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02화
군림천하 (1002)
서문명이 활동할 당시의 종남파 장문인은 풍운신룡 담명이었다.
담명은 종남파의 재건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다 조일화의 암수에 아깝게 쓰러진 비운悲運)의 인물이었다.
담명이 장문인이었을 때 서문명은 장경각을 맡고 있었고, 서지명은 서문명을 도와 문서의 출납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담명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후, 풍운각주인 황조익마저 변사체로 발견되자 종남파 전체가 크게 뒤흔들리고 많은 제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서문명은 그들의 죽음에 의혹을 느끼고 몰래 조사를 시작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자신도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자살로 판명되긴 했으나, 누구도 그걸 사실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서지명은 서문명이 죽기 전에 ‘나마저 죽게 되면 너는 무조건 종남파를 떠나라. 그것만이 우리 집안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말을 들었기에, 형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남은 식솔들을 이끌고 황급히 종남산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종남파를 떠날 때 서지명 시조께서는 담당하고 있던 장경각에서 어렵게 구한 몇 권의 비급을 챙기셨소. 특히 그중에서도 종남파 무공의 핵심인 삼락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며 당시 불이 나서 난장판이 된 장경각을 며칠이나 뒤진 끝에 간신히 겉표지가 불에 탄 낙전칠검의 비급을 발견하셨다고 하오.”
낙전칠검은 삼락검 중의 하나로,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어 종남파에 전해지지 않은 절학 중의 절학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종남파의 선배 고수들이 사라진 삼락검을 찾기 위해 천하를 이 잡듯 뒤지고 돌아다녔는데, 의외의 곳에서 삼락검 중의 하나인 낙전칠검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의 종남파는 언제 문파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문호(門戶)가 망가지고 기강이 흐트러졌었다고 하오. 적지 않은 비급들이 외부로 유출되거나 소실되었고, 정체 모를 세력에 의해 장문인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자살을 빙자한 살해를 당해서 문파의 존립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소. 그러니 서지명 시조께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소.”
서해원이 서지명의 당시 행적을 변호했으나, 이미 진산월은 그때의 일에 대한 진상을 상당히 알고 있기에 서지명의 행동에 대해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서지명 시조께서는 이천에 정착하고도 혹시라도 종남파에 혈겁을 일으킨 흉수가 자신을 찾아올지 몰라 평생을 노심초사하셨소. 그분이 자신의 사후 삼십 년이란 시간을 내건 것도 만에 하나 있을 흉수의 추적을 뿌리치고, 가문의 무공이 종남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소.’
서지명은 낙전칠검의 일곱 초식을 나누어 열네 개의 초식으로 만들고 전광십사검법(電光十四劍法)이라 이름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거의 오십 년이란 세월 동안 그 무공을 외부로 보이지 않게 했으니, 그의 우려와 심모가 얼마나 지대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서가보는 전광십사검으로 단숨에 하남의 유력한 명문이 될 수 있었고, 대대로의 가주들은 하남성의 십대검객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쌓았다. 하나 그들의 무공이 종남파에서 연원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으니, 서지명의 심모원려가 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긴 이야기를 마친 서해원은 눈을 빛내며 진중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서지명 시조의 유지는 하나가 더 있었소.”
“그게 무엇입니까?”
“후일 언제라도 종남파가 재건된다면 낙전칠검을 종남파로 돌려주라는 것이었소.”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아십니까?”
서해원은 결단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모든 일에 각오가 되어 있소.”
무공을 원래의 문파에 돌려준다는 것은 단순히 비급 하나를 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무공을 익힌 모든 사람들의 처분을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만에 하나 진산월이 서지명의 과거 행적에 불만을 느끼고 낙전칠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그 무공을 익힌 자들을 외부의 적으로 판단한다면 서가보는 당장이라도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무공을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단전을 폐하거나 양팔을 잘라 제대로 된 검법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일은 강호 무림에서 비일비재했다.
문파에 있어 비전의 무공이란 이토록 중요하고 엄정하게 취급되는 것이었다.
서해원은 품속에서 작은 보자기 하나를 꺼내어 진산월 앞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서해원은 백발이 가득한 머리를 숙이며 더할 수 없이 묵직한 음성을 토해 냈다.
“이것이 바로 서지명 시조께서 종남파를 떠날 때 가지고 오셨던 종남파의 비급들이오. 늦게나마 시조의 유지에 따라 다시 종남파에 돌려드리니 받아 주시기 바라오.”
진산월은 묵묵히 보자기를 풀어 보았다.
세 개의 얇은 책자들과 하나의 검게 그을린 서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령비검(彫靈飛劍)>
<낙안추풍보(落雁追風步).>
<선풍십이권(旋風十二拳)>
세 개의 비급 아래에 놓은 것은 겉표지가 완전히 타 버리고 외관 전체가 검게 그을려 얼핏 보기에는 불탄 서책의 잔해처럼 모이는 물건이었다.
진산월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책자를 넘겨 보았다.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반쯤 타 버린 종이가 부스러질 것만 같아서 진산월은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겉이 완전히 없어진 책의 앞에 두 장은 절반 가까이 타 버려서 내용을 알기 어려웠으나, 얼핏 남아 있는 글자로 보아 검법의 내역과 검법을 처음 창안하고 발전시킨 인물들에 대한 소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장에 가서야 비로소 선명하게 남은 글자와 사람의 인체 도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전칠검(落電劍) 기일(其一), 어기분여전(氣奔如電)…………>
진산월은 서책이 망가지지 않게 한 장씩 조심스럽게 넘기며 끝까지 모두 읽었다.
삼락검의 하나이며 오래전에 실전되어 누구도 알지 못했던 낙전칠검의 일곱 초식이 인체도와 함께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천만다행이도 내용 자체는 조금도 손상이 없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난 진산월은 낙전칠검의 비급을 세 개의 책자 위에 올려놓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해원을 쳐다보았다.
“이건 확실히 본 파의 삼락검 중 하나인 낙전칠검의 비급이 맞군요. 서 가주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종남파의 무공이 다시 종남파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순리적인 일일 뿐 아니라, 본 가의 가장 오래된 숙원이었소. 이제 본 가의 숙원을 풀게 되었으니, 진 장문인이 이에 대한 어떠한 처분을 내리든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소.”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해원은 반쯤 자포자기한 표정을 묵묵히 진산월의 대답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데 비해 서인걸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초조한 얼굴로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나 다부지게 다물어진 입술과 떨리는 가운데 단단히 결심한 눈빛은 어떤 미래가 닥치든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나름의 각오를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진산월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처음 서해원에게 사정을 들었을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후였다.
무엇보다 육천기와 경요궁의 전례가 있지 않은가?
자신의 발로 문파를 떠나는 제자들을 잡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다시 찾아오는 제자 또한 막지 않는 것이 종남파의 방식이었다.
돌연 진산월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겁고 장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종남파 십육 대 제자 서지명의 자손인 서해원에게 명한다. 서해원을 종남파의 제자로 인정하고, 서가보를 종남파의 속문으로 삼도록 하겠다.”
그 말을 듣자 서해원과 서인걸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서해원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종과도 같은 우렁찬 외침을 토하며 진산월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종남파의 제자 서해원이 장문인을 뵙니다.”
서인걸 또한 황급히 아버지를 따라 진산월에게 절을 했다.
“서인걸이 장문인을 뵙니다.”
진산월은 절을 마친 서해원을 자신의 앞자리에 앉게 했다.
“장문인으로서 첫 명을 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 가주에게 하대를 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서해원은 아직도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기 힘든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이해라니 당치 않습니다. 장문인으로서 제자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연배나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보아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서 가주께서는 서지명 조사의 몇 대손입니까?”
“서지명 시조께서 사대조(四代祖)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서 가주님을 본 파의 이십 대 제자로 인정하겠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서해원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십 대라면 장문인보다 윗대인데, 괜찮겠습니까?”
“당연한 순리이지요. 마침 본 파에 그 항렬의 선배 고수분들이 여럿 계시니 본 파에 오셔도 적적하지 않으실 겁니다.”
서해원은 자신이 졸지에 천하제일고수인 신검무적의 사숙이 된다는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자신의 아들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제 아들 녀석은………….”
“당연히 저와 같은 이십일 대가 되겠지요.”
서인걸 또한 설렘과 흥분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은 서해원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자신이 신검무적과 같은 항렬이 된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 제가 진 장문인과・・・・・・ “
서인걸이 비록 요즘 하남성 일대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며 신진 고수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지만, 신검무적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름달과 반딧불 같은 차이가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신검무적이 악심을 품고 서가보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던 그로서는 자신이 중천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은 존재인 신검무적의 사제가 된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때마침 서해원의 외침을 들었는지 조심스레 이 층으로 올라오던 호가쌍위와 서해원의 둘째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놀랍고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서해원은 그들을 손짓해 불었다.
“웅아(兒)야, 어서 이리 와라. 자네들도 오게.”
세 사람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서해원은 둘째 아들을 진산월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본 가는 종남파의 속문이 되었고, 너도 종남파의 이십일 대 제자가 되었으니, 진 장문인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그 말에 혹시나 하고 있던 둘째 아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하얀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활짝 미소 지었다. 그는 황급히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저는 서가보의 둘째인 서인웅(徐仁雄)이라 합니다. 천하의 영걸이신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진산월일세. 우리는 이제 같은 항렬의 사형제이니 너무 과한 인사는 삼가도록 하게.”
“제…… 제가 진짜 진 장문인의 사제가 되는 겁니까?”
“자네 부친이 내 사숙이 되었으니 그렇게 되겠지. 내키지 않는가?”
그가 너무 긴장한 듯해서 진산월이 슬쩍 농을 걸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마구 도리질을 했다.
“그・・・・・・ 그럴 리가요! 너무 기쁘고 놀라서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한 차례 다독이고는 이어 호가쌍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서해원의 사촌 동생이었으나, 직계가 아니기에 빈객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을 하는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하남의 구석에 있는 일개 가문의 가주를 호위하는 무사에서 당금 무림을 호령하는 종남파의 빈객이 되었으니 그들로서는 신분이 몇 배나 상승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서해원에게서 서가보에 가주 직계로 낙전칠검의 변형인 전광십사검을 배운 사람은 서해원과 서해원의 친동생이며 서가보의 총관을 맡고 있는 광명수사(光明秀) 서강원(徐康遠), 그리고 서인걸과 서인웅 형제들뿐인 것을 알고 그들만을 종남파의 제자로 인정했다.
하나 서가보를 종남파의 속문으로 받아들이는 입파식은 후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종남파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진산월로서는 서가보까지 가서 그들을 속문으로 입파하는 의식을 치를 다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진산월은 조만간 종남파 본산에서 정식으로 입파식을 여는 것으로 서해원 일가의 마음을 달랜 후 다시 본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났다.
그 여정에 서해원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인걸이 동행하여 일행이 하나 늘었다는 것만이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