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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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8화


제 226장 용검쟁투(龍劍爭鬪)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주위는 고요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시간도 흐름을 멈춘 것 같은 순간,
장내에 갑자기 도기와 검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출수(出手)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중인들이 보기에는 그냥 가만히 서 있던 두 사람 사이로 난데없는 도기와 검기가 솟구쳐 오른 것 같았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사방이 온통 도풍과 검영에 휘감겨버렸다.
중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장내의 격전을 지켜보았으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두 사람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점 뿐이었다.
양천해의 도는 중앙에 금색의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일단 그가 손을 쓰면 도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이 금색 실선이 마치 칼 전체에 띠를 두른 것처럼 보여졌다. ‘금도(金刀)’라는 별호는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도 진산월의 사방을 무섭게 압박해 들어가는 양천해의 도는 진산월이 보기에도 금빛으로 테를 두른 것 같아 보였다.

일전에 진산월은 양천해의 사제인 한충과 싸워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막연히 두 사람의 도법이 비슷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 막상 겪어본 양천해의 도법은 한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충의 도법은 칼 자체의 회전력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으로, 좀처럼 보기 드문 괴이한 형태여서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에 양천해의 도법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방식이었다. 다만 엄청 빠르고 무겁기만 했다.
양천해의 도와 처음 부딪쳤을 때 진산월은 하마터면 용영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만큼 양천해의 칼에는 무지막지한 경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칼 한 자루에 그처럼 엄청난 경력을 실을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도가 눈으로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양천해의 도법은 구절마도(九截魔刀)라는 것으로, 초식 자체는 그리 변화무쌍하거나 다양하지 않았다.
한충을 비롯한 양천해의 사제인 무적사도는 구절마도에 각기 개성에 맞게 다양한 변화를 집어놓거나 도를 휘두르는 방식을 독창적으로 개발해서 나름대로의 절학으로 삼았다.
한충의 겁륜구절도도 그렇게 탄생된 무공이었다.
하나 양천해는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변화를 늘리거나 다른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무공 본연의 빠르고 강력함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그것이 그를 구림구봉 중의 하나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되었다.
속도와 무거움을 담게 되자 구절마도는 그야말로 천하의 어떤 도법보다도 더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양천해의 사제들은 ‘정도(正道)가 곧 왕도(王道)’라는 무공의 오래된 격언을 떠올렸으나, 이미 너무 다른 길을 걸어와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천해의 별호에 ‘무적’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나중에 양천해의 사제라는 위치 때문에 그의 사제들에게도 무적사도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들에게는 쑥스럽고 계면적인 일이었다.
지금도 양천해의 칼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일직선으로 진산월의 목덜미를 찔러오고 있었다.
단순히 곧장 앞으로 찔러오는 단순한 일도(日刀)인데도 진산월은 사방이 온통 거대한 칼날로 변해 자신을 짓눌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구절마도의 무서운 점이었다. 칼에 막대한 경력이 담겨 있기 때문에 칼이 움직이면 주위의 공기가 그 힘에 눌려 상대에게 질식할 듯한 압박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더구나 칼이 날아드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빨랐으니 어지간한 고수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진산월도 피하지 않았다. 구절마도는 피한다고 해서 공세를 벗어날 수 있는 무공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양천해와 똑같이 용영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용영검의 검끝에 기이한 광망이 이글거리며 시퍼런 검광이 쭈욱 뻗어 나왔다.
그 검광은 진산월의 목덜미를 찔러오는 양천해의 칼의 도첨(刀尖)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꽝!

칼끝과 검끝이 부딪친 소리치고는 믿어지지 않는 굉장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세찬 경기가 반경 십여 장 내를 송두리째 휩쓸고 지나갔다.
주변에 있던 중인들은 이미 그들이 싸우기 전에 한참 뒤로 물러나 있었기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만에 하나 누군가가 경내에 있었다면 폭발하듯 회오리치는 도기와 검기의 폭풍에 사지가 갈가리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중인들은 모두들 강호의 고수들일 뿐 아니라 경험도 풍부한 자들이어서 이런 사태를 대비해 멀찌감치 피해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들조차도 두 사람의 격돌이 이토록 가공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중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앞을 바라보니 양천해와 진산월이 모두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고 있었다.
양천해의 상반신 옷자락은 여기저기가 검기에 짤려져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군데군데가 베어져 핏물이 흘러내려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진산월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산월은 겉모습은 그런대로 멀쩡했으나 양천해의 막강한 도를 정면으로 받아친 탓인지 용영검을 쥔 오른손의 호구가 찢어져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낯빛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내상(內傷)을 입었음이 확실해 보였다.

두 사람은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세울 사이도 없이 재차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양천해는 여전히 진산월의 목덜미를 노리고 칼을 찔러왔는데, 조금 전과는 달리 칼이 비스듬히 뉘어져 있어 날아오는 각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구절마도 중의 절초인 사양절(獅陽截)이라는 것으로, 조금 전에 펼쳤던 일섬절(一閃截)보다 관통력은 떨어졌으나 날아드는 각도가 예리해서 막기는 더욱 힘든 초식이었다.
진산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중의 용영검을 한 차례 흔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처럼 검끝에서 검광이 폭사해 나왔다.
단지 그 숫자가 이번에는 네 개로 바뀌어져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 검광은 유운검법에서 가장 고명한 수법 중 하나인 유운검광으로, 뿜어져 나오는 검광의 숫자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졌다.

진산월은 양천해의 도에 실린 막강한 경력을 상대하기 위해 유운검법을 선택했는데, 그 결과가 조금 전의 대격돌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번에 펼친 유운사봉(流雲四峯)은 단순히 숫자만 네 개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검광의 경로에도 변화가 있었다. 두 가닥은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칼의 진로를 막아섰고, 나머지 두 가닥은 양천해의 상체를 향해 쏘아져 갔다. 공수를 겸한 그 초식의 운용은 가히 완벽한 것이었다.

파팡!

기이한 각도로 찔러 들어오던 양천해의 칼이 검광에 연거푸 두 번 부딪히며 옆으로 비틀어졌다.
그 사이에 나머지 두 개의 검광이 무서운 기세로 양천해의 인후혈과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양천해는 내뻗었던 칼을 회수했다가 재차 찔러댔다. 거두어들였다가 내뻗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칼이 순간적으로 두 개로 불어났다가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중양절(重陽截)이라는 초식으로, 사양절과 연환하여 사용하면 누구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목구멍이 뚫리고 마는 살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는 초식이었다.

양천해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던 검광이 양천해의 칼에 부딪혀 소멸되었고,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광만이 남았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뻗었던 검광을 거두어들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검광이 양천해에게 닿는 것보다 양천해의 칼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쉬잉!

양천해의 칼이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진산월의 목덜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목덜미의 피부가 갈라져 핏물이 솟구쳐 나왔다.
단지 풍압(風壓)만으로 태을신공으로 보호되어 있는 진산월의 피부를 갈라버릴 정도로 양천해의 칼에 담겨 있는 경력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진산월은 지혈할 겨를도 없이 용영검을 휘둘러 반격을 가하려 했다. 하나 그 순간,
진산월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던 양천해의 칼이 옆으로 비틀어지더니 횡(橫)으로 움직이며 진산월의 목을 향해 왔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찔러오던 칼날이 진행 방향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어떤 물체라도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양천해를 천하제일도객으로 올려놓은 구절마도 중의 절초, 횡단절(橫斷截)이었다.

사양절에서 중양절을 지나 횡단절로 이어지는 연환수법은 구절마도의 연환식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연환수법에 당해 목을 잘린 채 쓰러졌는지 모른다.

누가 보더라도 진산월의 목이 양천해의 칼에 뎅강 베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진산월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진산월의 몸이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어느새 양천해의 좌측 방향으로 돌아서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눈에 신광을 번뜩인 채 장내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운중용왕이 이 장면을 보고 이를 부득득 갈았다.

‘저 보법이다! 저 보법이 대체 무엇이기에 나의 이신수미를 가볍게 뚫고 운중용왕의 절초마저 피해버린단 말인가?’

양천해 또한 진산월의 기묘한 움직임을 예상치 못했는지 칼을 미처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진산월이 용영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유운단악의 검세가 폭포수 같은 검광을 뿌리며 양천해의 몸을 두 쪽 내버릴 듯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양천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검광이 막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에 양천해는 칼을 내뻗던 자세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양천해의 몸이 순간적으로 앞뒤가 바뀌어진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까깡!

양천해의 칼이 결정적인 순간에 진산월의 용영검을 튕겨냈다. 하나 용영검의 기세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는지 양천해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그와 함께 검기 몇 가닥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양천해의 이마가 피범벅이 되었다.

“흐흐흐….. 정말 좋구나!”

양천해는 얼굴에 피칠을 하고서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무심함만이 가득 담겨 있던 두 눈은 기이한 광기에 물들어 있었고, 입가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피로 물든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진산월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진산월 또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유운검법 중의 절초들을 펼쳐 그에 맞서 갔다.

두 사람은 조금 전보다 더욱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들의 싸움이 어찌나 살벌하고 흉험하던지 사람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그들의 격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 중 고수 아닌 자가 없었고, 강호의 숱한 싸움을 겪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누구도 이토록 무시무시하고 가슴 떨리는 격전은 본 적이 없었다.

쾅쾅!

그들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마찰음이 아니라 굉음이 터져 나왔고, 그때마다 주위의 땅이 뒤흔들리며 세찬 도기와 검기가 사방을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운중용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의 싸움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격전을 바라보고 있던 화중용왕이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운중용왕이 입술을 살짝 들썩이자 나직한 전음이 그녀의 귓전에 들려왔다.

“부인께선 저들의 승패를 어떻게 보시오?”

화중용왕 또한 전음으로 대답했다.

“모르겠군요. 지금으로서는 누가 이길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운중용왕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운중용왕이 승리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소.”

화중용왕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당신은 신검무적이 운중용왕을 쓰러뜨린다면 우리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운가요?”

“물론 부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지 않소?
신검무적이 운중용왕마저 꺾은 후 몸을 피해버린다면 누가 그의 앞을 막을 수 있겠소?”

“내가 보기에는 신검무적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서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소? 아무리 신검무적이라도 멀쩡한 상태로 도중용왕을 이길 수는 없소. 그가 부상이 심하다면 훗날을 기약하고 물러날 수도 있소. 물론 주위에 흑갈방의 이십필살이 있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신검무적이 그들의 포위망을 뚫는다면 우리는 크나큰 후환을 남기게 되는 셈이오.”

화중용왕도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잠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운중용왕은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눈치를 보니 구궁보와 신목령의 인물들이 서로 힘을 합칠 수도 있을 것 같소. 그들과 천봉궁이 뭉쳐서 대항한다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오.”

화중용왕은 그를 흘겨보았다.

“그들이 합세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단 말이에요?”

운중용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리 있소? 당초의 계획대로였다면 구궁보와 신목령이 서로 상잔(相殘)하고 그 이후에나 흑갈방의 이십필살이 등장을 할 예정이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신검무적이 화면신사의 정체를 너무 빨리 폭로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것이오.”

화중용왕은 처음부터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운중용왕의 말이 거짓이 아니며,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계획을 세운 운중용왕보다는 화면신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화면신사는 이 자리에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었는데, 굳이 본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직접 끼어들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신검무적에 대한 묘한 경쟁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신검무적이 몰락하는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심이 문제를 불러온 것이다.
운중용왕은 화중용왕의 표정을 살피며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 신검무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 또 이런 기회를 잡게 될지 알 수 없소. 부인도 보셨다시피 어느 한 개인의 힘으로 그를 막기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오. 나중에 크나큰 후환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화중용왕은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잠시 주시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 말대로 후환을 남겨두는 일은 더욱 내키지 않는군요.”

“잘 생각하셨소. 도중용왕이 그를 이길 확률도 절반은 있으니 어쩌면 우리의 걱정이 한낱 기우에 그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부인께서 적당한 때에 손을 쓰시리라 믿겠소.”

화중용왕은 아무 말 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운중용왕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는지 더 이상은 그녀에게 전음을 날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장내의 격전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진산월은 호구가 갈라진 오른손이 계속된 격돌로 생살마저 드러나 있어 검을 잡고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게다가 양천해의 막강한 구절마도에 담긴 경력에 당한 내상이 깊어져서 입가로 계속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천해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다.
그는 유운검법의 변화무쌍한 검초를 완벽하게 막지 못하고 크고 작은 검기에 계속 격중당하는 바람에 온몸이 피로 뒤덮여서 그야말로 혈인(血人)을 연상케 했다.
오직 드러난 건 두 개의 광기 어린 눈과 가끔씩 내비치는 하얀 이빨뿐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병기를 휘두르는 속도와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최후의 진력까지 끌어올리는지 더욱 강력하고 살벌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동작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멈추어졌다.
두 사람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장내의 고수들은 최후의 결전이 임박해왔음을 느끼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바람에 누구도 화중용왕이 허리에 꽂고 있던 나비 모양의 장식 하나를 손에 든 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서로를 응시한 채 미동도 않고 서 있던 두 사람의 몸이 움직인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양천해였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손을 모두 이용해 칼을 움켜쥔 자세로 진산월을 향해 벼락같은 팔도(八刀)를 내질렀다.
항상 일직선상으로만 도를 찔러오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여덟 개의 선명한 칼 그림자가 가공할 기세로 진산월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놀랍게도 여덟 개의 도영 모두에서 똑같이 강력한 경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여덟 명의 양천해가 진산월을 동시에 공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초식이야말로 양천해의 구절마도 중에서 최절초인 팔선절(八線截)이었다.
팔선절은 엄밀히 말하면 양천해의 구절마도의 근간이 되는 일섬절을 연속으로 여덟 번을 펼치는 수법이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지만 그만큼 투로가 단순했던 일섬절이 각기 다른 여덟 군데의 방향으로 거의 동시에 날아든다고 생각해보라.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 그만큼 펼치기가 어려워서 양천해가 이 팔선절을 실전에서 사용한 것은 다섯 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천하제일도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팔선절은 칼을 여덟 개의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거의 동시에 내찔러야 하기 때문에 펼치는 사람의 몸에 상당한 무리가 오게 된다.
초인적인 속도로 움직여야 하기에 근육의 과다한 사용으로 육체가 큰 손상을 입게 되고, 여덟 개의 도에 모두 경력을 싣느라 막대한 공력이 손실되어 단전이 깨어질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양천해는 이 팔선절을 한 번 펼칠 때마다 적어도 보름 이상의 정양을 취하곤 했다.
그런 만큼 그 위력은 실로 막강하여 지금까지는 누구도 그의 이 벼락같은 팔도를 피한 사람이 없었다.

여덟 개의 도영(刀影)이 진산월의 몸을 난도질하려는 순간, 진산월의 용영검이 환영처럼 움직였다.
그러자 솜뭉치처럼 작은 구름이 생겨났다.
그 구름은 순식간에 확대되더니 이내 장내를 완전히 뒤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구름으로 변해버렸다.
그 구름은 무서운 기세로 진산월의 전신을 짓쳐들던 여덟 개의 도광을 덮어버렸고, 팔선절을 펼치고는 체력이 바닥난 채 휘청거리고 있는 양천해의 몸도 그대로 휘감아버렸다.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무섭게 피어올랐던 구름은 나타날 때와 똑같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온몸이 난자당한 양천해가 질펀한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중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천해가 쓰러졌다. 강호의 최고 고수인 무림구봉 중의 하나가 무너진 것이다. 중인들은 자신이 흘린 질펀한 피 속에 잠겨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천하제일도객의 시신을 보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감흥에 젖어들었다.

무림구봉은 지난 세월 동안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각기 한 분야에서 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세의 고수들이었고, 확고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절대자들이었다.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그 자리를 노리고 무수히 도전했으나,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하남성 한쪽 구석의 이름 모를 야산에서 무림구봉 중의 하나가 꺾인 것이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누구라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한쪽에 서 있는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쳐라!”

그와 함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흑갈방의 고수들이 일제히 중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전에 계획한 듯 그들은 두세 명이 짝을 이뤄 중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장내는 검풍과 장력이 휘몰아치고 욕설과 비명 소리가 난무하는 격전장이 되어버렸다.

그 바람에 누구도 진산월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진산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는데, 몸에 두 개의 칼자국이 새롭게 난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양천해의 팔선절 중 여섯 개는 바로 소멸되었으나 나머지 두 개는 각기 진산월의 옆구리와 어깨 부위에 칼자국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두 군데의 상처가 제법 깊었지만, 천하제일도객을 쓰러뜨린 대가치고는 아주 미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그의 몸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의 서 있는 자세가 너무 어색하고 딱딱했다. 게다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탁하고 흐릿해 보였다.

장내가 흑갈방 고수들의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가운데 한 사람이 천천히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운중용왕이었다. 운중용왕은 진산월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아무리 허점을 노린 암습이었다고 해도 신검무적을 단숨에 꼼짝도 못하게 제압해버리다니…”

그의 시선은 진산월의 얼굴을 지나 목뒤로 향했다. 진산월의 목뒤 아문혈(阿門穴) 부위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나비는 비록 정교하게 조각되기는 했으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짜 나비가 아니라 여인들이 머리에 꽂는 장신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된 나비 장신구는 금시라도 날개를 흔들며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 나비 장식품을 보는 운중용왕의 눈에는 짙은 경의와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선녀호접표(仙女蝴蝶慓)의 위력은 놀랍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장신구가 강호 제일의 암기라는 것은 아마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때 거짓말처럼 나비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금속으로 만든 장신구가 진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마음대로 움직이다니……………….

운중용왕이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나비 장신구는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가더니 이내 한 사람의 손에 내려앉았다.

그 손은 잡티 하나 없는 완벽한 섬섬옥수였다. 어찌나 희고 깨끗한지 도저히 사람의 몸에 달려있는 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당연히 나 있어야 할 모공조차 두 눈에 안력을 돋우기 전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나비 장신구는 그때까지도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옥수의 손가락 두 개가 움직여 날개를 접자 그제야 나비는 움직임을 멈추고 평범한 장신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운중용왕은 한참이나 나비 장신구와 옥수를 바라보더니 이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부인의 솜씨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선녀호접표를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구려. 소수마공에 다른 기공을 융합한 것 같기는 한데……….”

손의 주인은 화중용왕이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개인적인 비밀이에요.”

다른 사람의 무공의 비밀을 파악하려는 것은 자칫하면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무림에서는 철저한 금기에 속했다. 더구나 당사자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운중용왕은 입맛이 씁쓸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신검무적은 어떤 상태인 거요? 숨이 끊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혈도가 제압된 것도 아닌 것 같구려?”

“그는 선녀호접표의 접미침(蝶尾針)에 찔려 심신이 제압된 상태에요.”

운중용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접미침에 극독이라도 묻어있는 거요?”

“독으로는 신검무적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접미침에 미인루(美人淚)를 조금 묻혔어요.”

운중용왕의 몸이 움찔거렸다.

“미인루라면……..”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미인루는 독이 아니라 강력한 마비액의 일종이라 만독불침이라도 막을 수 없어요. 게다가 신지(神智)를 상실케 하는 효능이 있어서 일단 체내에 투입되면 누구라도 몸과 마음을 꼼짝할 수 없는 반송장이 되고 말아요.”

물론 운중용왕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원래 미인루는 남자에게 실연당한 어느 여고수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천고의 기물이라고 했다. 마음이 떠난 애인을 잡아두기 위해 만들었으나, 그 위력이 지독해서 당하는 남자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어서라도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여인의 애틋한 마음의 표현인지 아니면 변심한 남자를 향한 여인의 무서운 복수심의 발로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미인루의 악명은 오랫동안 강호에 암암리에 퍼져 나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허나 소문과는 달리 미인루를 실제로 보았다거나 미인루에 당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미인루를 만들었다는 신비의 여고수에 대한 이야기도 정확한 진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인루가 여인들의 상상 속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중용왕은 미인루의 전설이 사실이며, 미인루를 만들었다는 신비의 여고수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고수가 다름 아닌 화중용왕이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화중용왕이 자신을 배신한 산서철혈문의 고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미인루였다. 그녀는 산서철혈문으로 쳐들어가서 그들을 멸문시킨 후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인루를 이용해 반시체 상태로 만들어서 데려갔던 것이다. 그녀가 끌고 간 그를 어떻게 했는지는 그 뒤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운중용왕으로서는 미인루라는 말에 절로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인루까지 사용하다니…. 그녀가 신검무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구나.’

바꿔 말하면 그만큼 신검무적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도중용왕의 처절한 싸움을 직접 본 운중용왕 또한 신검무적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중용왕이 신검무적에게 당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상대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다.

매장원이 방심했을 수도 있고, 설사 신검무적이 정당한 승부로 매장원을 꺾었다 할지라도 운이 좋았거나 무공의 상성이 맞았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신검무적과 손속을 겨루어보고는 자신의 예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신검무적은 소문보다 오히려 훨씬 더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았던 도중용왕과 신검무적의 격전은 그로 하여금 절대로 신검무적과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우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절박감까지 안겨주었다. 양천해는 천하제일도객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절세의 도객일 뿐 아니라 타고난 무공광이어서 운중용왕도 그를 일대일로는 꺾을 자신이 없었다.

아마 칠대용왕 중에서도 단순히 무공만 놓고 보자면 인중용왕(人中龍王)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의 위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런 양천해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상대에게 제대로 된 치명상도 입히지 못하고 온몸이 걸레 조각처럼 변한 채 싸늘한 시신이 되고 말았으니 운중용왕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화중용왕이 좀처럼 남들 앞에서 내보이지 않던 선녀호접표뿐 아니라 꽁꽁 숨겨놓았던 미인루까지 사용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도중용왕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무림의 신화적인 인물이며 자신들의 동료이기도 했던 그의 시신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려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화중용왕은 양천해와 진산월이 최후의 격돌을 할 때를 노려 진산월을 암습했다.

그녀의 강호에서의 지위와 명성을 생각해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로서는 그 이상의 좋은 기회는 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감행한 일이었고 또한 완벽하게 성공했으나, 결코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운중용왕도 그녀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그녀의 암습이 성공하자마자 바로 흑갈방의 이십팔살로 하여금 중인들을 공격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다. 때문에 그들을 제외하고는 장내의 누구도 진산월이 양천해를 쓰러뜨린 직후에 바로 화중용왕의 암습에 당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화중용왕은 손에 쥐고 있던 선녀호접표를 다시 머리 위에 꽂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풍성한 머리에는 유난히 많은 장신구들이 꽂혀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장신구들이 무려 열 개 가까이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꽂혀 있었는데,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운중용왕은 그녀의 머리 위에 꽂혀 있는 각양각색의 장신구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장신구들이 하나같이 사람의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앗아가는 무서운 살인흉기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운중용왕이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화중용왕의 음성이 그를 깨웠다.

“이제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좋겠군요.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또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말이에요.”

운중용왕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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