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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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6화


제 161장 묵령지비 (墨靈之秘)

진산월이 낙일방을 대동하고 숙소를 나서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호원무사들은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은 설마 자신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종남파의 장문인이 직접 나서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일파의 장문인이라면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출입을 막고 있는 상황에서 직접 나섰다가 헛걸음을 하게 된다면 장문인 개인뿐 아니라 문파 전체의 위신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옆구리에 한 자루 검을 매단 채 담담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낙일방은 그의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패기무쌍한 기운이 무럭무럭 흘러나오고 있어 이번에도 그들이 막아선다면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라는 무언(無言)의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호원무사들은 순간적으로 망설였으나, 이씨세가의 녹(祿)을 먹고 있는 이상 상부의 지시를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진산월의 앞을 막아서며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잠시만 걸음을 멈춰 주십시오.”

낙일방의 눈에서 횃불 같은 광망이 이글거렸다. 아마 진산월이 오른손을 슬쩍 들어 제지하지 않았다면 당장 앞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을 것이다. 일개 호원무사가 한 문파의 장문인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로 문파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원무사들도 그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자신들도 모르게 병기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진산월은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호원무사들을 둘러보더니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우두머리 무사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중압감이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것이다. 그는 감히 진산월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진 장문인.”

그가 어찌 현재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신화(神話)의 인물을 모르겠는가?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이 공자를 만나고 싶소. 안내하시오.”

우두머리 무사는 뜻밖의 말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무의식적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진산월의 투명할 정도로 맑으면서도 차가운 눈을 보자 안색이 순간적으로 핼쑥하게 굳어졌다.

마치 전신이 차가운 빙굴(氷窟) 속으로 들어간 듯한 오싹한 기분이 느껴졌던 것이다.

우두머리 무사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 제가 이 공자님께 말씀을 전해 드릴 테니 숙소로 가서 기다리시는 것이‥‥‥‥”

“모처럼 밖으로 나왔더니 봄 날씨가 좋군. 나는 이 공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갈 테니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하도록 하시오.”

진산월이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의 앞에 서 있던 우두머리 무사의 몸이 옆으로 주르르 밀려났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우두머리 무사를 묶어 끌어당긴 줄로 알았을 것이다.

우두머리 무사는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한줄기 무형(無形)의 경력이 자신의 몸을 밀어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맙소사‥‥ 전설로만 내려오는 줄 알았던 무형경기(無形勁氣)를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그는 감히 막아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진산월과 낙일방은 유유히 그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두머리 무사는 몇 차례 표정이 변했다가 자신의 옆에 있는 다른 무사에게 나직하게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그의 말을 들은 무사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개 호원무사치고는 제법 뛰어난 신법(身法)을 전개해 쏜살같이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우두머리 무사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진산월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우두머리 무사가 의외로 선뜻 나서서 안내해 주겠다고 하자 낙일방이 의외인 듯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어느덧 미시(未時)를 넘어 유시(酉時)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주위는 조용했고 날씨는 쾌청했으며,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했다.

봄날의 오후다운 한적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후원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바로 전날 밤에 세가의 주인이 살해당한 것치고는 지나치리만치 평온한 광경이었다.

진산월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며 걷고 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고색창연한 용영검만 아니라면 영락없이 봄날을 만끽하려는 상춘객(賞春客)의 모습이었다.

“이쪽입니다.”

우두머리 무사는 그들을 후원에서 제법 떨어진 월동문 근처로 안내했다.

간혹 그들을 스쳐 가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우두머리 무사의 눈짓을 받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사라지는 광경이 몇 번 눈에 띄었다.

월동문은 장정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갈 정도의 넓이였는데, 붉은색 기와를 씌운 일 장 높이의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어 제법 단아한 운치를 풍기고 있었다.

월동문에 가까이 갈수록 사위(四圍)는 더욱 고요해졌다.

하나 무언지 모르게 분위기는 조금 전과는 달리 팽팽해져 있었다.

우두머리 무사는 월동문 앞에 멈춰 서더니 월동문을 손으로 두 차례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차갑고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냐?”

“갈 총관님 밑에 있는 위수독(韋守獨)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냐?”

자신을 위수독이라고 밝힌 우두머리 무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종남파의 장문인께서 이 공자님을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월동문 안의 인영은 이미 위수독이 미리 보낸 무사에게서 소식을 들었는지 별로 당황해 하지 않고 여전히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 공자께선 지금 장례 절차를 준비하라 바쁘시니 내일 다시 오시라고 해라.”

듣고 있던 낙일방의 쌍심지가 돋았다.

‘이것들이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직접 찾아왔으면 문을 활짝 열고 버선발로 달려와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내일 다시 오라고 소리만 내지르고 있으니 낙일방이 아니라 누구라 해도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기 어려울 것이다.

황당해하기는 위수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 수하 한 명을 보내 진산월이 이존휘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을 말했는데 기껏 찾아온 사람에게 내일 오라고 하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었다. 아무리 장례 준비로 바쁘다고 해도 일파의 장문인이 직접 찾아왔는데 모습도 보이지 않고 돌려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지‥‥ 진 장문인께서 지금 이곳에 와 계십니다.”

그는 혹시라도 월동문 안의 사람이 상황을 잘 모르고 있을까 봐 한마디 말을 덧붙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다. 그러니 네가 그분이 서운하지 않도록 잘 말씀드리도록 해라.”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된 위수독은 난감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런데 웬걸? 의당 불같이 화를 내고 있을 줄 알았던 진산월은 처음과 전혀 다름없는 담담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월동문과 그것을 둘러싼 담벼락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감탄하는 것이었다.

“사소한 곳에서도 명가(名家)의 솜씨가 느껴지는군. 과연 전통(傳統)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로군 그래.”

위수독은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제삼자(第三者)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지독한 모욕을 당한 사람이 어찌 이리도 태연자약하단 말인가? 더구나 그는 한 문파의 존주(尊主)일 뿐 아니라 당대 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절세의 고수가 아닌가? 시정잡배라 해도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오히려 주위의 경관을 칭송하고 있으니 위수독은 도저히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낙일방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거친 숨을 몇 차례 몰아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산월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모처럼 나온 김에 산책이나 좀 더 즐기고 들어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장문사형.”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이어 그는 아직도 한쪽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위수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까지 안내해 주어서 고맙소.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위수독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진 장문인.”

“당신이 죄송할 게 뭐 있소? 미리 통보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온 내 불찰이지.”

이어 그는 낙일방과 함께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위수독이 멀거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월동문 안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남들이 하도 신검무적이 모처럼 나타난 희대의 검객이라고 하기에 어떤 자인가 궁금했는데 별로 대단할 것도 없군 그래. 내 말 한마디에 꼬리를 만 개처럼 고분고분 들어가다니 말이야.”

걸음을 걷던 낙일방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오른손을 뒤로 내질렀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군.”

검은 장갑을 낀 그의 주먹이 살짝 쥐어졌다가 내뻗어진 것 같았는데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꽈릉!

나직한 굉음과 함께 한 줄기 노도 같은 권경(拳勁)이 뿜어 나와 월동문을 강타해 버린 것이다.

콰앙!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제법 커다란 월동문이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부서진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고요하기 그지없던 주위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머리가 솟아올라 왔다. 하나 그들은 부서진 월동문과 진산월 일행을 보더니 다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 버렸다.

월동문 뒤에서 냉소를 날렸던 사람은 이 가공할 광경에 기가 질렸는지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낙일방은 월동문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진산월을 힐끔거리더니 진산월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멋적은 웃음을 날렸다.

“아무리 전통 있는 명문가라도 버릇없는 개 몇 마리는 있나 봅니다.”

진산월은 그를 꾸짖지 않았다. 다만 짤막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들이 부서진 문을 변상해 달라고 하면 네가 물어 주도록 해라.”

낙일방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혀를 날름거렸다. 쑥스럽거나 기분이 좋을 때 하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하하‥‥‥ 그거야 제가 내지요. 다 낡아빠진 문이 얼마나 비싸려고요?“

“이씨세가의 모든 문은 석년의 명장(名匠)인 사공력(司空歷)이 직접 만든 것이다.”

그 말에 진산월에게 야단맞지 않아서 속으로 희희낙락하던 낙일방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사공력은 목수(木手)로는 가히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장인(匠人)으로, 신수(神手)라고까지 불려졌던 인물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아무리 작고 볼품없는 것이라도 부르는 게 값이었다.

월동문 정도의 크기라면 아마도 낙일방이 및 년 간 벌어도 갚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거금일 게 분명했다. 낙일망은 그들이 정말 월동문 값을 물어내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저 미친개 한마리가 있길래 쫓아냈을 뿐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믿든 말든 그건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길래 누가 사람 성질을 건드리래?

만일 내게 찾아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있으면 단단히 혼을 내주겠다.’

그렇게 마음먹자 오히려 은근히 누가 시비를 걸어 오기를 기대하는 심정이 되었다.

진산월은 낙일방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가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는 제법 잘 참더구나.”

낙일방은 시비를 걸어오는 이씨세가의 고수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제 응 사형이 화를 억눌러 참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앞으로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좀 더 자중(自重)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잘 생각했다. 네가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려면 필시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특히 권법이나 장공(掌功) 등 맨손을 장기로 하는 고수들은 절대로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흥분하면 몸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느려지고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낙일방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 채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내가 왜 항상 그 묵령갑을 끼고 있으라고 지시한 줄 아느냐?”

낙일방도 그 점을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라 재빨리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손에 더 익숙해지라는 뜻이 아닙니까?”

“묵령갑에는 특이한 효능이 있다. 너도 알고 있겠지?”

“예. 묵령갑을 낀 상태에서 천단신공을 운용하면 묵룡기라는 강기가 형성됩니다.

저도 일전의 싸움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묵령갑에 있는 특이한 성분 때문이다.

네가 그 성분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굳이 묵령갑을 끼지 않고도 묵룡기를 자유자재로 발출할 수 있다.”

낙일방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

당년에 우일기 조사께서 바로 그런 경지에 올라 계셨다.

당시 그분께서 양손을 휘두르면 무시무시한 묵룡기가 사방으로 흘러나와 어느 누구도 감히 정면으로 받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낙일방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한 빛이 떠올랐다.

어찌 그렇게 않겠는가? 묵령갑에서 발출되는 묵룡기는 신편 갈 태독 같은 절정고수도 완벽하게 피하지 못할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반드시 묵령갑을 끼고 천단신공을 운용해야만 묵룡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용상에 번거로움이 많은 편이었다.

더구나 묵령갑을 착용하는 것이 꼭 병기의 이로움을 보는 것 같아 낙일방은 마음 한구석에 찝찝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묵령갑을 끼지 않고도 묵룡기를 마음대로 발출할 수 있다면 사용상의 불편함도 없을뿐더러 진실한 본신(本身)의 실력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겠는가?

낙일방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어떻게 하면 그 성분을 체내에 흡수할 수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다. 묵령갑을 낀 채로 수시로 천단신공의 흡자결(吸字訣)을 운용해라.

그러면 어느 순간 묵령갑 없이도 묵룡기를 발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무나 간단한 방법이라 낙일방은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다.”

낙일방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이 손에 끼고 있는 묵령갑을 내려다보더니 천단신공을 끌어올려 흡자결을 운용했다.

묵령갑이 손에 찰싹 달라붙어 착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그뿐이었다.

무언가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석년에 우일기 조사께서는 삼십 년 간의 노력 끝에 그런 경지에 오르셨다.”

그 말에 낙일방은 하마터면 실망에 가득 찬 탄식을 토해낼 뻔했다.

다행히 그도 이제는 아무 일에나 쉽게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 애송이가 아닌지라 재빨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진산월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 나이가 이제 겨우 이십이니 열심히 노력하면 오십이 되기 전에 저도 절정고수가 될 수 있겠군요.”

진산월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짤막한 말을 덧붙였다.

“당시 우일기 조사께서는 아침저녁으로 한 시진씩 묵령갑을 끼고 천단신공을 연마하셨다.”

“그렇다면……”

낙일방의 눈에 다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저는 하루에 다섯 시진, 아니 여섯 시진씩 천단신공을 운용하겠습니다.

그러면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낙일방은 무언가를 느낀 듯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겠군요. 그래 봐야 아무리 빨라도 십 년은 걸릴 테니 말입니다.”

이번에도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하나 낙일방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진산월이 자신에게 늘 묵령갑을 끼고 있으라고 한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낙일장은 너무 늦은 나이에 제대로 된 무공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무공 수준도 대단한 것이지만, 절정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미흡한 면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낙일방의 내공은 남에게서 격체전력(隔體傳力)으로 전해 받은 것이어서 순수하게 혼자 힘으로 내공을 쌓은 사람에 비해 정순(精純)하지 못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안 되며,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장문사형께서는 하루에 몇 시진이 아니라 하루 종일 천단신공을 운용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빨리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니까.”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난 반드시 해낼 것이다. 기필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묵룡기를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그래야 장문사형을 도와 본파를 군림천하시키고야 말 것이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이 집념의 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음속으로 나직하게 탄식했다.

‘네가 너에게 몹쓸 짓을 시키는구나. 하지만 이 길만이 너를 위하고 본파를 위하는 길이다.’

진산월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운 노을이 됐다. 노을에 비친 진산월의 얼굴은 노을 색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고 그가 저 묵령갑을 벗는 날, 강호무림은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이며 천하제일장(天下第一掌)이셨던 소선 우일기의 재림(再臨)을 보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신형이 멀어져 갔을 때, 부서진 월동문 옆의 담벼락 뒤에서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짙은 남삼을 입은 사십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남삼중년인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월동문 뒤에서 진산월을 비웃는 웃음을 날렸던 인물로, 일수단혼(一手斷魂) 북리궁(北里宮)이라 했다. 태행산 일대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태행삼존의 첫째로, 장력(掌力)에 관한 한 보기 드문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어린놈의 권법이 대단하군. 저놈이 옥면신권이란 놈인가?”

그는 가벼운 주먹질만으로 두꺼운 월동문을 박살내 버린 낙일방의 무공에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낙일방은 외모가 워낙 준수하고 인상이 순후해 보여서 누구도 그가 불같은 성질에 막강한 공력을 지닌 고수라는 것을 쉽게 믿지 않았다.

북리궁 또한 그들의 반응을 떠보려고 은근히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썼다가 하마터면 의외의 낭패를 당할 뻔했다. 무심코 월동문 뒤에 서 있다가 월동문이 박살날 때 간신히 몸을 피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쌓여진 부서진 파편을 탁탁 털어내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검무적에 옥면신권이라‥‥‥ 정말 쉽지 않은 놈들이군.”

그때 하나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다가왔다. 북리궁은 고개를 돌렸다가 그 인영을 보고는 정색을 했다.

“삼공자.”

나타난 사람은 바로 이존휘였다. 이존휘는 갑작스런 폭음에 놀라 달려왔다가 월동문이 부서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이오?”

북리궁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조금 전의 일을 말해 주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존휘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경솔한 짓을 했소. 아직은 그들을 건드릴 때가 아니오.”

“나도 지금 당장 그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 단지 그 젊은 놈의 성질머리가 그토록 불같은 줄을 미처 몰랐을 뿐이오.”

“옥면신권은 신검무적의 사제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요. 종남혈사에서 초가보의 공봉인 신편 갈태독과 현음상인이 모두 그에게 낭패를 당했소. 그의 외모만 보고 그를 경시해서는 절대로 안 되오.”

북리궁은 이존휘의 거듭된 지적에 약간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었다.

“동생들의 죽음이 생각나서 내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소. 앞으로는 조심하리다.”

이존휘는 자신이 북리궁을 너무 몰아세웠다고 생각했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만 참으면 되오. 내일이면 모든 게 결판이 날 테니까 말이오.”

북리궁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내일이란 말이오?”

“그렇소. 내일이 되면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소. 그리고 저 두 사람의 운명(遲命)도 결정이 날 거요. 물론 어떤 최후를 맞게 될지는 이미 정해졌지만 말이오.”

“흐흐…. 삼공자의 신기묘산(神機妙算)은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난다 해도 당해낼 수 없을 거요. 나는 삼공자만 믿고 있겠소.”

이존휘는 그의 아부 섞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에 대한 감시는 철회하도록 하시오. 그가 오늘 나를 찾아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간 이상 굳이 감시하지 않아도 이대로 종남산으로 갈 리는 없을 테니 말이오.”

“알겠소.”

이존휘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내일‥‥‥‥”

그는 아무도 알아듣기 어려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이 바로 신검무적의 제삿날이고 봉황인이 그 꼬리를 드러내는 날이 될 것이다.”

진산월과 낙일방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뜻밖의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가?”

짙은 흑의를 입은 날카로운 용모의 미남자가 대청 안에 혼자 동 그마니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산월을 맞았다. 진산월은 흑의청년을 보고 약간 놀랐다. 그는 다름아닌 진산월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마검 조일평이었던 것이다. 조일평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투덜거렸다.

“종남파 고수들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치 달려왔더니 팅 비어 있더군. 그래도 혹시나 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만 가려고 했는데, 용케도 때맞춰 들어오는군 그래.”

진산월과 낙일방이 이존휘를 만나러 나간 사이 동중산은 지일환과 함께 강일산을 운반하여 종남파로 떠났던 것이다. 이곳을 감시하던 무리들의 이목이 온통 진산월에게 집중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산월은 말없이 대청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조일평은 그를 따라서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빙글 웃었다.

“어디를 갔다 왔나? 긷혀 있었다는 말은 모두 헛소문이었나? 본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이존휘를 찾아갔었네.”

“오라! 가서 담판을 지은 게로군.”

“그는 만나지도 못했네.”

조일평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초상집에서 상주가 자리를 안 지키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진산월은 짤막하게 이존휘를 만나러 갔다가 내일 오라는 말만 들었다며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듣고 있던 조일평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순순히 돌아왔단 말인가?”

“모욕은 무슨. 원래 모욕이란 당하는 사람이 느끼지 않으면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는 걸세.”

조일평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멀거니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따가워서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바라보나?”

조일평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진산월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 아니면 얼굴이 가장 두껍거나, 아마도 후자(後者)겠지?”

“그말을 하려고 나를 찾아왔나?”

조일평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자네는 달라졌어. 예전에도 얼굴이 두껍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확실히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건 자신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그가 자네를 모욕했다는 건 분명한 일 아닌가?”

“예전의 자네라면 속으로 잔뜩 끓으면서도 겉으로는 웃어 넘겼겠지만, 지금은 자네 말대로 아예 모욕감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그건 아마도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별거 아닐세. 요새 자네의 소문이 하도 대단해서 자네가 내가 알던 그 사람인가 가끔씩 헷갈릴 때가 있다니까. 그런데 종남파는 장문인에게 손님이 찾아왔는데 차 한 잔 내오지 않는단 말인가?”

때마침 낙일방이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약간의 음식과 술병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낙일방은 조일평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 대협.”

조일평은 진산월의 하나뿐인 친구이기 때문에 낙일방도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조일평은 그를 보더니 차가운 얼굴이 몰라보도록 환해졌다.

“이 녀석, 신수가 훤해졌구나. 요즘 젊은 층에서는 주먹으로 당할 자가 없다며?”

낙일방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에게서 칭찬을 듣자 쑥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조 대협 앞에서 제가 어찌 고수 행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허헛… 말하는 솜씨도 많이 늘었구나. 이제는 제법 강호의 이름난 고수 풍모가 나는걸? 그런데 그놈의 대협 소리는 집어치워라.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내가 불편하디니까.”

조일평이 강권했으나 낙일방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게 형님은 사형들만으로 충분합니다.” 조일평은 새삼스런 눈으로 낙일방을 이모저모 뜯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전에 보았을 때는 아직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홍안(紅顔)의 소년이었는데, 어느덧 너도 남자 되었구나. 진정한 남자라면 자신의 형님은 자신이 택하는 법이지.”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너무 옛날 생각만 하고 너를 어리게 보았다. 이제는 엄연히 강호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무림의 고수인데 말이야.”

조일평은 예전부터 얼굴이 준수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낙일방을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이제 삼 년 만에 다시 만난 낙일방의 부쩍 성장한 모습에 조일평은 대견함과 함께 어떤 아쉬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한차례 고개를 내젓고는 낙일방이 들고 온 요리들을 바라보았다.

“근데 웬 음식이냐? 이씨세가에서 주었을 리는 없고, 이곳에는 여자도 없으니 직접 장만했을 리도 없는데…”

낙일방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실 이 요리들은 조금 전에 이동정이 가져온 것들 중 남은 음식들이었다. 낙일방이 아무리 강호의 물을 먹고 전보다 많이 의젓해졌다고 해도 자신의 입으로 혼수 대용으로 들어온 음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진산월이 그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었다.

“우리가 이씨세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천봉궁에서 보내온 것일세.”

“그렇군. 그 콧대 높은 여인네들이 이런 음식도 만들었단 말이지?”

조일평은 음식을 몇 점 집어먹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들지 그러나?”

“아니, 됐네. 더 적으면 내가 누구 대신 장가를 가야 할지도 모르니 말일세.”

조일평의 말에 낙일방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제서야 낙일방은 조일평이 이미 사정을 알면서도 자신을 놀리기 위해 시치미를 뗐던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조일평은 낙일방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어째서 너 같은 천하의 숙맥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낙일방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나 그는 조일평에게 감히 그녀가 누구냐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듣든 그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지라 별반 표정 없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천봉궁의 속사정을 제법 자세히 알고 있나 보군.”

“그런 건 아닐세. 다만 요새 그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몇 가지 귀동냥을 했을 뿐일세.”

“이곳에는 언제 왔나?”

“어젯밤 너무 늦게 도착해서 그들의 숙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지.” 진산월은 조일평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천봉궁의 인물들과 동행을 했나?”

조일평의 얼굴에 한차례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말일세. 천봉궁에서 귀한 사람이 온다고 호위를 해달라더군.”

진산월은 조일평에게 그런 부탁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금교교로군. 그녀가 그날 아침에 일평을 찾아온 것이 바로 그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진산월은 문득 금교교가 일부러 조일평에게 찾아가 부탁을 할 정도로 천봉궁에서 내려온 귀한 손님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남봉 엄쌍쌍은 그 귀한 손님을 모시고 함께 온 일행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천봉궁에서 천봉선자가 모시고 올 정도의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산월의 뇌리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붉은색 봉황(鳳凰) 무늬‥‥‥. 높게 틀어 올린 탐스런 흑발과 투명할 정도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진산월은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조일평은 진산월이 천봉궁의 귀한 사람에 대해 물어 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가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자, 자신이 오히려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자네는 궁금하지 않은가?”

“무엇이 말인가?”

“천봉궁에서 왔다는 그 귀한 손님이 누구인지 말일세.”

진산월의 음성은 왠지 딱딱하게 들렸다.

“궁금하지 않네.”

조일평은 짙은 검미(劍眉)를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특유의 냉기가 흐르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더 말해 주고 싶어지는군. 내가 호위해 온 사람은 여자일세.”

“………….!”

“그것도 절세미인이지. 당금 강호를 송두리채 뒤져 보아도 찾기 힘든 천하의 절색(絶色)이란 말일세.”

조일평은 이래도 궁금하지 않느냐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으나 이내 실망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진산월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어서 그의 말이 전혀 흥미를 끄는 것 같지 않았다. 조일평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재미없군. 관심 없다면 관두게. 나만 괜히 객쩍은 사람이 되었군. 자네는 변해도 너무 변했어. 전에는 그래도 예쁜 여자 얘기가 나오면 귀를 기울이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조일평은 돌연 정색을 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혹시 마정기란 사람을 아나?”

진산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살추혼이란 별호를 쓰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네. 별로 대단한 고수는 아니지만 비도를 날리는 솜씨는 제법 쓸만해.”

“그자는 왜?”

“어젯밤에 이씨세가에 와서 자네 거처를 찾아갈까 하고 후원을 나왔다가 밤이 너무 늦은 걸 알고 다시 돌아가려 했네. 그러다 우연히 후원의 그늘 속에서 신음 소리를 듣게 되었지.”

진산월은 묵묵히 조일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심스레 다가가서 보니 야행복(夜行服)을 입은 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더군. 이씨세가의 회갑연이 열리는 날에 야행인(夜行人)이 있다니 재미있는 일 아닌가? 그래서 일단은 그를 데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네.”

“그자가 마정기란 말인가?”

“그렇다네. 부상이 무척 심해서 치료하는 데 제법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괜찮은 영약 몇 개를 가지고 있었기에 간신히 살릴 수 있었지.”

마정기란 자가 무슨 이유에서 늦은 밤에 이씨세가의 후원 그늘 속에 쓰러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진산월은 특별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종남파와 관계가 있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조일평의 다음 말은 그의 그런 생각을 산산이 깨부수는 것이었다.

“그자는 조금 전에 깨어났는데, 깨어나자마자 대뜸 자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 꼭 전할 말이 있다고 말일세.”

“나를 보자고 했다고?”

“그렇네. 나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는 말게. 나에게도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종남파의 장문인을 만나게 해달라고만 하더군.”

진산월로서는 궁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생사(生死)의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나자마자 자신을 찾는다니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어떤가? 만나 보겠나?”

진산월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자는 아직도 부상이 심해 몸을 움직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내 방에서 사제로 하여금 지키게 했네. 다행히 지금은 자네를 감시하는 무리들이 없는 것 같으니 어두워지기 전에 갔다 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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