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3화
제 231장 주차요로(走車了路)
계절은 어느덧 봄의 정점을 지나 사방에서 조금씩 더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위는 그야말로 신록(新綠)으로 물들어 있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나무 특유의 진한 향기가 폐 속 깊숙이까지 가득 밀려들었다.
진산월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하며 신성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셧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몸속에 남아 있는 미인루의 여독(餘毒)이 모두 씻겨 나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괜찮아.”
모인풍과 나자행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그의 몸은 아직 완전하게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을 때는 그런대로 견딜 만 했지만, 걸음을 떼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내공의 흐름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아직 기혈이 환전하게 안정된 상태가 아니어서 함부로 공력을 사용할 형편은 아니었다.
떨어진 체력도 아직 복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오른손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고 있었다.
모인풍은 적어도 열흘간은 절대로 검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몇 차례나 신신당부하기도 했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진산월은 남과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만류하는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고 모인풍의 거처를 나온 것은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방에 적을두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수 없으나,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시급한 일이기도 했다.
모인풍의 거처를 떠난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도중용왕양천해와 처절한 격전을 벌였던 바로 그 공터였다.
몇일 전만 해도 많은 고수들의 고함 소리와 미녀들의 향기가 진동을 하던 숲 속 공터는 텅 빈 채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 저기 움푹 파여진 바닥과 잘려져 나간 나무의 잔해들, 그리고 곳곳에 뿌려져 있는 검게 변색된 선혈의 흔적들이 당시의 흉험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공터의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두 눈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복잡하고 무거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의 긴박했던 상황과 살벌하기 그지 없는 순간들이 흡사 방금 전에 벌어진 일들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양천해의 금도는 정말 무서웠다.’
진산월이 강호에 출도한 이후 만나 본 고수들 중 양천해가 가장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마 중봉을 나온 이후 바로 양천해를 만났다면 패한 사람은 오히려 진산월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단 하루도 무공 연마를 소홀히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매장원을 비롯한 적지 않은 절정고수들과 싸우면서 꾸준히 실력을 배양했기에 그나마 양패구상하지 않고 양천해를 물리칠수 있었던 것이다.
무림구봉은 단순히 상징적인 이름뿐인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온 천하의 무림인들이 한 방면에 있어 강호에서 누구도 견줄 수 앖는 절대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공인한 진정한 고수들이었다.
무림구봉 중 진산월이 직접 만나 본 사람은 소림사의 장문인인 대방과 나자행과 양천해, 세 사람뿐이었으나 그들 모두 각기 권법과 신법, 도에 있어서 천하제일의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들이었다.
무림구봉의 다른 여섯 사람 또한 그들에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봉을 능가한다는 무림삼성은 얼마나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들이겠으며, 그들 위에 홀로이 존재한다는 섬성 모용단죽의 무공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모용단죽을 뛰어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야율척이란 존재는?’
무림구봉 중 하나를 꺽었으나 진산월은 앞으로도 자기 앞에는 무수한 산봉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봉우리들을 모두 올라갈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수 없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험하고 가파른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그는 주저 하지 않고 그 봉우리를 넘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이며, 절대로 중도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봉우리를 넘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진산월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터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한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었다. 오랜 풍상(風霜)에 시달렸는지 소나무의 등줄기는 구부정한 노인처럼 휘어져 있었으나,줄기에서 사방으로 뻗은 가지에는 푸른 솔잎이 가득 돋아나 있어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나날들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그소나무로 다가가 거북의 등껍질처럼 갈라진 나무의 기둥 부위를 몇 차례 쓰다음었다. 그러다 구부러진 나무의 줄기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다시 내려왔을 때 그의 손에는 하나의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운중용왕이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천룡궤였다. 공터로 가기 직전에 진산월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청룡궤를 이 소나무의 구부러진 줄기 사이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운중용왕이 알았으면 너무도 허탈하고 약이 올라서 펄쩍 뛰었겠으나, 진산월로서는 청룡궤를 보호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뿐이었다.
진산월은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 안에 쥐어진 청룡궤를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손검당은 이 청룡궤 속에 청룡객 석동이 가장 아끼는 무공 비급이 들어있다고 했다.’
석동은 아주 오래전 석가장을 거의 말아먹을 뻔한 장본인이었으며 철혈홍안의 남편이라는 신분 외에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신비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청룡객이라는 그의 외호는 진산월이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의 무공비급을 운중용왕을 비롯한 쾌의당과 신목령의 고수들이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얻으려고 한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보다는 이 청룡궤를 둘러싼 전후의 상황들이 오히려 더욱 궁금했다. 대체 철혈홍안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꽁꽁 숨겨 가며 감추어 두었던 청룡궤를 밖으로 내돌릴 생각을 한 것일까? 석동은 그 운반을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부탁한 것일까? 단봉공주는 왜 그토록 청룡궤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고 한 것일까? 모용 공자가 청룡궤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봉황금시를 임영옥에게 준 것은 과연 그의 말대로 청혼의 증표로 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만약 다른 의도에 의한 것이라면, 모용 공자의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청룡궤와 봉황금시가 자신과 임영옥에게 각각 전해진 것은 과연 단순한 우연일 뿐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진산월은 청룡궤와 자신이 거대한 운명의 동아줄로 묶여 있는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운명의 사슬이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다가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지그시 허공을 응시했다.
“어찌 되었건 청룡궤는 지금 자신의 수중에 있다. 구궁보로 가서 모용 대협에게 청룡궤를 전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떠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용 대협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품고 있는 대부분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는 자신을 동여매고 있는 사슬을 서슴없이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진산월은 안광을 번뜩이며 허공의 한 점을 쏘아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는 청룡궤를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런 다음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떻겠소?”
담담한 그의 음성이 정적에 싸인 숲속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한 사람이 십여 장 떨어진 커다란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황삼을 입은 이십 대 미녀였다. 오뚝한 콧날과 이지적인 눈매가 붉은 입술과 묘한 조화를 이루어 차분한 가운데 지적인 매력을 느끼게 했다.
황삼미녀는 진산월의 앞으로 똑바로 다가오더니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주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금 소저일 줄은 나도 몰랐소.”
나타난 황삼미녀는 천봉팔선자 중의 셋째인 영봉 금교교였다.
금교교는 특유의 조용하면서도 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진 장문인께서 사라지신 후 조만간 다시 이곳에 오리라고 예측하셨어요.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이 이곳에서 진 장문인을 기다리기를 원하셨는데, 마침 시간이 남는 사람이 나밖에는 없어서 내가 남게 되었어요.”
“단봉공주가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공주께서는 제게서 일의 자세한 경과를 전해 듣고는 그때 진 장문인께서 청룡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필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숨겨 두었을 거라고 예상하신 거지요.”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때 진산월은 한시라도 빨리 임영옥을 찾느라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청룡궤를 숨기거나 남에게 맡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자연히 이곳에 오기 직전에 근처에 숨겨 둘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단순한 이치를 운중용왕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진산월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의 냉정하고 치밀한 두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허둥대다 정작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에 비해 단봉공주는 금교교에게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일의 맥락을 꿰뚫어 보고 진산월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했으니 실로 일대기녀(一大奇女)다운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어쩌면 운중용왕이 뒤늦게라도 이 사실을 깨닫고 이곳에 수하들을 잠복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나, 금교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안심을 하고 태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청룡궤를 회수했던 것이다.
“단봉공주가 금 소저를 이곳에 남긴 것은 나에게 달리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오?”
진산월의 물음에 금교교는 순순히 시인을 했다.
“공주께선 모용 대협에게 청룡궤가 전해질 때까지 진 장문인께서는 봉황금시를 가진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나보고 내 사매를 만나지 말라는 말이오?”
“꼭 임 소저를 지칭한 것은 아니에요. 누구라도 지금 봉황금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진산월은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모용 대협을 만나기 전에는 청룡궤가 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로군.”
“그래요.”
“꼭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소?”
“그건 제가 말해 줄 수 없는 일이에요.”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한쪽 뺨에 나 있는 칼자국이 움푹 파이며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졌다.
“당신들은 아직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군.”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그 말투에 섞인 냉랭함을 느꼈는지 금교교는 황급히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지요?”
“자신들이 원하는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이오.”
어조는 조용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신랄한 것이었다.
금교교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짝 굳어졌다.
“그 말씀은 수긍하기 힘들군요. 우리는 늘 공정했어요.”
“공정이란 객관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는 거요. 그런데 당신들은 늘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금교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침착하고 냉정한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성난 모습이었다.
“진 장문인의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군요.”
“지나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오. 당신들은 청룡궤의 주인이 아니고 나도 당신들의 수하가 아니오. 내가 청룡궤를 어떻게 할지, 누구를 만날지는 전적으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란 말이오.”
금교교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보면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나 이런저런 요구만 하고 막상 그가 궁금해하는 사안에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으니 자신들이 강압적이라고 느낄 만도 했다.
하나 단봉공주와 자신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청룡궤가 모용 대협에게 안전하게 전달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안의 곡절은 절대로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점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일방적으로 그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금교교는 진산월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채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진산월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을 듯하오. 먼저 가 보겠소.”
그녀는 다급하게 그를 부르려 했다.
하나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산월은 어느새 몸을 돌려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착잡함의 빛이 함께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단순히 단봉공주의 말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며칠씩이나 이곳에서 언제 올지도 모를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와 쓸데없는 승강이를 벌이느라 막상 꼭 해야 할 말을 미처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하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성거리고 있던 그녀는 의미 모를 탄식을 토해 내고는 자신도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기(琦)아야, 어디 있느냐?”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수많은 꽃들로 천채만홍(千彩萬紅)을 이루는 아름다운 화원 사이를 영롱하게 메아리쳤다.
온갖 형형색색의 꽃밭 사이로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활짝 핀 꽃 한 송이를 보는 것 같았다.
“기아야, 어서 나오렴. 이러다 어른들에게 또 꾸지람을 맞을지도 모른다.”
화의미녀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듯 꽃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한 사람을 계속해서 불렀다. 꽃밭 중앙에 있는 작은 동산을 막 넘던 그녀는 동산 모퉁이에서 까닥거리는 한 쌍의 발을 발견했다. 꽃들 사이로 하얀 옥단화(玉緞靴)를 신은 발 한 쌍이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니 누군가가 꽃밭에 누워서 한쪽 발을 무릎 세운 채 까닥거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숨을 멈춘 채 소리를 죽여 발이 흔들거리는 곳으로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그녀가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발의 흔들림이 멈추더니 누군가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쳇, 꼭 좋은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니까. 숨소리를 죽이면 뭘 해? 그렇게 소 떼가 몰려오는 것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한 사람이 풀밭에서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직 채 약관이 되지 않아 보이는 십 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짙은 검미(劍眉)에 눈빛이 맑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준수한 용모의 미소년이었다.
소년과 시선이 마주치자 화의미녀는 배시시 웃었다. 입고 있는 화의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말 한번 곱게 하는구나. 그럼 소 떼한테 깔려 볼 테냐?”
그녀는 고운 용모와는 달리 거친 동작으로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에 그녀의 발은 어느새 소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의 행동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한차례 빙그르 굴려 화의미녀의 발을 피하며 잔디밭 밖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성미하고는, 아…..! 강호인들은 짐작이나 할까? 회하제일화(淮河第一花)라고 칭송받는 옥비연(玉飛蓮)의 취미가 자고 있는 사람을 발로 차서 깨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짐짓 허공을 응시하며 한탄을 하는 모습이 몹시 우스꽝스러웠는지 화의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내가 할 말이다. 강호인들은 안휘에서 제일가는 기재라는 옥기린(玉麒麟)이 사실은 아무 곳에나 늘어져 잠자는 게 취미라는 걸 아무도 믿지 못할 게다.”
그녀는 다시 성큼 소년에게 다가섰으나 그때 소년은 이미 오 장 밖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강호인들은 알까? 회하제일화 옥비연이 말보다 주먹 날리는 게 더 빠르며, 손보다 발을 쓰는 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화의미녀는 소년을 따라 몸을 움직이면서도 지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강호인들이야말로 옥기린이 무공을 쓰기보다 입을 놀리는 걸 더 좋아하며, 나려타곤(驢打滾)의 당대 최고 고수라는 걸 짐작도 못할 거다.”
“아! 강호인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옥비연이 발을 날릴 때마다 그녀의 발 냄새가 사방을 진동한다는 것을, 남자들이 그녀를 무서워하는 진정한 이유가 바로 그것임을 한낱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너….. 그 얘긴 하지 말랬지?”
화의미녀는 소년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배꽃같이 하얀 얼굴이 도홧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하나 그때는 이미 소년의 몸은 화원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하하….. 강호인들은 알까? 그녀가 왜 매일 밤이면 청승맞은 여우처럼 남몰래 후원에 나가 허공을 올려보며 한숨을 짓고 있는지를…. 그건…..”
“거기 안 서?”
소년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고함 소리에 묻혀 버렸다. 곧 두 사람의 신형은 아득히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화원을 벗어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한 채의 고풍스러운 전각 앞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 두 사람은 몇 번이나 투닥거린 듯 의복의 여기저기가 구겨지고 머리가 헝클어졌으나, 전각 앞에 당도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관을 정비하고 머리를 단정히 했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의 모습에 미비한 점이 없는지를 확인해 준 다음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공손한 자세로 전각 앞에 나란히 섰다.
“기아와 경아(瓊兒)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소년이 전각 안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아뢰자 전각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 오너라.”
두 사람은 다시 한차례 빠르게 서로의 의관을 봐주고는 공손한 모습으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대풍각(大風閣)>이란 현판이 씌어진 전각 안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전각 안의 대청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어, 왠지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소년은 화의미녀와 함께 전각 안으로 들어서면서 벌써 그 분위기에 짓눌렸는지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으나 내색하지 않고 전각을 가로질러 중앙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팔선탁이 놓여 있었는데, 팔선탁 주위에 여섯 명이 둥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선탁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십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세 줄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년과 화의미녀는 팔선탁에 있는 여섯 명의 인물들 중 유난히 눈빛이 서늘하고 검은 수염을 턱까지 기른 초로의 중년에게 다가가 나란히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기아와 경아가 백부님을 뵙옵니다.”
중년인은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조용한 시선이었으나 왠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힘이 담긴 눈빛이었다.
“백부가 아니라 가주라고 불러라. 지금 이곳은 세가의 일을 논하는 자리이니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너희를 오라고 한 지가 일각이 넘었는데, 이제야 도착하다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냐?”
크게 화를 내거나 꾸짖는 음성이 아니었음에도 소년과 화의미녀의 얼굴은 모두 창백하게 변했다. 소년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허리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중년인도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은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턱 끝으로 가장 구석의 자리를 가리켰다.
“가서 앉거라, 잠시 후에 너희들의 의견도 듣겠다.”
“예.”
두 사람이 구석의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자 중년인은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오십 명에 가까운 적지 않은 인원들이 앉아 있음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열거나 인기척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사람을 닮은 석상들이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중년인은 물처럼 고요하면서도 서늘한 시선으로 장내의 인물들을 한 사람씩 훑어보더니 이윽고 팔선탁에서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는 마른 체구의 백삼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신보당주(神步堂主), 지금까지의 경과를 말해 보게.”
백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보당(神步堂)을 맡고 있는 남궁욱상(南宮旭翔)입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오늘 갑작스레 세가연석회의(世家連席會議)를 개최한 것은 조만간 올 것으로 예상되는 종남파의 비무첩에 대한 대책을 검토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오전에 신보당에서는 종남파의 고수들이 회남성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주위는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하여 맑고 청명한 그의 음성이 넓은 전각의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곱 명으로,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중년인, 세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어린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 중 장문인인 신검무적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에 북문 근처에 있는 가빈루(嘉賓樓)에 여장을 풀었으며, 현재 가빈루의 별채 후원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남궁욱상이 다시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팔선탁에서 중년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우람한 체구의 중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음성은 굉장한 울림을 담고 있어서 가뜩이나 조용했던 전각 안에 마치 뇌성병력이 친 것처럼 크게 들렸다.
남궁욱상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중노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감히 그의 말에 무어라고 토를 달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중노인의 옆에 앉아 있는 머리가 허옇게 세고 비쩍 마른 인물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 게냐?”
중노인은 그를 힐끔 쳐다보며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깟 종남파가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미리 사람을 풀어 그들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둥 전체 연석회의를 연다는 둥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남궁세가란 말이오.”
“그래서?”
“그래서라니? 형님은 본 가의 강호에서의 지위와 명성으로 보아 종남파를 상대하는데 이런 호들갑을 떠는 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백발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라면 우선 그들을 가빈루 같은 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회남성의 성문을 넘자마자 그 즉시 본 가로 불러들이겠소.”
“그래서?”
“그들이 꽁무니를 빼기 전에 날짜 잡아서 바로 비무인지 뭔지를 후다닥 해치워버려야지. 마침 그들에게는 신검무적도 없다면서요? 신검무적만 아니라면 나머지 떨거지들은 신검당(神劍堂)의 팔수(八秀)들만으로도 충분할 거요.”
백발노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백발노인이 무색투명한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중노인은 조금 불편한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럼 형님의 생각은 다르단 말이오?”
“네가 그 실력을 가지고도 왜 지금까지 당주(堂主)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장로(長老)에 머물러 있는지 아느냐?”
“또 그 소리요? 내가 너무 앞뒤 분간을 못해서 남을 이끄는 자리에는 못 앉힌다고? 장로가 뭐 어때서? 당주보다 높은 자리면 되지 않소?”
백발노인은 손으로 팔선탁을 가볍게 쳤다.
“이런 데 앉아 있으니까 네가 제법 남들의 우러름을 받는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지? 하지만 아쉽게도 본 가의 실질적인 권력은 팔개당에 있다.”
중노인의 숯검정 같은 짙은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럼 장로는 뭐 하는 자리란 말이오?”
백발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 있으면 된다. 가끔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상대가 나타나면 한 손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제법 싹수가 있어 보이는 놈을 발견하면 쓸 만한 재목으로 키워 팔당(八堂)에 보내기도 하고… 가주가 심심하면 말동무가 되어 주면 되는 것이다.”
중노인은 거친 콧소리를 내었다.
“흥! 그런 건 형님이나 하시오. 난 그런 한량 같은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니까.”
백발노인은 다시 한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장로가 되는 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그런데 너는 부득부득 낙선원(落仙院)에 들어갈 바에는 장로를 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느냐?”
중노인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뒷방 늙은이처럼 할 일 없는 쭈그렁바가지 노인네들이 모여서 노닥거리는 곳이 바로 낙선원 아니오? 그곳에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칼을 깨물고 죽는 게 낫지!”
“그래도 어쩌겠느냐? 우리 나이에는 그런 곳밖에 갈 데가 더 없는 걸.”
“그럼 팔당 말고 사전(四殿)이라도….”
“네가 할망구냐? 그곳에는 육십 넘은 여자들만 출입할 수 있다는 것도 잊었느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던 중노인이 부쩍 기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어떡하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기껏 장로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형님 말대로라면 낙선원의 늙은 귀신들과 다를 게 없지 않소?”
“그래서 장로가 되느니 차라리 낙선원에 들어가는 게 어떠냐고 했던 거다.”
“장도가 이렇게 한심한 자리였다니….”
중노인은 풀이 죽어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백발노인은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리고는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늙은이들의 주책을 용서해 주기 바라오, 가주.”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더 좋은 자리에 모시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백발노인은 싱겁게 웃었다.
“본 가에서 이보다 더 편하고 좋은 자리가 어디 있겠소? 남들의 존중을 받으면서도 부담스런 책무는 별로 없으니 노부는 아주 만족하고 있소. 너무 우리에게 신경 쓰지 말고 가주의 일을 보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중년인의 남궁세가의 당대 가주인 남궁탄(南宮灘)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설전을 벌였던 두 사람은 중주 일대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날렸던 유명한 고수들인 검기쌍절(劍棋雙絶)이었다.
백발노인이 기협(棋俠) 남궁추(南宮推)였고, 우람한 체구의 중노인이 남궁추의 사촌동생인 검패(劍覇) 남궁철(南宮鐵)이었다.
두 사람은 항렬로는 남궁탄의 숙부가 되었고, 나이는 벌써 팔십에 가까웠다.
남궁세가에서는 그들의 대우에 여러모로 신경을 쓰다가 결국은 네 자리뿐인 장로의 지위를 주었으며, 그들 두 사람 외에 다른 두 명의 장로 또한 비슷한 항렬의 전대 고수들이었다.
그들과 같은 항렬의 노인들이 대부분 원로원격인 낙선원에 들어간 것에 비해 그들 네 사람이 장로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그만큼 그들이 아직은 세가 내에서 활용 가치가 높은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기협 남궁추는 대인 관계가 넓고 강호의 견식이 누구보다도 풍부하여 세가의 대외적인 일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검패 남궁철은 압도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어 지금도 세가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중 낙성군자(落星君子) 남궁도(南宮陶)는 강호무림의 십대신법대가에 꼽히는 경공의 고수였고, 절옥검(切玉劍) 남궁진(南宮鎭)은 쾌검의 달인이었다.
남궁탄과 그들 네 명의 장로 외에 팔선탁에 앉아 있는 마지막 인물은 허름한 마의를 입은 초로의 인물이었다.
남궁탄보다 몇 살 많아 보이기는 했으나, 다른 네 명의 장로들과는 나이 차이가 적지 않아서 언뜻 보기에도 장로의 신분이 아닌 듯했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는데, 짙은 속눈썹에 이목구비가 수려하여 젊은 시절에는 많은 여인들의 환심을 샀을 게 분명해 보였다.
남궁탄 또한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네 명의 장로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후 말문을 열었다.
“신보당주가 말한 대로 종남파가 화남에 들어왔네.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네. 한상(寒翔), 자네는 그들이 언제쯤 비무첩을 보내오리라고 생각하는가?”
팔선탁 주위에서 다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채구가 뚱뚱하고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남궁한상(南宮寒翔)이란 인물로, 남국욱상의 친동생이며 신명당(神明堂)을 맡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짧으면 삼 일이고, 길어도 오 일을 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들은 신검무적과 동행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본 가와의 비무를 앞둔 상황에서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이 그들 일행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얼마 전부터 강호에 퍼지기 시작한 신검무적과 금도무적 양천해와의 대결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 신검무적
이 현재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소문이 어느 정도 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본 가와 비무를 하려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굳이 이곳 회남에 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남궁탄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들이 단순히 무당산의 대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곳을 지나갈 확률은 없는가?”
옆에 서 있던 남궁욱상이 앞으로 나섰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신보당에서는 그들이 하남성을 벗어날 때부터 그들의 행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나온 곳을 되짚어 본다면 그들이 본 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무당산 쪽으로 갈 생각이었다면 이쪽이 아니라 남양(南陽)으로 갔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무당산이 있는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방향을 꺾은 것은 본 가로 오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남궁욱상의 단정적인 말에 남궁탄은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신분은 모두 확인했는가?”
그들 일곱 명 중 유일한 노인은 진산수 뇌일봉입니다. 뇌일봉은 아시다시피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임장홍의 친구입니다. 두 명의 중년인 중 애꾸눈은 비천호리 동중산이고, 세 명의 청년 중 둘은 신검무적의 사제들인 옥면신권과 폭뢰검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청년과 아이는 이번에 종남파에서 새로 받은 제자들임을 확인했습니다.”
“모두 여섯이로군. 다른 한 사람은?”
남궁욱상의 얼굴에 처음으로 약간의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그자가 문제입니다. 분명 여남에서 청의방과 비무를 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종남파의 일행에는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들의 일행에 속해 있더니 지금까지 계속 함께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자의 신원은 알아냈나?”
남궁욱상은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기도가 범상치 않은 사십대 중반의 인물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내역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남궁탄은 굳이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강호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남궁탄으로서는 아무리 남궁욱상과 그가 이끄는 신보당의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강호의 모든 인물들을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흠….. 기도가 범상치 않은 중년이라…. 그자가 종남파의 고수일 확률은?”
남궁욱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종남파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이미 강호상에 세세하게 알려진 상태가 아닌가?”
“일단 강호에 알려진 종남파의 고수들 중 그 중년인과 같은 인상착의의 인물은 없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종남파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짧은 순간에 너무 급속도로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뇌일봉처럼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과 친한 사이의 인물이 아닐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인 임장홍의 지인이라면 강호에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일 텐데 제가 알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라…”
남궁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남궁한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자가 이번 일에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겠나?”
남궁한상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자가 신검무적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작은 변수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대세를 바꾸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세라….. 자네가 생각하는 대세는?”
“그들에게 신검무적이 없다면 본 가의 필승, 신검무적이 있다면 승산은 절반 이하의 확률이라고 봅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눈을 감고 있던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마치 한 줄기 섬광 같은 빛이 장내에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중년인은 다시 눈을 감았으나 남궁한상은 뚱뚱한 얼굴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남궁탄은 그 광경을 못 본 사람처럼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지금은 신검무적이 그들 일행에 속해 있지 않지만, 언제라도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제가 그들이 본 가에 비무첩을 바로 보내지 않고 삼일에서 오일의 시간을 끌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그들이 그곳에서 신검무적과 만나기로 약속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일 후에도 신검무적이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온 강호의 이목이 이곳에 쏠려 있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본 가의 코앞에까지 와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오일이 한계일 것입니다.”
“신검무적이 합류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것도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신검무적이 강호의 소문대로 양천해와 싸워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아무리 신검무적이라고 해도 짧은 시간에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할 수 없기 때문에 본 가의 승률은 칠할 이상으로 올라간다고 봅니다.”
“신검무적이 완벽한 상태로 합류한다면….?”
남궁한상은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감고 있는 중년인을 슬쩍 돌아본 다음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게 보아야 사할, 정상적이라면 삼할 정도라고 봅니다.”
“본 가가 이길 승률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형님이 가세해도 말인가?”
남궁한상은 다시 중년인의 눈치를 슬쩍 살핀 다음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가세하기에 그 정도의 승률이라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군.”
남궁탄도 이제는 대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신검무적은 단신으로 강북무림을 거의 초토화시킨 절세의 검객일뿐 아니라 무림구봉 중 하나를 꺾은 신화(神話)의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한 개인에 불과할 뿐이지만, 지금 현재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수들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두려운 존재였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종남파는 강호의 어떤 문파와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종남파의 진영에 신검무적 대신 양천해를 놓고 판단해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천하제일의 도객이라는 양천해가 가세한 종남파의 진영은 결코 남궁세가의 아래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양천해를 쓰러뜨린 신검무적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자명할 게 아니겠는가?
“어렵군…어려워….”
남궁탄은 오른손으로 이마의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한결 신중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항상 모든 일에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대책을 세우는 게 순리겠지. 신검무적이 정상적인 몸 상태로 그들에게 가세했다고 가정하고, 본 가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남궁한상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본 가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첫째는 신검무적과 종남파의 역량을 순순히 인정하고 본 가의 전력을 다해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비록 본 가는 그들에게 패할 확률이 높지만, 그렇다고 청의방처럼 굴욕적인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궁탄의 눈빛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자네는 아직 모르는군. 강호에서 굴욕적이지 않은 패배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남궁한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로 인해서 그는 남궁탄이 아예 남궁세가의 패배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둘째는 종남파와의 비무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본 가에서 어떤 사유를 대든 그들의 비무첩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결코 두 번 다시 비무첩을 보내오지 않을 겁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자들은 있겠지만, 본가는 정식으로 패한 것이 아니니 어떤한 굴욕도 당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남궁탄의 목소리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는군. 본 가의 역사에서 남과의 싸움이 두려워 피한 적은 없었네.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럼 세 번째 선택을 말씀드리지요.”
남궁한상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을 뒤흔들어 비무에서 기필코 승리하는 것입니다.”
남궁탄의 얼굴에 비로소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의견은 모처럼 마음에 드는군.”
남궁탄은 안광을 번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신명당주(神明堂主)의 제일 마지막 의견이 지극히 합당하며 본 가의 법도와도 맞다고 생각하오. 이견이 있는 분은 말씀해 주시오.”
그의 시선은 제일 먼저 팔선탁에 앉아 있는 네 명의 장로를 향했다. 그들 중 한두 사람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 얼굴들이었으나, 누구도 고개를 젓는 사람은 없었다.
남궁탄의 시선은 눈을 감고 있는 중년인을 훑듯이 스치고 지나쳐서 이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장내의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소리 내어 거부 의사를 밝히는 자는 없었다. 다만 화의미녀와 함께 제일 마지막으로 전각에 들어왔던 소년만이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갈등 어린 표정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소년 또한 끝내 한마디도 입을 떼지 못했다.
소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화의미녀가 남들의 눈을 피해 필사적으로 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 남궁세가에서 누구나가 제일가는 기재로 첫 손가락을 꼽는 옥기린 남궁기(南宮琦)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절규를 소리 없이 내지르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정녕 본 가의 법도란 말입니까? 대체 왜 그렇게 어긋난 길을 가려 하는 것입니까,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