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11화 (1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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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11화


제155장. 연쇄살인(連鎖殺人)

진산월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낙일방과 동중산은 그때까지도 잠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사형.”

낙일방은 반색을 하고 달려오다가 진산월의 뒤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일환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녕하시었소, 낙 공자?”

지일환이 인사를 했으나 낙일방은 횅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뒤이어 낙일방을 따라 나온 동중산도 지일환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일환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달리 갈 데도 없어서 애꿎은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낙일방이 진산월에게 다가와서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리고 중산, 너는 저 노인을 살펴 보아라.”

“예, 장문인.”

동중산은 지일환이 업고 있는 노인을 건네받아 자신과 낙일방이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방으로 따라 들어오자마자 그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그에게 별다른 부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피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한바탕 하신 모양이군요.”

“그래. 일단 좀 씻어야겠으니 잠시 후에 중산과 함께 내 방으로 오너라.”

지일환은 그때까지도 두 개의 방 중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방 밖에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서성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진산월이 부르자 지일환은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낙일방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진산월이 허락한 이상 굳이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낙일방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간 후 진산월은 지일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씨세가의 경계가 삼엄해 밖으로 나가기 힘들 거요. 내일 내가 수를 써 볼 테니 오늘 하루만 이곳에 계시오.”

“감사합니다, 진 장문인.”

진산월에게 두 번씩이나 목숨의 구원을 받은 후 그를 대하는 지일환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해졌다. 특히 그는 조금 전 뇌옥을 탈출할 때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약간 상기된 모습이었다. 지일환이 진산월의 싸우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이씨세가를 탈출할 때는 경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무공을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 하나 이번에는 검광이 난무하고 장력이 날아다니는 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진산월이 단 일장(一掌)으로 거대한 석문을 박살내는 광경이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을 짚단처럼 쓰러뜨리는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석문이 박살날 때 그 반탄력에 의해 세찬 경기와 부서진 돌 조각의 파편 중 일부가 그에게도 날아왔으나, 가슴에 대고 있는 철판 덕분에 별다른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진산월이 왜 자신의 가슴에 철판을 대도록 했는지를 깨닫고 그의 용의주도함에 거듭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쫓아왔던 두 명의 정체 모를 고수들을 처치하는 진산월의 솜씨는 그야말로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처음 한 사람은 구름 같은 검광을 일으켜 살해했고, 두 번째 사람은 일검을 장난감처럼 쭈욱 뻗어 단숨에 쓰러뜨려 버렸다. 지일환은 아직도 왜 그 두 번째 고수가 단순해 보이는 일검을 피하지 못하고 그토록 허무하게 쓰러졌는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 두 번째 일검이 빠르기는 엄청나게 빨랐지. 강호 제일의 쾌검(快劍)이라는 분광검객(分光劍客) 고심홍(古心紅)의 검도 그 정도로 빠르지는 못할 거야.’

지일환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낙일방과 동중산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본 지일환은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자꾸만 몸을 뒤척거렸다. 동중산이 조용히 웃었다.

“예전 일이야 어찌되었건 지금 당신은 분파 장문인의 손님이시오. 그러니 마음 편히 계셔도 되오.”

“아, 알겠소.”

지일환은 동중산의 부드러운 말에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동중산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으며 지일환을 바라보았다.

“장문인께서 당신을 데리고 와서 솔직히 깜짝 놀랐소. 이곳에서 당신을 다시 보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서 말이오.”

지일환은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내가 진 장문인에게 두 번씩이나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소.”

“그걸 보면 당신도 본파와는 제법 인연이 있는 것 같소.”

지일환의 입가에 떠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혈색을 보아하니 몸 상태가 완벽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좀 봐도 되겠소?”

지일환의 눈에 언뜻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종남파에는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준 자신인데 이토록 환대를 해주니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약간의 피육(皮肉)이 긁힌 상처일 뿐이오. 대수로운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

“그렇다면 다행이오.”

동중산은 지일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가 어떻게 진산월을 따라오게 되었는지, 자신이 건네받은 늙은이가 누구인지 하는 것은 일체 묻지 않았다. 장문인이 없는 틈을 타 그를 추궁해서 무엇을 알아볼 속셈 같은 건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세심한 그의 마음 씀씀이에 지일환은 동중산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사실 동중산은 외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어서 왠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강호에 퍼져 있는 그에 대한 소문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어서 지일환은 은연중에 그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는 생각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남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강호의 소문은 왕왕 와전(訛傳)된다고 하더니….’
지일환은 자신에 대한 소문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니 동중산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同質感)까지 느껴졌다. 때마침 진산월이 목욕을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동중산이 조심스레 묻자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앙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래, 노인의 몸은 잘 살펴보았느냐?”

“예. 계속 혼수상태인 것을 보니 아마도 예전에 어떤 악독한 금제(禁制)에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기혈(氣血)이 뒤엉켜 있고 그동안 영양이 너무 부실해서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제를 풀 수 있겠느냐?”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자의 실력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금제를 당한 지가 워낙 오래되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처음에 당한 금제가 강력하다는 뜻도 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의도(醫道)와 무학(武學)에 모두 밝은 사람이 아니면 금제를 풀기 힘들 거라고 봅니다.”

“일단 제갈 노인의 힘을 빌려야겠군.”

동중산은 다소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제갈 노인의 의술은 물론 뛰어나지만 무공이 어떨지는….”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제갈 노인의 무공은 사숙조님의 아래가 아니다.”

언뜻 동중산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제갈 노인이 무공을 익힌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보니 놀라운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요.”

“번거로움을 자초하기 싫어 그러는 것이니 너도 모른 척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낙일방이 그제서야 기회를 잡은 듯 물었다.

“저 노인은 어떤 분이십니까?”

진산월은 그들에게 지일환을 구할 때부터 노인을 데리고 뇌옥을 탈출할 때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점차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동중산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이씨세가와 초가보가 내통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게 되니 충격이 크군요. 강호무림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그들의 배후가 아직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뇌옥 근처의 동산에서 서장의 고수들로 파악되는 자들을 만나셨다면서요.”

“아무리 서장의 고수들을 만나고 그들의 무공을 많이 접해도 확실한 증거를 찾기 전에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게다가 오늘 상대한 자들 중 서장의 고수로 추측되는 인물은 겨우 그들 둘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중원인들이다.”

잠시 침음하던 동중산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단서를 잡았으니 이곳을 나간 후 그들을 압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이 그들의 안방이라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우리의 의도만 발각되지 않는다면 이곳을 나가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그들 중 눈썰미가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내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짐작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들도 막연한 의심만으로 우리에게 손을 쓰지 못할 겁니다. 더구나 지금같이 많은 무림인들이 이씨세가에 몰려 있는 경우에는 말입니다.”

진산월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씨세가에서 이대로 순순히 회갑연을 치를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초가보와 내통하는 사이라면 자기들 입 속에 들어온 우리를 순순히 돌려보낼 리 없지. 반드시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밤의 정적을 찢어 놓는 비명 소리. 그것은 분명 여인의 음성이었다. 중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일방이 날카로운 신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화산파가 머무르고 있는 방향입니다.”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일방, 너는 지 대협과 함께 이곳에 있거라.”

진산월은 자신을 따라 일어나려는 낙일방을 제지시킨 후 동중산과 함께 방을 벗어났다. 낙일방은 자신도 가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진산월은 그가 말을 꺼낼 틈을 주지 않고 벌써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흐음….”

다소 불만 섞인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일환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와 비명이 들려온 곳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은 그에게는 너무나 길고 긴 밤이었다. 하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명 소리는 단 한 번에 그쳤지만, 후원의 객방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잠을 깨워 놓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동중산과 함께 화산파가 머물러 있는 객방의 입구에 왔을 때, 그 앞에는 이미 적지 않는 수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차마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화산파 고수들의 숙소로 들어갈 수 없어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진산월과 동중산이 나타나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고수들은 그들이 누구이며 화산파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익힌 알고 있었다. 야심한 밤에 화산파의 숙소에서 울려 퍼진 여인의 비명 소리. 그 숙소 앞에 종남파의 장문인이 나타났으니 중인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한 상황이었다. 동중산은 주위를 빠른 시선으로 둘러보고는 진산월을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가 먼저 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중산은 빠른 걸음으로 화산파의 숙소로 다가갔다. 호산파의 숙소로 들어가는 작은 월동문 앞에는 호산파의 제자 한 사람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동중산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오?”

화산파의 젊은 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동중산을 쓸어보더니 그가 종남파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험악해졌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니 돌아가시오.”

“이런 밤에 여인의 비명 소리가 울렸는데 어찌 그냥 가라고 하는 거요? 대략적인 사정이라도 알려주는 게 도리 아니겠소?”

“흥! 본파에 무슨 일이 벌어지듯 당신네가 신경 쓸 게 아니오.”

동중산이 다시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명의 미녀였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죠?”

두 미녀 중 나이가 조금 어리고 눈빛이 유달리 반짝이는 여인이 대뜸 화산파의 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화산파의 제자는 다소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누 소저.”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서 매 대협에게 우리가 뵙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화산파의 제자가 머뭇거리자 여인의 고운 아미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우리를 언제까지 여기 세워 둘 참이에요? 화산파 고수들은 여인에 대한 배려도 없나요?”

화산파의 제자는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알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그가 들어가자 여인을 혀를 낼름거렸다.

“핏! 남자들은 다 똑같아. 그저 여자 말이라면 깜박 죽는다니까.”

그녀는 옆에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중산에게로 휙 고개를 돌리더니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이게 누구야? 종남파에서 장문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비천호리 나으리 아니세요?”

동중산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천봉팔선자 중의 막내인 누산산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동중산이 화산파의 제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을 뻔히 보았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내숭을 떨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동행한 사람은 첫째인 백봉 정소소였는데, 정소소도 입가에 고소를 머금고 있더니 이내 동중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동중산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정 소저!”

누산산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나한테는 왜 인사 안 해요?”

동중산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누 소저.”

그로서는 마치 자신의 막내 사제인 서문연상을 떠올리게 하는 누산산의 행동거지가 그저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동중산은 두 여자를 붙여 놓으면 정말 볼 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누산산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술을 실룩거렸다.

“굉장히 기분 나쁜 웃음이네. 혹시 지금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정소소가 그녀에게 꾸짖는 시선을 보냈다.

“너는 어째 갈수록 말이 험해지는구나. 여인의 입으로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누산산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으나, 이내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저기 서 계시는 위풍당당하게 생긴 분은 혹시 그 유명한 종남파의 장문인 아니신가요?”

동중산은 그녀가 이미 자신들의 모습을 보아 놓고도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에 정소소는 그녀가 계속 좌충우돌하지 점차로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산산은 금시라도 진산월을 향해 달려갈 듯 하다가 정소소의 표정을 살피고는 재빨리 원래의 새침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정소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동중산을 향해 침착한 음성을 내뱉었다.

“산 매의 성격이 워낙 천방지축이니 동 대협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래요.”

“저는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동중산이 점잖게 말했으나 그것이 또 누산산의 비위를 거슬렸는지 그녀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정소소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도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희가 들어가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본 다음에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동중산은 반색을 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진 장문인께 잠시 후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때 마침 화산파의 제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동중산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진산월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오시랍니다.”

화산파 제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산산이 정소소의 소매를 잡아끌며 한 마디 나비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가요. 여기서 더 있다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옷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 같으니까 말이에요.”

여인답지 않은 그녀의 말에 명문정파로 유명한 화산파 제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정소소가 진산월을 찾아온 것은 해가 뜨기 직전에 어둠이 더욱 짙게 깔리는 무렵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한 게 아닌가 모르겠군요.”

정소소가 다소곳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알맞은 시간에 오셨소.”

방안에는 두 사람 외에도 동중산과 낙일방, 그리고 정소소와 함께 온 누산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진즉에 조잘거렸을 누산산이 지금은 왠일인지 요조숙녀처럼 얌전한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진산월은 쓸데없는 인사를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화산파의 숙소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거요?”

정소소는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에서는 이번 회갑연에 모두 여덟 명의 고수가 왔어요. 그들 중 담로검 매장원과 신산 고수를 제외한 여섯 명은 모두 화산파의 일대 제자들이에요.”

중인들은 모두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그들 중 막진웅(莫眞雄)이라는 일대제자가 자신의 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어요.”

중인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그럼 여인은 비명은 어찌된 거요?”

“같은 일대제자인 종요설이 막진웅의 시체를 보고 놀라 내지른 것이에요.”

진산월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구려. 사인(死因)은 무엇이오?”

“예리한 흉기에 목덜미를 관통당했어요. 아마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거예요.”

“흉수는?”

“그건 아직 몰라요.”

진산월은 그녀의 말에 의혹을 제기했다.

“그건 이상하구려. 화산파의 숙소라면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을 텐데 아직도 흉수를 찾지 못했단 말이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에요. 심지어는 매장원과 곡수 같은 사람들도 몇 번이나 시체를 살펴보았지만 흉수를 알아내지 못했어요.”

매장원과 곡수는 강호 경험이 풍부할 뿐 아니라 무공이 절정에 다다른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시신에서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누구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종요설이라는 여제자는 그 시간에 무슨 일로 피살자의 방에 들어갔던 거요?”

언뜻 정소소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사실 서로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다고 해요. 아마도 그녀는 모두들 잠든 틈을 타서 막진웅과 같이 있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녀는 더 이상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 수 있었다. 화산파는 강호의 명문 정파답게 문규(門規)가 엄격하여 제자들이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화산파에서 동문 사형제들끼리 내연(內緣)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동문들끼리 결혼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기는 했으나, 그런 경우에도 사문 어른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서로간에 얘의를 차리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더구나 사문의 어른을 모시고 강호의 중요한 행세에 참여한 여제자가 야심한 밤을 틈타 남자의 방으로 찾아간다는 것을 실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막진웅이 살해된 시각을 알 수 있소?”

“정확한 건 흉수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거예요. 단지 곡 대협은 시체의 혈흔(血痕)과 사후경직 상태로 보아 짧게는 한 시진(時辰)에서 길게는 두 시진을 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건 너무나 막연하군.”

“그래서 다들 골머리를 썩고 있어요.”

“화산파에서는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오?”

“일단은 어젯밤 이후에 막진웅을 찾아온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수소문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범행에 쓰인 흉기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어요.”

“흉기를?”

“흉기가 다소 특이한 모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시겠소?”

“시체의 상흔(傷痕)을 보면 관통당한 부위가 상당히 거칠다고 하더군요. 자세히 보면 거의 너덜너덜해 보일 정도라고 해요.”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에는 예리한 흉기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래요. 상처 자체는 분명 예리한 흉기에 의한 것이었오요. 그렇지 않고서야 화산파의 일대제자의 목을 관통할 수 없었겠지요. 단지 예리한 흉기에 의한 흔적치고는 상흔의 겉표면이 너무 거칠다는 거예요.”

“흠. 그건 이상하군.”

“그래서 특이하다고 했던 거예요. 곡 대협의 말로는 이런 식의 상흔이 나려면 흉기의 끝 부분이 검처럼 예리하고 그 날은 톱니처럼 날카로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검처럼 예리하고 톱니처럼 날카롭다?”

그때 그동안 묵묵히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동중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자는 그와 유사한 병기를 알고 있습니다.”

진산월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게 무엇이냐?”

“낭치편(狼齒鞭)입니다.”

“낭치편!”

진산월은 물론이고 정소소의 입에서도 동시에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군. 낭치편을 잊고 있었군.”

낭치편은 채찍이었다. 여느 채찍과 다른 점은 채찍의 표면에 날카로운 철침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양이 꼭 늑대의 이빨과 같다고 하여 낭치편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채찍은 비록 부드러운 병기지만, 내공을 주입함에 따라 얼마든지 단단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채찍 끝은 사람의 목을 관통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예리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흉수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낭치편은 비록 강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병기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사용하는 고수의 숫자가 아주 적은 것도 아니었다. 동중산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침 제자는 이 근처에서 낭치편을 사용하는 고수를 알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연회장에서 그를 직접 보았습니다.”

진산월은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냐?”

동중산의 대답은 중인들을 경악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흑랑(黑狼) 변혁(邊爀)입니다.”

중인들은 아연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단 하나, 흑랑 변혁은 개방에서 파견된 오의단 소속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정소소의 전갈을 받고 화산파의 고수들이 개방의 고수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로 달려간 것은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개방 고수들의 모습이었다. 개방 고수들의 앞에는 한 구의 처참한 시체가 누워 있었다. 가슴이 완전히 으스러진 채 쓰러져 있는 그 시체는 다름아닌 흑랑 변혁이었다. 화산파의 고수들은 일부는 낙담했고, 일부는 당황했으며, 일부는 불안감을 느꼈다. 무언지 모를 어두운 기운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화산파와 개방 고수들의 합동 조사 끝에 변혁의 사인은 곧 밝혀졌다. 변혁은 강력한 철봉(鐵棒) 같은 것에 강타당해 가슴뼈가 완전히 함몰(陷沒) 되어 있었다.

중인들 중 가장 지혜가 뛰어나고 견식이 풍부한 곡수는 그것이 단순한 철봉이 아니고 그 끝에 고리가 달린 것임을 밝혀냈다. 변혁의 함몰된 가슴뼈 주위의 피부가 시커멓게 죽어 있다는 사실에서 유추(類推)한 결론이었다. 고리가 달린 철봉은 무림에 많이 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의 뇌리 속에는 똑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선장(禪杖)!’

선장은 중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회갑연에 초대된 사람들 중 승려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소림사의 승려들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림사에서 파견된 승려들 중 선장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그는 나한당의 고수인 정결(丁潔)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중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누구나가 이 밤이 정말 한없이 긴 밤이 되리라는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산파와 개방의 고수들이 소림사 승려들의 숙소를 찾아가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소림의 승려들이 먼저 그들을 찾아왔다. 그들은 한 구의 시신을 가지고 왔다. 그 시신을 본 중인들은 경악과 공포를 함께 느껴야만 했다. 가슴이 쩌억 갈라진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는 그 시체는 바로 정결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화산파와 개방의 고수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소림의 승려 중 가장 뛰어난 영기(靈氣)를 자랑하는 소신승 정화가 압을 열었다.

“정결 사형의 가슴에 난 검흔(劍痕)을 보시오. 그러면 흉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거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결의 가슴을 향했다. 다음 순간, 화산파 고수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너무도 낯익은 검흔! 그것은 화산파의 자랑인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만 만들 수 있는 매화문(梅花紋)이었던 것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소림사와 화산파, 개방, 그리고 천봉궁 등 당금 무림의 거대세력 네 군데의 고수 수십 명이 하나같이 무겁고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백포(白布)로 감싼 세 구의 시신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시신들을 보는 각파 고수들의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라지 않는다는 개방 오의단의 고수, 광권 종호였다.

“이건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놈 짓이오. 그놈이 아니라면 각파의 고수들을 이런 식으로 조롱하듯 살해할 리 없지 않겠소?”

상당수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호는 그런 반응에 힘을 입은 듯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놈은 아미 우리들이 자신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거을 알고 자객들을 보내 암습을 했소. 그리고 이제 우리를 자신의 안마당에 불러 놓고 태연하게 일을 저지른 거요.”

인시망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평상시의 종호라면 인시망의 한 마디에 그냥 입을 다물었을 것이나, 지금은 잔뜩 흥분한 상태라 추호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차분하란 말이오? 이미 각파에서 이십 명에 가까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소? 여기서 더 머뭇거렸다가는 우리들 중 누가 또 변을 당할지 모르오. 그때도 성급하다고 하겠소?”

다른 파의 고수들까지 모여 있는 상황에서 종호가 자신의 말에 반박을 하자 인시망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나 그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냉정을 유지했다.

“이번 사건을 그자가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네. 우리가 우격다짐으로 그를 범인으로 몰아 보았자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네. 자네는 설마 우리들이 구파일방의 위세를 믿고 다른 사람을 압박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단 말인가?”

그 말에 종호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흥분하여 인시망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시망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은 이번 사건의 전모(全貌)를 밝히는 것일세. 그런 연후에 이 사건과 취미사 혈겁이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무림인들에게 인식시켜야 하네. 그를 응징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일세.”

소림사의 대원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정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확실히 지금 각파의 고수들은 너무 흥분해 있습니다. 이런 때 자칫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흉수의 노림에 빠져 들지도 모릅니다.”

“대사께선 어떻게 하시는 것이 좋겠소?”

“빈승은 조금 전에 인 대협께서 말씀하신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일단 우리는 이번에 벌어진 세 건의 살인(殺人)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원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세 개의 살인 사건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 사건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각기 서로 다른 문파의 고수 손에 당한 듯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대원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바람에 중인들의 이목이 온통 그의 다음 말에 쏠렸다.
대원은 충분히 효과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모두 자파(自派)의 숙소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만이 대원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하나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각파에서도 내로라 하는 인재들인 만큼 곧 그들은 그 의미를 깨달았다.
화산파의 추풍검객 고장명이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물었다.

“대사님의 말씀은 그들이 자파의 고수 손에 살해당했다는 뜻입니까?”

장내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무언가를 느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그것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의견이군.”

고장명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자신의 무심결에 마음속의 의혹을 말했을 뿐인데, 대원은 그걸 하나의 의견으로 만들어 버린 거이다. 하나 그는 매장원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장원의 시선은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끼어든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었다.
좌중의 시선이 다시 대원에게 집중되었다. 심지어는 각파의 수뇌인 매장원과 인시망, 차복승도 묵묵히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원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에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세 건의 살인이 벌어졌는데도 어느 누구도 비명을 듣거나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솔직히 이번에, 살해된 정결은 나한당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인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숙소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살해당한 다른 두 사람도 각파에 정결과 위치한 인물들었을 것입니다.”

화산파와 개방은 고수들이 부지불산에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이것은 흉수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흉수가 자신을 죽일 때까지도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한 겁니다. 따라서 빈승은 그들이 자파에 있는 누군가의 손에 쓰러졌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대원은 비록 완곡하게 도려 말했지만, 그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중인들은 그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가정(假定)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흉수가 각파의 고수들 중에 있다! 이것은 생각만으로도 섬뜩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었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의 지금까지의 한 마디도 일올 열고 있지 빙항여 열고 있지 않은 매장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매 대협께선 빈승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장원은 짤막하게 말했다.

“올바른 분석이라고 생각하네.”

대원의 서선은 인시망을 향했다.

“인 대협께선?”

인시망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어이 천봉궁의 총관 차복승을 바라보았다. 그가 엽을 열기도 전에 차복승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대사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믿고 있소.”

대원은 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가 이렇게 각파의 수뇌에게 자신의 의견에 대한 동의를 구한 것은 아주 현명한 행동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네 개의 문파는 하나같이 당금 무림의 누구도 무시 못할 세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또한 자신들의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게 강한 인물들이었다.
이런 자리에서의 회의는 자칫하면 서로간에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기 쉬웠다.
대원은 각파의 최고 어른인 매장원과 인시망, 차복승에게 각각 동의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에 대한 공증(公證)을 받은 셈이었다.
그때 중인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인시망은 그가 자파의 고수인 철심수사 모관임을 알고 눈을 빛냈다.
모관은 이번에 오의단에서 파견한 고수들 중 가장 두뇌가 비상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모관, 자네로군. 이곳은 자유로이 자기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자리이니 좋은 의견이 있으면 서슴없이 말해 보게.”

“감사합니다. 먼저 대원 대사님의 혜안(慧眼)에 감복했음을 밝혀 둡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과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흉수가 자파의 고수들 중에 있다는 것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관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사실 저는 삼파의 고수들이 서로 상잔(相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흉수는 이토록 빤히 눈에 보이는 일을 꾸몄을까 하는 점입니다.”

장내에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했다.
모든 중인들은 목구멍에 납을 달아맨 듯한 표정으로 모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세 구의 시신이 며칠의 사이를 두고 발견되었으나, 서로 상잔하는 모습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같은 사람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흉수는 보란 듯이 그런 어설픈 행동을 했습니다.”

중인들은 모관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흉수의 이런 행동은 의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모관은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법(解法)을 제시했다.

“이곳에 오기 전 서안의 초입에서 각파는 암습을 당했습니다. 그때 차복승 노총관께서 소개해 주신 이동정 대협은 그 사건에 대해 세세한 분석을 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흉수의 목적은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는 걸 알리려는 것이다.'”

중인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커다란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모관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매듭지었다.

“저는 이번에도 흉수의 의도는 그때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흉수는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 더 희생자가 생기기 전에 알아서 그 배반자들을 색출해라’ 하고 말입니다.”

잠시 주위에는 적막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의 얼굴에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고, 개중에는 당혹감과 불안감으로 좌불안석인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에 인시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네. 매 대협은 어떠시오?”

중인들의 시선이 매장원에게 향했다.
매장원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차복승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과연 철심수가 개방의 지낭이라는 소문은 허언이 아니었구려. 노부는 진정으로 탄복했소.”

모든 사람이 칭송의 눈빛을 보내건만 막상 모관의 얼굴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각파의 배반자를 색출하는 겁니다. 그것이 비록 흉수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일지라도 배반자를 내버려 둔 상태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두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관은 할 말을 모두 마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을 때,
차복승이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한 가지는 분명하군. 각파의 배반자가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그자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인지 추궁할 수 없다는 걸세.”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했던 사파회동은 맥없이 끝나 버렸다.
각파의 거처로 돌아가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같이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곧이어 다가올 참혹한 사건을 알지 못했다.

아침 해가 밝았을 때 들려온 소식 하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었으며, 말로 표현 못할 공포감을 모두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밤사이에 이씨세가의 가주이며 이번 회갑연의 주인인 이세적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 15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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