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5화
제 192장 석가장주
석곤의 거처는 석가장의 동쪽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장주의 거처가 왜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지 의아해 하겠지만, 사실 그 위치는 석가장의 가장 복지이며 또한 중지로, 처음 석가장을 세울 때부터 당대 최고의 지관들을 총동원하여 선택한 아주 특별한 장소였다.
대대로 석가장의 장주들은 그곳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고, 그래서인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의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석가장은 당대에 이르도록 엄청난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진산월은 석지명을 따라 세 개의 작은 화원과 네 개의 월동문, 그리고 두 개의 좁은 소로를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석곤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석곤의 거처는 생각만큼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작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한 채의 건물이 전부였다. 건물 자체도 단층이었고, 석가장 내의 다른 건물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크기였다.
그 건물의 이름은 삼금헌이라 했다.
석지명은 왜 이런 특이한 이름이 붙었는지 그 유래를 설명해 주었다.
“원래 처음 세워질 때 이곳의 이름은 삼행헌이었습니다. 삼행이란 근행, 의행, 덕행을 가리킵니다. 항상 근면하고, 언제나 신의를 지키며, 누구에게나 인덕을 베풀라는 뜻이지요.”
진산월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구려.”
“그런데 이십오대조께서 삼금헌으로 이름을 바꾸셨다고 합니다.”
석가장의 이십오대조라면 진나라 때의 전설적인 거부인 석숭이었다.
“삼금이란 무엇이오?”
금태, 금치, 금채 입니다. 다시 말해서 게으름과 사치, 그리고 돈을 빌려 주거나 빌려 받는 외상 거래를 금한다는 말이지요. 그분께서는 이곳의 이름을 삼금헌으로 바꾸시면서 석가장 내에서는 누구도 그 세 가지를 어기면 석가장의 식솔로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진산월은 잠시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느라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창업과 수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처음 사업을 일으킬 때는 근면과 신의, 인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지만, 번창한 사업을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게으름과 쓸데없는 사치, 그리고 불필요한 돈 거래가 없어야 했다.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석숭은 그것을 식솔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장주의 거처인 삼행헌의 이름까지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 심려만 보아도 석가장의 부가 결코 어느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과 석지명이 별로 높지 않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삼금헌의 작은 앞마당에 막 발을 들여놓았을 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찾아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음성은 삼금헌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석지명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신 진산월, 진대협이시네. 부친께서 뵙자고 초대하셨네.”
안에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더니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삼금헌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짙은 남삼을 입고 이목이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남삼 중년인은 진산월에게 다가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석가장의 이집사인 공상춘이라 합니다.”
진산월은 스스로를 공상춘이라고 밝힌 남삼 중년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만나게 되어 반갑소.”
공상춘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야말로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공상춘의 음성은 낭랑했으며, 목소리의 끝이 분명해서 듣는 사람의 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눈빛은 차갑고 맑았으며, 턱밑으로 몇 가닥의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어 청수한 인상이었다.
석지명은 잠시 후에 오겠다며 몸을 돌렸고, 진산월만이 공상춘의 안내를 받으며 삼금헌 안으로 들어섰다. 삼금헌 겉으로 보았던 인상대로 정갈하면서도 소박한 곳이었다. 정연각에서 보았던 화려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대신 은은한 정취를 나타내는 몇 점의 고서화와 오래된 서탁만이 눈에 띄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천하에 명성을 날리는 부귀 가문의 가주의 거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출한 모습이었다.
사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삼금 중 한 가지는 확실히 지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서탁 너머에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있다가 진산월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쳐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비쩍 마른 얼굴에 볼품없는 용모를 한 육십대 초반의 늙은이였다. 체구도 그리 크지 않았고, 눈빛은 탁하고 흐렸으며, 얼굴 곳곳에는 벌써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허름한 마의였다.
그야말로 시중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하나 이 노인이야말로 당금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이며 이곳 석가장의 당대 가주인 석곤이었다.
진산월은 말로만 듣던 석곤의 모습을 실제로 접하고는 적지 않은 흥미를 느꼈다. 그가 알기로 대대로 석가장의 장주들은 장주에게만 비전되는 특이한 양생법을 익혀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할 뿐 아니라 장수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양생법은 도가무공에서 파생된 것으로, 익히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석곤의 무공의 고수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 본 석곤은 장사만 하다가 늙어 버린 볼품없는 노인 같은 인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흐릿하고 초점이 없는 눈빛은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이 가만히 석곤의 인상을 살피고 있을 때 석곤의 주름살로 뒤덮인 입이 꿈틀거리듯 움직이며 깊은 우물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서 오게. 내가 바로 석곤일세.”
석곤의 나이는 육십이 세.
부친인 석담의 뒤를 이어 석가장의 장주가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의 일이었으며, 검소한 생활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장주가 된 후 석가장의 부는 전대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정설이었다.
남들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면서도 그의 영향력은 지대해서 비단 낙양뿐 아니라 천하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석가장과 함께 부귀삼대가문으로 명성이 높은 혁리세가와 구양세가의 가주들도 그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낙양에서조차 얼굴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석곤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진산월은 소문만 무성한 석곤의 얼굴을 처음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너무나 평범한 모습이어서 실망이 들 법도 했으나, 진산월은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진산월입니다.”
진산월이 특유의 담담한 음성으로 인사를 하자 석곤은 자신의 앞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만나게 되어 반갑네. 앉게.”
진산월이 자리에 앉자 석곤은 공상춘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차 한 잔만 내오고, 자네는 볼일을 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공상춘마저 물러나자 실내에는 두 사람만이 동그마니 남게 되었다. 석곤은 별다른 말이 없이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진산월은 그런 석곤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비가 차를 가져오고, 그 차가 식을 때까지도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석곤이 책을 다 읽었는지 읽고 있던 책을 서탁 위에 올려놓으며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나이에 비해 참을성이 강하군.”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어려서부터 별의별 일을 다 겪다 보니 절절로 참을성이 생기더군요.”
“그런 것 같군. 그래도 자네 나이에 그 정도의 참을성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일세.”
“단순히 제 참을성을 시험하기 위해 저를 보자고 하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책을 그리도 재미있게 읽고 계셨습니까?”
석곤은 서탁 위의 책을 집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직접 확인해 보게.”
진산월은 사양하지 않고 그 책을 건네 받았다. 책의 겉장에는 아무런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다. 진산월은 책의 내용을 읽어 보기 시작했다. 대충 책의 내용만 살필 줄 알았는데, 진산월은 의외로 책의 앞부분부터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이번에는 진산월이 책을 읽고 있었고, 석곤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런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책을 모두 읽고는 석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재미있군요.”
석곤은 책을 받아 자신의 앞에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흥미 있는 내용이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장주께서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는 휘하의 상회가 그처럼 많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모두 선른한 개나 되더군요.”
“내가 장주가 된 지 이십오 년이 지났네. 일 년에 하나씩만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숫자는 아닐세.”
“그 서른한 개의 상회에 소속된 자들만 해도 천 명이 넘을 텐데 짧은 시간 동안에 그들을 모두 조사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진산월은 계속 칭찬의 말을 늘어놓는데도 석곤의 표정이 여전히 심드렁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안 해도 되네. 그들의 신상이야 상회에 들어올 때 이미 파악했던 것이고, 이건 그들 중 핵심 요직에 있는 인물 백 명을 간추린 보고서일 뿐이네.”
“그들 중 서른한 명이 행적이 의심스러운 자들이군요.”
“정확히 상회 하나에 한 명씩이지.”
“공교로운 일이군요.”
“그렇지.”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사람은 의외로 석곤이었다.
“자네는 아직 자네 생각을 말해 주지 않았네.”
진산월의 시선이 석곤의 눈과 마주쳤다, 보면 볼수록 탁하고 흐릿한 눈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아무런 빛도 담겨져 있지 않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으로 빨려 가는 듯한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진산월은 석곤의 그런 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회 인물 서른한 명을 포섭한 자들은 이번에 장주의 상회 열 두 곳의 책임자를 살해한 자들일 겁니다. 그들의 속셈은 책임자를 죽이고 자신들이 포섭한 인물들을 책임자가 되게끔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정도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열두 번째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장주께서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포섭된 자를 먼저 제거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자가 바로 풍림서각의 지배인인 문지상이란 인물입니다.’
“……”
“원래대로라면 그날 아침에 살해되어야 할 자는 문지상이 아니라 풍림서각의 갖주였겠지요. 하지만 흉수가 풍림서각주를 공격하기도 전에 문지상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흉수는 더 이상 살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 것입니다.”
석곤은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친구가 생각이 깊군. 자네 생각은 그게 전부인가?”
“장주께서 저를 만나자고 하신 건 그 일에 관해 제게 무언가 부탁할 게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석곤의 흐릿한 눈에 희미한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그 것은 마치 오래된 우물 밑에 잠겨 있던 낙엽 하나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낙엽은 이내 다시 우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장주께서는 삼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석가장의 장주로 계시면서도 외부인을 거의 만나지 않아 무면공이라는 별칭까지 붙어 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오 년 전에 소림사의 방장이 방문했을 때도 소림 방장의 요청으로 만난 적은 있어도 먼저 남을 청한 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먼저 저를 만나겠다고 하시니 단순히 제가 종남파의 장문인이기 때문에 인사치레로 한 것은 아닐 테고, 결국 제게 무언가 용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잘 보았네. 노부는 확실히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네.”
진산월은 그 부탁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을 뿐이다.
“차가 식었군요.”
석곤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서탁 옆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시비가 모습을 나타냈다.
“차를 새로 가져오거라.”
시비가 따뜻한 차를 새로운 잔에 따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시비가 밖으로 나간 후, 진산월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도 석곤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찻잔을 깨끗하게 비운 후에야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잘 마셨습니다. 담백한 가운데로 톡 쏘는 맛이 있는데, 무슨 차인지 모르겠군요.”
“특별한 이름은 없네. 그냥 내가 후원에서 재배한 차 잎을 따서 말린 것일세.”
“차를 직접 재배하시다니 좀처럼 보기 힘든 일입니다.”
“나의 작은 변덕 중 하나지. 세상에 좋다는 차는 다 마셔 보았지만 어딘가 한 가지씩은 다 미흡한 점이 있더군. 그럴 바에야 내 마음대로 만들어 보리라고 생각하고 일을 벌였지. 맛은 어떻던가?”
진사월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특이한 맛이었습니다.”
석곤의 주름진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한 친구로군. 한때의 변덕으로 만든 것이지만 별로 신통치 않아서 나는 마시고 있지 않네. 가끔 손님이 오면 내와서 품평을 듣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지.”
“다른 사람들은 무어라고 했습니까?”
석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천하일품이라고 말하지 않은 사람은 자네가 유일하네.”
진산월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 중에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입맛을 가진 거겠지. 아무튼 요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맛있다고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는 게 요새의 큰 즐거움이었는데, 자네가 그 즐거움을 깬 걸세.”
“별로 사과하고 싶지 않군요.”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본가에는 언제까지 있을 예정인가?”
“삼 일 후에 떠날 생각입니다.”
“그 전에 한 번 더 오게. 그때는 제대로 된 차를 맛보게 해주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진산월은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석곤과 헤어졌다. 그동안에도 석곤은 자신이 말한 ‘부탁’이란 것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고, 진산월 또한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석지명이 미리 말한 대로 정연각에서 조촐한 연회가 벌어졌다. 조촐하다고 했지만, 차려진 음식상은 결코 조촐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종남파의 누구도 일찍이 보지 못했던 산해진미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 중에는 진산월과 안면이 있는 인물도 있었다.
“진 장문인,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인물은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정도로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봄이라고 해도 저녁나절에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은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뚱뚱보 중년인은 다름 아닌 석가장의 십이지공자 중 첫째인 석석이었다.
진산월은 삼 년 전에 모용 공자에게 초대된 자리에서 처음 석성을 만났었는데, 그때와 전혀 몸의 변화가 없이 여전히 뚱뚱했다. 진산월은 당시 그와 잠깐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깊은 편이었다.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석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쉽게 보기 힘든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럭저럭 지냈소, 당신도 여전히 잘 지내는 모양이구려.”
“저야 먹는 것만 잘 먹으면 만사가 태평인 사람 아닙니까?”
석성은 실낱같은 눈으로 진산월의 전신을 빠르게 흝어보았다.
“그나저나 진 장문인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풍채가 당당했던 것 같은데…..”
“비만이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살을 조금 뺐소, 그런데 당신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때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구려.”
석성은 뚱뚱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헤헤….. 그야 진 장문인께서 이제는 어엿한 일파의 종주이시니 저 같은 장사꾼이 함부로 대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도 나는 본파의 장문이었소.”
“진 장문인도 참 곤란한 질문만 하시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때의 종남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었습니까?”
말은 존칭을 쓰면서도 태연히 이런 말을 지껄이는 석성을 종남파의 고수들이 성난 눈으로 쏘아보았다. 진산월만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역시 진 장문인은 말씀이 통하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천생 장사꾼이오.”
석성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정신 좀 보게. 너무 오랜만에 반가운 분을 만났더니 정작 해야 할 일을 잊었군요. 이분들도 본가에 오신 손님들입니다. 제가 종남파의 장문인을 뵈러 가자고 하자 자신들도 만나겠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늘 기대되는 일이지. 어느 방면의 고인들이시오.”
석성과 함께 온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세 명은 이십대 초반에서 후반까지의 청년들이었고, 한 명은 중년인이었다. 청년들 중 눈부신 백삼을 입고 얼굴이 유달리 새하얀 미남자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먼저 나서서 포권을 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사에서 온 구양전월이라 합니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 백삼 청년에게 향했다. 진산월은 백삼 청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자신도 마주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구양가의 이공자이셨구려. 반갑소. 진산월이오.”
구양전월은 석가장과 함께 삼대부귀가문으로 꼽히는 구양가의 둘째 공자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풍류아였다. 알려지기로는 그는 시서금화에 고루 능할 뿐 아니라 무공 실력도 상당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구양가의 공자답게 상재도 뛰어나서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상회만도 열 개가 넘었다.
삼대부귀가문 사이에 친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석가장에 구양가의 공자가 와 있다는 것은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인물이 구양가의 네 명이나 되는 공자들 중에서도 강호에서의 명성이 가장 뛰어난 구양전월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구양가의 대공자는 구양표일이라는 인물인데, 구양전월과는 달리 파락호로 유명하여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구양가의 당대 가주인 구양망의 나이가 아직 중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벌써부터 후계 구도를 말하기는 이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구양가의 다음대 가주는 둘째인 구양전월이나 셋째인 구양현성 중 한 사람일 거라고 소문을 내고 있었다.
구양가의 공자 중 막내인 구양수진은 상인 가문의 자식답지 않게 무공에 미친 인물이라 아예 가문을 물려받을 생각을 포기하고 연공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형편이었다. 이들 네 명의 공자는 각기 이름 뒤의 글자를 따서 일월성진 사공자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석가장의 십이지공자와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구양전월은 풍류공자라는 소문대로 준수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일행들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저와 함께 석가장에 오신 분들입니다. 먼저 이쪽 분은 구대문파 중의 하나인 점창파의 고수이신 칠절수라 고천동 대협이시고, 그 옆의 두 분은 고 대협의 사질이신 사인기 소협과 관을진 소협이십니다.”
구양전월이 짙은 청삼을 입은 중년인과 두 청년을 가리키며 말하자 중인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점창파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다소 특이한 위치의 문파였다. 그들은 운남성에 본거지를 둔 채 좀처럼 중원으로 나오지 않아 강호에서의 명성은 다른 구대문파들에 뒤처지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십 년을 주기로 문파의 고수를 몇 명씩 강호로 내려 보냈는데, 그때마다 강호를 경동시키곤 했다.
특히 오 년 전에 강호로 출도한 점창파의 젊은 장로인 조빙심은 가공할 신법과 무서운 쾌검으로 열다섯 명의 일류 고수들을 연거푸 격파하여 천하를 놀라게 했다. 덕분에 그는 강호의 십대신법대가 중 하나로 꼽혔을 뿐 아니라, 점창파의 명성 또한 크게 고양시켰다.
당시 조빙심은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불과했는데, 강호에서 경공으로 수십 년간 혁혁한 명성을 떨치던 비응문의 문주인 섬응 학도량을 신법으로 꺾었고, 이어 산서제일의 검객이라는 탈정마검 현우림마저 검으로 패배시켜 강호인들을 경악케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섬응과 마검을 꺾은 젊은 협객이라 하여 그를 신응검협이란 외호로 부르게 되었다.
신응검협 조빙심 이후 점장파를 우습게 보는 강호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칠절수라 고천동은 점창파의 장로는 아니었으나, 점창파의 외총관 신분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천동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반갑소. 점창의 외부 일을 맡고 있는 고천동이라 하오. 그리고 이 두 아이는 본파의 일대제자들인 사인기와 관을진이오.”
고천동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고, 사인기는 이십대 중반, 그리고 관을진은 그보다 어린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보였다. 사인기는 평범한 인상이었고, 관을진은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상당히 잘생긴 인물이었다.
“점창파의 일대제자인 사인기라 합니다.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인기의 인사가 정중한 데 비해 관을진은 다분히 형식적으로 고개만 숙였다.
“점창파의 관을진입니다.”
종남파 사람들의 눈에는 관을진의 그런 행동이 무례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비쳐졌으나 고천동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관을진을 탓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진산월을 대하는 고천동의 태도 또한 그리 정중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고, 이어서 낙일방 또한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사단은 전흠의 차례에서 벌어졌다.
점창파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던 전흠은 고천동과 사인기 등을 쓰윽 흝어보고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전흠이오.”
고천동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지고 관을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반면에 사인기는 흥미로운 눈으로 전흠과 다른 종남파의 고수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몹시도 침착해 보여 동중산은 내심 경각심을 일으켰다.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자로군. 사씨는 흔한 성이 아닌데….. 혹시 점창파의 괴걸이라는 십방랑자 사효심과 관련이 있는 자가 아닐까?’
십방랑자 사효심은 점장파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로, 십오 년 전에 점창산을 내려온 후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워낙 한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떠돌기를 좋아하여 랑자라고 불리게 되었으나, 처음에는 십방신검이란 외호가 붙을 정도였다.
사효심이 활약할 당시의 점창파는 소림과 무당에 못지않은 명성을 구가했고, 사효심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검객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하나 워낙 방랑벽이 심한 사효심은 점창파에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대로 잠적해서 강호에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그 때문에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숱한 소문이 떠돌았다.
귀환 명령을 거부한 사효심이 점창파의 선배 고수들에게 사로잡혀 영어의 몸이 되었다는 말부터, 보다 높은 검법을 익히기 위해 폐관수련에 들었다는 둥,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과 강호를 떠나 깊은 산골에 숨어들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많은 강호인들은 사효심이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강호에서 활약했다면 무림구봉의 이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었다.
점창파에 사씨 성을 쓰는 또 다른 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중산은 왠지 사인기라는 청년이 십방랑자 사효심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중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사태는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 전흠의 무례한 태도에 격분한 관을진이 돌연 그에게 비무를 청한 것이다.
같은 명문정파의 일대제자끼리 비무를 하는 경우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의 연회에 찾아와서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대뜸 비무부터 청하는 것은 예의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고천동은 관을진의 그런 행동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손뼉까지 치며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다. 옛말에도 무인들끼리 검을 겨루어 보는 것만큼 빨리 친해지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오랜만에 강호에 나타난 종남파 고수들과 친분을 쌓기에 적합한 방법 같구나.”
중인들은 어이가 없느지 입을 벌린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건 진산월의 반응이었다. 의당 화를 내거나 거절해야 옳을 텐데 오히려 진산월 또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괜찮은 생각이오. 말이 나온 김에 한 번의 비무로는 뭔가 아쉽지 않겠소?”
고천동의 얼굴에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진 장문인의 말씀은?”
진산월의 시선이 고천동과 사인기, 관을진을 차례로 쓸어보았다.
“점창파의 인원이 모두 세 사람이니 우리 측에서도 세 사람을 내보내겠소, 이번 기회에 기고막측하다는 점창파의 검술을 견식해 보고 싶구려.”
고천동은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한마디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칫 문파 간의 겨룸으로 비쳐지지 않겠소?”
“친분을 쌓기 위한 비무인데 남들 눈에 어떻게 비쳐지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하지만….”
“고 총관께서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일대제자 두 분의 실력만이라도 보도록 합시다.”
진산월이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고천동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좋소, 을진과 인기, 두 사람을 비무에 내보내겠소, 그런데 한 사람이 패하고 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면…..”
“어차피 승부를 가리기 위한 것도 아닌데 아무려면 어떻소? 두 번의 비무의 결과가 어떻든 그걸로 그치도록 합시다.”
“현명한 생각이오.”
고천동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연회장이 때아닌 비무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던 술상이 한쪽 구석으로 치워지고 대청의 중간에 오 장 남짓 되는 공간이 생겨났다. 정연각의 대청이 넓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남파와 점창파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석지명과 석성 같은 석가장의 인물들과 뇌일봉, 구양전월 등의 외부인들도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에 모두들 흥미로운 표정들이었다. 장내가 정리되고 관을진이 먼저 대청의 중앙에 가서 우뚝 섰다.
전흠이 그를 향해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진산월이 살짝 그를 불렀다.
“무슨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전흠이 심드렁한 모습으로 묻자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급적이면 싸움을 오래 끌도록 해라.”
전흠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것뿐이오?”
“그렇다.”
그제서야 전흠이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난 또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소리를 하려는 줄 알았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전흠은 진산월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말 내가 저놈에게 상처를 입혀도 상관없단 말이오?”
“상관없다.”
“죽여도 괜찮소?”
“검에는 눈이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왜 그렇게 관대해진 거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너를 믿기 때문이다.”
전흠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전흠은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더니 냉소를 날리며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 여전하군.”
진산월이 전흠의 굳건한 뒷등을 바라보며 웃고 있을 때 동중산이 슬쩍 그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그들의 비무를 승낙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울고 싶었는데 그들의 뺨을 때려 준 격이라고 할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산월은 여전히 전흠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강호행은 단순히 사매를 데려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본파의 이름을 강호에 널리 떨치기 위한 것도 주요한 목표다. 삼 년 전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구대문파는 우리가 필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마침 그들 중 한 문파를 상대할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어찌 기회를 그냥 버릴 수 있겠는냐?”
동중산도 진산월을 따라 전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조금 전에 전 사숙께 하신 말씀은…..”
“하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더 하는 녀석이니 자기 멋대로 해보라고 내버려둔 것이지, 기본적인 생각은 있는 놈이니 함부로 살수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숙이라면 능히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점창파 일대제자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게 조금 불안하군요.”
진산월은 조금도 걱정스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의 실력이야 직접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동중산이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의 실력이 어쨌든 실전 경험에서는 결코 전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