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2화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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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2화


제11장. 석가공자(石家公子)

나루터는 한산했다.
정오 무렵이라 손님이 제법 많을만 한데도 낙수를 건너기 위해 배를 탄 사람은 불과 십 여명 뿐이었다. 그들 중 진산월 일행과 뱃사공을 제외하면 다른 손님은 겨우 다섯 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진산월 일행은 모두 일곱 이나 되었다.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인물 다섯 명외에도 상원건과 상소홍 부녀가 동행을 했기 때문이다.
상원건은 진산월이 소림사로 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고, 진산월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상원건은 강호를 유람한 경험도 많고 무림에서의 대소사(大小事)도 적지 않게 알고 있어 그들의 행로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상원건은 배를 탄 경험이 많기 때문에 느긋한 표정으로 뱃전에 서서 낙수의 절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나 정해와 응계성은 배를 타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지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배의 중앙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푸른 물살을 출렁이는 낙수의 강물은 처음 본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낄 만 했다. 정해는 그래도 침착한 성격인지라 차분한 모습이었으나, 응계성은 신경이 곤두선 표정이 얼굴에 송두리째 드러나 있었다.
낙일방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거푸 히죽히죽 웃으며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장문사형은 배를 처음 타보세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두 세 번 타본 적이 있다. 너는 자주 타보았겠지?”

낙일방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럼요. 저는 배타는걸 무척 좋아해서 일부러 나루터에서 일한 적도 있는걸요. 품삯은 시원찮았지만 배를 실컷 탈 수 있어서 정말 좋았죠.”

“그럼 노(櫓)를 저을 줄도 알겠군.”

“물론이죠. 배 한 척하고 노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걸요. 예전에는 삼 일 동안 꼬박 배를 저어 천리 길을 왕복한 적도 있어요. 그때 배주인이 저를 보고 타고난 뱃사공이라며 본격적으로 사공이 되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죠….”

낙일방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눈을 반짝이며 두 뺨을 붉게 상기시킨 채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 준수해서 천상(天上)에 있다는 금동(金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상소홍은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가 그의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참동안이나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상원건은 노련한 인물답게 이 광경을 알아차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홍아(紅兒)가 저 녀석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나보군. 그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상원건은 낙일방이 인물됨이 준수할 뿐 아니라 본성이 선량해서 능히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런 만큼 앞으로 강호에서 행도(行道)하게 되면 적지 않은 여인들의 정(情)을 받게 될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일전에 만났던 천봉팔선자중의 남봉 엄쌍쌍도 헤어지는 순간까지 낙일방을 연신 힐끔거렸지 않았던가?
상원건은 겉으로는 먼 산을 쳐다보는 척 하면서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동정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낙일방은 상소홍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치 노를 젓듯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을 계속했다.

“한번은 동정호(洞庭湖)에서 물길을 따라 무창(武昌)근처의 양자호(梁子湖)까지 배를 타고 간 적도 있었는데, 그때 이틀만에 뱃사공이 부상을 당해서 나머지 길을 제가 직접 노를 잡았죠. 그런데…”

낙일방이 흥에 겨워 발에 힘을 주는 바람에 그들이 탄 배가 조금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그 바람에 배의 중앙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낙일방을 쏘아보고 있던 응계성이 중심을 잃고 한차례 휘청거렸다.
응계성은 즉시 얼굴이 붉으스름하게 변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방! 너 계속 그렇게 잘난 척만 하고 있을거냐? 네놈이 그렇게 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아예 물 속을 헤엄쳐 건너오게 만들어 버리겠다!”

낙일방은 한참 신나게 입을 놀리고 있다가 응계성의 호통을 듣자 찔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나 응계성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소매를 걷어붙이며 낙일방을 향해 다가왔다.

“어디 네놈이 물 속에서도 그렇게 주둥아리를 잘 놀리는지 한 번 보자!”

낙일방은 평소에는 천방지축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었으나, 응계성에게만은 예외였다. 응계성은 화가 나면 정말 물불을 안가리는 사람이어서 다른 사형제들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면 모두 조심하는 편이었다.
응계성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낙일방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 좁은 뱃전에서 피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낙일방은 진산월의 뒤로 몸을 숨기려 했으나 마침 공교롭게도 진산월의 서 있는 위치가 응계성이 다가오고 있는 쪽이어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다급해진 낙일방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상소홍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상소저.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상소홍은 그가 돌연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반가운 듯 말을 걸어오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하나 워낙 재치가 있고 영특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며 되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갑자기 제게 친한 척 하세요? 혹시 저를 며칠 전에 보았던 남봉 엄쌍쌍으로 착각하신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 속에는 은근한 가시가 담겨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잘생기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낙일방에게 은근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자신보다 더 예뻐 보이는 엄쌍쌍이 나타나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더구나 낙일방을 보는 엄쌍쌍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데다 낙일방 또한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여서 그동안 속으로 마음을 끓이고 있던 터였다.
낙일방은 어색한 상황을 면해 보려다 오히려 그녀에게 핀잔어린 말을 듣자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저… 그게…”

그는 어쩔 줄 몰라 더듬거리며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순진해 보여 상소홍은 웃음이 터져 나올뻔 했으나 꾹 눌러 참으며 일부러 더욱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엄쌍쌍이 있을 때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는 척을 하는 거죠? 당신은 위급할 때만 여자를 찾는 못된 버릇이 있군요?”

낙일방은 준수한 얼굴이 완전히 홍시처럼 붉어져 아무 소리도 못한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며 킥킥거렸다.
상원건은 더 이상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상소홍을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홍아야. 낙소협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빨리 사과드려라.”

상소홍은 귀여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제 말버릇이 어때서요? 사실이 그래서 그렇게 말한건데 뭐가 잘못되었나요?”

“네가 갈수록 말버릇이 고약해 지는구나. 어서 사과드리지 못하겠느냐?”

상원건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르자 상소홍은 움찔하여 할 수 없이 낙일방을 향해 고개만 살짝 까닥거렸다.

“별 뜻없이 한 말이니 마음에 두지 말아요.”

상원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걸 사과라고 하는거냐?”

상소홍은 혀를 낼름거렸다.

“그럼 남녀(男女)가 유별(有別)한데 이보다 어떻게 더 정중하란 말이에요? 무릎을 꿇고 머리라도 조아려야 하나요?”

상원건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쓴웃음만 머금고 있었다.
오히려 낙일방이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상원건을 돌아보았다.

“저는 괜찮으니 상대협께서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응계성은 낙일방을 향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자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저절로 화가 풀려져 버렸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배의 중앙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때 마침 배가 기우뚱 거리자, 응계성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리며 배의 난간 근처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몸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 사람은 질좋은 금의(錦衣)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어 늘어뜨린 이십대 초반의 체구가 건장한 청년이었다. 금의 청년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먼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응계성에게 등이 떠밀려 몸이 배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어어?”

금의 청년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손을 마구 휘저었으나, 워낙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난간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응계성이 황급히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서 금의 청년의 몸은 그대로 차가운 강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풍덩!

금의 청년이 물에 빠지자 여기저기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앗? 공자(公子)님!”

“배… 뱃사공! 빨리 배를 멈춰라!”

금의 공자의 시종인 듯한 두 명의 장한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당황한 건 응계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엉겁결에 생면부지의 남을 떠밀어 물에 빠지게 만들자 평소의 성격 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난간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만약 정해가 재빨리 다가와 말리지 않았다면 금의 청년을 구한 답시고 물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응사형. 잠깐 기다리세요.”

정해는 응계성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게 맡기세요. 사형은 수영도 못하시잖습니까.”

응계성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정해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그를 돌아보았다.

“빨리 어떻게 좀 해 봐라. 제기랄… 재수가 없으려니 별 일이 다 일어나는군.”

정해는 그 말이 영문도 모르고 물에 빠진 금의 청년이 해야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뱃사공을 향해 다가갔다.

“밧줄이 있소?”

뱃사공은 노젓기를 멈춘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황급히 선미(船尾) 쪽을 가리켰다.

“저 쪽에 있습니다.”

배의 후미에는 배를 정박하기 위해 쓰이는 밧줄이 묶여 있었다. 정해는 재빨리 밧줄을 풀어 한쪽 끝을 자신의 오른 팔에 감고는 반대쪽 밧줄을 매듭을 묶은 다음 강물에 빠진 금의 청년을 향해 던졌다. 그때 금의 청년은 이미 몇 모금의 물을 마셨는지 허우적 거리며 물 속으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줄을 잡으시오!”

정해의 외침을 들었는지 금의 청년은 눈을 뜨고 바둥거리다가 용케도 밧줄을 움켜 잡았다. 정해는 금의 청년이 밧줄을 잡은 것을 확인하자 있는 힘껏 밧줄을 잡아 당겼다. 낙일방이 어느 새 다가와 그를 도와 밧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푸우….!”

간신히 배위로 끌어올려진 금의 청년은 한바탕 물을 토해내고는 벼락맞은 개구리처럼 뱃전에 사지를 뻗은 채 드러누워 버렸다. 금의 청년의 얼굴은 시체처럼 푸르뎅뎅했고, 팔다리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자님.. 정신 차리십시오!”

금의 청년의 하인인 듯한 두 명의 장한이 울상을 하고 그의 다리를 주무르기도 하고 가슴을 문지르기도 하며 법석을 떨었다.

“저리 비켜!”

갑자기 세찬 고함과 함께 응계성이 그들을 밀어젖히며 바닥에 누워 있는 금의 청년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뭐… 뭐야!”

“이… 이 나쁜….”

두 명의 장한은 분기탱천하여 욕설을 내뱉으려다 응계성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질겁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뜩이나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상궃은 그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절로 오금이 저려왔던 것이다. 응계성은 두 명의 장한을 물리친 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금의 청년을 내려 보더니 갑자기 오른 주먹으로 그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퍽!

“쿠엑!”

응계성의 주먹에 정통으로 인후혈을 격중당한 금의 청년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떨다가 다시 한 움큼의 물을 토해냈다. 토해진 물 속에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퍼득 거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금의 청년은 강물을 마시다 물고기가 목에 걸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것이다. 응계성의 행동이 조금만 늦었어도 금의 청년은 질식하여 생명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장한들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찢어 죽일 듯한 모습으로 응계성을 바라보던 눈빛이 한결 부드럽게 바뀌었다. 금의 청년은 그제서야 낮빛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시며 간신히 눈을 떴다. 그는 몇 차례 더 기침을 하여 물을 토하고는 이내 몸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시간은 하루중에서도 가장 더운 정오 경이었지만, 계절적으로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워서 강물은 무척 차가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물속에 빠졌던 금의 청년의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장한들 중 한 명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금의 청년에게 주었으나 온 몸이 젖어 있는 상태라 별다른 효과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이 안되어 보였던지 상원건이 다가와 품속에서 작은 환약(丸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걸 먹으면 추위가 좀 가실걸세.”

금의 청년은 망설이는 모습이었으나 상원건이 사람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떨리는 손을 내밀어 환약을 받아 들었다. 그는 다시 한 차례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환약을 입속으로 집어 넣었다. 얼마 되지 않아 금의 청년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화색이 돌더니 몸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정해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감탄한 듯 말했다.

“정말 성능 좋은 보양환(補陽丸)이로군요.”

“조양단(朝陽丹)이라는 것인데, 추위를 몰아내는데는 그런데로 쓸모가 있다네.”

상원건과 정해가 말을 주고 받고 있는 동안에 금의 청년은 몸이 많이 좋아졌는지 한결 혈색이 감도는 얼굴로 바닥에 일어어났다. 자세히 보니 그는 제법 당당한 체구에 얼굴에는 귀티가 흐르는 미남자였다. 눈과 코, 입이 모두 컸는데도 잘 조화를 이루어 시원시원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두 귀는 상당히 크고 길어서 복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금의 청년은 상원건과 정해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두 분 덕에 한 목숨 건지게 되었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의 음성은 얼굴 만큼이나 낭랑하고 깨끗했다. 상원건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야 뭐 한게 있나? 모두 이분 소협이 재빨리 손을 쓴 덕분이지.”

정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런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금의 청년은 조금 전의 생각을 하면 아찔한 지 다시 한 차례 진저리를 쳤다.

“물이 너무 차서 숨도 쉴 수가 없더군요. 게다가 저는 헤엄을 전혀 못하는지라 정말 끝장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나를…”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갑자기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지? 나를 떠밀은 사람이…”

그는 응계성의 앞으로 달려가서 사나운 눈으로 응계성을 쏘아보았다. 응계성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금의 청년에게 반말 비슷한 소리를 듣자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어디까지나 자기가 실수한 것이 분명한지라 꾹 눌러 참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금의 청년은 그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흘겨 보며 아무 대꾸도 없자 더욱 노화가 솟구치는 듯 코에서 더운 김이 새어나왔다.

“당신… 도대체 왜 나를 민거야? 내게 무슨 감정이 있다고…”

정해가 눈치빠르게 재빨리 끼어 들었다.

“이해하십시오. 배가 갑자기 흔들려서 제 사형께서 실수한 모양입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은 처음이라 그러니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그 말에 금의 청년이 희한한 동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응계성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오? 배를 탄게 처음이라니?”

응계성은 여전히 퉁명스런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해가 다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저의 사형이 재빨리 손을 써서 형장 목에 걸려 있는 물고기를 토해내게 하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금의 청년은 응계성에게 맞은 목 부위가 아직도 아픈 듯 몇 차례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 나이가 되도록 배도 못타본 풋내기라니… 아무래도 내가 재수가 없음을 탓하는게 더 낫겠군.”

그 말에 중인들은 폭소를 터뜨릴 뻔 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욹으락 붉으락하게 변한 응계성의 살벌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진산월이 뒤에서 슬쩍 어깨를 잡지 않았더라면 응계성은 성질을 폭발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이 슬쩍 낙일방에게 눈짓을 하자, 낙일방은 재빨리 알아듣고는 응계성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응사형. 저 쪽으로 가시죠. 저쪽에서 보는 금보산의 경치가 정말 멋있어요.”

응계성은 자신이 여기에 더 있다가는 틀림없이 그 금의 청년의 밉살스런 얼굴을 후려갈기고 말 것 같아 못이기는 척 낙일방이 잡아 끄는대로 배의 좌현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낙일방의 뒷통수를 냅다 후려 갈겼다.

쾅!

“아이고! 응사형! 왜 때려요?”

낙일방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소리치자 응계성이 고리눈을 부릅떴다.

“이게 모두 네 놈이 잘난 척하고 떠들었기 때문이 아니냐?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면 진짜로 혓바닥을 뽑아 버릴테니 그렇게 알아라.”

“에이…. 말썽은 사형이 저질렀으면서 괜히 나만 가지고…”

낙일방은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다가 응계성이 다시 커다란 손을 들어올리자 황급히 입을 다물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난간 쪽으로 피해갔다.

“구경이나 하자… 구경! 구경!”

금의 청년은 그제서야 화가 풀린 듯 정해와 상원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는 석지명(石志明)이라 합니다. 두 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상원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농서의 상원건이라 하네.”

정해도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종남에서 온 정해라고 합니다.”

금의 청년, 석지명은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종남파에서 나오신 분들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정해는 다시 진산월을 가리켰다.

“이 분이 바로 본파의 장문인이십니다.”

정해의 말에 석지명은 물론이고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손님들도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진산월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보아도 이십대 중반도 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가 일파(一派)의 장문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산월은 석지명을 향해 담담하게 포권을 했다.

“진산월입니다.”

석지명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낙양(洛陽)의 석지명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상원건이 눈을 번쩍 빛냈다.

“낙양이라면… 혹시 석가장(石家莊)에서 나오지 않았나?”

석지명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낙양의 석가장이라면 화북(華北)일대에서 제일가는 거부(巨富)인데 어찌 모를 리 있겠나?”

상원건은 비록 웃으면서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화북 지방은 강북(江北)의 오개 성(省), 즉 하남과 하북, 산동, 산서, 그리고 섬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물자가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거부나 거상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부를 축적한 곳이 바로 석가장이었다. 석가장이 부를 쌓기 시작한 것은 멀리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부터라고 한다. 그뒤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석가장은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역사속에서도 계속적으로 부를 축적해와 당대에 이르러서는 강호를 통털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황금의 가문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 비길 만한 부를 누리고 있는 곳은 강소의 혁리가(赫里家)와 호남의 구양제일가(歐陽第一家) 밖에 없다고 했다. 석지명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장한 중 한 명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석공자님은 석가장의 큰 어른이신 석장주(石莊主)님의 여덟 번째 아드님이십니다.”

그 말에 상원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석지명을 쳐다보았다. 석가장의 당대 가주는 검소한 생활로 유명한 석곤(石鯤)이었다. 석곤은 허름한 마의(麻衣)를 즐겨 입으며 반찬은 세 가지 이상 먹지 않는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석곤에게는 모두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석가십이지(石家十二支)라고 불렀다. 석곤이 어렸을 적 아들들에게 열두 간지(干支)의 동물 이름 하나씩을 붙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상원건은 잠시 속으로 생각을 헤아리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그럼 석공자의 아명(兒名)은 아양(阿羊)이었겠구료?”

석지명도 따라서 웃었다.

“정확히는 유양(乳羊)이라고 했습니다.”

“젖먹이 양이라…”

“어렸을 때 저는 무척 개구쟁이여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젖먹는 어린 양처럼 부모를 잘 따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신 거지요.”

“허허… 그거 재미있구료.”

정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살짝 웃으며 끼어 들었다.

“석가의 십이지공자(十二支公子)에 대한 소문은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설마 그 분들 중 한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석공자께선 좀처럼 어린 양처럼 보이지는 않으십니다.”

그 말에 석지명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우리 형제는 태어난 순서대로 아버님이 이름을 붙여주셔서 생긴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석지명은 화북제일의 부자인 석가장의 공자 답지 않게 소탈하면서도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정해는 그의 그런 모습에 적지 않은 호감을 느꼈다.
석지명 또한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한 정해가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금새 의기투합하여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덧 배는 강가에 도착하게 되었다.
석지명은 문득 생각난 듯 정해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귀 일행들은 지금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

정해는 슬쩍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숭산으로 갑니다.”

석지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뼉을 탁 쳤다.

“아! 이달 보름에 숭산의 오유봉에서 무림인들의 대집회(大集會)가 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혹시 그곳에 가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숭산이라면 이곳에서 삼 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아직 며칠 여유가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본가(本家)에 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정해는 눈을 번쩍 빛냈다.

“석가장에 말입니까?”

석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대로 스쳐 지나가긴 너무 아쉬운 일이지요. 본가에 별로 구경할 것은 없지만 와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정해는 다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건 장문사형께서…”

진산월은 잠깐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으나 이내 담담하게 웃으며 석지명을 향해 포권을 했다.

“초청해 주신다면 기꺼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석지명은 황급히 마주 포권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진장문인!”

진산월이 석지명의 초청에 선뜻 응하자 정해는 물론이고 낙일방도 몹시 기뻐했다.
그들은 모두 천하에 부귀로 이름이 높은 석가장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응계성 또한 아직도 퉁명스런 얼굴이었으나 그다지 기분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낙일방이 히죽히죽 웃으며 진산월을 향해 다가왔다.

“장문 사형께서 승낙하실 줄은 몰랐는걸요. 전 장문사형께서 소림사로 바로 가시는 걸 더 원하시는 줄 알았는데…”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이번의 강호행(江湖行)은 단순히 소림사의 무림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강호의 견문(見聞)을 넓이려는데 더 큰 뜻이 있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낙양의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

낙일방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거렸다.

“아무튼 이번에 낙양에 가게 되면 꼭 들려볼 곳이 있어요.”

정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곳이 어디냐?”

“사실은 그곳에 친구가 한 명 살거든요.”

“친구?”

“헤헤… 몇 년전에 떠돌이 생활할 때 사귄 녀석인데 삼 년 전에 헤어진 뒤로는 아직 못만났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낙양에 있느냐?”

낙일방은 신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종남으로 올 때 그 녀석은 낙양으로 가겠다고 했거든요. 낙양에 가서 꼭 성공하겠다고 말이죠.”

정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양은 좁은 곳이 아닌데 그곳에서 어떻게 몇 년전에 헤어진 친구를 찾는단 말이냐?”

“헤헤… 우리끼리는 서로 통하는 암호가 있어요. 그 녀석이 낙양성 어딘가에 있기만 하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만날 수 있어요.”

그때 어느 새 다가왔는지 응계성이 불쑥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암호란게 뭐냐?”

낙일방은 움찔하여 급히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응계성은 눈알을 부라렸다.

“빨리 말 안해? 대체 무슨 암호이길래 반나절도 안돼 낙양에서 사람을 찾아낸단 말이냐?”

낙일방은 울상을 지었다.

“아이고… 응사형! 정말 별거 아니라니까요. 왜 자꾸 나만 못살게 들볶는 거에요?”

“네놈이야 말로 왜 내가 말만 하면 우거지상부터 짓는 거냐? 이게 모두 네놈이 나를 우습게 보기 때문이 아니냐?”

“응사형… 세상에 응사형을 우습게 볼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응계성의 얼굴이 험상궃게 변하더니 이내 소매를 걷어붙힌 채 그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이 녀석이 뚫린 입이라고 말은… 정말 말 안해?”

그때 마침 배가 강가에 도착하자 낙일방은 재빨리 배에서 뛰어내렸다.
낙일방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가더니 거리가 조금 확보되었다고 생각하자 고개를 돌려 응계성을 향해 소리쳤다.

“그건 정말 말 못해요! 그건 소풍자(小風子)와 나 만의 비밀이란 말이에요!”

“저놈이?”

응계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더운 콧김이 확확 뿜어나왔다.
그때 진산월이 조용하게 웃으며 응계성을 제지했다.

“낙양에 가면 자연히 알게 될텐데 소란을 피울 필요가 있느냐? 배나 내려가자.”

응계성은 얼굴이 욹으락 붉으락 해졌으나 감히 진산월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씩씩 거리며 배를 내려왔다.
낙일방은 벌써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여차하면 도망갈 모습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해가 웃으면서 낙일방을 향해 다가갔다.

“네 친구 이름이 소풍자냐?”

낙일방은 응계성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름 한 번 특이하구나.”

‘풍자(風子)’ 란 ‘미친 사람’ 을 뜻한다.
그러니 ‘소풍자’ 라면 ‘작은 미친 놈’ 이라는 말이었다.
낙일방도 따라 웃었다.

“헤헤… 그 녀석의 원래 이름은 위적풍(衛赤風)이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소풍(小風)이라고 불렀는데, 하고 다니는 짓이 워낙 괴팍하고 정신이 없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소풍자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사형도 만나보면 마음에 들거에요.”

“그래?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만나보고 싶군.”

정해는 낙일방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그들이 낙양성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종남파의 제일차 강호행(江湖行)은 본격적으로 파란만장한 대여정(大旅程)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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