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1화
제 156장 밀실살인 (密室殺人)
“일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처음 이세적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낙일방이 진산월을 향해 물은 말이었다.
똑같은 말이 수십, 수백 군데에서 내뱉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당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잖아.”
단 한 사람만이 남들과는 다른 반응을 나타냈다.
“당했군. 이건 완전히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오”
이동정은 천봉궁의 고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소 강호를 제법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직 한참 모자라는 멍청이일 뿐이오”
누산산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짐짓 위로하는 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평생 바보멍청이 소리를 듣고 살 뻔했잖아요”
금교교가 아미를 찌푸렸다.
“산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느냐”
“내가 뭘요? 저자가 자기 입으로 말한 건데.”
“너 정말‥‥‥‥”
“알았어요 입 다물고 있을게요 하지만 저자가 바보멍청이라는건 사실이에요 자기는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하잖아요”
금교교는 물론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정소소까지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자 그제서야 누산산이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동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는지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다른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표정이 무거웠다.
“솔직히 나는 이번 회갑연이 이존휘의 꼬리를 잡고 그를 몰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칫하다가는 우리가 큰 낭패를 볼 수도 있게 생겼소 확실히 그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오”
정소소가 약간은 의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대협의 말씀은 이세적의 죽음이 이존휘와 연관이 있다는 뜻 같은데,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아무리 이존휘가 야망이 큰 인물이라고 해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까지 음모를 꾸민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군요”
“나도 들른 이존휘가 이세적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지만 이존휘가 어떤 식으로든 이세적의 죽음에 관여했을 것이며 적어도 그의 죽음을 사전에 인지(認)했으리라는 것이 내 추측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번 일이 너무나 공교로운 시기에 발생했기 때문이오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칼자루를 잡고 이존휘를 어떻게 요리하느냐로 고민했어야 했는데, 이 일로 인해 이제는 오히려 이존휘가 칼자루를 잡게 되었소”
정소소는 아직도 선뜻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든 듯한 표정이었다.
이동정은 침착한 음성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명문세가의 후예인 이존휘로서는 취미사 혈겁의 흉수로 의심받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이미 몰락의 길로 들어선 거나 마찬가지였소 그가 그토록 치밀하게 취미사 혈겁을 저지른 이유도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정체가 발각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결국 꼬리를 잡혀 사파(四派)의 고수들이 서안에 집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소”
“‥‥!”
“일단 의심을 받게 된 이상 이존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소 나는 그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리라고 생각했소”
“그게 무엇인가요?”
“첫째로 그가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잠적하는 길이오 물른 무림인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겠지만, 그동안 그가 보여준 치밀한 일처리로 보아 그가 모습을 감출다면 그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가장 가능성이 없는 일이오 이존휘가 그동안 쌓아놓은 모든 걸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오”
중인들은 모두 수긍하는 빛을 적었다.
“두 번째는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오. 솔직히 나는 이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소 이존휘에 대한 별다른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가 몇 가지 증거를 조작하여 흉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오”
“일리가 있군요” –
“세 번째는 취미사 혈겁에 관련된 각 문파에 계속 사건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취미사 혈겁에 신경을 쓰게 하지 못하는 것이오. 시일이 흐르면 사건은 점차 유야무야될 것이고, 이존휘가 흉수라는 증거 또한 없어질 것이 분명하오 이번에 거듭된 암습과 살인이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이존휘가 이 범법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소”
“우리 모두 그렇게 의심하지 않았나요?”
이동정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소”
정소소는 급히 물었다.
“그게 무언가요?”
이동정의 얼굴은 왠지 음울하게 보였다.
“아예 판 자제를 뒤엎어 버리는 것이오”
정소소는 물론이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판 자제를 뒤엎다니요?”
“말 그대로요 지금 서안 일대는 누군가가 도화선에 불만 붙이면 그대로 폭발하고 마는 거대한 화약고(火藥庫)나 마찬가지요 이런 시기에 취미사 혈겁을 능가하는 커다란 사건(事件)이 일어난다면 도저히 수습할 수 있는 일대 혼란이 벌어질 거요 그런 상황에 처하면 취미사 혈겁의 흉수를 찾는다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고 말거요”
정소소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 대협의 말씀은 이번 일이 그런 대혼란의 시발(始發)이 될 거라는 거예요?”
“이미 혼란은 시작되었소. 이세적은 누가 뭐라 해도 서안의 최고 유력자며 또한 관(官)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오. 그가 살해당한 이상 우리가 아무리 취미사 혈겁 운운하며 떠들어 봤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존휘를 추궁은 고사하고 조사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소?”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 이세적의 죽음은 그들에게도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 그 일이 미칠 여파를 아직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이동정의 분석대로라면 이존휘를 조사하기 위해 사파가 이씨세가에 모여든 것 이 오히려 사파의 목덜미를 조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동정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이존휘가 노리고 않는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거요. 틀림없이 이번 일로 누군가를 노리고 있을 텐데, 그 칼끝이 어디를 향하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두렵단 말이오.”
매장원이 곡수를 대동하고 이씨세가의 본당(本堂)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십여 명의 인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회갑연에 참석한 인물들 중 가장 배분이 높거나 명성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소림사에서는 대원선사와 소신승 정화가 참석을 했고 개방에서는 풍수 인시망이 광권 종호와 철심수사 모관을 대동하고 와 있었다. 천봉궁의 노총관인 차복승과 백봉 정소소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외에도 서안 일대의 유력한 인물들이 대부분 와 있었다.
그들 중 특히 눈길을 끄는 사람들은 관복(官服)을 입은 두 명의 관인(官人)들이었다. 한 명은 중년인이고 다른 한 명은 이십대 중반의 젊은 사람이었는데, 의외로 젊은 관인이 오히려 직급이 높은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중년 관인이 그의 뒤에 시립하는 자세로 서 있었다.
장내의 고수들과 눈인사를 하던 매장원의 시선이 젊은 관인에게로 향하자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이존휘가 그를 소개했다.
“이분은 장안부(長安府)의 동지(同知)이신 강염(江廉)대인(大人)이십니다. 지부(知府)께서 천거하셔서 이번 시건을 조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
동지는 장안부의 수장(首長)인 지부의 바로 아래 직위로, 정오품의 고위관리였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동지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그가 특별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거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뜻했다. 장안지부가 이세적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보냈다면 아마도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강 대인, 이분은 화산파 장문인의 사제이신 담로검 매장원, 매대협이십니다.”
이존휘의 말에 강염이 매장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매장원은 강염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강염의 얼굴은 선이 가늘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얼핏 보기에는 남장여인(男裝女人)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나, 정면으로 바라보면 턱과 코밑으로 검은 수염이 조금씩 나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안색은 약간 창백했으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고 맑게 번뜩이고 있어서 매장원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가 장안지부인 서정욱(徐定煜)이 오른팔처럼 아낀다는 강염이로군. 별명이 옥안빙심(玉顔氷心)이라고 하더니 과연 특이한 용모로구나.”
남자에게 ‘옥안’이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외호였다. 그런데도 강염에게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단순히 그가 뛰어난 미남자여서라기보다는 얼굴색이 여인의 그것처럼 하얗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게다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정상(情狀)을 참작하거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칼로 자르듯 정확하고 때로는 야박할 정도로 냉정했기 때문에 ‘빙심’이란 이름까지 붙게 된 것이다.
강염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여성스린 외호를 붙인 것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옥안’이 아니라 ‘철면(鐵面)’이 더 어울릴 거라고 떠들기도 했다.
강염은 매장원과 시선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강호에 명성이 높은 매 대협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본관(本官)은 강염이라 하오.”
매장원은 강염에게 마주 인사를 하면서도 그의 태도에 다소 놀랐다.
오래 전부터 무림의 고수들은 관가와는 불가근불가원 원칙을 지키려 했다. 가급적이면 너무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연히 관가 또한 무림인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무림인들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강염은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매장원을 대하는 태도가 깍듯했다.
매장원이 답례를 하고 자리에 앉자 이존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오실 분들은 모두 오신 것 같으니 제가 여러분들을 오시라고 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식을 들으셨겠지만, 오늘 아침에 아버님께서 흉사를 당하셨습니다.”
이존휘의 태도는 침착했고 음성도 차분했다. 마음속의 슬픔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중인들의 마음에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이존휘는 이세적의 죽음을 발견한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래 이세적은 인시경이면 일어나 새벽 연공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한 시진쯤 연공을 마치고 나면 몸에 좋은 성분으로 이루어진 영양식을 먹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진시가 가까워 오도록 이세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비가 총관인 갈종의를 찾아갔고, 갈종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존휘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존휘가 이세적의 연공실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이세적은 싸늘한 시신이 된 채 연공실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존휘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물었다.
“이 가주의 사인은 무엇인가?”
말을 한 사람은 창룡표국(蒼龍標局)의 국주인 철장개천(鐵掌蓋 天) 공료(孔瞭)였다. 창룡표국은 대응표국과 함께 서안에서 가장 큰 표국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그 역사는 오히려 대응표국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대대로 공씨는 이씨와 함께 서안에서 가장 강력한 혈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비록 요즘 들어서는 이씨세가의 위세에 눌리고 있긴 했으나, 공씨를 대표하는 창룡표국은 여전히 서안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공료는 이세적과 어렸을 때는 친한 친구였고, 점차 성장해 가면서는 경쟁자였으며, 이제는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아마 이세적의 죽음에 가장 큰 당혹감과 허전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공료일지도 몰랐다.
이존휘는 공료가 자신의 부친과 각별한 사이였음을 잘 알고 있기에 머리를 숙이며 공손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몸에는 오직 한 군데의 외상(外傷)만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언가?”
“아버님의 왼쪽 가슴에 검흔(劍痕)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어떤 상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공료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으로 살짝 찌푸렸다.
“다른 상처는 일체 없고 오직 검흔 하나라니‥‥‥ 대체 누가 단 일검(一劍)으로 이 가주를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중인들의 머리에 비슷한 의문이 떠올랐다.
하나 이존휘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그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아버님의 시신이 발견된 연공실은 본가의 중지(重地) 중 하나라서 본가에서도 몇몇 식솔들 외에는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버님께서 연공을 하실 때는 항상 문을 안에서 걸고 계시기 때문에 외부에서 안으로 침입할 수가 없습니다.”
공료가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들어갔나?”
“본가에는 비상시에 대비해 연공실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두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자네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버님께서 가장 신임하는 자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오직 아버님과 그 당사자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증인들은 그제서야 사태가 당초 예상보다 더욱 어렵고 난해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존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세적을 죽인 흉수가 누구냐 하는 것 이전에 흉수가 어떻게 연공실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가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점만 밝힐 수 있다면 총수의 정체에 대해서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공료는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알아야겠다는 듯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 가주가 새벽마다 연공실에서 연공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본가의 식솔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연공실의 위치를 아는 자는?”
이존휘는 이미 사전에 그런 일들을 모두 파악해 놓았는지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모두 열두 명입니다. 그중 두 명은 아버님을 오랫동안 모셔 온 직속 시비들이고 네 명은 수신위(修身衛)들이며, 다른 여섯 명은 저를 비롯한 본가의 친족들입니다.”
공료는 이존휘의 말을 듣고 그가 이미 그 점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를 마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 부분은 더 캐물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공료는 즉시 화제를 돌렸다.
“자네가 이 가주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언제인가?”
“어젯밤 초경(初更)이 막 지났을 무렵입니다. 연회가 모두 끝난 후 아버님이 처소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제 방으로 들아갔습니다.”
“그때 이 가주에게 별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나? 평소와 다른 점 말일세.”
“없었습니다. 회갑연에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신 것에 기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공료는 더 물을 것이 없는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서가 너무 없군. 이래서야 흉수가 누구인지 알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 같네.”
대다수 사람들이 동조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매장원이었다.
“영존의 시신은 어디에 있나?”
매장원의 물음에 이존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버님의 시신은 이 건물의 지하에 모셔져 있습니다.”
“영존의 시신을 볼 수 있겠나?”
“물론 가능은 합니다만‥‥‥‥”
“나는 영존의 시신에 나 있는 검흔을 보았으면 하네.”
매장원은 장내에 모여 있는 고수들 중에서도 강호에서의 명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그가 검흔에 관심을 기울이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흥미가 발동한 표정으로 이존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존휘는 별다른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고 즉시 군웅들을 안내해 본당의 지하실로 향했다.
이세적의 시신은 본당의 지하석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관(棺)은 비록 질이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한 평도 되지 않는 관 속에 누워 있는 그의 시신은 살아생전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아직 뚜껑을 덮지 않은 관 속에 누워 있는 이세적의 시신은 혈색(血色)이 전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온한 모습이어서 마치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존휘는 시신으로 다가가 시신의 한쪽 가슴을 조심스럽게 들췄다. 육십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건장한 이세적의 가슴이 드러났다.
“음‥‥”
중인들 중 누군가가 답답한 신음성을 흘렸다. 이세적의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검흔 하나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검흔의 길이는 한 뼘 정도 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리한 검에 그어진 흔적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 의외로 피가 많이 흘러나오지 않은 듯 약간의 혈흔만이 보일 뿐이었다.
매장원은 시신으로 바짝 다가가 그 검흔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내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침을 삼키는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한동안 신광을 번뜩이며 검흔을 바라보고 있던 매장원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무거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정말 무서운 검법이구나. 정말 빠르고, 날카롭고, 위험한 검법이다.”
그 음성은 가뜩이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장내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대체 어떤 검흔이기에 매장원 같은 절세의 검객으로 하여금 몇 번이나 탄식을 토해내게 한단 말인가?
매장원의 옆에서 이세적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던 공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르고 날카로운 검법이라는 건 검흔을 보니 알겠는데, 위험한 검법이라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이 검흔을 남긴 자는 단 일순간에 이 가주의 심장부위에 있는 심맥(心脈)을 정확하게 절단했소 그 솜씨가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거요”
공료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 가주의 실력으로도 흉수의 일검을 피하지 못했으니 그 점만 보아도 강호에 보기 드문 무서운 검법이라는 건 충분 짐작하고 있소”
“보통 이런 검법은 빠르고 매서운 위력만큼이나 시전하는 조건이 까다롭소. 우선은 상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되오 거리가 가깝게 되면 상대의 반격을 피하기 힘들고 너무 멀면 정확하게 자신이 노리는 부위를 격중시키기 어렵기 때문이오”
공료가 묵묵히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매장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또한 호흡에도 신경을 써야 하오 단숨에 목표 지점을 베어야 하기 때문에 발검을 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발검이 끝날 때까지 숨을 내쉬거나 들이마셔서는 안되오 완벽하게 호흡이 정지되어 있어야만 하오”
매장원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이유는 공료가 비록 강호의 이름난 고수이지만 권장을 주로 연마해서 검도의 이론에 그리 해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 일순간에 전력을 기울여 검초를 시전해야 한다는 것이오 그러니 생각해 보시오 그러한 일초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말이오”
공료는 무언가를 느낀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명적인 허점을 노출당해 자신이 오히려 위기에 빠지게 되겠구려.”
“그렇소 그래서 이런 식의 검초를 검도에서는 생사검이 라고 부르고 있소 상대가 죽든 자신이 죽든 순식간에 결판이 나기 때문이오 그러니 어찌 위험한 검법이 아니겠소?”
“음‥‥‥‥
“이 가주를 해친 흉수가 누구이든 그자는 놀라운 검법과 결단력을 지닌 자가 분명하오”
공료는 슬쩍 매장원을 쳐다보았다.
“매 대협의 실력에 비하면 어떻소?”
공료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몹시 위험한 질문이었다. 매장원은 공료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을 검에 미쳐 살아왔지만, 아직 이와 같은 빠르고 강력한 살검은 익히지 못했소 공 대협을 실망시켜 미안하오
공료는 즉시 손을 내저었다.
“아 다른 뜻은 없었소 정말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오 매 대협의 검법이 장중(莊重)하면서도 웅혼(雄魂)한 기상을 담고 있어 담로검이라고 불린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소? 기분이 언짢았다면 용서하시오”
공료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자 매장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공 대협께서 다른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다만 흉수의 검법과 내가 익힌 검법은 각기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한 말 몇 마디로 우열을 가늠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자 했을 뿐이오”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장내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중인들은 조금 전에 공료의 말이 경솔했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공료는 강호에서의 명성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 한 인물이었다. 그가 사과를 한 것도 그 대상이 매장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강염이 특유의 차갑고 금속성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매 대협께선 당금 강호에서 이런 살검을 익힐 만한 자가 누구인지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소이까?”
매장원은 그를 힐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강호는 워낙 넓고 광활한 곳이오 게다가 도처에 잠룡(潛龍)들이 숨어 있으니 그것을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그래도 이러한 검법 소유자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나타날리는 없지 않소?”
“그럴 것이오”
정염의 시선이 살피듯 매장원의 얼굴을 슬쩍 훍고 지나갔다.
“본관은 지금 이곳에 모인 군웅(群雄)들 중 매 대협보다 검도에 해박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매 대협마저 모른다고 한다면 자칫 이번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소. 매 대협께서 검흔을 보자고 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 아니었소?”
매장원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차가운 한광(寒光)이 감돌다가 사라졌다. 매장원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강염을 쳐다보더니 이내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소. 하지만 이 검흔만으로 흉수의 정체를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경솔하게 이 가주의 시신을 보자고 한 것 같소.”
강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지 않소. 매 대협께선 조금 전에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말씀하셨소. 그 점만으로도 매 대협이 시신을 살펴보신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소.”
언뜻 매장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중요한 사실이라니‥‥‥ 무얼 말하는 거요?”
“매 대협은 흉수가 이 가주와 적절한 거리를 두었다가 호흡을 멈추고 생사검을 펼쳤다고 하셨소.”
“그렇소.”
“그 말은 곧 흉수가 이 가주와 친분이 두터운 자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겠소? 상대를 믿고 전적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가주 같은 분이 흉수가 생사검을 펼치려는 것을 사전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겠지요.”
매장원은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 해도 그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세적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천하의 누가 감히 그를 단 일검에 살해할 수 있겠는가?
강염의 시선이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이존휘게로 향했다.
“문제는 이 가주의 신임을 얻고 그분을 암습한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이 공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싶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존휘에게로 향했다. 이존휘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강염을 마주보았다.
“제가 도와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강염은 특유의 무심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이존휘의 준수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건이 이렇게 된 이상 이 가주의 연공실을 출입할 수 있는 열쇠의 소지자가 자네말고 누구인가 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네.”
이존휘는 조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자에 대해서는 저도 선친께 들은 바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영존은 그런 면에서는 엄격할 정도로 치밀한 분이시니 말일세. 하지만 자네라면 그자에 대한 호기심에서라도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짐작이 틀렸나?”
이존휘의 얼굴에 한 줄기 쓴웃음이 떠올랐다.
“말씀대로 저도 그 점이 무척 궁금스러워서 나름대로 그에 대한 조사를 해본 적이 있기는 했었습니다.”
“자네의 성격에 일단 시작한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맺지 않고는 조사를 마치지 않았을 텐데.”
이존휘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강염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어깨를 으쓱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솔직하게 밝히지요. 선친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적지 않지만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신임을 얻고 있는 사람은 단지 세 명뿐입니다. 저는 그자가 그들 중 한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지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이존휘의 입으로 고정되었다. 이존휘의 입에서 나올 이름들이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임을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분위기는 금시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 세 사람이 누구인가?”
이존휘는 좀처럼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하나 결국은 세 사람의 이름을 꺼내고야 말았다.
“이세관(李世冠), 서기형(徐期炯), 하옥당(夏玉堂). 저는 이분들 중에 반드시 열쇠의 소유자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홱 변했다. 하나 대부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만큼 이존휘가 말한 사람들은 이세적과 단순한 친분 이상의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이세관은 이세적의 사촌동생 중 하나로, 이세적이 친족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이세적이 이세관의 아들인 이서명을 중용하는 것만 보아도 그에 대한 신임도가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원래 이씨세가는 친족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이세적만 해도 외아들이었으며, 이존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세적에게는 모두 세 명의 사촌동생들이 있었는데, 이세관은 어려서부터 그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특히 그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이세적을 무척 따랐었는데, 그 관계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서기형은 이세적의 장인인 서정욱의 둘째 아들로 손아래 처남이었다. 서정욱에게는 서기형 말고도 서장형(徐長炯)이라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이세적과 죽이 맞은 사람은 둘째인 서기형이었다.
이존휘의 모친이자 이세적의 아내인 서연향이 세상을 떠난 후, 서기형은 이씨세가와 서기를 잇는 가장 두터운 교량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었다. 특히 이세적은 그를 아내인 서연향만큼이나 아끼어서 자신이 직접 그에게 배필을 소개해 줄 정도였다.
이존휘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거론된 하옥당은 이세적과 오랫동안의 절친한 친우로, 교우 관계가 누구보다도 폭넓은 이세적이 서슴없이 자신의 가장 친한 벗은 하옥당이라 공언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그들 세 사람은 모두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덕분에 중인들의 시선은 그들을 연신 훑고 지나가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에게 무어라고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또한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주위의 시선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들도 자신들이 열쇠의 소유자로 지목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세관이었다. 이세관은 탐스럽게 기른 검은 수염을 한 차례 쓰다듬더니 침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비록 형님과 각별한 사이라고 하나, 아쉽게도 열쇠를 얻지는 못했네. 아마 형님께는 나보다 더 심복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일세.”
그의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겉으로 드러난 음성이나 표정에는 추호도 아쉽거나 서운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이세관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그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상시의 이세관은 쾌활하면서도 말을 잘해서 남에게 호감을 주는 달변가였던 것이다.
이세관의 뒤를 이어 사십대의 준수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중년인은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몸매가 호리호리해서 날렵하면서도 영민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바로 이존휘의 외숙부인 서기형이었다.
“나도 또한 열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오 그런 열쇠가 있다는 것조차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오”
그의 음성 속에는 무언가 억눌린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성격이 솔직하고 낙천적인 서기형은 친형보다 더욱 따랐던 이세적이 자신에게 그런 사실을 비밀로 했다는 것이 못내 서운한 모습이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 무언가에 심통난 사람처럼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다소 희화적인 것이어서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장내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중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세 번째로 지목되었던 하옥당에게로 쏠렸다. 하옥당은 육십대 초반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유난히 얼굴이 길고 눈썹이 짙어서 다소 차가워 보였다. 하옥당은 젊었을 때 한 쌍의 판관필(判官筆)로 관중(關中) 일대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날렸었고, 나이를 먹어서는 장안에 거처를 정하고 강호의 명숙으로서 당당한 위세를 떨친 인물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이세적과 우연히 비무(比武)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고, 장안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우애를 쌓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이세적의 가장 친한 벗이 되었다. 하옥당은 강호의 풍상을 오랫동안 겪어 온 인물답게 절친한 친우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에서 벗어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부 또한 열쇠의 주인은 아니네. 다만, 예전에 얼핏 춘보(春輔)에게서 그와 비슷한 사람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뿐이네”
춘보는 이세적의 자(字)로, 이세적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하옥당을 비롯한 극히 제한된 몇 사람뿐이었다. 중인들은 막 실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의 마지막 말에 귀를 종긋 세우는 모습이었다.
“선친께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이존휘의 물음에 하옥당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 날인가 춘보의 얼굴 표정이 썩 밝아 보이지 않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그때 춘보는 입 안의 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며 씁쓸하게 웃었네.”
“입 안의 가시 같은 존재라니요?”
“가만 두자니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고 빼버리자니 어떻게 빼야 할지 몰라 난감한 존재 말일세. 그래서 내가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묻자. 춘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지금 당장 가시를 뺄 수 없다면 더 깊은 곳으로 영영 들어가 버리기 전에 자기가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두겠다고 하더군.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는데, 자네에게 열쇠에 대한 말을 듣고서야 춘보의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네.”
이존휘는 다소 긴가민가하는 모습이었다.
“하숙부께선 선친의 그 말씀이 열쇠를 가진 자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혹시 춘보에게 그런 사람에 대해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나?”
“없습니다. 그래서 당혹스럽습니다. 선친께서 그런 문제로 고민하신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이 불효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춘보가 자네에게 말하지 않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춘보가 자네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행여 서운한 생각일랑 접어 두도록 하게.”
이존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얼굴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아마도 춘보는 자신 혼자 그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판단했을 것일세 하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혼자 힘으로 그자를 제어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하옥당의 의견은 상당히 일리가 있어서 많은 중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하나 그의 말만으로 흉수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열쇠의 주인이 단순히 이세적의 신임을 얻은 자일 뿐 아니라 이세적으로 하여금 골머리를 썩게 했던 우환 거리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심뿐이었다.
결국 강염은 이번 사건을 ‘이세적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자에 의한 암습’으로 일차 결론을 내리고 계속 사건을 조사할 것을 공언했다. 군웅들은 무언지 모를 무거운 기운에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암울함을 가슴 가득 안은 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중인들이 모두 돌아간 후 둘만 남게 되자 강염은 이존휘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 그들 세 사람 중에서 흉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의외로 이존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누구도 흉수가 될 수 없습니다.”
강염은 침착한 눈으로 이존휘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들은 물론 아버님의 신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버님의 가슴에 나 있는 검흔을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설사 그들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난 하 숙부라 할지라도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너는 총수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의심이 가는 자도 없단 말이냐?”
강염의 질문에 이존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다가 딱 부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이번에 본가에 온 사람들 중 단 일검으로 아버님의 가슴에 검흔을 남길 수 있을 정도의 빠르고 사나운 검법을 익힌 자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아버님이 방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자의 검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강염은 의외인 듯 얼굴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런 자가 있다면 왜 조금 전에 밝히지 않았느냐?”
“그자가 어떻게 연공실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자가 흉수가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이존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자 외에는 다른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자는 본가에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버님을 살해할 동기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자가 대체 무슨 수로 연공실에 들어갔느냐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강염은 이존휘가 이미 범인에 대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 침묵하다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자가 누구냐?”
이존휘는 천천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섬뜩한 광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무서운 눈으로 이존휘는 허공의 한 점을 한참 동안이나 쏘아보더니 이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나직한 음성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