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8화
제 163장 십년재회 (十年再會)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제갈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날 찾는다고? 그런 자가 있을 리 없다.”
서문연상은 고운 눈을 살꼭 치켜떴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 그 사람이 소 사숙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가 보면 될 거 아니에요?”
“다 큰 계집애가 어디서 눈을 부라리는 거냐? 나는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해라.”
제갈외는 휑하니 몸을 돌려 한쪽 구식에 쪼그리고 앉더니 조그만 절구통을 꺼내 약초를 빻기 시작했다. 서문연상은 답답한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소 사숙께서 모시고 오라고 했는데 그냥 가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냔 말이에요. 그거 또 소응한테 주려고 이상한 약 만드는 거죠? 그런 거 만들 시간 있으면 피부가 고와지는 화장수(化粧水)라도 좀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제갈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약초를 빻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시켰다. 서문연상은 바짝 약이 오른 모습이 됐으나, 그렇다고 제갈외에게 함부로 대할 수도 없어 끙끙거리고 있었다.
나이로 보나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보나 제갈외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그녀의 할아버지에 조금도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정말 저 늙은이의 성질머리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거 어떻게 하지? 모시고 오겠다고 큰소리는 잔뜩 쳐놨는데‥‥‥‘
그녀의 머릿속에 조금 전에 보았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그중 한 사람은 제법 준수하기는 했으나 이미 중년이 지난 사람이라 관심 밖이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준수한 미남자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녀의 낙사숙과도 견줄 정도였다. 나이도 그녀보다 두세 살 많아 보였으니 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비범한 모습인데, 신분이 무얼까?
그 중년인의 예의바른 행동거지로 보아 강호에서도 이름 높은 명문정파의 후계자일 게 분명해. 무공은 어느 정도일까?’
그녀는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가 문득 현재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는 힐끔 제갈외를 쳐다보았다. 제갈외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 자세로 앉은 채 약초를 빻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가 들어온 사람을 보자 아미를 찡그리며 쌀쌀맞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들어온 사람은 방화였다. 방화는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저‥‥‥ 제갈 노인께서 왜 안 오시는지 소 사숙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
“이런 바보 내가 어련히 모시고 갈까 봐 여기까지 왔단 말이에요?”
그녀는 방화가 소지산의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한참이나 그를 구박했다.
그때 제갈외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시끄러운 계집이구나 떠들려면 네 방에 가서 할 것이지 왜 여기서 소란을 부리느냐? 그리고 방화, 이 녀석.”
방화는 움찔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예, 제갈 노인.”
“노부는 갈 생각이 없으니 그리 알라고 전해라.”
방화는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손님께서 만약 제갈 노인이 안 오시면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어냐?”
방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화산(九華山) 임소군(任昭君).”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던 제갈외의 표정이 대변했다.
“뭐라고?”
제갈외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방화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방화는 무언가가 눈앞에 번쩍 거린다 싶은 순간 무서운 힘이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것을 느끼고 크게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갈외는 평상시에는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행동거지가 느렸기 때문에 지금의 이런 모습은 보는 사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서문연상은 방금 전까지 한쪽 구석에 맞아 있던 제갈외가 어떻게 순식간에 방을 가로질러 방화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제갈외는 무서운 눈으로 방화를 쏘아보았다.
“방금 무어라고 했느냐?”
“제갈 노인‥‥‥ 먼저 이걸 놓고‥‥”
그제서야 제갈외는 방화의 목덜미를 잡았던 손의 힘을 풀었다. 방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목 주위를 어루만지며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자는 ‘구화산 임소군’이라고 했습니다.”
“구화산‥‥ 임소군‥‥‥‥”
제갈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두 단어를 몇 번이나 입 속으로 뇌까렸다. 그러다가 다시 번갯불 같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방화를 쏘아보았다.
“누구냐? 그 말을 한 자가?”
“예. 찾아온 두 사람 중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노인이었습니다. 이목구비가 상당히 수려했는데, 몸에 병(病)이 있는지 안색이 창백하고 연신 기침을 하고 있더군요.”
제갈외는 허공을 응시하며 한동안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돌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방화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제갈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서문연상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 거예요? 우리도 따라가 봐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그녀는 방화가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나비같이 가벼운 동작으로 제갈외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방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자네였군.”
조옥린은 소지산을 앞에 두고 감회가 새로운 표정이었다. 소지산 또한 그가 자신을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무뚝뚝한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엿보였다.
그들이 정업사의 후원에서 헤어진 지는 채 삼 개월도 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처지는 판이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 팔을 쓸 수 없어 의욕을 상실한 채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소지만은 팔을 고치고 무공이 놀랍도록 향상되어 강호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검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순수한 선의(善意)에서 그에게 호의 어린 충고를 했던 조옥린은 막중한 부상을 입고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인간사(人間事)는 앞날의 길흉(吉凶)을 예측할 수 있다고 했는데, 두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쿨룩‥‥‥ 쿨룩‥‥‥‥
조옥린이 갑자기 세찬 기침을 토해냈다. 그때마다 그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솟아 나와 앞가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소지산은 그의 상처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을 알고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어쩌다 그런 심한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소지산은 그의 상처를 보려 했으나, 어느새 한시몽이 다가와 묵묵히 조옥린의 가슴을 추궁하고 있었다.
“이제 됐다. 너무 쓸데없는 데 힘을 쓰지 마라.”
조옥린은 한시몽을 제지시키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강호에 몸을 담는 이상은 언제고 이런 꼴이 될 수 있네. 자네도 명심하게.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 죽고 사는 문제는 이미 자네의 능력을 벗어난 걸세. 그러니 목숨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게. 그게 강호인(江湖人)의 자세일세.”
소지산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문이 털컥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무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옥린과 시선이 마주치자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조옥린 또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온 사람은 물론 제갈외였다. 제갈외의 주름진 얼굴은 쉴새 없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눈빛은 마구 흔들려 금시라도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에 비하면 조옥린은 담담하면서도 조용한 모습이었다.
“오랫만이오 제갈 형.”
조옥린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자 제갈외의 어깨가 급격히 흔들렸다. 소지산은 제갈외가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여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나, 어느새 제갈외는 몸을 똑바로 한 채 조옥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어코 나를 찾아왔군.”
그의 음성은 무언가에 억눌린 것처럼 들렸다.
“힘든 여정(旅程)이었소.”
“죽을 데까지 자네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를 수 없는 꿈이라는 것도 알았지.”
“십년이 넘는 세월이었소.”
“자네를 만나는 상상만 해도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고 가슴이 너무 뛰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
“나는 제갈 형을 꼭 만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소.”
“그런데 막상 자네 얼굴을 보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시원하군. 오랫동안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야.”
“때로는 제갈 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었소.”
“그리고 이제는 알겠더군. 어떤 일은 무작정 피하기만 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진작에 자네를 만났으면 어떤 결말을 보았든 내 마음은 편안했을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소. 원래 매듭을 묶은 자만이 매듭을 풀 수 있다는 것이 천고(千古)의 진리요.”
‘이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네.’
“이제는 지난 세월 동안 묶어 두었던 매듭을 풀 때가 된 것 같소.”
두 사람이 각기 서로 다른 말을 꺼내자 듣고 있던 중인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뒤늦게 방안으로 들어왔던 서문연상은 이 광경을 보고 속으로 몰래 웃었다.
“누가 늙은이들 아니할까 봐 서로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있네.”
그런데 마지막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제갈외는 더 이상 격동에 찬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조옥린 또한 차분하고 침착했던 모습과는 달리 냉정하고 싸늘해 보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제갈외가 그 답지 않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손을 쓰게. 나는 기꺼이 과거의 빛을 목숨으로 갚겠네.”
그 말에 설마 했던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심지어는 항상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던 소지산조차도 안색이 굳어져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조옥린은 차가운 얼굴로 제갈외를 노려본 채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제갈외는 아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다.
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중인들은 전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당해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 조옥린이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리면 제갈외의 목숨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의 숙명(宿命)적인 기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조옥린은 오른손을 번쩍 쳐든 채 살광(殺光)이 이글거리는 무서운 눈으로 제갈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조옥린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한시몽조차도 처음 목격한 살기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꿀꺽‥‥‥‥
누군가의 목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조옥린은 쳐들었던 오른손을 힘차게 내리쳤다.
“아앗!”
여인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문연상은 조옥린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가 스스로 놀라서 자신의 입을 자기 손으로 막았다.
조옥린의 손은 제갈외의 왼쪽 가슴에 정확하게 닿아 있었다. 제갈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자신의 심장 바로 위에 올려져 있는 조옥린의 손을 보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나를 살려 주는 건가?”
조옥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그의 전신에서 구름처럼 피어올랐던 진득한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살기가 모두 가신 그의 얼굴은 예전의 준수하고 평온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피곤하고 초췌해 보이기도 했다.
제갈외는 다시 물었다.
“자네는 십년 전의 그 끔찍한 원한을 잊었단 말인가?”
“……………!”
“자네가 평생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그 원한을 벌써 잊어버렸단 말인가?”
조옥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착잡함이 담긴 미소였다.
“많은 세월이 물처럼 흘러가 버렸소, 제갈 형.”
이번에는 제갈외가 입을 굳게 다물고 묵묵히 그를 쏘아보았다.
조옥린의 차분한 음성이 적막감에 싸인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영원히 살아 있소. 내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말이오. 지금도 나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면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살며시 꺼내어 보곤 한다오”
“‥‥‥!”
“지금의 나는 그녀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소 과거의 원한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도, 그리고 나의 뜨거웠던 사랑도‥‥‥ 모두 세월과 함께 흘려보냈소”
조옥린은 제갈외의 가슴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이제 우리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소. 그 아까운 시간들을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고 싶지는 않소. 이제 이것으로 우리의 은원의 매들을 짓는 것으로 합시다‥‥‥‥“
말을 마치자마자 조옥린의 몸은 허물어지듯 쓰러져 버렸다. 앞에 있던 제갈외가 엉겁결에 그의 몸을 안지 않았다면 조옥린은 바닥에 보기 흉한 모습으로 나뒹굴었을 것이다.
“숙부님.”
한시몽이 재빨리 다가와 제갈외가 안고 있는 조옥린을 빼앗다시피 받아 들었다.
조옥린의 안색은 이미 핏기 한 점 없이 하얗게 변해 있었고, 금시라도 숨이 끊어질 듯 기색이 엄엄했다.
한시몽은 그의 심맥(心脈)을 짚어 보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심맥이 너무 가늘게 뛰어 당장이라도 멈출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는 양손에 공력을 돋우어 조옥린을 추궁과혈하려 했다. 그때 하나의 차가운 음성이 그를 제지했다.
“비켜서라, 꼬마야.”
한시몽은 짙은 검미를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제갈외의 늙고 추레한 얼굴이 그의 코앞에 있었다. 주름살 가득하고 볼품없는 얼굴이었으나,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할 만한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한시몽은 그의 기백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고 말았다.
제갈외는 한동안 조옥린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하고 있더니 재빠른 손길로 그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제갈외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한시몽은 절로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문득 손을 내려보니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만일 숙부님이 돌아가신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한시몽은 손을 힘껏 움켜쥐며 각오를 되새겼다. 그때 제갈외가 조옥린에게서 떨어져 몸을 일으켰다.
한시몽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어느새 서문연상이 다가와 재잘거렸다.
“어때요, 제갈 노인?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갈외는 그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한시몽을 돌아보았다.
“이리 오거라.”
서문연상은 제갈외가 자신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바짝 약이 올랐으나 준수한 한시몽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새침한 표정으로 한발 뒤로 물러섰다.
‘흥! 제갈 노인. 어디 두고 보자구요’ 마음속의 흉심(?)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표정을 지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서 있있다.
한시몽은 제갈외에게 다가가다가 웬 어린 소녀가 깍쟁이 같은 표정을 하고 제갈외 옆에 붙어서 떠나지를 않고 있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조옥린의 상태가 급한지라 그녀는 무시하고 제갈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숙부님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지독한 내가장력(內家掌力)은 처음 보았다. 조옥린을 저 꼴로 만든 자가 누구냐?”
한시몽은 잠깐 머뭇거렸으나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실대로 말했다.
“서장의 고수인 철사자 등곽이란 자입니다.”
“철사자 등곽? 서장의 고수가 왜 중원까지 와서 사람을 다치게한단 말이냐?”
“그간의 사정은 복잡해서 짧은 말로 설명하기 힘이 듭니다. 그보다 숙부님의 상처는‥‥‥‥“
한시몽은 조급한 마음이 가득했으나, 제갈외는 태평하기만 했다.
“조옥린이 죽을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죽었다. 비록 가슴뼈가 모두 부서지고 폐에 구멍이 뚫리기는 했지만 노부가 손을 쓴다면 살아날 확률이 더 높다.”
“아!”
한시몽의 입에서 안도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갈외는 그의 위아래를 살펴보더니 불쑥 물었다.
“너도 조옥린과 같은 곳에서 왔느냐?”
한시몽은 조옥린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긴장감이 풀어져 넋을 놓고 있다가 제갈외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예. 그러니까‥‥‥‥
한시몽이 우물쭈물거리자 제갈외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생긴 건 멀정한 놈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조옥린은 내가 돌볼 테니 너는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한시몽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숙부님과 같이 있겠습니다.”
“조옥린을 치료하는 데 네가 힘쓸 일은 없다. 그러니 이곳에 남아 물 흐리지 말고 들어가라. 조옥린은 상처가 낫는 대로 돌려보내겠다.”
“하지만‥‥‥‥”
한시몽이 거절하려 할 때 제갈외가 갑자기 호통을 내질렀다.
“갈(喝)! 네놈이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단 말이냐?”
그의 호통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든지 한시몽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한시몽은 자신의 귓전이 아직도 얼얼한 것을 알고 내심 크게 놀랐다.
‘무림에서는 제갈외가 단순히 의술에 능한 자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 보니 무서운 내공을 지닌 고수였구나.’
조금 전 제갈외의 호통은 다른 사람의 귀에는 단순히 커다란 고함 소리로만 들렸지만, 한시몽에게는 한 줄기 막강한 진기가 함께 쏟아졌던 것이다.
고함 소리에 경력을 실어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능력은 절정고수가 아니면 시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시몽이 멈칫거릴 때 그의 귓전으로 제갈외의 전음이 들려왔다.
“종남파는 과거에 신목령과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 저들이 네 정체를 알게 되면 한바탕 드잡이질을 피할 수 없을 텐데, 그게 조옥린이 상처를 치료하는 데 이로울 것 같으냐?”
한시몽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이내 마음을 결정하고 제갈외를 응시했다.
“숙부님은 언제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길면 한 달, 짧으면 보름.”
“그건 너무 깁니다.”
“싫으면 도로 데려가라. 그 이상 단축시킬 자신은 노부에게 없으니까.”
한시몽은 제갈외의 고집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러면 제가 보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숙부님을 부탁드립니다.”
이어 그는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정중하게 제갈외를 향해 인사를 했다. 준수하고 고고해서 다소 오만하게 보였던 그로서는 뜻 밖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갈외도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살짝 치켜뜨다가 냉소를 날렸다.
“그 귀신 소굴 같은 곳에서도 그래도 제법 쓸 만한 놈이 있군. 하지만 그래 보았자 어차피 새끼귀신일 뿐이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어서 떠나라.”
한시몽은 그가 무어라고 하든 공손하게 인사를 마친 후 종남파 고수들을 쓸어보았다. 조금 전에 제갈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싸늘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졌다.
중인들은 그가 제갈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할 때만 해도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그의 마지막 모습에 모두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해 했다. 그들 중 서문연상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뾰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뭐 저런 재수 없는 녀석이 다 있어? 생긴 것만 멀쩡했지 하는 짓은 완전히 시정(市井)의 삼류 무뢰배잖아.”
중인들은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말에는 내심 동조를 했다. 확실히 한시몽이 마지막 떠날 때 종남파 고수들을 훑어본 시선에는 무언(無言)의 협박이 담겨 있었다. 그런 식의 협박은 뒷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서문연상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연신 콧바람을 씩씩거리며 제갈외에게 다가갔다.
“제갈 노인, 저 녀석의 정체가 뭐예요? 귀신 소굴이 대체 어디냐고요?”
제갈외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그렇게 마음에 드느냐?”
서문연상은 얼굴이 빨개져서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저 녀석이 마음에 든다고 그래요?”
“아니면 아닌 것이지 왜 그렇게 정색을 하느냐?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래요?”
서문연상이 숨까지 헐떡이며 제갈외를 들볶으려 하자 소지산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갈 노인께 무례하지 마라.”
서문연상은 찔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소지산은 평소에는 좀처럼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가 입을 열 때면 모두들 긴장하고는 했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지금 가서 제갈 노인의 옆방을 치워놓도록 해라.”
“예, 사숙님.”
서문연상은 새색시처럼 얌전한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나 사람이 없는 곳에 가면 혼자 몸부림치면서 소리를 지를 것이 뻔했다. 소지산의 시선은 다시 한쪽에 있는 방화에게로 향했다.
“너는 조심해서 조 대협을 그 방으로 모시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소지산은 마지막으로 제갈외를 처다보았다.
“달리 도와드릴 일이 없겠습니까?” 제갈외는 소지산의 침착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말괄량이 계집이 내가 치료하는 곳으로 오지 않도록만 해주면 된다.”
“주의시키겠습니다.”
소지산은 짤막하게 대답했고, 제갈외는 그것으로 만족을 했다. 소지산이 한 말인 만큼 반드시 지켜질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