 후, 그대로 닫힌 문 앞에 정렬해서 섰다.

“얘들아. 절대 멈추면 안 돼. 계속 걷는 거야.”

“네…….”

고선하의 말에 애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어른들의 다독거림에 입을 꾹 닫고 줄 사이에 끼었다.

“…….”

근데 왜 제가 제일 앞에 서게 된 겁니까…?

여러분, 왜 자연스럽게 뒤로 가시냐고요.

‘준비물 구하는 과정을 너무 생략해서 말했나…!’

다들 날 무슨 세기의 강심장이자 탐구심 넘치는 능력자 정도로 생각하나 보다. 아, 제발….

‘이제 와서 무섭다고 해도 안 믿겠지?’

……그래도 맨 뒤보다는 낫긴 한가.

나는 체념하며, 다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다시 어둠과 안개에 휩싸인 산기슭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

“으,”

“쉿.”

애들이 겁먹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는 천천히, 최대한 조용히 발을 옮겼다.

터벅, 터벅.

작은 소리가 울릴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창귀에 말을 걸며 쫓아올 것 같은 압박감이 무리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친구!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일의 경우에도 언제나 이 브라운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리고 그 ‘만일의 경우’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과 안개 너머로, 낡은 기와가 보인다.

이상한 각도로 휘어진 붉고 푸른 옛집.

신당이다.

쿵.

“후우.”

“다, 다 들어왔지?”

무사히 사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숨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느기적거리며 들어온 경비반장이 창호지로 된 초록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이병진 과장이 허겁지겁 그 문 위에 폐가 바닥에서 주워 온 부적을 덧바르려 했으나, 고선하가 말렸다.

“의식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냥 두죠. 빨리하고 나가면 돼요!”

“그, 그래.”

나는 그사이에 신당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그림자로 윤곽을 보여주었다.

그 안은 기묘하도록 깨끗했으나, 아주 낡았다.

머리 없이 녹슨 미륵상 두 점 사이에 다 부서진 향로.

그리고 그 위로 좀 먹은 목판이 보였다.

-저게 의식이란 것이 적혀 있던 그 목판인가 보군요. 제법 분위기 있습니다….

나는 브라운이 말해주는 목판의 내용을 따라 읽었다.

“…가장 심신이 담대한 인간이 앞으로 나와 의식을 진행한다.”

와 일단 난 아님.

“…….”

아니, 두 분 저 보지 마십쇼 진짜.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서 경비반장을 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도 따라오긴 했는데…….

“나 못해요.”

“…예??”

“못 하니까 시키지 말라구…….”

“아, 알겠습니다.”

이병진 과장이 깨갱 하더니 나를 보았다.

나는 빤히 과장을 쳐다보았다.

“…….”

“……그,”

“하십시오.”

“예, 예…….”

그쪽이 노이로제에 걸렸어도 저보단 덜 쫄보일 겁니다….

이병진 과장은 벌벌 떨리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가, 곧 기겁한 얼굴로 나와 고선하를 돌아보았다.

“자, 잠깐만! 산중호걸!”

고선하도 기겁했다.

“맞아! ‘산군께 올릴 가락’!”

“그래, 그거! 그 호랑이 동요든 민요든 대체할 게 없잖습니까! 아무리 준비물이 다 있어도 그게 없으면….”

아.

“있습니다.”

“……??”

“잠시만요.”

나는 중학생들을 불렀다.

그리고 매우 정중하게 물었다.

“얘들아. 수학여행 중이라고 했지.”

“네….”

“혹시 내려오는 차 안에서 계속 노래 들었던 친구 있니? 아니면 연예인 잘 아는 친구.”

애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앞머리 없는 학생 하나를 눈짓했다.

나는 얼른 그 학생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이, 이나연이요.”

“그래 나연아. 물어볼 게 있어.”

나는 매우 선량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들의 얼굴에 일제히 물음표가 떠올랐다.

“…?? 저기, 지금 뭘 하시는….”

“유명한 아이돌 노래 중엔 가사에 호랑이가 나오는 노래도 있지?”

“…!!”

나는 어른들을 돌아보았다.

얼빠진 표정들이다.

“하, 하지만 어, 가요를 적, 적어도 되나? 아이돌 노래 같은 건….”

“됩니다.”

나는 고선하가 적어줬던 의식 쪽지를 들어 올렸다.

“보시면 ‘가락’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꼭 민요나 동요 같은 걸 쓸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

여기가 괴담 위키 작성란도 아니고, 꼭 괴담 분위기에 맞춰서 곡을 선곡해 줄 필요도 이유도 없단 말이지.

인간의 편견이 범위를 좁힌 것이다.

“아….”

나는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연아. 그래서 기억나는 노래 있을까? 산군, 범, 이런 것도 괜찮아.”

“아!”

그리고 나연이는 즉각 얼굴이 훤해지며 대답했다.

“있어요! 세인트유의 까꿍!”

당첨.

“또, 또 브이틱 노래도 있고….”

“그중에 가사를 다 알고 있는 노래가 있어? 동시에 유명한 거.”

“네! 세인트유의 까꿍!”

오케이.

나는 어른들을 돌아보며 엄중히 선언했다.

“우리는 세인트유의 까꿍을 산군께 올릴 가락으로 쓸 겁니다.”

아이돌 노래를 받아라 호랑아!

* * *

고요한 신당 속.

어둠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온 이병진 과장이 떨리는 손으로 향로 안에 재를 털어 넣었다.

복숭아 나뭇가지를 태운 재다.

-첫째.

-‘의식을 진행하는 자, 앞으로 나와 향로에 복숭아 나뭇가지를 태워 넣고 그 향을 맡아라.’

-‘조심히 향로의 덮개를 닫은 후, 향이 날아가면 다시 열어라.’

과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 부서진 낡은 향로의 위를 마찬가지로 낡은 덮개로 덮은 후, 몇 초를 기다린 후에 덮개를 치웠다.

놀랍게도 잿더미는 사라졌다.

그 대신 온전한 향 하나가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 모양의 향에서 복숭아 섞인 향냄새가 물씬 피어오른다.

“…!!”

-‘향이 타오르고 있다면, 산군님께서 네 정성을 알아차리셨다’…. 오, 계획대로 잘 맞아떨어지는군요. 멋집니다!

“윽.”

향냄새가 독했는지 고선하가 코를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과장이 허겁지겁 다음 동작을 한다.

-둘째.

-‘창호지를 열어라.’

드르륵.

열린 문 너머로 어두운 숲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어른의 뒤로 숨는다.

-‘황동 잔에 매실 석 점을 짓이겨 마루 아래 흙에 뿌려라. 남은 잔은 동쪽으로 던지고 절대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나는 매실 석 점을 이병진 과장에게 건넸다. 과장이 청동 잔에 매실을 손가락으로 마구 으깬 후, 흙에 뿌렸다.

역할 정도로 달고 신 향이 올라왔다.

뒤로 물러나 있던 고선하가 앞으로 나오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안색이 좀 나아졌다.

그리고 이병진 과장에게 손짓했다.

세 번째 과정을 진행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셋째.

-‘산군께 올릴 가락을 준비하라. 세간에 알려진 것일수록 그 효과가 좋다.’

이병진 과장이 미리 적어둔 가사지를 들어 조심스럽게 말아서 향단 아래 서랍에 넣었다.

-‘노랫말은 적어 향단에 넣고, 목청껏 부르며 한 걸음마다 박수하고 서른 걸음마다 절하라.’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한 발씩 나온다.

이나연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가르쳐준 노랫말을 이병진 과장이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까꿍. 이 몸 나오신다.”

중학생들이 합창한다.

산군에게 바치는 가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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