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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1014화


군림천하 (1014)

제409장 남산신조(南山)

종남산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시간이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 때의 아침과는 조금 달랐다.

고요한 가운데 여기저기 움직임이 있었고, 정적 속에서도 나직한 소곤거림과 대화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소란을 제일 먼저 느낀 사람은 전풍개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침잠이 없어져서 늘 새벽에 깨곤 하던 전풍개는 오늘따라 종남산의 건물 사이를 오가는 괴이한 소란스러움에 평상시보다 더욱 일찍 눈이 떠지고 말았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다음 방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는 방화의 뒷모습이었다.

방화는 소지산의 제자가 된 후로 새벽같이 일어나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풍개도 아침 일찍 그를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나 지금은 아무리 봐도 수련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허둥대는 모양새가 평상시의 차분하면서도 신중한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어흠.”

전풍개가 헛기침을 하자 달려가던 방화가 깜짝 놀라 돌아보더니 이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아침부터 분주하구나. 무슨 일인 게냐?”

방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인께서 일어나셨는지 확인해 보려고 장문인의 거처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장문인이 벌써 일어날 리 있느냐? 충분히 여독을 풀 수 있도록 방해하지 말아라.”

방화는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장문인께서 어제 주무시기 전에 오늘 아침에 일찍 조사전에서 간단한 제(祭)를 지낼 거라고 하셔서 그 준비를 하려고 한 겁니다. 장문인께서 일어나셨는지를 알아야 시간을 맞출 것 같아서…….”

그제야 전풍개는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긴 외출을 하고 돌아온 장문인이 조사전에 자신의 귀환을 고(告)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방화를 비롯한 제자 녀석들이 그 준비를 한답시고 꼭두새벽부터 수선을 피운 게 분명했다.

“언제쯤 지낸다고 하더냐?”

“묘시(卯)에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그리 일찍 지내려 하느냐?”

방화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문인께서 오늘부터 며칠간은 제법 바쁜 날이 계속될 거라 일과를 일찍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사부님께 들은 터라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방화가 머리를 조아리자 전풍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장문인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니 나름의 복안이 있겠지. 가서 하던 일을 마저 하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방화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가던 방향으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전풍개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늘 보던 풍경이지만, 오늘은 왠지 많은 것이 새로워 보였다.

무엇보다 본산 안의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활력과 생기가 넘실거리는 것 같아 전풍개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 지었다.

이 모든 게 장문인이 돌아왔기 때문임을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평온한 나날이 깨어진 건 살짝 아쉬웠지만, 장문인이 돌아옴으로써 외적의 침입 이후 다소 침체되어 있던 문파의 분위기가 일신되고 모두 신이 나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전혀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풍개 자신도 무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과 가슴 가득한 충만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 사람의 힘이 이 정도까지 될 수 있는 거로군.”

전풍개는 새삼 진산월이란 존재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종남파의 제자들에게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숨죽이고 있던 종남파가 꿈틀거리며 진정한 도약을 위한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사전을 참배한 지도 오래되었군. 묘시라고 했던가? 모처럼 거기나 가 봐야겠구나.”

사손뻘인 장문인이 귀환 보고를 하는 자리에 참석할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전풍개는 자신도 조사전에 들러 선배의 영령에 제를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는 간단하게 치러졌다.

장문인 진산월이 선배영령들의 위패에 술을 따르고 두 번 절을 하여 자신의 무사 귀환을 알렸고, 이어 임영옥과 전흠이 각각 절을 했다.

임영옥은 용케도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절을 해서 보는 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으나, 힘겹게 절을 마친 그녀는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제 비로소 자신이 종남파로 돌아왔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그녀는 행복한 마음까지 들었다.

제를 마치려 할 때 어느새 나타난 전풍개가 슬그머니 앞으로 와서 제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그의 아래 항렬인 성락중과 하동원을 비롯해 소지산과 낙일방 등이 차례로 절을 해야 했다.

전풍개는 자신 때문에 일이 커진 것을 알았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제례를 지냈다. 오히려 이 바람에 서인걸을 비롯해 새롭게 종남파에 들어온 제자들이 자연스레 조사전에 예를 올려 입문식을 치른 셈이 되고 말았다.

제를 마친 후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여타의 연회처럼 시끌벅적하거나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으나, 조용한 가운데 모두들 밝은 얼굴로 서로를 보며 미루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풍개는 어느덧 부쩍 늘어난 제자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선 얼굴들이 제법 보이는구나. 저들도 본 파의 제자들이냐?”

전풍개의 시선이 서인걸과 왕옥지에게 가 있는 것을 본 진산월이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에 본 파의 이십일 대 제자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진산월은 자신이 최근에 귀문을 허락한 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전풍개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여느 때보다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화 사형이 귀문 하셨다니 뜻밖이구나. 본가로 돌아가면서 본 파와의 인연을 영영 끊은 줄 알았는데, 마음이 바뀌신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분을 잘 아십니까?”

전풍개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오래전에 계셨던 분인 데다 나보다 훨씬 연상이어서 당시에도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인지 얼굴도 가물가물하구나. 단지 전대 장문인이셨던 장하민 사백의 제자였으며 상당한 명문가의 후손인 것만 간신히 기억날 뿐이다. 화의숭이란 이름도 지금 듣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전풍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장 사백께서 그분을 무척 아끼셨던 것 같은데, 장문인의 자리는 하원지 사형에게 넘겨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로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대충 계산해 보아도 화의숭과 전풍개는 열다섯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화의숭이 종남파를 떠난 것이 사십 년도 넘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으니, 전풍개가 그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왕도일에 대해서는 전풍개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왕도일은 해 사형이 아끼는 제자였지. 성격이 깐깐하고 날카로워서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맡은 일은 확실히 처리해서 나는 괜찮은 놈으로 보았다. 좀 더 성장하면 본 파의 내실을 다질 수 있는 좋은 인재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왕도일을 입에 올릴 때 전풍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냉엄하고 매서운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본 파를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녀석과 해 사형이라면 본 파를 굳건히 지켜 주리라 믿었던 것인데, 결국 두 사람 모두 본 파를 등지고 말았으니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자책하는 전풍개의 말 속에는 왕도일에 대한 일말의 서운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해 사형은 몰라도 그 녀석만큼은 본 파에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워낙 계산이 빠르고 냉철한 놈이라 선배 고수들이 모두 사라진 본 파를 떠난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할 때의 전풍개의 노안에는 말로 형용키 어려운 씁쓸한 감정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본 파를 훌쩍 떠난 왕도일에 대한 서운함만큼이나 그런 상황을 초래한 자신과 당시 종남파에 대한 아쉬움과 자괴감이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전풍개조차도 일가족을 모두 데리고 종남파를 등진 셈이었으니 무작정 왕도일만을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런 암울한 시기에 악착같이 종남파에 남아 어려운 문파를 이끌어 가면서도 하나둘씩 제자들을 늘려나갔던 임장홍이 새삼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회한에 찬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전풍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왕도일이 다시 돌아온다는 건 본 파에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예전부터 그 녀석은 일단 자기가 맡은 일만큼은 분명하게 해치우던 놈이었다. 그러니 그가 온다면 사숙이라고 대접해 주지 말고 마음껏 부려 먹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본 파가 여러모로 바빠질 거라서 제례를 일찍 올렸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아마 제 예상에는 본 파로 제법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올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지 않게 일과 시간을 조금 앞당기도록 한 겁니다.”

“방문객이 많이 올 거라니?”

“이번에 제가 본 파로 돌아오면서 섬서성을 지날 때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돌아오는 일정이 바빠서 대부분은 정중히 거절했습니다만, 제가 본 파로 귀환한 것이 알려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본 파를 찾아올 겁니다.’

듣고 보니 전풍개는 진산월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진산월이 종남파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귀환한다는 소식만으로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가 들썩거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진산월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과거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종남파를 떠났던 자들 중 상당수가 다시 종남파로 돌아오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배척할 수도 없고, 배척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결국은 종남파를 살찌우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남파는 예전부터 도가(道家)의 영향이 큰 탓인지 문파를 나가거나 들어오는 것에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았다.

본 파의 무공을 함부로 외인에게 전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지만, 본인의 의향이나 사정에 따라 문파를 나가는 것을 크게 탓하거나 백안시하지 않았다. 종남파가 힘을 잃었을 때 많은 제자들이 문파를 등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반면에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는 제자들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기사멸조의 죄를 저질렀거나, 외인에게 문파의 무공을 함부로 전하는 등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자들은 엄벌에 처하거나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외의 사정에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전풍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남파로의 귀문 의사를 보여 왔고, 앞으로도 그 일로 본산을 찾아올 거라는 진산월의 말에 조변석개(朝夕改)하는 있었다. 인심의 변화무쌍함에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종남파의 재기를 바라는 자들이 그토록 많이 있다는 것에 적지 않은 위로감도 느끼고 아울러 자신이 알고 있는 동년배의 고수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했다.

사실 지금의 종남파 제자들은 대부분이 젊은 나이의 청년들이거나 자신의 제자뻘이어서 전풍개는 마땅히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끔은 자신이 벌써 뒷전의 늙은이 신세가 된 게 아닌가 하여 울적해질 때도 있었다.

‘화 사형이라도 찾아뵙고 옛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려나?’

오죽했으면 얼굴도 가물가물한 화의숭을 찾아가 볼 생각까지 할 정도로 전풍개는 짙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전풍개는 귀문을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받지 말라거나 신중하게 사람을 고르라는 당부 같은 건 아예 하지 않았다. 진산월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점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왕이면 자신과 비슷한 배분의 인물이 한 명이라도 더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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