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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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3화


제190장 운수괴천

풍림서각은 낙양 일대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다.

평상시의 풍림서각은 낙양뿐 아니라 하남성 전체에서 몰려드는 유생들로 늘 북적였고, 희귀한 고서들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풍림서각을 주로 이용하는 단골들은 풍림서각의 뒤편에 있는 별관을 더 애용하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의 풍림서각은 여느 때보다 유달리 시끌벅적했다.

바로 어제 아침에 풍림서각의 수석 지배인이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머리를 맞아 처참하게 살해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수석 지배인이 피살되었는데도 풍림서각은 정상적으로 영업을 개시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은 손님이 몰리고 있었다.

하나 손님들 중 대부분은 풍림서각의 주 고객들인 유생이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었다. 이제 보니 그들은 책을 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풍림서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귀한 일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근처의 행인들도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어 풍림서각 앞은 때아닌 시장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그 한바탕 소동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풍림서각의 입구에 있는 계산대 앞이었다.

“정말 계속 시치미를 뗄 셈이냐?”

풍림서각의 계산대를 책임지고 있는 장궤 곽삼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다른 몇 명의 종업원들도 성난 눈으로 한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에워싸여 금시라도 봉변을 당할 것 같은 사람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는데, 놀라거나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놈들이 지금 내 앞에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거야? 누가 그까짓 몇 푼 되지도 않는 책값을 물어주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그러면 어서 책값을 물어내면 될 거 아니냐?”

“글쎄 그게 그렇지 않다니까. 내가 파손한 것도 아닌데 뭣 때문에 내가 돈을 물어낸다 말이냐? 이게 이 잘난 낙양의 법도냐?”

청년이 낙양 전체를 싸잡아서 욕을 하자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의 얼굴에도 노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오히려 더욱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내가 서안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으면서 별의별 일을 다 보았어도 이렇게 무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은 당해 본 적이 없다. 책장에서 책 몇 권 꺼내 들춰 보았다고 책값을 물어낸다면 누가 이런 곳에 와서 책을 산단 말이냐?”

곽삼과 종업원들은 어이가 없는지 다들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더욱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게 말이 되느냐? 네놈이 단순히 책을 꺼내 보기만 했는데 왜 멀쩡한 책이 부서져 버렸단 말이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고? 너희들이야말로 망가진 책을 책장에 꽂아 놓고는 나 같은 외부인이 뽑아 들기만 기다렸던 게 아니냐?”

곽삼은 너무도 화가 나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우리 풍림서각이 어떤 곳인데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단 말이냐?”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거리며 웃었다.

“오! 이제야 이실직고를 하네. 그게 파렴치한 짓인 줄은 안단 말이지?”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놈이로군.”

“내가 할 소리다. 정말 이 망할 놈의 서점은 말이 안 통하다 못해 아예 앞뒤로 꽉꽉 막혔구나. 이러니까 나 같아도 화살이라도 날려 보내고 싶구나.”

곽삼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곽삼과 종업원들의 표정이 분노를 넘어 살기등등하게 변했으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곳이니 홧김에 누가 화살을 날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말이다. 불이라도 안 지른 게 다행일지 모르겠군.”

청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종업원들이 일제히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어? 이놈들이 말로 안 되니까 이제는 폭력을 쓰네.”

청년은 피하지 않고 마주 주먹을 휘두르며 맞섰으나, 한 주먹이 두 주먹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인지라 이내 종업원들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억……. 이놈들이 정말…..! 너희들 자꾸 이러면 나 정말 화낸다.!”

청년은 맞으면서도 계속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는 청년의 얼굴은 솟구치는 울화통과 억울함을 참지 못해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손풍. 서안 토박이로, 낙양에는 처음 찾아온 신출내기다.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본인이 그런 성격을 가진 것을 못내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런 그가 왜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낙양의 한복판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단 말인가?

오늘 아침만 해도 그는 옷을 단정히 입고 머리까지 완벽하게 손질한 상태로 사숙인 전흠과 함께 머물러 있는 객잔을 나섰다. 그러고는 전흠이 이끄는 대로 낙양의 거리를 가로질러 풍림서각으로 왔다.

전흠이 책장에서 책을 고르는 동안, 손풍은 풍림서각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으나 이내 시큰둥해졌다.

“제길 낙양까지 와서 고리타분하게 책방에나 들르다니…. 정말 풍류와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구나.”

그는 전흠에게 들리지 않게 조그만 음성으로 투덜거리다가 전흠이 부르자 이내 그에게 달려갔다. 전흠의 앞에는 십여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내가 고른 책들을 누가 가져가지 않도록 잘 지키고 있거라.”

손풍은 전흠이 뒷간에라도 가는 줄 알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밖으로 나간 전흠은 당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기다리다 지친 손풍은 무심결에 자신의 앞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뒤적거렸다.

그런데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종이가 푸석거리더니 맥없이 바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어?”

손풍은 얼떨결에 경호성을 터뜨리며 책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책은 더욱 빨리 파손되더니 종내에는 겉표지만 남기고 한줌의 먼지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손풍은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멍하니 있다가 다시 그 옆의 책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부벼 보았다. 몇 번 부비지도 않아 책은 다시 먼지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손풍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쌓여 있는 책들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책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바닥에 우수수 쌓여 있고, 겉표지들만이 동그마니 남게 되었다.

그때 손풍의 경호성을 들은 종업원 하나가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앗? 당신 무슨 짓을 하는 거요?”

그 뒤의 상황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종업원들은 이내 벌떼처럼 모여들어 손풍을 에워쌌고, 손풍은 꼼짝없이 책을 파손한 주범으로 몰려 책값을 변상하게 되었다. 문제는 겉장만 남겨진 책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손풍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만큼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 책을 뒤척거리기만 했을 뿐 글 한 줄 읽어보지 못했는데 책값을 고스란히 물어주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무슨 놈의 책값이 이리도 비싸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겉장만 남은 책들은 하나같이 다른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고서들이었고, 그중 몇 권은 구하기 힘든 진본이었다. 그래서 열두 권의 책값이 무려 은자 백 냥이 넘어가니, 아무리 손풍이 씀씀이가 큰 편이라고 해도 선뜻 주머니가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지고 있는 돈을 톡톡 털면 책값이야 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 오늘 저녁에 난향원에서 쓸 돈이 없는 것이다. 결국 손풍은 책값을 물어주지 않기로 결심했고, 전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종업원들에게 몰매를 맞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자칭 서안의 열혈남아인 손풍이 색향으로 유명한 낙양의 이름난 고서점 앞에서 수많은 낙양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신창이가 된 사연이었다.

때마침 풍림서각의 부지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손풍은 팔다리 중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날카로운 인상에 백색 유삼을 걸친 중년인이 나타나 소리치자 손풍에게 몰매를 가하던 종업원들이 흠칫 놀라 일제히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백색 유삼의 중년인은 풍림서각의 두 명의 부지배인 중 하나인 도영소라는 인물이었다. 도영소는 원래 별관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는데, 바깥이 하도 시끄러워서 나와 보았다가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종업원들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도영소의 시선이 장궤인 곽삼에게로 향했다.

“곽 장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게.”

곽삼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정을 설명하자 도영소는 아직도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손풍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냉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서점 안에서 폭력을 휘두른단 말인가? 본각의 법도가 얼마나 엄중한지 잊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곽삼은 무어라 변명도 못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도영소는 평상시에는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일단 성질이 나면 표독스러울 정도로 매섭게 사람을 다그치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곽삼을 비롯한 종업원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이 개 같은 놈들! 네놈들은 오늘 사람 잘못 건드렸다. 내가 오늘 이 망할 곳을 불 질러 버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손풍이 피범벅이 된 채 간신히 바닥에서 일어나며 이를 부드득 가는 것이었다. 손풍의 얼굴은 푸르뎅뎅하게 부풀어 있었고, 양쪽 코에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와 그야말로 낭패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었다.

그런데도 두 눈에서는 독기 어린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어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였다.

도영소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종업원들이 손님에게 주먹을 휘두른 건 분명한 잘못이지만, 그 사태의 발단은 이자가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적당히 사과하고 치료해 준 다음 일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오히려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도영소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거니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손풍은 코 밑으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소맷자락으로 쓰윽 훔치며 더욱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뭘 봐? 사람 코에서 피 나오는 거 처음 보냐? 돈 몇 푼 집어 주고 없던 일로 할 생각이라면 아예 포기해라. 오늘 이 망할 놈의 서점이 불쏘시개가 되든 내가 죽든 어디 결판을 내보자.”

손풍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자 도영소도 일시지간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상대가 대화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말이라도 붙여 볼 텐데 이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날뛰고 있으니 자칫 어설프게 대응했다가는 풍림서각의 위신만 바닥으로 추락할 판이었다.

도영소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사람들 틈을 뚫고 한 사람이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을 보자 성난 멧돼지마냥 씨근덕거리던 손풍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토록 기다려도 오지 않던 전흠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흠은 손풍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더니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더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손풍은 약도 오르고 화도 나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사숙…… 어디 가셨다……”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이런 분위기에서는 책 사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자.”

그러더니 손풍이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휑하니 몸을 돌려 다시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손풍은 너무나 황당해서 전신이 곤죽으로 얻어맞은 통증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아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꼴을 당했는데…..”

손풍은 말 못할 억울함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전흠이 딱히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없으나, 이번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전흠이 자신에게 책을 맡길 때부터 무언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긴 했다. 무엇보다 그가 맡긴 책들이 하나같이 만지기만 해도 부서져 버렸다는 건 그런 의심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무어라고 할 수도 없어 속만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손풍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화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때렸던 종업원들은 물론이고 도영소마저 그 사나운 눈길에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지금 손풍의 심정은 누군가가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서인지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손풍은 험악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전흠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도 도영소를 비롯한 풍림서각의 점원들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후우……”

누군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장궤 곽삼이 울상을 하며 도영소를 쳐다보았다.

“부지배인님, 그나저나 책값을 한 푼도 받지 못했는데…..”

도영소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지. 보아하니 나중에 나타난 자는 강호의 고수 같은데,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살신지화를 불러올지도 모르네. 다행히 남아 있는 겉장을 보니 진본은 두 권뿐이고 나머지는 복사본이니 생각만큼 큰 손실은 아닌 셈이네.”

곽삼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멀쩡한 책이 왜 갑자기 파손되었을까요? 그놈은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난들 알겠나? 아무튼 요사이 본각에 자꾸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분위기가 흉흉하니 이럴 때일수록 자네가 좀 더 신경을 써서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흠의 뒤를 따라가던 손풍은 아무래도 미심쩍은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흠을 불렀다.

“전 사숙님.”

전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 음성에 실린 냉기가 워낙 싸늘해서 성격이 제멋대로인 손풍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 그 책들……”

전흠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칼날처럼 예리하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그 책이 어때서?”

손풍은 직감적으로 여기서 한마디만 잘못 꺼냈다가는 자신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봉변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종업원들에게 몇 대 맞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당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 쪽으로는 누구보다도 눈치가 비상한 손풍이었다.

즉시 그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 책들 때문에 곤궁에 처했는데 사숙께서 때맞춰 오시는 바람에 살았습니다. 늦게나마 감사를 드립니다.”

전흠은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손풍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라니까. 저녁때 난향원에 가서 화를 풀지 않으면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들 것이다.’

손풍은 낙 사숙과 함께 난향원에 가서 낙향제일미녀의 술시중을 받는 것으로 지금의 울화를 풀기로 작정했다.

하나 오늘은 그에게 여러모로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왜 벌써 돌아오는 건가?”

동중산이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풍을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상태에서도 반드시 난향원에 가야 한다며 낙일방을 반강제로 끌다시피 하여 데리고 나갔던 손풍이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 다시 객잔으로 돌아온 것이다.

손풍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더니 힐끔 동중산을 쳐다보고는 아무 대꾸도 없이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동중산은 허허거리며 웃고 말았다.

그때 낙일방의 모습이 나타났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동중산이 인사를 하자 낙일방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손 사제가 또 사고라도 쳤습니까?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돌아오셨군요.”

낙일방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동중산의 외눈이 크게 뜨여졌다.

들어온 사람은 녹의를 입은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녀는 동중산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또 만났네요. 내가 올 줄 몰랐죠?”

동중산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오. 누 소저.”

그녀는 뜻밖에도 천봉팔선자 중의 사고뭉치인 누산산이었다. 정난향을 만나겠다며 난향원으로 갔던 낙일방과 손풍이 어떻게 누산산과 함께 돌아온 것일까?

누산산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호호….. 당신 같은 사람도 그런 멍청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군요. 나를 보니까 그렇게 반가워요?”

동중산은 이 막무가내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맹랑한 아가씨가 전혀 반갑지 않았으나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누 소저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

누산산의 시선이 한쪽에 서 있는 낙일방에게로 향했다.

“요새 종남파의 형편이 나아졌는지 기루에도 들락거리는군요. 내 평생 강호의 이름난 명문정파 중에서 사숙과 사질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기루에 출입하는 건 처음 보았어요. 정말 종남파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녀가 짖궂게 말하자 낙일방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중산은 일이 고약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낙양제일화의 명성이 하도 대단해서 낙 사숙께서 손 사제에게 잠시 구경이라도 시켜 줄 생각에 데리고 나가셨던 모양이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 저 꽁생원 같은 낙 소협이 먼저 나섰을 리는 없으니 버르장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그 손가놈이 먼저 꼬드겼겠지요. 어쩐지 난향원 앞에서 나를 보자마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바르르 떨더라니…… 이번 기회에 단단히 손을 봐줄 걸 그랬나?”

예전에 그렇게 심하게 두들겨 패고도 부족했는지 누산산은 손풍을 그냥 내버려둔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동중산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헛. 손 사제가 오늘 좋지 않은 일을 당해 위로해 줄 겸 갔던 것이니 누 소저는 너무 그를 탓하지 마시오.”

“하긴 얼굴을 보니까 어디서 잔뜩 얻어맞고 온 모양이더군요. 그 성질머리를 봐서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용하네요.”

“그런데 누 소저께서는 난향원에 무슨 일로 가신 것이오?”

누산산의 얼굴에 드물게 난처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내 원래의 얼굴 표정으로 되돌아왔으나 눈이 날카로운 동중산을 속일 수는 없었다.

누산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정난향의 소문이 하도 대단해서 얼마나 예쁘기에 그렇게 소문이 자자한가 궁금해서 가 본 것뿐이에요.”

“그렇소?”

동중산은 태연하게 되물었으나 누가 보기에도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산산은 눈이 샐쭉해져서 그를 흘겨보았다.

“내 말을 의심하는 거예요? 여자라고 미녀에게 호기심이 없는 줄 알아요? 다른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알고 싶은 건 여자가 더 심하단 말이에요.”

“이를 마이오. 직접 만나보니 어떻소? 과연 소문대로 뛰어난 미녀였소?”

“코빼기도 보지 못했어요.”

“왜 그렇소?”

“갑자기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당신들 일행을 만나게 되었지만 말이에요.”

동중산은 누산산이 무엇 때문에 정난향을 만나려고 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으나, 약삭빠른 누산산은 재빨리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손님을 밖에 세워 둘 참이에요? 빨리 나를 당신들 장문인에게 안내하세요.”

“장문인을 만나려고 오셨소?”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라도 하고 가야지요. 게다가 할 말도 좀 있고.”

동중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진산월에게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의 앞에 간 그녀는 천하에 다시없는 요조숙녀라도 된 듯 새침하면서도 얌전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동중산이 차를 가져온 후 물러가자 그제야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미처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소. 부탁 들어주어 고마웠소.”

진산월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누산산은 평상시의 모습과는 달리 상냥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별말씀을. 별로 힘들지도 않은 일이었는걸요.”

진산월이 말한 것은 일전에 누산산이 화월루에서 손풍을 잡아 종남파로 데리고 온 일이었다. 당시 진산월은 이씨세가에서 몸을 빼기 힘들어서 정소소에게 부탁을 했고, 정소소는 누산산을 보내 손풍을 종남파로 데리고 오게 했다.

그런데 누산산은 홧김에 손풍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종남파에 데려다 놓고는 진산월에게 눈총을 받을 것이 두려워 그를 만나지도 않고 몰래 떠나버렸다. 그래서 진산월이 지금에서야 당시의 일을 사례한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훌쩍 떠나버린 것에 대해 미안해야 할 법도 하련만 누산산은 그런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뚝 뗀 채 태연히 인사를 받고 있으니 손풍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화가 복받쳐 실신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누산산을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낙양에는 무슨 일로 오게 되었소?”

누산산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그걸 확인하려고 왔어요. 그런데 당사자를 만나지 못해 헛걸음만 하게 되었군요.”

“그 이상한 소문이란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평상시의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토록 얌전하고 다소곳한 모습이 그녀가 몹시도 기이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그녀와 진산월이 만난 것은 몇 번이나 되었지만, 이토록 좁은 공간에서 단둘이 있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산월이 기억하는 누산산의 모습은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것이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조금 낯설기는 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정 소저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진산월이 정소소에 대해 묻자 갑자기 누산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큰언니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그녀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질문은 너무도 당돌한 것이어서 천하의 진산월도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 소저는 여러 차례 본파의 일을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소? 일전에 본파에 왔을 때 제대로 대접도 하지 못하고 떠나게 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소.”

누산산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금세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으나 음성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빛이 담겨 있었다.

“큰언니는 물론 잘 있어요. 그녀는 노총관과 함께 소궁주님을 보필하고 있어요. 진 장문인이 그녀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내가 소식을 전해 드리죠.”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진산월이 점잖게 사양하자 그제서야 누산산이 솟구쳐 올라갔던 눈꼬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잠시 장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산산이 갑자기 생각난 듯 뾰족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진 장문인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무얼 말이오?”

“돌아오는 중추절에 야율척과 모용 공자가 다시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기로 했잖아요?”

“그 소식은 정 소저에게 들었소.”

“그런데 그때를 노려 천룡사에서 다시 중원으로 들어올 모양이에요. 그래서 중원무림에서는 삼 년 전의 그때처럼 무림맹을 결성해서 그들에 맞서려고 해요.”

누산산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입을 놀려댔다.

“다만 삼 년 전처럼 강호무림 전체가 집회를 갖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고 실속이 없다고 판단해서 구파일방을 비롯한 몇몇 세력만이 따로 모임을 가질 계획인가 봐요. 큰언니가 소궁주님에게 간 것도 그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예요.”

진산월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담담한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누산산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 장문인은 전혀 몰랐나요?”

진산월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누산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일은 강호의 중요 세력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논의되는 것으로, 아직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무심결에 진산월에게 그 사실을 발설했으니 어찌 생각하면 큰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그녀는 이내 예의 새침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진 장문인에게도 소식이 간 줄 알았어요. 아직 오지 않았다면 조만간에 연락이 가겠지요.”

그녀는 진산월이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당연히 연락이 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과연 그러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그 일의 주관자는 누구요? 삼 년 전처럼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들이오?”

진산월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여기까지 말한 마당에 무얼 더 주저하랴고 생각했는지 이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림맹주인 위지 대협이에요.”

“일장개천지 위지립 말이오.”

“그래요. 그분은 삼 년 전의 대집회에서 무림맹주로 선출되어 아직까지 그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번 일을 주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떠올랐다.

일장개천지 위지립은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인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으로, 장력에 관한 한 첫손가락에 꼽히는 절대고수였다.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에서 위지립은 무림맹의 맹주로 선출되기는 했으나, 그동안 무림맹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무림맹이 창설된 이유가 서장무림과의 격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서장무림과의 싸움이 모용 공자와 야율척의 결전으로 싱겁게 마무리되는 바람에 무림맹은 제대로 된 활약을 해보기도 전에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 자연히 위지립 또한 무림맹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삼 년간, 강호는 나름대로 평온했으며 서장무림의 직접적인 위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무림인들의 뇌리에 무림맹이란 이름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누산산의 말이 사실이라면 암중으로는 여전히 그 이름이 존재할 뿐 아니라 강호의 커다란 흐름을 좌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산산은 그 후에도 몇 마디의 말을 더 꺼냈으나 이야기에 맥이 풀려버렸다. 그녀는 진산월이 복잡한 상념에 빠져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다는 걸 알고는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인사를 하고는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나간 후, 동중산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요?”

“별일 아니다. 그보다 석가장에 배첩은 보냈느냐?”

“예. 석 공자에게 내일 정오경에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수고했다. 앉거라.”

동중산이 앞에 있는 의장에 앉자 진산월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일 석가장에 가면 너는 은밀히 석 공자에게 한 사람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도록 해라.”

“낙 사숙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공상춘 말씀이지요?”

“공상춘이 아니라 그의 형인 공영춘이다.”

동중산이 외눈이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개방의 분타주에게 공상춘에 대해 조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습니까?”

“역시 너도 짐작하고 있었구나.”

“낙 사숙이 말씀을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장문인께서 개방의 분타주에게 공상춘이 알아도 상관없으니 그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그 속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게 아닌가 궁리했습니다.”

“네 말대로다. 공상춘을 조사하라고 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이목을 흐리기 위함이었고, 내 목표는 공영춘이다.”

동중산은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장문인께서는 응 사숙에게 위해를 가한 자가 공영춘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이동평의 말대로라면 공상춘은 석가장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바빠서 사소한 일은 신경도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몰락에 버린 종남파에서 불쑥 찾아온 제자 한 사람을 직접 상대할 리가 있겠느냐?”

“……!”

“그에 비해 공영춘은 십이지공자의 시중을 들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신세였으니 계성을 접대하기에 적당한 위치였지.”

동중산은 잠시 침음하다 다시 물었다.

“그들 두 사람은 친형제지간이니 서로 한통속일 확률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큰 상관은 없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상 공영춘은 경각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중요한 건 공영춘이 아니라 그의 배후에 있는 자다. 공영춘은 응계성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지도 않았는데도 그에게 자객을 보내 그를 사로잡아서는 초가보로 보내려 했다. 그러니 틀림없이 그와 초가보 사이를 연결하는 배후 인물이 존재할 것이다.”

그제서야 동중산이 진산월의 의중을 짐작한 듯 외눈을 반짝였다.

“그런 상황에서 공영춘을 조사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은 필시 꼬리를 자르고 숨겠군요?”

“바로 그렇다. 하지만 조사받는 대상이 공상춘이라면 공영춘과 그의 배후 인물도 설마 이 일이 자신들이 몇 달 전에 저지른 일에 대한 것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에 우리는 공영춘의 배후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어쩌면 생각 외로 수월할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공영춘이 십이지공자의 뒤처리를 하고 있다면 그들 중 누군가와 특별히 자주 왕래했을 것이다. 석지명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없다.”

동중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석 공자 입장에서는 종남파와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리 없겠지요.”

“그래서 석지명에게 가서 공영춘에 대해 물어보라고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석 공자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동중산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는 이번 낙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산월은 동중산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네 생각은 어떻냐?”

동중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조금 이상하게 굴러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열이틀째 매일 아침이면 낙양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상인이 한 명씩 죽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죽었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동중산은 흠칫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제 풍림서각의 수석 지배인이 죽었기 때문이다.”

동중산은 누구보다도 총명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일시지간 진산월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피살된 자들은 모두 검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런데 풍림서각의 수석 지배인은 화살에 맞아 죽었지.”

“그 말씀은 풍림서각의 수석 지배인을 죽인 자가 지금까지 연쇄살인을 저지른 자와 다른 인물이란 뜻입니까?”

“그렇다.”

“단순히 흉기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피살된 자들은 모두 업종은 달랐지만 크고 작은 상회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어제 피살된 문지상이란 자는 풍림서각의 지배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아니라 일개 종업원의 신분이었단 말이지.”

“……!”

“지금까지 상회의 주인을 제거한 흉수가 왜 하필 풍림서각에서는 주인이 아닌 지배인을 살해했을까? 더구나 기존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게 활을 이용해서 말이다. 활이란 사람을 은밀히 제거하는 데는 그리 효과적인 병기가 아니다.”

동중산은 멍하니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다가 퍼뜩 생각이 난 듯 혹시……”

“그렇다. 어제 풍림서각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의혹을 느꼈던거지. 전흠은 손풍의 소란을 일으킨 틈을 노려 풍림서각의 내부를 조사해 보았다. 그의 말로는 수석 지배인이 죽었음에도 풍림서각내에 별다른 혼란이 없다고 하더구나. 심지어 명령체계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수석 지배인의 죽음이 풍림서각의 조직 운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석 지배인이 죽었는데도 명령체계가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이미 수석 지배인이 죽을 것을 알고 사전에 명령체계를 정비했다는 뜻이다.”

“누가 알았을까요?”

“당연히 풍림서각주겠지.”

“그렇다면 풍림서각의 주인이 수석 지배인을 살해한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그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연쇄살인을 저지른 흉수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풍림서각의 주인이 아니라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산월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번 연쇄살인의 최종 목표는 석가장주의 석곤이다. 아마 흉수의 목적은 석곤의 수족 같은 상인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석곤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만히 참고 있을 리는 없지.”

“…..!”

“나는 이번 풍림서각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석곤이 흉수에게 반격을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풍림서각의 수석 지배인이 그 대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필연적인 이유가 있겠지. 당연히 흉수로서는 더 이상의 살행을 계속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석곤의 다음 반격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중산은 진산월이 말한 의미를 되짚어 보는지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론일 뿐이다. 보다 정확한 것은…..”

동중산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내일 석곤을 만나봐야 알겠군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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