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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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2화


제189장 적정탐색

낙양의 중앙을 관통하는 중주대로에서 백마사쪽으로 가다 보면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제법 큰 누각이 나온다. 이곳이 팔각루다.

팔각루는 낙양성의 어느 곳에서도 잘 보였기 때문에 곧잘 낙양에서 사람을 만날 때 지표로 이용되기도 했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를 무렵, 팔각루 앞을 서성이고 있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그는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대충 묶어 어깨 뒤로 늘어뜨린 청년이었다. 비록 청년의 의복은 남루했고 앞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으나,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눈빛만큼은 총기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 청년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으나, 가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문득 청년이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두 명의 사람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낙일방과 진산월이었다. 낙일방을 본 청년은 그에게 다가가서 덥석 그를 안았다.

“일방, 이 녀석. 정말 너로구나.”

청년은 낙일방을 힘껏 끌어안다가 뒤로 물러서서 그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는 둥 법석을 떨었다. 낙일방 또한 준수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청년의 모습을 이리저리 흝어보았다.

“몇 년 안 본 사이에 거지에서 다시 사람이 됐구나. 개방을 뛰쳐 나오기라도 한 거냐?”

낙일방이 웃으면서 묻자 청년은 가뜩이나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소리 말아라. 내가 개방 아니면 갈 데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일이 조금 바뀌어서 이런 옷을 입고 다니게 됐다.”

“의결은?”

청년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자신의 아랫배를 툭툭 두르렸다.

“옷 속에 잘 묶고 다니고 있지. 이제 삼결이다.”

낙일방은 깜짝 놀랐다.

“아니, 불과 삼 년 만에 이결에서 삼결이 됐단 말이냐?”

청년은 히죽 웃었다.

“다 이 몸이 잘나신 덕분이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은 사부를 잘 만나서 벼락출세하게 됐다.”

“네 사부가 누군데? 개방 방주라도 된다 말이냐?”

“방주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가락하는 분이시다.”

“누군데?”

낙일방이 계속 물었으나, 청년은 싱겁게 웃을 뿐 쉽게 말해 주지 않았다.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이 찌푸려졌다.

“몇 년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적풍! 네가 삼결이 되더니 이제는 옛 친구까지 무시한단 말이냐?”

청년은 낙일방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위적풍이었다. 원래 위적풍은 낙일방의 고향 친구로, 낙일방이 종남파로 입문할 때 낙양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삼 년 전의 무림대회에서 낙일방은 위적풍을 다시 만났는데, 그때 그는 개방의 이결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삼 년 만에 다시 삼결로 올라서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개방은 문도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만큼 배분이 복잡하고 승급하기가 까다로워서 평생을 개방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일결이나 이결을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삼결이라면 개방에서는 분타주의 신분이며, 그때부터 비로소 개방의 중심 세력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었다.

낙일방은 어제 위적풍을 만나기 위해 개방의 낙양분타로 갔으나 위적풍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남겨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삼 년 만에 다시 만난 위적풍은 개방의 상징과도 같은 오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비록 허름한 복장에 추레한 몰골이긴 했으나, 과거에 땟구정물이 주르르 흐르고 몸에서 악취가 진동을 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탈태환골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위적풍 또한 낙일방의 변모한 모습이 새삼스러운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여러 번이나 그의 전신을 이리저리 쓸어보고 있었다. 낙일방은 과거보다 키가 한 뼘 가까이 커지고 체격도 당당해져서 고수의 풍모가 절로 우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수줍음 많고 어리숙했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리고 헌앙한 풍채에 태도 하나하나에 당당한 자신감이 배어 있어 그야말로 절세의 미장부라고 할 만했다.

보면 볼수록 낙일방의 달라진 모습이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위적풍은 문득 생각이 난 듯 한쪽에 말없이 서 있는 진산월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뵙는 것 같습니다.”

삼 년 전에 진산월 앞에서 천방지축이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동안 잘 있었나? 복장이 바뀐 걸 보니 순의단으로 옮긴 모양이군.”

위적풍은 움찔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진 장문인의 혜안은 대단하시군요. 짐작하신 대로 이 년 전부터 순의단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낙일방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위적풍을 바라보았다. 순의단은 개방의 총타 직속에 있는 삼단 중 하나로, 무력단체인 오의단이나 감찰기관인 청의단과 달리 정보 수집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개방이 강호에서 가장 소식이 빠르고 정확한 문파임을 생각해 본다면 순의단이야말로 개방의 중추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방의 핵심인 삼단에서도 순의단이 인원이 가장 많았고, 위장한 신분들도 다양했다. 개중에는 다른 문파의 제자로 들어가 있는 자들도 있었고, 주루를 경영하거나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심지어 관부에 등용된 자도 있었으니 개방의 막강한 정보력이 순의단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닌 것이다.

개방에 별다른 연줄도 없었던 위적풍이 순의단에 발탁되었다는 것은 그가 불과 몇 년 만에 삼결제자가 된 것과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위적풍은 진산월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일방이 남긴 서신을 보니 진장문인께서 본방의 낙양분타주를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셨는데, 그 생각은 변함이 없으십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왔지 않나?”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는데도 위적풍의 태도는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사실 위적풍은 삼 년 만에 다시 만나 진산월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어서 속으로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절세의 검객이 되었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만난 진산월은 단순히 무공이 고강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사람 자체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얼굴은 왠지 차갑고 냉정해 보여서 쉽게 말을 붙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삼 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위적풍은 삼 년 전에 만났던 풍채 좋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늘 웃음을 짓고 있던 젊은 청년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분타주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위적풍은 멋쩍게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낙일방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다가 약간 의아한 듯 묻었다.

“이 길은 낙양분타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

“분타주라고 허구한 날 분타에만 틀어박혀 있으란 법이 있냐? 진장문인같이 귀한 분을 냄새 나는 곳에 모실 수는 없으니 좀 더 번듯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여타의 대문파라면 장문인이 일개 방파의 분타주를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록 개방이 강호제일의 거방이라고 해도 대문파의 장문인이라면 분타주쯤은 언제든지 아랫사람을 시켜 불렀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자신이 직접 분타주를 만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 분타주 입장에서도 대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신검무적과 종남파라는 이름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위적풍이 낙일방과 진산월을 안내한 곳은 팔각루에서 조금 떨어진 장원이었다. 장원은 대로에서 십여 장 골목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로에서 가까우면서도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시선에서 묘하게 벗어나 있어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드나들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현판도 달려 있지 않은 장원의 굳게 닫힌 대문 앞으로 다가간 위적풍이 대문을 몇 차례 규칙적으로 두드리자 아무런 기척도 없이 대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지요.”

위적풍의 안내로 진산월과 낙일방이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이 다시 소리도 없이 닫혔다. 낙일방은 대문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신기하게 생각했으나, 진산월은 이미 이 장원이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여러 가지 기관장치로 보호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장원으로 들어서자 작은 화원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안목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 화원 자체가 하나의 진식을 이루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낙일방도 그 화원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보았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곳도 개방의 소유냐?”

위적풍은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에 있는 본방의 비밀 거처 중 하나지. 낙양분타는 너무 사람들 눈에 띄어서 중요한 현안을 해결할 때는 이곳을 주로 이용하고는 한다.”

“낙양에는 이런 곳이 많으냐?”

“아주 본방의 비밀을 다 까발리라고 하는구나. 이런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다.”

낙일방은 위적풍이 말한 ‘좋은 곳’이라는 말이 단순히 집이 좋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시설이 가장 좋을 뿐 아니라 아마도 가장 완벽한 보안이 유지되는 곳일 것이다. 위적풍이 진산월과 낙일방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은 그만큼 그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화원을 지나자 두 채의 전각이 나타났다. 두 개의 전각은 얼핏 보기에는 똑같은 모양이었는데, 위적풍은 서슴없이 오른쪽 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낙일방을 향해 턱으로 슬쩍 왼쪽 전각을 가리켰다.

“저곳은 가짜야. 안으로 들어가면 온갖 함정이 득실거리지.”

“저런 곳에서도 손님을 맞이하나?”

“물론이지. 간혹 귀찮은 손님들이 올 때도 있거든. 그런 손님들에게 아주 어울리는 곳이지.”

낙일방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산월이 지나가는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지는 않겠지. 가끔은 정상적인 손님도 받을 것 같군.”

위적풍이 몸을 움찔했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낙일방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발했다.

‘그렇구나! 두 전각 모두 비슷한 기관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다 손님에 따라서 기관이 발동해 무서운 함정이 되거나 아니면 평범한 전각이 되는 것이겠구나.’

낙일방은 위적풍이 얼굴을 힐끔 쳐다보다가 그의 얼굴에 한 줄기 난처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아주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일의 진행 상황에 따라 그 자리가 단순히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의 매복이 도사린 무시무시한 함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낙일방은 왠지 눈앞의 전각 안에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였졌다. 위적풍이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끌었다.

“너 잡아먹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고 들어와라. 아무려면 내가 너한테 해로운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

낙일방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다. 요새 하도 험악한 일을 많이 당해서 낯선 장소에 들어갈 때는 나도 모르게 조심부터 하는 습관이 생겨서 그렇다. 너도 그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면 나처럼 될 것이다.”

위적풍이 그를 째려보았다.

“강호에서 평생 동안 굴러먹은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너는 설마 이 형님이 지금까지 험한 꼴 한 번 안 당해 보고 편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본방의 순의단이 어떤 곳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낙일방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소풍자가 고생깨나 했단 말이지? 그래서 예전에는 마른 장작개비 같던 녀석이 그렇게 볼에 살이 토실토실 올랐느냐?”

“누가 할 소리? 네 녀석이야말로 그동안 어디 가서 신선놀음을 하다 왔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냐?”

낙일방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얼굴이 어때서?”

“그게 기생오라비 얼굴이지 강호에서 행도하는 고수의 얼굴이란 말이냐? 고생한 티라곤 눈을 까뒤집고 봐도 보이지 않는구나.”

낙일방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잘난 것도 죄로구나. 내가 졌다. 네가 나보다 훨씬 더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 여기저기에 주름살이 많이 생긴 것도 같구나.”

“이 녀석이 정말……”

위적풍은 낙일방이 목덜미라도 끌어안으려다 자신의 뒤에 진산월이 따라오고 있음을 깨닫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전각으로 들어서자 제법 넓은 대청이 나타났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수수한 대청에는 커다란 팔선탁에 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 두 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진산월 일행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어딘지 안면이 눈에 익은 자였다. 낙일방은 좀 더 기억을 더듬어서야 그가 삼 년 전 소림사의 대집회에서 잠시 스쳐 가듯 보았던 철골개 이동평임을 알아보았다. 당시 이동평은 종남파의 고수들을 보고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멀리서 눈짓으로 위적풍만을 불러 휑하니 떠나버려 종남파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를 다시 보자 낙일방은 당시의 복잡했던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지금 이동평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뿐 아니라 자신이 먼저 진산월 앞으로 성큼 다가와서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개방의 낙양분타를 맡고 있는 이동평이라 하오.”

일파의 장문인을 대접하는 데 한치의 소홀함도 없는 모습이었으나, 낙일방은 왠지 강호의 인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졌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이동평의 인사를 받았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이동평의 첫인상은 다소 강퍅한 것이었다.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나이였는데,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몸의 중심이 잘 잡혀 있어 제대로 수련을 쌓아온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동평은 자신의 여폐 있는 인물을 진산월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본방의 순의단 소속의 천리추풍 양광이라 하오.”

진산월의 시선이 양광이란 자에게로 향했다. 천리추풍 양광이라면 진산월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양광은 순의단의 구대호령 중 한 명으로, 강호에서 소문난 신법의 고수였다. 비록 십대신법대가에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개방에서 그보다 신법이 빠른 인물은 방중이자 무림구봉 중의 한사람인 만리무영개 나자행과 순의단의 단주인 표묘랑자 주서기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순의단에서 호령이라는 지위는 단주의 바로 아래에 있으며 순의단의 다른 고수들을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수백 명이 넘는 순의단에서도 호령의 지위를 가진 자는 단 아홉 명뿐으로, 양광은 호령에서도 서열 사 위에 올라 있었다.

양광은 비쩍 마른 체구에 턱밑으로 염소수염을 길러서 언뜻 보기에는 경박한 인상이었다. 게다 습관적으로 오른쪽 다리를 달달 떨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심란할 정도였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양광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아이고,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가 바로 양광입니다. 소문만 듣던 신검무적을 만나게 되다니 제가 오늘 눈복이 터졌나 봅니다.”

외모에 어울리는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었다. 진산월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양광은 이어 진산월의 뒤에 서 있는 낙일방을 향해 예의 허술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협이 바로 그 강북에서 제일가는 미남자라는 옥면신권이로군. 실제로 보니 정말 눈앞이 훤해지는 것 같네그려.”

낙일방은 강호에 이름난 고수 중에 이토록 언행이 경박스런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기에 황당하면서도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낙일방입니다. 이 분타주와 양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목소리도 어쩌면 저렇게 낭랑할까? 말로만 듣던 것보다 더욱 헌앙하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강호의 여협들이 낙 소협 때문에 시름에 잠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구려.”

예전이었다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나 이제는 낙일방도 이런 일에는 제법 만연이 되어 그냥 조용히 웃고 말았다. 이런 농담에 얼굴을 붉힌다면 그야말로 상대의 의도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낙일방이 예상과 달리 가볍게 웃고만 있자 양광은 속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 옥면신권이 무공은 뛰어나지만 아직 어리숙하고 강호 경험이 없어서 사람을 대하는데 미숙한 점이 있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구나.’

양광은 겉으로 드러난 외모나 행동거지와는 달리 상당히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단순히 경망스럽기만 한 인물이었다면 순의단에서 호령이라는 지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일행이 모두 팔선탁에 앉자 곧 밖에서 장한 한 사람이 커다란 찻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우라부락한 외모의 장한이 차를 따르는 광경은 다소 생경한 것이었으나, 차는 의외로 아주 정갈하면서도 은은한 맛이 있었다.

이동평이 진산월을 향해 찻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해하시오. 장원 내에 여자가 없다 보니 귀한 분을 대접하는데 아무래도 미흡할 수밖에 없구려.”

진산월도 마주 답례를 하고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차 맛이 아주 훌륭하오. 이곳에서 이렇게 좋은 차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소.”

“차는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도락인지라 거지 주제에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리고 있소. 진 장문인의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외다.”

강호에 소문난 이동평의 인물평은 무척 사무적이고 딱딱한 성격이며, 대신에 그만큼 일처리가 정확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낙양은 개방의 총타기 있는 개봉에서 멀지 않을 뿐 아니라 전통의 고도이며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여서 개방에서는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동평은 벌써 십 년째 낙양의 분타주를 맡아오고 있었으며, 그의 지위는 여타 지역의 분타주와는 격이 달랐다.

잠시 진중한 분위기로 차로 마신 후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동평이 먼저 물었다.

“진 장문인께서 나를 뵙자로 하신 용건이 무엇이지 궁금하군요.”

이동평은 강호에 나 있는 소문대로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이 분타주를 만나자고 했소.”

이동평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진산월 같은 신분의 사람이 다른 문파의 사람에게 부탁이라는 말을 내뱉는 것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체 신검무적이 남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동평은 갑자기 부담감이 생겨서 그 부탁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궁금증도 깊어졌다. 게다가 묻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 부탁이란 것이 어떤 것이오?”

“한 사람의 행적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오.”

“그가 누구요?”

진산월은 전혀 표정이 변화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공씨 성을 쓰는 사람이오. 나이는 사십대 중반. 매섭고 날카로운 인상을 지녔소.”

이동평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낙양성에서 공씨 성의 중년인이 수백 명은 족히 될 거요. 그 정도 인상착의로는 사람을 찾기 어렵소.”

“그는 석가장의 집사로 있소.”

진산월의 말을 듣자 이동평의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이내 다시 평상시의 표정으로 되돌아왔지만 음성이나 눈빛이 한층 더 진중해졌다.

“석가장에는 모두 여덟 명의 집사가 있소. 내가 알기로는 그중 공씨 성을 쓰는 사람은 모두 두 명이오.”

“그들의 나이나 인상은 어떻소?”

“공교롭게도 그들은 친형제지간인지라 나이도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고 얼굴 윤곽도 비슷하오.”

“그들이 누구요?”

이동평은 진지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소. 그전에 진 장문인께서 그들의 행적을 알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진산월은 짤막하게 말했다.

“받아야 할 빚이 있기 때문이요.”

이동평은 눈을 번쩍 빛냈으나 더 이상은 깊게 캐묻지 않았다. 진산월의 표정에서 더 이상의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기색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공영춘과 공상춘 형제요. 형인 공영춘은 올해 마흔일곱이고, 동생인 공상춘은 마흔다섯이오. 진 장문인이 찾는 사람은 그들 형제 중 하나일 거요.”

“그들의 성향은 어떻소?”

“성격을 말하는 거라면 두 사람 모두 침착하고 냉정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소. 원래 그들의 부친은 공치명이라고 하는데, 이곳 낙양에서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소. 그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는데, 첫째인 공망춘은 상인이 되었고, 두 형제는 석가장으로 들어가 집사가 된 것이오.”

“유학자의 아들들치고는 모두들 특이한 진로를 선택했구려.”

“그래서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소. 하지만 그들 세 형제는 나름대로 잘해 오고 있는 편이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들 형제의 석가장 내에서의 위치는 어떻소?”

“공영춘은 육집사이고, 공상춘은 이집사요.”

“동생인 공상춘의 지위가 더 높다는 말이오?”

“단순히 지위뿐 아니라 하는 일의 비중이나 가주인 석곤의 신임도 상당히 차이가 나오. 공영춘이 주로 십이지공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한직을 전전하는 데 비해, 공상춘은 석곤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서 석가장 내의 중요한 일들을 상당수 처리하고 있소. 적어도 석가장 내에서의 역할만 따지고 본다면 공영춘은 동생인 공상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오.”

“그들 두 사람의 사이는 어떻소?”

“형이 동생보다 지위가 낮으니 썩 좋을 리는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얼굴도 마주치지 않거나 원수를 대하듯 하는 사이는 아니오. 엄밀히 말하자면 형인 공영춘이 동생인 공상춘을 꺼려해서 소원해진 정도요.”

이동평은 성심성의껏 자신의 아는 바를 대답해 주었다. 진산월은 간간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질 뿐, 대체로 이동평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나 이동평이라고 그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석가장이 비록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귀가문으로 그 명성이 높다고 해도 개방에서 일개 집사의 신변까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동평이 낙양의 분타주이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알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이다.

말을 하는 이동평 자신도 진산월의 만약 두 형제 중 한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자신의 말만으로 그들 중 하나를 가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동평의 말이 끝나자 진산월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불쑥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행적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봐 줄 수 있겠소?”

이동평은 움찔하여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는 거요?”

“공상춘이오.”

이동평은 진산월이 왜 하필이면 석곤의 신임이 두터운 공상춘을 지목해서 행적을 알아달라고 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 장문인이 빛을 받아야 한다는 자가 공상춘이란 말인가? 아니면 공상춘을 지목하는 데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동평은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지금으로선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자세한 행적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요?”

“최근 몇 달간 그가 만난 사람과 밖으로 외출한 숫자 및 그 내용, 최근에 친하게 지내는 친우 관계와 자금 사정 등 전반적인 것이오.”

이동평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정도 조사라면 그야말로 분타의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공상춘 본인이 자기가 조사받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소.”

“그건 상관이 없소.”

개방이 조사하는 걸 공상춘이 알아도 상관없다고 하는데도 이동평의 얼굴은 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무거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개방에서 석가장주의 신임이 두터운 집사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개방에는 결코 좋은 일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낙양에서 석가장주의 비위를 건드린다는 것은 호랑이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굳이 해야 할 절박한 이유도 없고, 개방에도 뚜렷한 이득도 없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아무리 다른 문파 장문인의 부탁이라고 할지라도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개방과 종남파는 특별한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이동평은 거절하기로 마음먹고 막 자신의 의사를 밝히려 했다. 그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일을 들어준다면 과거 기산취악 당시 개방이 참관인이었다는 사실을 잊도록 하겠소.”

전혀 뜻밖의 말에 이동평은 물론이고 양광과 위적풍이 안색마저 변해 버렸다. 이십여 년 전, 소림사에서 구대문파가 전부 모인 적이 있었다. 당시 종남파는 급속도로 쇠퇴 중이었고, 반면에 형산파가 무섭도록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어서 종남파가 과연 구대문파로서의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많은 무림인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때였으며, 그 비무에서 처참하게 패하는 바람에 구대문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기산취악이었다.

당시 개방의 용두방주였던 천지일걸 도조산은 참관인 자격으로 그 비무를 주관했었는데, 이십 년도 넘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진산월이 당시의 일을 언급했으니 개방의 고수들이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도조산은 그 일 이후 자신이 우연히 소림사 장문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기산취악의 참관인이 되었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당시 그는 종남파의 장문인 하원지와도 안면이 있었고, 종남파 고수들과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문파의 오래된 전통과 역사를 도외시하고 당장의 성세만으로 구대문파를 바꾸려 하는 발상 자체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했었다.

하나 당시의 분위기는 종남파의 퇴출을 당연시했고, 도조산은 다른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참관인이 되어야 했다. 기산취악 이후 종남파가 철저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장문인인 하원지마저 비분에 못 이겨 세상을 떠나자 도조산은 마치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많이 괴로워했다. 그가 제자인 만리무영개 나자행에게 용두방주의 지위를 물려주고 은거에 들어간 것도 그때의 일에 대한 후유증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종남파 장문인의 입으로 당시의 일이 거론되었으니 개방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동평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그때의 일은 전대 방주께서도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고 계셨소.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잘못이 아니었소.”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래서 잊겠다는 거요.”

이동평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과거의 일을 잊겠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개방이 앞으로 종남파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일은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일로 묻어버릴 수도 있고, 언제까지 두고두고 기억에 되새길 수도 있는 것이다.

종남파가 예전의 별볼일없는 문파였다면 이런 말은 하등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았을 테지만, 현재 종남파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개방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말을 한 사람이 강호 최고의 검객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신검무적임에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동평은 한참 동안이나 진산월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결국 이동평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아무리 숙고해 보아도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석가장의 일개 집사 때문에 종남파 장문인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집사를 조사한다고 석가장과 사이가 나빠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종남파 장문인의 부탁을 거절하면 종남파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진 장문인의 말씀대로 하겠소. 하지만 몇 달간의 행적을 전부 조사한다는 건 솔직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포괄적인 것이라도 좋소, 하지만 최근 보름 이내의 행적은 최대한 상세히 조사해 주시오.”

“언제까지 조사하면 되오?”

“나는 앞으로 삼 일간 더 낙양에 머물러 있을 거요.”

“그 안에 진 장문인께 사람을 보내겠소.”

이야기가 대충 끝난 것 같자 진산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양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는 낙양을 떠나시면 어디로 가실 계획이십니까?”

진산월의 시선이 양광에게로 향했다. 양광의 질문은 의례적인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일까?

진산월의 의중을 짐작이라도 하듯 양광은 히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진 장문인께서 남쪽으로 가신다면 소림사에 한번 들르시는 게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소림사라……”

개방의 고수가 왜 난데없이 소림사 방문을 권유하는 것일까?

“사실 제가 이곳 낙양에 온 이유는 진 장문인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얼마 전 소림사에서 본방으로 진 장문인께 전해 드리라며 서신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양광은 품속에서 잘 봉인된 봉투 하나를 꺼내어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진산월이 받아보니 겉에 수려한 글씨체로 <종남파 장문인친전>이라고 씌어 있었다.

진산월은 봉투를 개봉해 보았다.

<종남파 진 장문인께. 상의드릴 일이 있으니 일간 본사에 왕림해 주셨으면 합니다. 소림사 방장 대방.>

짧막하게 용건만 쓴 서신이었다. 단정하면서 웅혼함을 느낄 수 있는 필체였다. 글자의 획 하나하나에 힘이 담겨 있었고, 뻗침은 자유스러우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으레 있는 인사문구가 전혀 없어서 어색할 법도 했으나, 진산월은 오히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제외하고 힘 있게 써내려간 그 글씨에서 보낸 사람의 심성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 서신을 다시 원래대로 접어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소림사 장문인이 이런 서신을 보낸 의미를 따지거나 원인을 파악하려고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일은 닥치기 전까지는 굳이 번거롭게 생각을 굴릴 필요가 없다. 이번 일이 그러했다. 다소 뜻밖이고 호기심도 일었으나, 소림사로 직접 방문해 보면 자연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산월과 낙일방이 작별인사를 하고 위적풍의 배웅을 받으며 멀어지는 광경을 이동평과 양광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누각 밖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뒤모습을 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제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동평은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 있어 흡사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양광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입꼬리를 말고 있었는데,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양광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그렇지 않소?”

이동평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인가?”

“저 나이에 저런 심기에 저런 배포를 지녔다는 게 말이오. 앞으로 몇 년 후에 그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구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렇겠지.”

양광의 가느다란 눈에서 한 줄기 신광이 번뜩거렸다.

“그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오?”

“그는 비범한 사람이지만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네. 강호에서 독불장군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일세.”

양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가보가 무너진 지금 뚜렷하게 종남파와 적대시할 세력이 어디 있겠소? 화산파와 형산파 정도인데, 화산파는 문파의 내부 문제로 집안 단속하기도 바쁜 처지이고, 형산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서안에서 그는 쾌의당의 칠대용왕 중 한 사람을 쓰러뜨렸네. 게다가 신목령과도 사이가 좋지 않고, 낙양으로 오기 전에는 흑갈방과 커다란 충돌을 일으켰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번에는 석가장과도 문제를 일으킬 모양이니 그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을 걸세.”

“종남파가 정말 그들 모두와 적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석가장과 반드시 사이가 갈라진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이동평은 다시 양광을 쳐다보더니 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에 냉엄한 빛을 떠올렸다.

“공상춘은 단순히 석가장의 일개 집사인 존재가 아닐세. 그는 석곤이 가장 믿는 수하이고, 철혈홍안이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일세.”

그 말에 양광의 비쩍 마른 얼굴에 한 줄기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공상춘이 철혈홍안의 제자란 말이오?”

“막내제자지. 그러니 신검무적이 공상춘을 건드리는 순간, 그는 석가장과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될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의 눈 밖에 나게 된단 말일세.”

“그렇다면 큰일 아니오? 우리가 공상춘을 조사한다는 게 알려지면……”

“그건 걱정하지 말게, 공상춘에게 미리 사정을 설명한다면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제서야 양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나직한 음성으로 혀를 차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철혈홍안의 제자라니….. 종남파도 정말 어지간히 운이 없구려.”

“그렇지 않았다면 한때 강호 제일을 구가했던 문파가 그토록 철저하게 몰락할 리가 없지.”

양광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이동평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그 운마저 자기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과거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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