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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1009화


군림천하 (1009)

왕옥지는 임영옥과 정소소, 엄쌍쌍을 차례로 둘러보다가 이내 임영옥의 앞으로 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셨던 태평검객의 따님인 임영옥 소저가 맞으시죠? 저는 왕옥지라고 합니다.”

임영옥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나를 어떻게 알아보았어요?”

“종남파 고수들의 용모파기는 늘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산월이 의아한 듯 물었다.

“본 파 고수들의 용모파기를 가지고 있단 말이오?”

왕옥지는 당연하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버님께서 적어도 종남파 고수들의 면면은 알고 있어야 한다며 예전부터 지시하셨던 일입니다.”

아마도 왕도일은 이런 식으로라도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문파에 대한 미련을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로만 여겨졌던 왕도일에게서 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아니면 이 또한 나름의 계산 끝에 나온 행동이었을까?

어찌 되었건 진산월은 자연스럽게 왕옥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천봉팔선자의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왕옥지를 보면서 진산월은 새삼 그들 부녀의 처세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성격적으로는 결코 부드럽거나 원만하지 못한 것 같은데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전혀 어려움이 없구나. 아마도 이들 부녀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겠지.’

왕옥지는 스무 살이 갓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데 상당히 능숙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적지 않은 상행을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그녀의 행동거지나 말하는 태도는 막힘이 없었고, 때로는 노련해 보이기까지 해서 비슷한 나이의 누산산보다 훨씬 강호 경험이 풍부한 강호인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눈 임영옥도 그 점을 느꼈는지 눈을 반짝이며 왕옥지를 찬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왕 소저는 스스로 상단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여인의 몸으로 그러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군요.”

왕옥지는 부인하지 않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어린 여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우습게 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그럴 땐 어떻게 처신했어요?”

“처음 제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섯 명 정도 계속 잘랐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제 말을 제대로 듣더군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임영옥은 물론이고 한쪽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누산산과 정소소마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었나요?”

“상단을 처음 꾸릴 때 아버님께 제가 모든 사람의 인사권을 부여받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달았습니다. 쫓겨난 사람 중에는 아버님의 밑에서 십 년 가까이 지내온 행수도 있었지만, 그들을 내보내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왕 사숙께서 말리거나 다시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던가요?”

“아버님께서는 오히려 잘했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내보낸 사람들을 두 번 다시 고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녀의 다부진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임영옥은 왕도일과 왕옥지 부녀가 어떤 성격의 사람들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문사형의 말대로군. 냉혹하고 비정하지만, 본 파에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동안 종남파는 몇 되지 않은 문하제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숱한 고비를 헤쳐 왔다. 그러다 보니 동문사형제 간의 정리(情理)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고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 종남파는 외연을 급속도로 확장하면서 적지 않은 새로운 피들을 수혈하고 있었다. 종남파가 진정한 군림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대신에 문호가 흐트러지거나 문파의 운영이 방만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때 사소한 인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는 분명 문파에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임영옥은 가슴 한편으로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예전의 작고 소박하며 끈끈한 정으로 뭉쳤던 시절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것이다.

그녀는 그런 기분을 털어내려는 듯 짐짓 미소 지으며 정갈하면서도 아늑한 별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이곳도 왕 소저의 주거래처인가요?”

왕옥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침착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제가 투자해서 지은 곳입니다. 이 별실의 설계도 제가 직접 했습니다.”

임영옥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그런가요? 이 주루는 객잔까지 딸려 있어서 상당히 규모가 큰데, 이 건물 전체가 왕 소저의 소유란 말인가요?”

“예, 제가 어려서부터 모은 돈을 모두 털어서 제일 먼저 장만한 첫 가게입니다.”

용돈이 얼마나 되기에 모은 돈으로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신 임영옥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이런 주루를 지을 생각을 했지요?”

“아버님을 따라다니면서 이 근처를 수십 번 왕래했는데, 이곳의 목이 좋아서 객잔을 겸한 주루를 만들면 성황을 이룰 것 같았습니다.”

“왕 소저의 생각대로 되었나요?”

“지은 지 이 년이 조금 넘었는데, 얼마 전에 투자한 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임영옥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런 건물에 대한 투자는 짧게는 오 년에서 길게는 십 년 이상을 보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이 년 만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했다는 것은 그만큼 장사가 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왕옥지의 사업적인 안목이 무척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녀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마 회수한 돈도 이미 어딘가에 투자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감탄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왕옥지는 전혀 흥분하거나 좋아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신 다음 말로 사람들의 찬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여기 주방장은 제가 애써 초빙한 사람이라 실력이 확실합니다. 오늘은 제가 대접할 테니, 부담 없이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 계산이 분명할 것 같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모두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은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화창하게 개인 날씨였다.

일행이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왕옥지가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장문인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산월은 자신의 행적이 이리도 널리 알려졌나 하는 생각에 내심 탐탁지 않았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오?”

“예전에 장문인을 만난 적이 있다며 잠깐만이라도 뵙기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주인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제게 알려 왔습니다.” 

왕흥루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깐깐한 왕옥지에게 직접 말을 건넬 정도면 그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사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종남산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자꾸 지체되는 것 같아 조금 답답했지만, 왕옥지의 사정을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 시간을 내겠소. 이리로 불러 주시오.”

“알겠습니다.”

돌아간 왕옥지가 한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을 본 진산월은 눈을 번쩍 빛냈다. 과연 그 사람은 진산월이 만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몇 달 전과 다름이 없었다.

백발노인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진 장문인의 신수는 여전히 훤하구려. 오히려 그동안 더욱 신태비범해 진 것 같아 기쁘오. 나를 알아보시겠소?”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복 대협을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백발노인은 다름 아닌 단명수 복필이었다.

그는 진산월이 종남산을 떠나 두 번째 강호행을 나올 때 만났던 인물로, 진산월에게 운문세가를 조심하라는 말을 해 주려고 일부러 한나절이나 진산월 일행을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진산월은 그가 잠시나마 종남파에 적을 둔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선배 고수 대우를 해주었고, 복필은 고마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복필이 진산월이 돌아오는 시점에 맞추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은 묘한 감회와 여러 가지 생각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복필은 진산월이 자신을 단번에 알아보고 변함없이 환대해 주자 주름진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감격에 겨워했다.

“나 같은 볼품없는 노인을 용케도 잊지 않으셨구려.”

“한때나마 본 파와 인연이 있던 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 고맙소, 정말 고마운 일이오.”

“제가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 장문인이 종남산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은 섬서성 전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얼마 전 금보산의 나루터에서 진 장문인 일행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어서 지금쯤이면 이 일대를 지나겠다고 예상했소. 마침 어제 비가 내려서 객잔에 머물렀을 거라는 생각에 발품을 좀 팔았소.’

말과는 달리 복필은 진산월의 거처를 알기 위해 제법 공을 들인 게 분명했다. 아직 날이 덥지 않은 오전임에도 이마에 땀이 제법 고여 있는 것을 보니 아침부터 이 근처의 객잔을 모두 뒤지고 다닌 모양이었다.

대체 복필은 무슨 이유에서 노구를 이끌고 아침부터 진산월을 만나기 위해 뛰어다닌 것일까?

진산월은 더 지체하지 않고 이 점을 바로 물었다.

“복 대협께서 아침부터 저를 찾으신 것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복필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내가 아니라 다른 분이 진 장문인을 뵙기를 간곡히 청하고 계시오. 나는 그분의 청을 전하려고 진 장문인을 만나려고 한 것이오.”

진산월은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복필을 만난 것은 한 번 뿐이었으나, 그가 본 복필은 예의를 잃지 않았고 자신의 주제에 넘는 일에 나서지도 않은 순후한 성품이었다. 그가 이토록 무리하면서까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 진산월을 찾아온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본인이 직접 와야 했지만, 진 장문인과 작은 인연이라도 있는 내가 먼저 나서는 게 순리일 것 같아 이렇듯 불쑥 찾아오게 되었으니 염치없다 생각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오.”

“복 대협 같은 분을 만나는 것이야 언제라도 즐거운 일이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고맙소.”

“복 대협이 말씀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복필은 한 차례 숨을 고르고는 한결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은 혹시 관중제일가(關中第一家)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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