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4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4화


제 232장 종횡무영(縱橫無영)

가빈루는 회남에서 제일 큰 주루는 아니었으나, 한 가지 점에서는 가장 유명했다. 그것은 바로 음식 솜씨가 다른 어느 곳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부 요리는 가빈루뿐 아니라 회남 전체의 자랑이기도 했다.
‘회남에 와서 가빈루의 두부 요리를 맛보지 못한다면 헛걸음을 한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두부 자체가 원래 회남에서 처음 발원한 것으로, 도가(道家)에 심취한 한(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鞍)이 회남의 팔공산(八公山)을 오르다 여덜 명의 신선들에게서 불로장생의 비법으로 두부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 뒤로 회남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거니와, 회남의 크고 작은 주루들 중에서도 두부 요리를 가장 잘하는 곳이 바로 가빈루였다. 그래서 가빈루에서 처음 묵게 되었을 때 손풍은 내심 기대하는 바가 컸다. 풍류를 즐기는 파락호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다는 평상시의 장담과는 달리 손풍이 섬서성 밖을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로운 지역을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유명한 음식들을 맛보는 것이 요즘 그의 가장 큰 도락(道樂) 중 하나였다. 하나 잔뜩 기대했던 저녁 식사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음식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손풍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우거지상을 한 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어디서 이런 빌어먹다 죽을 놈팡이 같은 자가 찾아온 건지…’ 양손으로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우고 있는 사람은 허름한 남삼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머리가 부스스하고 행색이 추레해서 별로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으나, 얼굴은 그런대로 준수한 편이었다.

“이거 정말 기가 막히군. 별미야, 별미.”

중년인이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중인들은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들이었다. 손풍은 한술 더 떠서 아예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풍류를 안다고 생각하는 손풍은 적어도 음식을 먹을 때는 제법 예법을 지키는 편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앞에서 저토록 추잡스럽게 음식을 먹는 중년인의 모습에 입맛이 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두부는 쉽게 부스러지는 음식이라 탁자의 곳곳에는 중년인이 먹다 흘린 두부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손풍뿐 아니라 다른 몇몇 사람들의 표정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동중산만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눈으로 중년인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중년인이 식사를 마쳤는지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트림까지 시원하게 하고는 동중산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너무 주책을 부려 미안하오.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서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어 있던 참인지라 맛있는 음식을 보자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오.”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잔뜩 찡그렸다.

‘이틀 굶은 게 그 정도면 하루만 더 굶었으면 아예 식탁까지 먹어 치웠을 게로구나.’

“하하… 식사 대접 한 번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성격이 바뀐 거요?”

“좋은 차와 맛있는 음식이 나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이긴 하오. 그래도 이곳에 무림의 선배도 계신데 내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나를 너무 후안무치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겠소?”

말을 하면서 중년인의 시선은 한쪽에서 딱딱한 얼굴로 앉아 있는 진산수 뇌일봉을 슬쩍 응시하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그와는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중년인은 조금도 불편한 표정을 짓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여우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년인은 호반유객 이동정이란 인물로, 동중산과는 서안의 이씨세가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무림구봉 중 제일 가는 신비인이라는 번신봉황 이북해의 하나뿐인 동생으로, 발이 넓고 강호의 소식에 정통해서 강호의 명숙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뇌일봉 또한 그를 몇 번 만난 적은 있었으나 흉금을 터놓고 사귈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어서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잔꾀가 많고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친구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뇌일봉의 지론(持論)이었다. 하나 동중산은 그와는 생각이 다른지 누구보다도 반가운 얼굴로 가빈루에 불쑥 나타난 이동정을 맞이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이곳까지 달려온 걸 보면 우리에게 전할 급한 소식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이제 슬슬 털어놓는 게 어떻겠소?”

동중산이 넌지시 말하자 이동정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동 형이 왜 이렇게 나를 반기나 했더니 결국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구려, 하긴… 밥을 먹었으니 밥값을 해야겠지.”

이동정은 가벼운 너스레를 떨더니 한결 진중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틀 동안 오백 리를 달려온 것은 동 형이 예측한 대로 종남파에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소. 다행이 서두른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건 무슨 의미요?”

이동정은 정색을 하고 오히려 되물었다.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냈소?”

“아직 보내지 않았소. 오늘과 내일은 이곳에서 쉬면서 여독(旅毒)을 풀고 모레쯤 보낼 생각이었소.”

이동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식사도 거르면서 달려온 보람이 느껴지는군. 종남파에서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내기 전에 도착하려고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동 형은 상상도 못할 거요.”

동중산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정과는 비록 서안에서 몇 차례 만나서 이세적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 할 교분이 없는 사이였다. 이동정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상통하는 부분도 있어서 대화 상대로는 괜찮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그와 문파의 일을 논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동정이 종남파와 남궁세가의 비무 때문에 이틀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오백 리를 달려왔다니 그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동정은 질질 끌지 않고 바로 그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 장문인이 금도무적 양천해와 싸웠다는 것은 알고 있소?”

진산월의 이야기가 나오자 동중산은 물론이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바뀌었다.

“소문을 들었소. 며칠 전부터 조금씩 그런 소문이 퍼지더니 지금은 아예 기정사실화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 그런데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오?” 동중산이 외눈을 번뜩이며 묻자 이동정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한 사실이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서 그 전설적인 격돌에 대한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소.”

“그 목격담이란 것을 우리도 들을 수 있겠소?”

“나도 자세리 듣지는 못했소. 다만 진 장문인이 구궁보의 고수들을 공격하려던 쾌의당에 맞서 싸우다 양천해와 겨루게 되었다고 하오.”

동중산은 흠칫 놀랐다.

“양천해도 쾌의당의 인물이었단 말이오?”

“그렇소, 괘의당 칠대용왕 중의 도중용왕이 바로 양천해였소. 두 사람은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바로 격전을 벌였는데, 실로 보는 이를 전율케 할 만큼 무시무시한 싸움이었다고 하오. 지난 십 년 동안 강호에서 벌어진 일대일 격투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살벌한 싸움이었다는 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고 하더구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구궁보의 고수 몇 사람과 신목령, 천봉궁, 그리고 쾌의당의 인물들이오.”

동중산은 침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으나 그 말을 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정이 말한 문파들은 하나같이 당금 무림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재감이 큰 거대집단들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거요?”

“그 안의 자세한 내막은 나도 아직 알지 못하오. 아무튼 두 사람은 가히 경천동지할 싸움을 벌인 끝에 양천해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이 끊어지고 진 장문인 또한 적지 않은 부상을 당했다고 하오.”

동중산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은 손에 땀을 쥐고 이동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진산월이 부상을 당했다는 말에 모두들 표정이 굳어졌다. 진산월이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을 정면 대결에서 꺾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그들의 얼굴을 활짝 펴게 만들지 못했다. 그것은 그만큼 진산월이라는 존재가 그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어떠한 소식도 진산월의 안위보다 소중하지 못한 것이다.

“장문인의 부상은 어느 정도요?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었으면 좋겠구려.”

동중산의 애타는 물음에 이동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에게 목격담을 말한 사람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소. 그러니 아무리 나에게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소.”

“이 형에게 목격담을 말해 주었다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요?”

이동정도 이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천봉팔선자 중의 막내인 옥봉 누 소저요. 그녀와 영봉 금 소저, 남봉 엄소저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오.”

“천봉팔선자가 세 사람이나 있었는데도 누구도 장문인의 상세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오?”

동중산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이동정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고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아도 달라질 건 없소. 그녀들은 진 장문인과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었던 데다 당시의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고 하오.”

“다급한 상황이라니?”

“양천해가 진 장문인의 손에 쓰러지자 다른 두 명의 용왕과 쾌의당의 고수들이 동시에 그녀들과 다른 중인들을 습격했다고 하더구려.”

동중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자리에 양천해 말고도 쾌의당의 용왕이 두 명이나 더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그들은 어찌 되었소? 아니, 장문인께선 어찌 되셨소?”

“그들이 진 장문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순간에 연막탄이 터지며 누군가가 진 장문인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 나간 모양이오.”

“그게 누구요?”

“그건 그녀들도 모르고 있소. 아무튼 그때 그녀들은 쾌의당의 습격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던 터라 진 장문인 쪽으로는 제대로 신경을 기울일 경황이 없었소.”

이동정의 말을 듣고 있던 동중산과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은 여러 차례 변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부상을 입은 채로 쾌의당의 용왕들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말에는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가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말에 환해졌다. 하나 진산월을 구해 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말에 다시 그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동중산은 무거운 표정으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이동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형이 불원천리하고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그 말만을 전하기 위한 게 아닐 거요. 좀 더 자세한 속사정을 밝히는 게 어떻겠소?”

이동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 형의 눈치는 정말 비상하구려. 사실 누 소저에게 들은 건 그게 전부였지만, 그 뒤로 내가 나름대로 뛰어다녀서 전해 들은 게 있소.”

“당신의 발이 누구보다 넓고 귀가 밝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지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나는 진 장문인을 데려간 의문의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소. 마침 그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의 거처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그곳으로 가 보았소.”

“차근차근 말하시오. 단신이 짐작했다는 그 사람이 누구요?”

“두 명의 용왕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사람을 빼내서 사라질 수 있을 정도의 신법을 지닌 자는 강호에 열 명뿐이오. 그중에서 누런색 연기가 나는 연막찬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소.”

“그가 누구요?”

“개방의 용두방주인 만리무영개 나자행, 나 대협이오.”

동중산의 외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럼 그 연막탄은 개방의 현황탄이겠구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마침 그곳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벽송림(碧松림)에는 나 대협의 오랜 친우인 해수 모인풍 대협의 거처가 있소. 그래서 나는 나 대협이 진 장문인을 구해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곳으로 달려갔던 거요.”

“그곳에서 장문인을 보았소?”

동중산의 기대 어린 물음에 이동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진 장문인은 그곳에 없었소. 하지만…”

동중산이 실망의 표정을 짓기도 전에 이동정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나 대협을 만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소. 진 장문인을 구해 간 사람은 바로 나 대협 본인이었소.”

동중산과 중인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장문인은 이 형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곳을 떠난 것이겠구려?”

“그렇소. 하지만 모 대협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난 나는 전력을 다해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소.”

“왜 그렇소?”

“모 대협의 말로는 진 장문인의 상세가 워낙 위중해서 비록 몸을 움직일 수는 있을 지언정 남들과는 싸울 수 없는 상태라고 했소. 특히 오른손의 상처가 심해서 적어도 열흘간은 절대로 검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소.”

그 말에 동중산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나는 당신들이 남궁세가를 다음 비무의 상대로 정하고 움직인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들이 진 장문인을 만나기 전에 먼저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전해 버린다면, 진 장문인이 나중에 합류한다고 해도 진 장문인은 남궁세가와의 비무에 나설 수 없게 되오. 그렇다면 비무는 해보나 마나 결과가 너무도 자명하오.”

이동정은 동중산과 종남파의 고수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적어도 열흘간은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전해서는 안 되오. 진 장문인이 다시 손에 검을 쥘 수 있을 때까지 말이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 내가 이곳까지 달려온 시간을 생각하면 팔 일이 되겠군. 알겠소? 앞으로 팔 일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궁세가와 비무를 해서는 안 된단 말이오.”

동중산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종남파의 다른 고수들도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아무도 무어라고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동정은 자신이 이 말을 하면 종남파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해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있자 의아한 생각과 놀랍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종남파의 인물들은 정말 특이하군. 문파의 장문인을 끔찍하게 위하는 것 같은데도 장문인의 부상 소식에 누구도 경동(驚動)하는 사람이 없구나. 그런데 장문인의 소식을 알게 되면 당연히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포기할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그들은 정말 자신들만으
로 남궁세가와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동정은 그들의 면면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대 장문인의 친구인 진산수 뇌일봉을 제외하고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고수는 요즘 들어 강호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옥면신권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신검무적에 이은 종남파 재건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가공할 권법만큼이나 준수한 용모로 뭇 여인들의 방심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폭뢰검 전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검법의 소유자로 조금씩 명성이 퍼지고 있었으며, 비천호리 동중산은 무공 실력은 약간 처질지 몰라도 지혜롭고 심기가 깊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다른 두 명의 제자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공에 갓 입문한 풋내기들임이 분명해 보였고, 그중 한 명은 이제 갓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이동정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는 청수한 이목의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검은 수염을 기르고 눈빛이 유난히 맑은 인물이었다.

‘평범한 인상이 아니로군, 필시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일 것이다. 저자도 종남파의 인물일까?’

이동정은 재빨리 머릿속을 뒤져보았으나 그러한 용모파기의 인물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동정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검은 수염의 중년인이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그를 처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동정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맑고 투명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 속에 짐작키 어려운 막강한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동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절로 안색이 변했다.

‘검더(劍道)의 고수로구나. 더구나 무형지기를 방출할 수 있을 정도의…. 대체 어디서 이런 검객이 나타났단 말인가?’

이동정은 재빨리 종남파의 현재 역량을 가늠해 보았다.

당금 무림의 절정고수로 올라서고 있는 옥면신권과 그에 미치치못하지만 상당한 실력을 지닌 폭뢰검 전흠, 그리고 거기에 무형지기를 방출할 정도의 절세검객이라면 아무리 남궁세가라 해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신검무적이 가세한다면….생각만 해도 기가 질리는군. 대체 몇 달 전만 해도 다 무너져 가던 종남파가 언제 이런 전력을 보유했단 말인가?’

문제는 검은 수염의 중년인이 과연 종남파의 고수일까 하는 점일것이다. 하나 그가 이 자리에 자연스레 합석해 있는 것만 보아도 종남파의 소속이거나 종남파에 아주 가까운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즉 언제라도 종남파를 위해 기꺼이 손을 빌려 줄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종남파의 전력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이동정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동중산이 돌연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이 형이 본 파를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와 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뜻하지 않은 동중산의 행동에 이동정은 황급히 드를 만류했다.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마시오. 그에 대한 대가는 이미 밥 한끼 잘먹은 것으로 받지 않았소?”

“식사 한 끼로 이 형의 노고를 대신할 수는 없소. 이 형은 충분히 우리의 인사를 받을 만하오.”

동중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낙일방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감사드리오”

심지어는 차갑고 오만한 성정을 지녔다고 소문난 전흠마저 자신을 위해 허리를 숙이자 낮가죽 두껍고 좀처럼 쉽게 흥분하지 않는 이동정도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마주 인사를 했다,

“나는 이런 인사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나도 고맙소.”

당황해하는 이동정의 모습이 우스워 보일 만도 했으나 장내에서 아무도 미소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간에 한바탕 인사가 끝난 후다시 자리에 앉자 이동정은 새삼스런 눈으로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귀하들의 표정을 보니 진 장문인의 부상과는 상관없이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내려는 것 같구려.”

동중산은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의 일정은 다소 촉박하여 이곳에서 열흘씩이나 시간을 보낼수 없소. 장문인이 오신다면 바로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낼 거요.”

이동정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진 장문인이 언제 온다는 거요?”

“장문인보다 늦게 출발한 이 형이 이곳에 왔다면 장문인께서도 조만간에 도착하실 거요. 그보다 이 형은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던 거요?”

이동정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발이 빠른 편이오.”

“이 형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하지만 장문인보다 훨씬 빠르다는 건 선뜻 믿어지지 않는 일이오.”

동중산이 노골적으로 그의 말에 불신의 빛을 보이자 이동정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비록 입이 가볍고 태도가 경솔하기는 하지만 동 형에게 거짓을 말할 정도로 신뢰 없는 사람이 아니오. 동 형이 내말을 의심하는것도 당연하지만, 지금까지의 내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건 믿어 주기 바라오.”

“나는 물론 이 형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허언(虛言)을 할정도로 사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이 형을 모르는 본 파의 다른 분들이 이 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혹은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이동정은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자신을 응시하는 종남파 고수들의 시선이 유난히 따가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진산월보다 훨씬 빨리 이곳에 도착한 것에 의구심을 가질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진산월보다 하루 늦게 모인풍의 거처를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오기도 전에 먼저 회남에 도착하여 종남파의 고수들을 만났으니 아무리 밥도 굶어 가면서 달려왔다고 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동정은 어쩔수 없다는 듯 그답지 않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아무래도 오늘 내 밑천이 다 털어지게 생겼구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나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이니 여러분들은 가급적이면 외부로 발설하지 말아 주길 바라겠소.”

이동정이 거창하게 말문을 열자 동중산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입이 가벼운 사람들이 아니니 이 형은 걱정할 필요 없소.”

동중산의 그 말이 꼭 입이 싼 자신을 빗대는 것 같아 이동정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종남파 고수들의 말이니 믿어 보겠소. 동 형은 당금 강호에서 가장 신법이 뛰어난 고수 열 명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았겠지요?”

“십대신법대가를 말하는 것이라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알고 있을거요.”

“그들 중 누구보다 신출귀몰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의고수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소?

동중산은 짧게 생각했다가 이내 대답했다.

“이 형이 말하는 사람은 혹시 십대법대가 중 유일하게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종횡무영객(縱橫無影客)이 아니오?”

“그렇소 그 종횡무영객이 바로 나요.”

이동정의 말에 동중산은 물론이고 다른 중인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종횡무역객은 십대신법대가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 점철된 정체불명의 고수였다.

아무도 종적을 모르고 다만 뜬구름 같은 그의 명호만이 강호를 떠돌고 있었으나, 강호의 명숙들 사이에서는 상다이 구체적인 정보다 알려저 있었다. 순수하게 신법 실력만 따지면 십대신법대가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며, 철저하게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강호의 구석구석에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돌어더나는 방랑벽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강호에서 활동한 시기는 이십 년이 넘었으나. 의외로 나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이동정이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이 바로 그 신비의 종횡무영객임을 밝히자 중인들은 호기심반, 불신 반의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이동정은 전혀 쑥스러워하거나 어색한 빛이 없이 오히려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내가 어떻게 진 장문인보다 늦게 출발하여 먼저 이고세 올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시오?”

동중산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힌 그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 비록 길게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동정이란 사람은 이런 일에는 결코 거짓이나 허언을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형이 바로 그 소문만 무성한 종횡무영객이라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구려. 이 형의 신법이 강호에 알려진 정도라면, 끼니조차 거르고 달려온 이 형이 아직 부상으로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장문인보다 훨씬 빨리 올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오.”

“이제 그 끼니 걸렀따는 소리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소?”

이동정이 우거지상을 지으며 말하자 동중산의 얼굴에도 모처럼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한동안은 더 우려먹을 생각인데 벌써부터 질려 하면 어떻게 하오? 이제 강호에는 종횡무영객이 굶으면 굶을수록 더욱 신법이 빨라지는 신비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될 거요.”

“아이고, 동 형. 나에 대한 건 어디 가서 입도 뻥긋할 생각 마시오. 내 정체가 알려지면 나는 지금처럼 마음 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못한단 말이오.”

이동정이 질겁을 하며 마구 도리질을 하자 동중산은 담담하게 웃었다.

“알겠소. 그런데 이 형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거요?”

“왜?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축객령이라도 내릴 참이오?”

이동정은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었다가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죽도록 달려왔더니 다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하겠소. 여기서 며칠 더 신세를 지면 안 되겠소?”

“안 될 것까지야 없소. 다만 밥값은 해야 할 거요.”

“밥값이라니? 그건 이미 치른 셈으로 하지 않았소?”

동중산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건 오늘 먹은 밥값이고, 앞으로 먹을 밥값은 따로 계산해야 하지 않겠소?”

이동정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이제 보니 동 형은 정말 야박한 사람이로군. 당당한 대문파에서 식객 한 사람 못 거두겠단 말이오?”

“식객도 식객 나름이지. 그 식객이 누구보다 귀가 밝고 남다른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주인이 된 입장에서 그 식객에게 작은 도움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후우… 정말 동 형의 말재간에는 당해 낼 재주가 없구려. 말해보시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소?”

이동정이 승낙을 하자 동중산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형이 조금만 재주를 부리면 되는 일이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