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7화
제 162장 풍구낭첨(風口浪尖)
야심한 밤이었다.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장님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먹물 같은 어둠 속을 걷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오늘따라 바람도 없고 달도 보이지 않는군. 이런 날은 대체로 흉다길소(凶多吉少)한 법인데‥‥‥‥”
그 인영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영이 걷고 있는 곳은 담벼락을 따라 길게 이어진 한적한 소로(小路)였다. 소로의 끝에는 한 채의 작은 모옥(茅屋)이 세워져 있었다.
“천도무친 상여선인(天道無親 常與善人 : 하늘의 도는 특별히 사람을 골라 친하지 않고, 누구이건 항상 선한 자에게 베풀어진다).”
그러자 모옥 안에서 그에 화답하는 듯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게 보이지만, 어떤 것이라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어 굳게 닫혀 있던 모옥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인영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서슴없이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 안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방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한쪽 방은 주방을 겸한 듯 식기를 비롯한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다른 한쪽 방은 침상과 탁자 하나, 의자 두 개가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침상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인영을 보고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많이 기다렸소?”
“일각(一刻) 정도 되는 것 같소. 항상 정확한 분이 왜 늦나 조금 의아했었소.”
들어온 인영은 고소를 머금었다.
“매장원이 상의할 게 있다며 부르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소.”
방에 있던 사람은 눈을 번뜩 빛냈다.
“매장원과 무슨 이야기를 했소?”
“이세적의 죽음이 서안 일대의 세력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논의했었소. 별다른 것은 없고 탁상공론(卓上空論)만 오갔을 뿐이오.”
“매장원이 무언가 눈치를 차린 것 같지는 않소?”
“그건 아닌 것 같소. 단지‥‥‥‥”
방에 있던 사람은 급히 물었다.
“그의 행동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소?”
“오늘 부쩍 두기춘을 자주 부르는 것 같았소. 오전에 그를 부르더니 저녁때도 그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군.”
“두기춘이라면‥‥‥ 몇 년 전에 종남파를 배신하고 입문한 녀석이 아니오?”
“그렇소.”
“문하 제자를 두 번 정도 불렀다고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지 않소?”
“그건 당신이 매장원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요. 매장원은 아랫사람들에게 엄격해서 자신이 직접 키운 제자라 할지라도 일대일로 만나서 훈계하는 법이 없소. 그런데 자신의 직전(直傳) 제자도 아니고 문파 내에서 찬밥 신세로 지내던 녀석을 두 번씩이나 부른 것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소.”
방에 있던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장원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해도 두기춘 정도를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무서운 건 두기춘이 아니라 매장원이오. 그가 일을 획책(劃策)한다면 절대로 단순하게 넘어갈 리가 없소.”
“그렇다면‥‥‥‥”
바로 그때였다.
“곡수, 그걸 알면서도 감히 나를 속이려 했느냐?”
차가우면서도 한없이 냉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을 듣자 두 사람의 안색이 대변했다.
“매장원‥‥‥”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양쪽으로 흩어져 몸을 날렸다. 방안에 있던 사람은 모옥의 유일한 창문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갔고, 다른 인영은 자신이 들어온 방문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막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 인영은 의외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아악!”
모옥 저편에서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인영은 그 비명이 창문을 들고 나간 사람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방안에서 헤어진 지 겨우 숨 몇 번 내쉴 사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한 사람이 상대의 손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 사람의 무공이 자신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영은 절로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영은 사력을 다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치달려 갔다.
하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십여 장을 달려갔는데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인영의 눈에 당혹 어린 빛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머리를 쓰는 방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늘 벌어지는 일은 계속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매장원이 어떻게 알았을까? 내 뒤를 밟은 것일까?”
인영은 미친 듯이 달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행적이 발각된 것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한데 그가 막 소로에 있는 담벼락 근처를 지나가려 할 때였다.
기척도 없이 그의 코앞으로 하나의 검광(劍光)이 날아들었다.
“헉!”
인영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짙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광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워서 하마터면 그대로 머리통을 꿰뚫릴 뻔했던 것이다.
그가 그 검광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검광이 마지막 순간에 조금 흔들리며 속도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결코 그의 반응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반응은 그 수준의 고수들에 비하면 그리 신속한 편이 아니었다.
의아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인영은 간신히 몸을 뒤로 젖혀 살인적인 일검을 피한 후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불의(不意)의 일검을 날렸던 사람이 재차 그에게 덤벼들며 검을 휘둘렀다. 인영은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신법으로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다행히 검을 휘두르는 자의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기적적으로 몇 번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겨우 몸을 피해 바닥에서 일어서던 인영은 검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두기춘! 네놈이 감히‥‥‥‥“
두기춘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곡수! 배반자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인영은 다름 아닌 곡수였다. 곡수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하마터면 두기춘의 검에 가슴을 잘릴 뻔했다. 간신히 옆으로 크게 한 걸음 움직여 검을 피한 곡수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그의 허리춤에서 시커먼 검광이 폭사해 나왔다. 곡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묵정검을 뽑아 번개 같은 일검을 발출한 것이다. 그의 검법은 그야말로 놀라워서 두기춘이 조금 전에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나 그 검은 완전하게 펼쳐지지 못했다. 막 검광이 두기춘의 목덜미를 관통하려는 순간, 갑자기 곡수는 도끼날에 맞은 나무처럼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가 발출했던 무시무시한 검광도 힘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조금 전만 해도 곡수가 서 있던 자리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의 신법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경(奇驚)스러워서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인영은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곡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두기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기춘은 어느새 검을 거두고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그를 죽이지 말고 내가 올 동안 시간을 끌라고 했더니 제법 능숙하게 잘하더구나.”
두기춘은 머리를 조아렸다.
“과찬이십니다. 가셨던 일은‥‥‥“
“예상대로 이들 외에 멀지 않은 곳에 두 명이 더 잠복해 있었다.”
두기춘은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매장원을 만난 이상 그들은 지옥의 사신(死神)을 본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매장원은 일단 손을 쓰면 그야말로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두기춘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곡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짐작했는지 매장원은 냉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곡수를 죽이지 말고 살려 두라고 했는지 궁금하느냐?”
“그를 통해 본파에 또 다른 배반자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두기춘의 말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면서도 자신이 결코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가 아님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매장원은 그의 말솜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가운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머금었다.
찬 바람이 돌 정도로 싸늘한 미소였으나, 그의 얼굴에서는 모처럼 나타나는 웃음이기도 했다.
“제법이구나. 곡수는 비록 본파의 중요 인물이지만, 무공 실력은 장로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현천검결을 파해(破解)하려면 그보다 더욱 뛰어난 검학(劍學)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 필시 그의 배후에는 더욱 높은 지위의 인물이 숨어 있을 것이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이존휘를 만나 취미사 혈겁에 얽힌 은원을 확실히 파헤친 다음에 본산으로 데려가서 엄중히 취조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네가 책임지고 그를 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두기춘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고는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는 곡수를 안아들었다. 매장원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들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십여 장 밖의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두기춘도 신형을 날려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주인을 잃은 묵정검만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 * *
“이 밤중에 어디를 가자는 거요?”
모관의 물음에 종호는 그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글쎄 따라오기나 하게.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
“허‥‥‥!”
모관은 한차례 혀를 차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장서 가는 종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이경이 다가오는 깊은 밤이었다. 모관이 막 잠자리에 들려 할 때 종호가 그를 찾아오더니 불문곡직하고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다.
모관은 종호와 그다지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같은 오의단의 일원이었으나 나이나 경력으로 보아 종호가 그보다는 더 선배였고, 말을 놓을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어서 이곳에 와서도 특별히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종호가 야밤에 찾아와 무작정 나가자고 하니 모관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다행히 바람은 별로 없었으나, 기온이 낮아 서늘한 밤기운이 피부에 소름을 돋게 했다. 종호가 모관을 데리고 간 곳은 개방의 처소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그 나무는 상당히 커서 장정 서너 사람이 팔을 잡아야만 간신히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모관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나무만이 동그마니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뭐가 있다고 오자고 한 거요?”
“저기를 보게.”
종호는 나무 아래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모관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부분의 흙이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진해 보였다.
“저건 누군가가 흙을 팠다가 다시 덮은 흔적이로군요·.”
“확실히 자네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군. 한번 파 볼 텐가?“
모관은 의아한 얼굴로 종호를 쳐다보았다. 야밤에 자려는 사람을 불러내더니 땅을 파 보라니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파 보게. 재미있는 게 나올 테니.”
종호가 거듭 땅을 파 볼 것을 권하자, 모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한 듯 오른손에 공력을 돋우었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은 금세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종호가 눈을 빛내며 감탄성을 발했다.
“자네의 청강수(靑剛手)는 거의 절정에 달했군. 그토록 수월하게 공력을 끌어올리다니 말일세.”
“종 형의 철전권(鐵纏拳)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무공일 뿐이오.“
모관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푸른색으로 물든 오른손을 땅에 찔러 넣었다. 그의 오른손은 너무도 수월하게 땅을 뚫고 들어갔다. 손을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아 장내에는 금세 제법 큰 구덩이가 파여졌다.
“얼마나 더 파야 되는 거요?”
“이제 거의 나올 때가 되었네.”
종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오른손을 휘두르려던 모관의 동작이 멈춰졌다. 과연, 파여진 구덩이의 한쪽에 무언가 희긋한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관은 조심스레 그 물체를 꺼내었다.
물체가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침착하기 이를 데 없던 모관도 순간적으로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피에 밴 장포(長袍)였던 것이다.
야밤에 땅에서 파낸 것이 피 묻은 장포라면 누구라도 가슴 한구석이 섬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종호를 돌아보았다.
“이게 뭐요?”
종호는 조금 전과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하면 직접 살펴보지 그러나?“
모관은 무언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장포를 살펴보았다. 그 장포는 처음에는 제법 질이 좋은 옷감으로 만든 것 같았으나, 여기저기에 누더기처럼 꿰맨 자국이 많아서 원래 옷감의 재질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장포의 허리 부분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구멍 주위는 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관은 누더기처럼 더덕더덕 기워진 장포를 보자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괴짜들이 많은 개방에서도 특이한 행색으로 유명한 괴인. 같은 오의단 소속은 아니었지만, 몇 번인가 마주쳐 술자리까지 함께했던 주름살투성이 늙은이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만결자(萬結子) 마영생(馬永生)의 옷이구나.”
그가 나직한 탄성을 토해내는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던 종호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그래. 네가 쓰러뜨린 마 늙은이의 하나뿐인 옷이다.”
“우두둑!”
갈비뼈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모관은 허리를 움켜쥐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윽!”
종호의 무쇠 같은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모관은 사력을 다해 피하려 했으나 이미 왼쪽 갈비뼈가 모두 부서져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종호의 주먹은 사정없이 그의 반대편 갈비뼈도 부숴 버렸다.
모관은 불에 올려진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신음을 흘렸다.
“크으으‥‥‥ 대‥‥‥ 대체 왜‥‥‥.“
종호는 무시무시한 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 보았다.
“몰라서 묻느냐? 네가 본방을 배반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실종된 순의단 고수들에게까지 직접 손을 썼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종호는 피에 전 누더기 장포를 들어 옆구리의 푸르스름한 구멍 자국을 가리켰다.
“저건 네놈의 청강수가 남긴 흔적이다. 네놈은 완벽하게 흔적을 지웠다고 생각했겠지만, 강물에 떨어진 마영생의 시신이 십여 리 아래의 강가에서 발견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모관은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올 뿐이었다. 종호는 광기가 가득한 눈으로 모관을 쏘아보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본방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동료를 살해한 네놈을 어떻게 요리할지 기대해 보거라.”
모관은 고통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종호가 주먹을 치켜드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후우‥‥‥‥”
정화는 결가부좌를 한 채 깊은 숨을 들이내쉬었다. 잠들기 전 한 시진씩 대승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을 운기하는 것은 정화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대승반야선공은 소림사의 칠십이종절기(七十二鍾絶技)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신공절학(神功絶學)으로 장로원에서 승인을 받은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정화는 특별히 혜택을 받아 벌써 오년 전부터 대승반야선공을 익혀왔으며, 그 경지는 오성(五成)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사부 격이며 당대의 소림 장문인인 대방선사가 구성(九成)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른 진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차례의 호흡을 마친 정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한 줄기 기이한 신광(神光)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정화는 결가부좌를 풀지 않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돌연 반장(半掌)을 히며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언제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가 앉아 있는 전면의 그늘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일각(一刻)쯤 되었다.”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대원선사였다.
대원선사는 정화의 일 장 앞까지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정좌해 앉았다. 정화는 자신에게는 사숙뻘인 대원선사가 앉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결가부좌한 자세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네 대승반야선공의 경지가 놀랍구나. 입문(入門)한 지 오년 만에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은 최근 수십 년 내에는 네가 처음일 것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다. 불문(佛門) 최고의 기재라 불렀던 대방 사형도 대승반야선공이 오성을 넘어간 것은 칠 년째 되는 해였다. 너는 확실히 찬탄을 받아 마땅하다”
정화는 이번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얼핏 무례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대원은 이번에도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정선에게 들으니 너의 검술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구나. 달마십삼검을 어디까지 익혔느냐?”
“불조항마(佛祖降魔)요”
정화의 대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만큼 불손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원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빙그레 미소까지 띠는 것이었다.
“대단하구나. 달마십삼검은 후반으로 갈수록 정묘(精妙)하고 까다로워서 익히기가 힘든데 벌써 십 초나 익혔다니 네 재주가 놀랍다. 마지막 후반 삼 초식만 익힌다면 능히 검으로는 소림제일(少林第一)이라고 할 만하다.”
정화는 무표정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게 그런 복은 없는 것 같소”
돌연 대원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렇다. 후반 삼 초식이야말로 달마십삼검의 최정화(最精華)이지만, 아쉽게도 너는 익히지 못할 것이다. 익힐 기회가 없다고 봐야겠지.”
정화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는 대원을 냉랭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불쑥 물었다.
“어떻게 한 거요?”
대원은 여전히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단 채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모양이구나. 그럴 만도 하겠지. 대승반야선공이 오성을 넘어가던 원만한 독(毒)은 저절로 해독(解毒)되고 강기(剛氣)가 항상 전신을 보호해서 어지간한 암습도 격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사용한 것은 독(毒)이 아니다.”
대원은 천천히 오른손을 소매에 집어넣었다가 하나의 물건을 꺼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어린아이의 손가락만 한 녹색 조각이었다. 그 조각에서는 말로 형용키 어려운 미묘한 내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화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용연향(龍涎香)이군.”
“그렇지.”
“그것만으로는 나를 중독시킬 수 없었을 텐데‥‥‥‥”
“물론이다. 용연향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뚜렷한 효과가 있지만 중독과는 거리가 멀지. 그래서 네가 저녁 예불을 드릴 때 이 방의 구석구석에 견혼수(牽魂水)를 살짝 뿌려 놓았다.”
정화의 눈꼬리가 꿈틀거렸으나 얼굴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견혼수만으로는 부족했을 텐데‥‥‥‥”
대원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아이로구나. 네 말대로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어서 저녁에 네가 먹는 음식에 군자산(君子散)을 조금 넣었다.”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정화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무너졌다. 그는 대원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더니 문득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군자산에 견혼수, 그리고 용연향이라‥‥‥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마취약인 제신환(制神丸)의 재료들이군.”
대원은 참지 못하고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그래, 네가 당한 것은 독이 아니라 마취약이다. 그래서 백독불침(百毒不侵)의 대승반야선공으로도 막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이런 수를 쓸까 봐 먹는 음식과 물에 철저히 신경을 썼는데‥‥‥ 어떻게 내가 먹는 음식에 군자산을 넣었소?”
“네가 나를 은밀히 주시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내가 직접 손을 쓰겠느냐?”
정화는 다시 한차례 한숨을 토해냈다.
“정선 사형을 유혹했군.”
“유혹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약간의 의혹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그는 군자산이 수면제인 줄 알고는 너를 일단 잠재워서 소림사로 압송해 가겠다는 내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정화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선 사형은 머리도 비상하고 침착한 사람인데, 남의 말을 지나치게 잘 믿어서 그 점이 항상 불안했지.”
“그걸 알면서도 그를 곁에 두었으니 그건 너의 명백한 실수다.”
“그렇소. 그게 나의 유일한 실수요.”
“아니, 두 번째 실수지. 첫 번째는 내가 손을 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수(先手)를 치지 않은 것이다.”
정화는 솔직히 시인을 했다.
“나는 적어도 내일쯤에나 당신이 손을 써 오리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아침에 정선 사형을 불러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늦고 말았구려.”
“강호의 험난함을 알면서도 순간의 방심으로 시기를 놓쳤으니 너는 무공에 대한 재질은 탁월할지 몰라도 아직 애송이일 뿐이다.”
정화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원을 응시하다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대원은 그의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느릿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던 일을 마저 해야지. 내일이 되면 모든 일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이라구‥‥‥?”
정화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듯한 음성을 내뱉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마취제인 제신환의 약효에 정신을 잃으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대원의 얼굴이었다.
밤은 계속 깊어졌다.
사방이 온통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도 아직 소란스러움을 잃지 않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낮에는 오히려 조용했다가 오후부터 서서히 시끄러워지기 시작해서 밤이 되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곳이었다. 때로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때로는 술 취한 장한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콰창!
“이런 제기랄!”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몸을 굴렀다.
쾅!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탁자가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동작이 늦었어도 그 탁자에 깔렸을 것을 생각하니 손풍은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탁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해진미(山海珍味)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풍성한 요리가 차려져 있는 술상이었다.
하나 술상은 이미 박살난 채 바닥에 널려져 있었고 주위는 온통 부서진 술병과 사방으로 뿌려진 요리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불과 반각(半刻) 전만 해도 손풍은 자신이 이토록 비참한 몰골로 요리의 잔해들 위를 구르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게 모두 다 그 계집 때문이었다. 반각 전에 손풍은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한 모습으로 화월루의 후원에서도 가장 큰 매취각(梅聚閣)에 앉아 술을 즐기고 있었다.
미색이 뛰어난 기녀(技女)들을 양쪽에 끼고 앉아 기녀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집어주는 안주를 먹을 때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웬 여자가 누각 안으로 불쑥 들어온 것이다. 하루 종일 마신 술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손풍은 그녀가 좀처럼 보기 힘든 절세의 미녀임을 알아차렸다. 당장에 회가 동한 손풍은 기녀를 뿌리치고 비틀거리고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이봐. 넌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은 기녀냐?”
미녀의 고운 아미가 하늘로 솟구치고 두 눈에서 쌍심지가 돋아 나왔으나, 손풍의 눈에는 그 모습조차 한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제법 얼굴이 반반한 걸 보니 콧대도 세겠구나. 하지만 오늘 밤에 넌 이 어르신을 모셔야 한다. 잘만 모시면 내일 아침에는 두둑한 주머니를 찰 수 있을지 모르니 정성을 다해야 하느니……… 어이쿠!”
손풍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코를 움켜쥐며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놀랍게도 멀치감치 떨어져 있던 미녀의 신형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면전에 나타나 옥수(玉手)같이 하얀 손으로 그의 콧등을 가격한 것이다. 잡티 하나 없이 고운 손으로 때려보았자 무슨 힘이 있겠냐만, 실제로 손풍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달포 전에 파락호 몇 놈과 시비가 붙어 싸웠을 때도 이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취기 가득했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던 것이다.
“아니, 이년이‥‥‥ 아이고!”
아픔을 억누르고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려던 손풍은 다시 허리를 부여잡고 나가 떨어졌다. 그녀는 치마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아랫배를 걷어찼던 것이다. 배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손풍은 그녀의 치마가 펄쩍일 때 잠깐 보았던 속바지가 무슨 색깔이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하나 그의 생각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꺄악!”
기녀들의 비명 소리가 없었다면 그의 머리통은 날아오는 의자에 정통으로 맞아 피분수를 뿌리고 말았을 것이다. 비명 소리를 듣자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렀다. 아니나다를까?
쾅!
그가 엎드려 있던 곳에 의자 하나가 날아와 틀어 박혔다. 의자가 얼마나 무서운 기세로 날아왔는지 의자 다리가 바닥을 뚫고 들어가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손풍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 걸렸다. 무공을 익힌 여고수(高手)로구나.’
무림인들이 얼마나 상대하기 힘들고 자존심 강한 부류들인지는 몇 년 동안의 파락호 생활로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는 그였다. 더구나 그중에서도 무림의 여고수들은 아예 상종치 말아야 할 족속들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이빨이 몽땅 부러지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거론할 가치도 없었고, 심지어는 시선을 잘못 주었다가 음탕한 눈알을 빼 버린다며 멀쩡한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경우도 곧잘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남자의 중요한 부위를 잘라버리거나, 자신은 고상해서 추잡하게 그런 건 안 건드린다며 대신 목 위에 달려 있는 머리통을 잘라버리는 여인들도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녀를 기녀로 알고 함부로 지껄였으니 목숨을 부지하면 그야말로 천행(天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길, 재수 옴 붙었구나. 어제쯤 집으로 돌아갈걸 괜히 며칠 더 있으려고 하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손풍은 속으로 자신의 재수 있음을 마구 탓했으나 그 와중에도 몇 개의 의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굴렀다.
손풍은 필사의 노력 끝에 그 의자들에 몸이 꿰뚫리는 참상은 막을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허공이 시커멓게 뒤덮이며 팔선탁(八仙卓)이 통째로 날아오는 엄청난 광경에 입을 막 벌려야만 했다.
‘난 이제 죽었다. 그냥 고수가 아니라 무지막지한 고수로구나.‘
그 팔선탁은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서 장정 서너 사람이 들어도 운반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무거운 팔선탁이 여인의 가벼운 손짓에 장난감처럼 허공을 훌훌 날아오는 것이다.
손풍은 정말 사력을 다해 몸을 갈려 기적적으로 자신이 먹던 술상에 깔려 죽는 참상은 면할 수 있었다. 하나 그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 한 쌍의 발이 나타났다.
질 좋은 옥단화(玉短靴)를 신은 귀엽고 앙증맞은 크기의 발이었다. 손풍은 수많은 시녀들을 섭렵했어도 아직 이토록 이쁘고 아름다운 발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그 발이 천천히 들려지더니 이내 싸늘한 음성과 함께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 아가씨가 콧대가 세게 생겼다고? 네놈 뼈다귀가 얼마나 단단 하길래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지 한번 보자”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손풍은 정통으로 그 발에 얼굴을 가격당했다.
비명도 내지를 사이가 없었다. 손풍은 철퇴로 얼굴을 가격당한 듯한 충격에 반쯤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오히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고, 눈앞이 흐려져 주위의 광경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 무언가 축축한 게 느껴지기에 손으로 만져 보았더니 금새 손이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사락‥‥ 사락‥‥.
치마가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예의 한 쌍의 발이 그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어디 이 아가씨에게 두둑한 주머니를 주겠다고 했는데 주머니 좀 꺼내 봐라. 네놈이 과연 이 아가씨의 마음에 들 정도로 대단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지 한번 보자.”
손풍은 사력을 다해 고개를 쳐들어 발의 임자를 올려보았다. 이미 그의 얼굴은 통퉁 부어오르고 앞 이빨은 절반 이상이 빠져 나가 그야말로 형편없는 몰골로 변해 있었다.
손풍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돈을 받으려면 나를 하룻밤 모셔야지! 공짜는 안 돼!”
여인은 막 다시 그를 발로 차려다 어이가 없는지 쳐들던 발을 내리고 멀거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손풍은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돈을 받고 싶으면‥‥‥ 봉사를 해라. 그러면 돈을 주겠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여인의 고운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다시 발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강력한 충격은 없었다. 대신 무지무지하게 아팠다. 게다가 그녀의 발길질은 어찌나 빨랐는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손풍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도 없는 상태에서 무방비로 정신 없이 얻어맞았다. 손풍의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이처럼 많이 맞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재작년에 하룻밤에 오천 냥을 도박장에서 날릴 때도 아버지에게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고 보름 동안이나 누워 있었으나. 지금은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손풍은 이렇게 맞다가는 자신이 정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불같은 오기가 끓어올랐다.
“이‥‥‥ 아‥‥‥ 내‥‥‥ 주‥‥‥‥”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무어라고 소리치자 그토록 무섭게 날아들린 발길질이 멈췄다. 그녀는 숨결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이 아가씨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거냐?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풍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오른 얼굴로 그녀를 올려보며 웃었다
“이년아‥‥‥ 아무리 때려 봐라‥‥‥ 내가 네년 시중도 받지 않고‥‥‥ 돈주머니를 풀 거 같으냐‥‥?”
여인의 안색이 핼쓱하게 굳어지더니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두 눈에서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해 나왔다.
손풍은 이제 그녀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뒷골목 기루의 한쪽 구석에 서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맞아죽는다는 것이 너무도 원통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외쳤다.
“이년아‥‥‥ 내가 누구 손에 죽는지라도 알아야‥‥‥ 염라대왕에게 보고를 하지‥‥‥‥”
그녀는 막 손을 쳐들다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손풍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얼굴뿐 아니라 전신이 단 한군데도 멀쩡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손풍은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아보고 있었다. 여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빠른 음성을 내뱉었다.
“잘 기억해 둬라 이 아가씨의 이름은 누산산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오른손을 세차게 아래로 내려쳤다
쾅!
폭음과 함께 손풍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손풍의 몸은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여인, 누산산은 조금 전의 성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착잡함이 깃든 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기녀들은 이미 꼬리를 말고 사라진 지 오래됐다.
폐허로 변한 텅 빈 누각 안에서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못박인 듯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후우‥‥‥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그녀의 음성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풍구낭첨(風口浪尖: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가 격렬한 형세)이라더니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 일들이 많은데 이런 일까지 겪게 되는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성난 기색이 떠올랐다.
“이게 모두 그 버릇없고 키만 큰 종남파 장문인 때문이야. 왜 하필이면 이런 불한당 같은 놈을 데려오라고 날 시킨 거야? 내가 종 남파 하수인이야?“
그녀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더니 씩씩거렸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자기가 뭔데 사람을 이렇게 부려먹는 거야? 그리고 큰언니도 그렇지. 그 말라깽이가 부탁했다고 거절도 하지 않고 넙죽 승낙하면 어떡해? 그리고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이야? 왜 꼭 나같이 고상하고 예쁜 여자한테 이런 일을 시켜서 험악한 꼴을 보게 만드냐 말이야?“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허공에 대고 온갖 욕설을 퍼붓더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손풍의 몸을 옆구리에 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녀들의 다급한 보고를 들은 화월루의 호위무사들이 매취각에 나타났을 때는 부서진 탁자의 파편들과 음식의 잔해들만이 휑하니 널려져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