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4화
제181장. 혈로생로(血路生路)
숲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산월이 숲 속으로 뛰어든 지 불과 반 시진 만에 숲은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울창함을 자랑했던 송림(松林)은 대부분의 나무들이 잘려져 있었고, 푸른 풀잎들은 뿌리째 뽑혀지거나 발아래 짓이겨졌다. 대신에 검은 옷을 입은 시체들이 나무와 풀을 대신해 숲을 메워 가고 있었다.
“크악!”
지금도 어둠에 잠긴 숲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리한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 성난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또 처절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진산월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게 했는데도 용영검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특유의 우윳빛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소맷자락이 없어져 훤히 드러난 팔은 검붉은 피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마치 붉은 물감을 들인 것 같았다.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진산월은 문득 말 못할 피로함을 느꼈다.
흑의사신이 만들었다는 십방금쇄진은 한 가지 점에서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피에 질려 버리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피가 자신의 피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피든 상관없었다. 십방금쇄진은 끝없는 피를 요구했고, 그 피의 행진 끝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십방금쇄라는 거창한 이름답지 않게 어찌 보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진형이었다. 주위 사방을 온통 자신의 부하들로 에워싼 채 계속 인원을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하나 그 안에 갇힌 사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살육에 스스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흑의인들의 수는 줄지 않고, 자신의 몸은 조금씩 지쳐 가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 또한 극도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숲 속에 뛰어들 때만 해도 크게 살계(殺戒)를 어기는 일이 있어도 최대한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 짓겠다고 결심했건만, 불과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지쳐 버리고 말았다. 육체적인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가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오늘 그는 짧은 시간에 평생 저지른 살인보다 더욱 많은 살인을 했으며, 수십 개의 허무한 죽음을 목격했다. 아마 오늘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의 숫자는 위수의 수상에서 죽은 자들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지긋지긋한 살행(殺行)을 계속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암담함이 그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이곳은 작은 공터였다. 정확한 위치는 진산월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숲에 뛰어든 후 불나방처럼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덤벼드는 흑의인들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 터라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 공터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중앙에 나무나 수풀이 전혀 나있지 않아서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흑의인들의 매복을 걱정하지 않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 냄새에 질려 있던 참이라 바람 속에 담겨 있는 숲의 신선한 내음이라도 맡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공기에 섞여 있는 것은 수풀의 내음이 아니라 아릿한 피 냄새뿐이었다.
사방이 온통 시체와 피로 뒤덮여 있는데 신선한 내음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왜 이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이들은 자신과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이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매를 되찾아 오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종남산을 떠난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그동안 두 번이나 습격을 당했고, 양손에는 평생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다량(多量)의 피를 묻히고 말았다.
진산월은 결코 피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살인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피와 폭력을 혐오하고 평온한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은 진득한 피와 죽음이 가득한 길이었다.
분명 자신의 의지로 걷고 있는 길이건만 점점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이 역설(逆說)에 진산월은 허탈할 뿐이었다.
오늘 이 피로 물든 숲 속을 어떻게 빠져 나간다 할지라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죽음과 마주쳐야 한단 말인가? 그 피와 죽음의 끝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자신은 과연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잠깐이나마 진산월은 짙은 회의와 무기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검은 하늘의 한쪽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새 그토록 길었던 밤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 오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짙은 어둠에 잠김 나무들과 그 나무들만큼이나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한구석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는데도 다른 곳은 오히려 더욱 어두워진 것 같았다. 원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밤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법이다.
진산월이 지금 피에 질리고 마음속으로 깊은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가 그만큼 피와 죽음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산월은 그런 자신이 싫었으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오직 외길뿐이었고, 갈림길이 나오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몰랐다. 그 갈림길이 언제 나올지, 그리고 그 갈림길을 만나게 되면 자신은 과연 서슴없이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지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갈림길은 이미 눈앞에 수없이 나타났는지 모른다. 다만 자신이 그 길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뿐.
하나 그 갈림길이 지금 걷고 있는 길보다 더 낫다는 것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피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가 더욱 많은 피와 죽음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 피와 죽음으로 뒤덮인 길속에서 과연 나는 생로(生路)를 찾을 수 있을까?’
진산월은 마음속으로 뇌까려 보았으나 지금으로선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임영옥을 만나고 싶은가?”
그 음성이었다. 임영옥의 죽음에 대해 거론했던 괴이한 음성. 자신이 이 숲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게 만든 문제의 음성이 다시 들려온 것이다.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어둠에 잠긴 숲 속에서 미약한 인기척이 쉴 사이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시 흑의인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이 그 음성의 주인을 찾아 사방을 살피고 있을 때 다시 전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면 동쪽을 뚫고 와라. 십방금쇄진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그쪽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동쪽을 향했다. 그곳은 짙은 어둠을 조금씩 깨는 여명(黎明)이 밝아오는 곳이었다. 진산월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피와 죽음으로 뒤덮인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 것이다.
- * *
노해광의 하루 일과는 꽤나 규칙적인 것이었다.
그는 늘 인시(寅時)경에 일어나 한 시진 가량 무공을 연마하고는 그날 해야 할 일을 점검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몸을 씻고 아침 식사를 하고는 자신의 일터인 주루로 나가는 것이다.
그가 처음 서안에 와서 종남파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넘겨받은 주루는 대왕령 일대의 네 개에 불과했다. 하나 그는 짧은 순간에 상재(商材)를 발휘하여 자신이 경영하는 주루의 수를 일곱 개로 늘렸으며, 종남파가 초가보를 물리치고 다시 서안 일대의 패권을 되찾은 후로는 종남파가 관할하고 있던 세 개의 주루를 포함하여 무려 열두 개나 되는 주루와 객잔을 책임지게 되었다.
노해광이 비록 게으름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혼자의 힘으로 열두 개나 되는 주루들을 모두 돌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단한 일이었다. 노해광은 그런 어려움을 믿을 만한 사람을 각 주루의 책임자로 앉히는 것으로 해결을 했다.
그의 사람 보는 눈은 꽤나 정확하여 열두 개의 주루는 큰 무리 없이 잘 운영되고 있었다.
노해광의 용인술(用人術)의 기본 원리는 단순명료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 주고, 부정을 저지른 자에게는 혹독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기간의 결과에 연연하지도 않아서 처음 주루를 맡긴 자에게는 적어도 석 달에서 넉 달의 유예 기간을 주었다. 서너 달 정도는 설사 매상이 떨어진다 해도 크게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조금의 부정이라도 저지르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을 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믿고 따랐다.
그런 노해광도 취영루(聚英樓)만은 아랫사람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운영을 했다. 처음 서안에 와서 자리를 잡기까지 이곳에서 제법 많은 고생을 하여 나름대로의 애착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전에 다른 열한 개 주루의 책임자들을 만나보고 나면 그는 늘 취영루의 삼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늦은 저녁까지 그곳에서 지내곤 했다.
예전에 노해광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곧잘 취영루로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나, 종남파로 돌아온 후로는 그런 행동을 자제하고 선배 고수로서의 체통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날도 노해광은 각 주루의 지배인들과 아침 회동을 한 후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때 종표(宗杓)가 다가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종표는 취영루의 실질적인 이인자로, 노해광이 거느리고 있는 수십 명의 부하들 중에서 가장 신임이 두터운 자였다. 무공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으나 두뇌가 비상하고 입이 무거워 노해광이 무척 아끼는 인물이었다.
노해광이 비록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이른 아침부터 그를 찾아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해광은 아침보다는 저녁때 사람 만나는 걸 더 즐기는 인물이었다. 그래야만 여유 있게 술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찾아온 사람이 누구냐?”
“손노태야입니다.”
“손노태야라…….”
노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불쑥 물었다.
“요새 비단 한 필의 시세가 얼마나 하지?”
뜻밖의 물음에 종표는 약간 의아한 모습이었으나 이내 대답했다.
“며칠 전에 은(銀) 두 냥 오십 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많이 올랐군.”
“작년에 늦가뭄이 심하게 들어 뽕나무들이 많이 말라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명주(明紬)의 수량이 많이 줄어드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 한 필당 은 한 냥 정도 오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뭄이 심했다면 곡물들의 가격도 많이 올랐겠군그래.”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뭄이 든 시기가 추수가 끝난 가을부터 겨울까지인지라 곡물들은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흠…….”
노해광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서안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만나자고 하는데 거절할 수야 없지. 특실로 모시고 손노태야가 좋아하는 백호은침(白毫銀針)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종표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노해광은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자신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노해광이 특실로 들어섰을 때 실내에는 손노태야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손노태야의 뒤에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호위무사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해광은 자연스런 눈길로 그들 두 사람을 훑어보다가 손노태야에게 가볍게 포권을 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소.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오?”
노해광이 간단한 인사 후에 바로 용건을 물은 것은 쓸데없는 인사치레를 싫어하는 손노태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노태야 또한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내가 자네를 볼 일이 뭐가 있겠나? 의뢰할 일이 있네.”
노해광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손노태야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 년 만의 의뢰로군요. 그날 이후로는 손노태야가 나를 찾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걸세.”
딱 부러지는 듯한 손노태야의 말에 노해광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 것 같소.”
노해광은 삼년 전에 서안에 자리를 잡은 후 주루를 경영하는 일말고도 서안의 유력자들의 비밀스런 의뢰들을 처리해 왔다. 그가 서안에 빨리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의뢰들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유력자들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년 전에 손노태야는 자신의 전장(錢莊)에서 자꾸 돈이 비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시 전장을 맡고 있던 사람은 손노태야의 오랜 심복인 공야중(公冶重)으로, 공야중은 돈 몇 푼에 손노태야의 눈 밖에 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자가 아니었다. 손노태야는 공야중엑게 석 달의 말미를 주었으나 돈은 계속 없어졌고, 공야중은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손노태야는 당시 서안의 유력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소문이 돌고 있는 노해광에게 그 사건의 해결을 의뢰했던 것이다.
노해광은 단 삼 일 만에 공야중이 석 달이 걸려도 알아내지 못하는 원인을 파악했고,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전장의 공금 횡령은 공야중의 둘째 아들과 전장 관리인 중 한 명이 결탁하여 벌인 것으로, 노해광은 그들의 진술서와 함께 그들을 포박하여 손노태야 앞에 끌어다 놓았다. 그때 공야중의 둘째 아들은 한 팔과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병신이 되어 있었고, 전장 관리인은 한쪽 눈과 두 귀가 없는 흉측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손노태야는 노해광의 사건 처리가 확실히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그의 잔혹한 손속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노해광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년 만에 다시 노해광에게 의뢰를 청해 왔으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해광은 짐작 가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한 눈으로 손노태야를 응시했다.
“의뢰할 일은 무엇이오?”
손노태야는 주름진 시선으로 물끄러미 노해광을 쳐다보고 있다가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내 집에 변고가 있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노해광은 서안에서 가장 소식이 빠르고 발이 넓은 인물이었다.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노해광도 굳이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손노태야에게 못된 마음을 품은 자들이 호굴(虎窟)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호된 꼴을 당했다는 말은 들었소만.”
“세 번일게.”
“세 번?”
“보름 전에 처음 살수(殺手)가 안방까지 침입한 이후 칠 일 전에 한 번, 그리고 어제에도 살수가 왔었네.”
보름 전의 일은 노해광도 소식을 들었지만,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살수가 손노태야를 노렸다는 것은 그도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손노태야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엄청난 부(富)를 일궈 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살수의 침입을 받았다는 것은 살수의 배후가 어디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만약 배후를 알았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손노태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같은 일을 당하도록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칠 일 전의 습격은 내가 저녁 식사를 할 때 일어났네. 그리고 어제에는 점주(店主)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공격을 받았네. 그 때문에 아까운 점주 세 명이 내 대신 목숨을 잃었지.”
손노태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으나, 노해광은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노태야는 이름난 미식가(美食家)답게 식사 시간만큼은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모든 일을 끝낸 후의 저녁 식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맛보는 자리여서 더욱 철통같은 호위를 받았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손노태야가 데리고 있는 가게의 점주들과의 회동이라면 그 경계의 삼엄함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두 번이나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살수들의 암습을 받은 후인지라 손노태야는 더욱 방비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살수들이 난입하여 손노태야가 간신히 참변을 면하고 점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뜻한다.
노해광은 눈을 번득였다.
“간세(奸細)가 있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내가 어디까지 해주기를 바라시오?”
“간세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그 배후에 있는 자를 밝혀 주면 되네.”
“배후에 대한 처리는?”
손노태야의 음성은 여전했다.
“그건 내가 해결할 걸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이었으나, 노해광은 그 음성 속에 담긴 핏빛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손노태야는 결코 적(敵)에게 관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노해광은 잠시 손노태야의 주름진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를 맡도록 하겠소.”
“기한은 얼마나 걸리겠나?”
“닷새만 주시오.”
손노태야의 심연(深淵)처럼 깊은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정도면 되겠나?”
노해광은 조용히 웃었다.
“더 달라고 하고 싶지만, 손노태야가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아서 말이오.”
손노태야는 굳이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첫 번째의 암습 때는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던 손노태야도 거듭된 살수들의 공격에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어제 벌어졌던 습격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고, 일말의 불안한 마음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철통같은 보안 속에 호위에 만전을 기울였는데도 두 명의 살수가 침입하여 하마터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뻔했던 것이다.
더구나 백방으로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살수들이 침입한 경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손노태야의 심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손노태야가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면 노해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해광은 일 처리는 믿을 만했지만, 손속이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가끔은 사람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해서 손노태야는 그를 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보수는 얼마면 되겠나?”
손노태야는 이번 일의 심각함을 감안해서 어떤 금액을 불러도 승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해광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돈은 필요 없소.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은 부탁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일종의 거래였다.
“자네 같은 사람도 부탁을 하는군. 말해 보게.”
노해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남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겠소? 내 부탁은 간단한 거요.”
“간단한지 아닌지는 들어 봐야 알 일이지.”
“포목점을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편의를 봐주시오.”
“포목점이라…… 자네가 장사에 관심이 많은 줄은 진작에 알았지. 그런데 어떤 편의 말인가?”
“손노태야의 가게와 경쟁을 하지 않게 해주시오.”
손노태야의 얼굴에 모처럼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포목점이 없네. 설마 자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손노태야는 전장과 미곡상(米穀商)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전장이야 손노태야의 뿌리와도 같은 사업이었고, 십여 년 전부터는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곡에도 손을 대어 큰 부를 이루었다. 현재에는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미곡상은 대부분이 손노태야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서안 최고의 정보통(情報痛)이라는 노해광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지금에야 그렇지만, 손노태야가 나중에라도 포목점을 차리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기껏 투자했다가 경쟁이 심해서 손해를 보긴 싫어서 말이오. 내 변변찮은 재력(財力)에 손노태야와 경쟁을 했다가는 쫄딱 망할 게 뻔하지 않겠소?”
손노태야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아직 차리지도 않은 가게를 벌써부터 걱정한단 말인가? 더구나 포목점이라니…… 나는 아직 그쪽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네.”
노해광의 얼굴에 의미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 일이란 앞일을 예측하기 힘든 법이오. 나는 그저 모처럼 작심하고 뛰어든 사업에서 손노태야와 다투기 싫을 뿐이오.”
손노태야는 주름진 얼굴로 한동안 물끄러미 노해광을 쳐다보았다. 노해광은 여전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았다. 손노태야는 한참 후에야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겠지. 알겠네. 자네가 있는 한 내가 포목점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걸세.”
“내 대신 만화원(滿華院)이라는 말로 바꿔 주시오.”
“만화원?”
“내가 만들 포목점 이름이오.”
“벌써 가게 이름까지 지었나?”
노해광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손노태야도 알다시피 나도 어지간히 성격이 급한 놈이라서 말이오. 어떻소? 괜찮은 이름 아니오?”
“화려함이 가득한 집이라…… 그 ‘화(華)’가 ‘화(禍)’가 되지 않길 바라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그렇지. 그럼 만화원이 서안에 있는 한 내가 포목점을 차릴 일은 없을 걸 약속하겠네.”
노해광은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노태야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가 봐야겠군. 아침부터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두면 곤란해서 말이지.”
“손노태야께서 좋아하는 백호은침을 준비했는데 맛도 보지 않고 가실 생각이시오?”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느긋하게 차를 즐길 여유가 없을 듯 하네.”
노해광도 굳이 더 권하지는 않고 자신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우연인 듯 그의 시선이 손노태야의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인물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내 사질 한 놈이 손노태야 밑에 있다고 하던데 오늘 그 녀석은 오지 않은 거요?”
손노태야는 고개를 저었다.
“데리고 오지 않았네.”
“손노태야를 보필하기에는 미흡한 놈인가 보구려.”
손노태야는 그 말에는 아무 대답 없이 노해광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자네 사질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노해광은 싱겁게 히죽 웃었다.
“사정이 있어서 아직 제대로 상면(相面)조차 하지 못했소. 듣기로는 제법 강단이 있기는 하지만 무공도 별 볼일 없고 성격도 그다지 좋은 녀석은 아니라고 하던데…….”
“그 무공도 변변치 않고 성격도 나쁜 녀석이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네.”
손노태야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왠지 화가 난 사람처럼 들렸다.
“어제도 그 녀석이 내 대신 가슴에 검을 맞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지. 지금 그 녀석은 의식을 잃은 채 의방(醫方)에서 치료를 받고 있네.”
노해광이 눈을 치켜떴다.
“많이 다친 거요?”
“의원 말로는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지켜봐야 죽을지 살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목숨 줄이 질긴 놈이라면 살아날 수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손노태야는 힐끗 노해광을 쳐다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말대로 별 볼일 없는 놈이란 뜻이겠지.”
노해광의 집무실에서 나온 손노태야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지금 서안에서 가장 큰 포목점이 누구 소유지?”
손노태야의 우측에 있는 자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유길상(劉吉翔)입니다.”
손노태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유화상단의 셋째가 하는 취선방(聚仙房)이 있었지.”
“취선방뿐 아니라 서안에서 가장 큰 다섯 개의 포목점은 모두 유화상단의 것입니다.”
유화상단은 서역(西域)과 비단을 거래하여 부를 축적한 가문이었다. 서안은 서역과의 실크로드가 시작하는 곳이어서 비단이 주요 상품이었고, 포목점의 숫자도 백여 개가 넘었다. 그중 절반 가까이가 유화상단의 소속이어서 가히 ‘비단 가문’이라고 부를 만 했다.
손노태야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한 줄기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손노태야는 한참 동안이나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보수를 너무 후하게 지불한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