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5화
제 160장 서안삼걸 (西安三傑)
잠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중인들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진산월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 한 가지 점만 빼고는 말이지”
중인들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고 음성 또한 침착했다.
‘이세적은 대체 누가 살해한 것인가 하는 점 말이오”
동중산과 이동정의 얼굴에 거의 동시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이제껏 열심히 이존휘의 심리 상태와 현재의 상황을 세밀히 분석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으나 막상 가장 중요한 요소 한 가지를 빼먹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세적을 죽인 진정한 흉수가 남아 있는 한 사태는 언제 또다시 돌변할지 몰랐다. 동중산과 이동정의 분석은 이존휘가 진산월을 이세적의 흉수로 생각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이존휘가 뒤늦게나마 흉수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치명적인 오판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순한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착오였다.
이동정은 자신의 지략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기에 속으로 적지 않게 충격을 느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진산월보다 섬세하고 예리한 두뇌를 지녔다고 믿고 있었지만, 대국 전체를 보는 안목에서는 오히려 뒤처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동중산은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겪었기에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진산월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그를 보조해 주는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동정이 일시지간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우두커니 있을 때 그는 지속적으로 머리를 굴릴 수 있었다.
그는 곧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가 생각하기에 이세적을 죽인 흉수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말해 보거라.”
“첫째로 이세적과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자의 소행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비록 이세적의 죽음 자체는 놀라운 일이지만 대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라고 봅니다. 또한 흉수의 정체를 알아내기도 가장 어려울 겁니다.”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동중산의 음성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의 귀에는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똑똑하게 들렸다.
“둘째로 이세적의 죽음으로 무언가 이득을 보는 자의 짓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흉수는 이세적과 친분이 있는 자일 확률이 높은데, 어느 정도의 혼란은 있겠지만 대국을 뒤흔들 만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세적을 살해한 경우인데, 흉수는 어느 특정 세력에 속한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때에도 그자가 이존휘와 적대적인 세력에서 보낸 경우와 우호적인 측에서 보낸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어느 경우이든 서안 일대가 풍운에 휩싸이고 대국 전체가 크게 요동을 치게 될 거라고 봅니다.”
“이존휘와 적대적인 세력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거나?”
“우선은 취미사 혈겁에 연루된 문파를 꼽을 수 있겠지요. 소림이나 화산, 개방…… 혹은 천봉궁일 수도 있고……”
무거운 표정으로 동중산의 말을 듣고 있던 이동정이 눈을 살짝 치켜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요?”
동중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강호의 일이란 게 워낙 예측하기 힘드니 어떠한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오.”
이동정은 무어라고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강호가 얼마나 귀계(鬼計)가 난무하고 음험한 곳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동정으로서는 무조건 동중산의 말을 부인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천봉궁에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확신은 있지만, 다른 문파까지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 문파에 배반자가 있다는 증거도 있지 않은가?
동중산은 이동정이 아무 말이 없자 진산월을 쳐다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니면 본파를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건 이존휘는 반드시 피의 보복을 하려고 할 것이며, 서안 전체가 혈풍(血風)에 휩싸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중인들은 공연히 가슴이 섬뜩한지 얼굴색이 모두 굳어졌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이 다시 물었다.
“우호적인 세력일 경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동중산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이존휘가 상당한 수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의 나이를 볼 때 한 조직의 우두머리라고 하기에는 어려우니, 그가 조직 내에 독자적인 세력을 쌓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조직 내에서 그를 견제하는 무리들이 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이세적이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조직 내의 알력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일이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아마도 이존휘는 부친의 복수와 자신이 맡은 임무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며, 그의 선택 여하에 따라 일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느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想定)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잠시 후에 내가 이존휘를 만나러 가면 너는 지 대협과 함께 어제 뇌옥에서 구출한 노인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본산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와 일방만이라면 최악의 경우 몸을 빼는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파의 장문인 입에서 몸을 뺀다는 말이 쉽사리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어이없어 하거나 한숨을 내쉬고 말았을 것이나, 이동정은 오히려 의아한 듯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이존휘를 만나기로 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그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행동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거요”
이동정은 진산월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효과적이지요 그런데 뇌옥에서 구한 노인이라면‥‥‥‥“
옆에서 듣고 있던 동중산이 정말 어지간히도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진산월 대신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 어젯밤에 이씨세가의 후원에 있는 뇌옥에서 지대협을 구출할 때 함께 구한 노인이오. 아직 제대로 의식을 찾지 못해서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요.”
이동정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씨세가의 후원에 갇혀 있었다면 필시 범상한 인물은 아닐 텐데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말해 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소. 의식이 없으니 이름을 물어볼 수도 없고, 행색으로 보아 상당히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아볼 방법이 없었소.”
“내가 봐도 필시 대단한 인물이겠소.”
동중산은 발이 넓은 이동정이라면 혹시 그 노인을 알아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진산월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산월은 그의 의중을 짐작했는지 승락을 했다.
“따라오시오. 내가 안내하리다.”
동중산이 이동정을 데리고 내실 쪽으로 들어가자 낙일방이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 호기심 많고 말도 많은 사람이군요. 대체 누굽니까?”
진산월은 동중산에게서 그에 대한 언질을 들었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강호에서 호반유객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지식이 방대하고 견문이 넓어서 모두들 만나고 싶어하지.”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는 번신봉황 이북해의 유일한 동생이다.”
낙일방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아무리 견문이 얕은 그라도 명금 강호의 최정상을 달리는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을 모를 리는 없었다. 더구나 이북해는 무림구봉 중에서도 행적이 신비하고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해서 강호 제일의 신비인(神秘人)이라고까지 불리는 일대 괴인(一代怪人)이 아닌가?
“정말 굉장한 형을 두었군요. 그래서 덩달아 이름이 알려졌나 보군요?”
낙일방은 끝까지 이동정이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의 준수한 얼굴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강호에서 행동하려면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이 어떤 부류들인지 아느냐?”
낙일방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악행(惡行)을 일삼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 아닙니까?”
“그런 자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 주의해야 할 자들이 아니다.”
“그러면‥‥ 아녀자들을 괴롭히는 채화음적(採花淫賊)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녹림도(綠林道)들‥‥‥‥”
“그들도 또한 제거 대상일 뿐이다.”
낙일방은 조금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체를 숨기고 있는 기인(奇人)‥‥‥‥”
“네가 진정으로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자들은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에서는 칼을 품고 있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이다. 그런 자들은 맹독을 가진 독사보다도 더욱 무섭지.”
“소리장도(笑裏臟刀)의 인물들 말입니까?”
“그렇다. 특히 그런 부류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좋아서 자칫 방심했다가는 그들의 노림수에 걸려들고 만다. 아무리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그런 자들에게 걸렸다가는 호된 꼴을 당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목숨마저 위태롭게 된다.”
낙일방도 이제는 진산월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진산월의 뼈저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교훈이 아닌가? 지금도 진산월의 왼쪽 뺨에 나 있는 칼자국은 당시의 경험이 남긴 흔적이었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왼쪽 뺨을 힐끔 쳐다보다가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자도 마음속에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인물이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직 모른다. 하지만 대체로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줄 안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충동을 이기는 사람은 남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른 어떤 살수보다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흉기가 되고 만다. 그리고 충동을 이기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법이지.”
낙일방은 문득 과거에 진산월을 이용해서 위험에 빠뜨렸던 인물이 이북해의 아들인 이정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동정은 이북해의 동생이 아닌가? 같은 혈연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면 성격이나 행동방식도 비슷할 게 뻔했다. 낙일방은 가뜩이나 이동정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진산월의 말을 듣고 나니 그를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때 내실로 갔던 이동정이 동중산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이동정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 장면을 미처 보지 못했으나, 눈치가 빠른 동중산은 자신들이 없는 사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다. 하나 그 일이 어떤 것인지는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이동정을 바라보았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겠소?”
이동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심지어 눈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마음속으로 커다란 격동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동정같이 심계가 깊고 행동이 침착한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 격동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동정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는 혹시 서안삼걸(西安三脚)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진산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듣지 못했소”
이동정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겁니다. 그 이름은 벌써 삼십 년 전에 알려진 것이니 말입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으니 당대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지일환이 짧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서안삼걸이라면‥‥‥ 혹시 그 서안의 삼대가문(三大家門)의 후계자들이라는 ‥‥‥‥”
“그렇소. 예전에 서안의 삼대가문인 강가(江家), 이가(李家), 공가(孔家)의 장손(長孫) 세 사람을 당시 사람들이 서안삼걸이라고 불렀소. 그때만 해도 그들 세 가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가세(家勢)가 막강해서 서안 일대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소. 당연히 그들 가문의 후계자들 세 사람이 함께 모여 다녔으니 가히 소황제(小皇帝)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었지.”
지일환도 조금씩 기억이 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때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서안뿐 아니라 강북무림에서 그들은 모든 소년들의 우상(偶像)과도 같은 존재들이었소. 그들 세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가면 모두들 멀리서 흠모의 눈길로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는 했었지. 정말 대단한 인물들이었는데‥‥‥‥”
지일환의 음성이 점차로 흐려졌다.
“그럼 그 노인이‥‥‥‥”
“그렇소. 그 노인이 서안삼걸의 첫째인 강일산(江一山)이오.”
지일환은 입을 딱 벌렸다.
“말소사, 그 노인이 강일산이라고?”
지일환은 자신이 뇌옥에서 보았던 노인의 흉터 가득하고 초췌하기 그지없는 몰골을 떠올리고는 아연실색한 얼굴이 되었다.
강일산은 한때 옥정랑(玉情郞)이라고까지 불리던 절세의 미남자였다. 그는 인물됨이 준수하고 기상이 뛰어나서 서안삼걸 중에서도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꼽고 있었다. 지일환은 아무리 머릿속 기억을 끄집어 보아도 어렸을 적 자신이 먼발치에서 보았던 서안삼걸의 옥정랑과 뇌옥의 노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동정은 넋이 나간 듯한 지일환의 얼굴을 한차례 보더니 다시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원래 강일산은 내 형님과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었소. 그런데 이십여 년 전에 그가 갑자기 실종되어 형님이 무척 의아하게 생각하셨소. 형님은 그의 행적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알지 못했는데, 오늘 이곳에서 내가 그를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오.”
당시 강일산의 의문스런 실종은 서안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 서안삼걸은 젊은 날의 치기(稚氣) 어린 모습을 벗고 조금씩 문파의 후계자로 틀을 잡아 갈 시기였는데, 강일산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강씨 가문이 송두리째 뒤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강씨 가문은 모든 가문의 식솔들을 동원하여 강일산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그 위로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어 불과 사오 년 만에 거의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서안삼걸이란 이름이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잊혀지게 된 것도 강일산의 실종 이후 그 이름 자체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었다.
“강일산을 그동안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얼굴이 너무 변해 버려 나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소. 그런데 그가 신음처럼 ‘일비야, 미안하다‥‥‥‥’라는 말을 내뱉는다는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한참 동안이나 살펴본 끝에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소.”
진산월이 급히 물었다.
“그럼 그가 말한 ‘일비’라는 인물이 정녕 강일비란 말이오?”
이동정은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진 장문인. 귀파의 전대 고수였던 운중안 강일비는 바로 옥정랑 강일산의 친동생입니다.”
“음‥‥‥”
“강일산이 실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일비 또한 종남파를 떠나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때 이씨세가에 필적(匹適)할 정도로 강성했던 강씨 가문이 급격하게 쇠락한 것도 가문을 이끌어 나가야 할 두 형제가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서안삼걸의 다른 두 사람은 누구요?”
“둘째는 이세적입니다. 그는 당시 이씨세가의 유일한 적통(嫡統) 후계자였지요.”
오래전에 실종되었던 강일산이 의제(義弟)였던 이세적의 집안 후원에 있는 뇌옥에서 초라한 몰골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이세적은 무슨 이유로 자신의 의형을 수십 년 동안이나 뇌옥에 가두어 놓은 것일까? 이세적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강일산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리고 강일산과 강일비의 실종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숱한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어느 것 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광을 번득이며 이동정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서안삼걸의 또 한 사람은‥‥‥‥”
“창룡표국의 국주인 공료입니다.”
이동정의 음성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진지하고 무거웠다.
“서안삼걸 중에서도 이세적과 공료는 유달리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니 강일산이 지금까지 이씨세가의 뇌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공료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공료가 지금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그도 이번 일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
“이세적을 죽인 흉수는 이세적이 연공실의 열쇠를 맡길 정도로 믿고 있는 자임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이씨세가와 친분이 두터운 인물들만을 의심했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이세적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사촌동생인 이세관도, 매제인 서기형도, 오랜 친우인 하옥당도 아닌 바로 공료인 것 같습니다.”
주위가 갑자기 깊은 정적(靜寂)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들어왔기 때문에 이동정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중인들은 서로 다른 상념에 잠겨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을 깬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그 노인이 강일산이라면 더더욱 본파로 안전하게 모셔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군. 아무래도 이번에는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소.”
이동정은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십시오. 책임지고 강 노인을 종남파로 모셔가겠습니다.”
“아니, 그 일은 중산이 할 거요. 당신에게는 다른 부탁을 하고 싶소.”
이동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일이라면……”
“몇 가지 힘을 써 주어야 할 것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