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1화
제 251장 흑색지령(黑色指令)
피는 붉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었다. 마치 진홍빛 물감을 진하게 으깨어 놓은 듯한 선붉은 핏물이 시신의 몸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조금씩 적셔가고 있었다.
염조홍(廉照紅)은 바닥을 타고 흐르는 핏물이 자신의 발밑에 올 때까지 묵묵히 서 있다가 슬쩍 걸음을 옮겼다. 그가 피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며칠 전에 새로 산 신발을 더럽히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핏물은 그가 피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염조홍은 다시 옆으로 두 걸음 이동해야만 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도중환(都重煥)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예 홀랑 벗고 다니지 그러나. 그러면 옷이 더러워지는 일은 없을 게 아닌가?”
염조홍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돌바닥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시신은 질 좋은 금의(錦衣)를 걸친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의 빛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서 죽기 전에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염조홍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중년인의 얼굴표정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에야 비로소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 최대한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염조홍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염조홍은 공포에 질린 사람의 표정을 볼 때마다 이상한 흥분 같은 것을 느끼고는 했다. 그것은 여인과의 정사(情事) 때도 느끼지 못하는 정말 짜릿한 쾌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죽일 때면 항상 천천히 시간을 들여 상대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최대한 끌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고는 했던 것이다.
염조홍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을 살해해 왔지만, 그들 중 진정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금의중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자는 금룡신조(金龍神雕)라는 허우대만 멀쩡한 이름을 등에 업고 처음에는 제법 기세 좋게 나왔지만, 염조홍의 손에 양쪽 팔목 뼈가 모두 부러진 다음에는 한결 고분고분하게 변했다. 염조홍이 두 다리마저 모두 부러뜨리자 그자는 신조라는 이름답지 않게 날개가 부러진 한 마리 참새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었고, 다시 염조홍이 배를 가르자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기까지 했다.
염조홍이 그 순간에 그를 살해한 것은 자칫하면 그자가 공포와 통증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리는 표정을 보는 것은 언제라도 좋았지만, 우는 사람은 질색이었다. 우는 것은 어린아이나 여인이 할 짓이며, 적어도 강호에서 칼을 품고 사는 무인(武人)이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持論)이었다.
어쨌든 금룡신조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두려움에 떨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염조홍은 오늘 일도 잘 마무리 지었다는 생각에 흡족한 웃음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도중환은 그런 염조홍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가 얼굴 가득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자네의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오싹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차라리 지옥의 염라대왕을 만날지언정 자네의 웃음을 보고 싶지 않다고 떠들어 대고 있는 게 아닌가?”
염조홍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들은 아마도 내 웃음보다는 자네의 그 번지르르한 입을 더 무서워할 걸.”
도중환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확실히 강호인들에게 소면염라(笑面閻羅) 염조홍보다는 홍설사신(紅舌死神) 도중환이 더욱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염조홍은 단순히 고통을 주고 목숨을 빼앗을 뿐이지만, 도중환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영혼마저 앗아가기로 악명(惡名)이 높은 인물이었다.
도중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켰다.
“아! 뻐근하군.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나?”
염조홍은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도중환을 보더니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자네는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더군. 다음 일은 자네가 맡게. 나도 좀 쉬어야겠으니.”
도중환은 빙긋 웃었다.
“그러지. 그런데 다음은 어디라고 했지?”
“서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긴 모양일세.”
“서안이라……. 가까운 거리군.”
“가급적이면 빨리 와달라고 하더군.”
도중환은 다시 피식 웃었다.
“가급적이라니……. 그런 애매모호한 말이 어디 있지? 그럼 나는 한 달쯤 후에 도착해야겠군. 가급적 빨리 말이야.”
염조홍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장난이 아니야. 이번 지령은 흑색(黑色)일세. 늦어도 내일 밤 자정까지는 도착해야 하네.”
흑색 지령이라는 말에 도중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에게 내려지는 지령은 모두 다섯 종류인데, 대부분은 녹색이나 황색 지령이었다. 그것들은 짧게는 닷새에서 길게는 한 달 이내에 처리해야 할 지령들이었다.
청색 지령은 사흘 이내에 처리해야 하며, 흑색 지령은 반드시 이틀 이내에 완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한 번도 발동한 적은 없지만, 홍색 지령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가장 신속히 해치워야만 하는 것이다.
흑색과 홍색 지령은 단 한 사람만이 내릴 수 있으며, 흑색 지령이 발동한 것은 정말 모처럼 만의 일이었다. 그것은 이번 일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다지 수월치 않은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도중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안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난들 알겠나? 아무튼 이번에는 그다지 심심하지 않을 거야.”
말을 하는 염조홍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도중환은 그것이 염조홍의 마음속에 살심(殺心)이 발동했을 때 생기는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중환도 사실 마음 한 구석이 야릇한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다. 지난 오 년 동안 모두 서른두 건의 지령을 완수했지만 단 한 번도 위기에 봉착하거나 어려움을 당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점차로 맥이 빠지고 일 자체가 시시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제 모처럼 흑색 지령을 받게 되자 그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과 흥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서안이라…….’
강호제일의 청부조직인 쾌의당에서도 단 열두 명뿐인 특급살수 중 하나인 도중환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피어오르는 묘한 살의(殺意)가 전신으로 퍼져가며 기이한 열기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천살령주(天殺令主)가 우리들을 급히 보내는 것을 보면 수중용왕이 함정에 빠져 허무하게 당했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과연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날 수 있을까?’
☆ ☆ ☆
서안의 하늘은 뿌연 잿빛이었다. 언제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하선루(賀仙樓)의 이층 누각에서도 보이는 것은 낮게 깔린 짙은 구름과 칙칙한 하늘뿐이었다.
금시라도 굵은 빗방울이 뿌릴 것 같은 날씨인데, 용케도 비는 내리지 않고 세찬 바람만 불었다. 그래서인지 거리에는 인적이 뚝 끊겼고, 자욱한 먼지바람만이 장안성의 넓은 대로(大路)를 휩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하선루의 장방(帳房)인 주노육(周老六)은 계산대에 턱을 고인 채 텅 빈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도 참 우라지게도 부는군. 아예 비라도 죽죽 내리면 속이나 시원할 텐데…….”
하선루는 서안의 남문대로(南門大路)에서도 가장 번화한 주루 중의 하나라서 이맘때쯤이면 항상 빈자리가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워낙 궂어서인지 수십 개의 탁자 중에서 겨우 서너 탁자에만 손님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일층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이층에는 아예 사람의 코빼기도 구경할 수 없었다. 하선루의 이층은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평상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노육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도 없이 하선루로 불쑥 들어서는 것이었다.
주노육은 흠칫 놀라서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나 그 사람은 어느 새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주노육이 볼 수 있는 것은 계단 위로 사라지는 검은 옷자락뿐이었다.
주노육은 한쪽 구석에서 졸고 있는 점소이 하나를 불러 이층으로 올려 보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난 점소이는 이층으로 올라갔다가 곧 다시 내려왔다.
“주문이 뭐냐?”
주노육이 묻자 점소이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상하네요.”
“뭐가?”
“그냥 앉았다 가겠대요.”
주노육은 눈을 부라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앉았다 가다니? 그럼 주문을 받지 않았단 말이냐?”
점소이의 얼굴에는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주문을 해야 받던지 하죠. 잠깐 앉았다 갈 테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주노육은 어이가 없는지 점소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네 놈은 그 소리를 듣고 그냥 내려왔단 말이냐?”
“저……. 그게……. 그 사람은 검(劍)을 차고 있는 데다…….”
“무림인(武林人)이면 무림인이지, 여기가 무슨 부랑자 휴게소인 줄 안단 말이냐? 어서 냉큼 가서 주문을 받지 못할까?”
점소이는 우물쭈물하다가 주노육이 다시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이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에 다시 내려온 점소이는 주노육의 앞으로 주춤거리며 다가오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대요.”
주노육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놈이 정말……. 너 혼 좀 나 볼 테냐?”
“아이고……. 그럼 장방께서 직접 올라가 보세요. 전 더 못하겠어요.”
점소이는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주노육은 이놈을 몇 대 쥐어박고 다시 올려 보낼까, 아니면 이 놈 말대로 자신이 직접 올라가 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올라가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런 상태에서는 이놈을 더 올려 보내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문 받아오면 넌 내 손에 경을 칠 줄 알아라.”
주노육은 점소이를 한 차례 윽박지르고는 이층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상 큰 소리는 쳤으나 이층으로 올라가는 주노육의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무림인 중에는 간혹 성격이 아주 괴팍하거나 살기가 많은 자들이 있어서, 자칫 그런 자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의외의 봉변을 당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았던 것이다.
드넓은 이층은 텅 비어 있었고, 단지 창가에 면한 탁자에 한 명의 흑의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흑의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칙칙한 날씨의 하늘을 올려다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과연 한 자루의 장검이 놓여 있어, 흑의인이 무림인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노육은 흑의인의 뒤로 다가가서 나직한 헛기침을 했다.
“험…… 험…….”
확실한 인기척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흑의인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나 주노육도 주루에서만 반평생을 지내온 인물이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세 좋게 큰 소리로 물었다.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흑의인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졌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목선을 따라 서늘하게 가라앉은 두 개의 눈빛이 주노육의 시야에 들어왔다.
‘꿀꺽…….’
그 눈빛을 받자 주노육은 자신이 상대를 잘못 만났음을 깨달았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냉정한 눈빛이었다. 주노육은 지금까지 이런 눈빛을 지닌 사람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살인자들이었으며, 더 할 나위 없이 냉혹하고 잔인한 족속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만나게 되면 무조건 멀리 피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방해하지 말라는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오히려 치근덕거렸으니 이거야말로 제 발로 호랑이 우리 속으로 들어간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안 먹는다고 말했을 텐데…….”
나직한 음성. 입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딱히 주노육을 탓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자기 자신에게 넋두리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도 주노육은 괜시리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그, 그럼 편히 쉬십시오.”
주노육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닿도록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층을 내려왔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등골에는 축축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점소이가 쪼르르 다가왔다.
“주문 받으셨어요?”
주노육은 사정없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놈아. 사정을 똑바로 설명해야지. 안 먹는다는 사람을 왜 자꾸 귀찮게 하게 만들어?”
“아이고…….”
영문도 모르고 머리통을 얻어맞은 점소이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주노육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하자 황급히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주노육은 재수 옴 붙었다는 얼굴로 이층을 힐끗 올려보다가 이내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새로운 손님 한 사람이 막 주루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피처럼 붉은 홍의(紅衣)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어서 오…….”
무심코 홍의 중년인을 향해 인사를 하던 주노육의 입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앙상하게 마른 홍의 중년인의 얼굴은 수백 개의 끔찍한 흉터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수많은 칼날로 잘게 다져진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 흉터투성이의 얼굴 한가운데 박혀 있는 두 개의 눈동자는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번뜩이고 있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부터 주노육은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한 채 학질 걸린 사람처럼 전신을 마구 떨고 있었다.
다행히 홍의 중년인은 주노육을 일별하고는 이내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휴우……!”
그제 서야 주노육은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한동안 까닭 모를 공포심에 젖어 있던 주노육은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째 오늘은 날씨부터 이상하더니 영 일진이 좋지 못한 것 같군. 오는 손님마다 심상치 않아 보이니 왠지 불길한 생각마저 드는구나. 제발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야 할 텐데…….”
주노육이 넋두리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시 한 사람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죽립을 깊게 눌러 쓰고 허름한 마의를 입은 인물이었다. 마의 밖으로 살짝 드러난 가슴은 단단해 보였고, 체구 또한 건장해서 겉모습만 보아도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마의인의 등 뒤에는 거무튀튀한 철도(鐵刀)가 도갑도 없이 매어져 있어서 주노육은 그에게 말을 걸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죽립인은 주위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이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노육은 죽립인의 모습이 이층 위로 사라지자 점소이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올라가서 주문 받아와야지.”
점소이는 얼굴이 울상이 되었으나, 주노육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이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세 사람의 손님이 각기 떨어진 탁자에 앉아 있었다. 점소이는 나중에 들어온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그래도 죽립인이 낫겠다 싶었는지 그의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죽립인은 실내에 와서도 머리에 쓴 죽립을 벗지 않고 있었는데, 죽립 아래로 살짝 드러난 아래턱에 짙은 수염이 무성하게 나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 수염 속에 파묻혀 있는 입술이 살짝 열리며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건아 한 병. 안주는 잘 볶은 낙화생(落花生)이면 된다.”
낙화생은 땅콩을 말하는 것으로, 소금 간을 살짝 하고 볶은 땅콩은 안주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이다. 백건아 또한 주루에서 주문할 수 있는 술 중에서는 가장 싼 것이니 두 개를 합쳐봤자 동전 몇 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점소이는 더 주문할 것이 없냐고 물어보려다 죽립인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철도를 힐끔 쳐다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머리를 조아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홍의 중년인에게 가서 주문을 받아야 하는데, 흉터로 뒤덮인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져서 점소이는 절로 아랫도리가 달달 떨려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서 있을 수는 없어 간신히 용기를 내어 홍의 중년인 앞으로 다가간 점소이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손님. 무엇을 가져다 드릴까요?”
홍의 중년인은 자신이 아닌 바닥을 보며 말하는 점소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흉터로 덮인 얼굴에 한 줄기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얼굴에 그려진 무수한 상처들이 꿈틀거리자 흉신악살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모습이 되었으나, 다행히 점소이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던 터라 홍의 중년인의 그 살벌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이 집에서는 무엇을 잘하느냐?”
의외로 홍의 중년인의 목소리는 흉측한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웠고, 울림이 분명해서 듣기에 좋았다. 점소이는 깜짝 놀라서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다. 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가슴이 쿵쾅거리며 하체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고, 고기볶음과 버섯볶음 요리가 맛있습니다.”
“오, 볶음 요리를 잘한다니 주방장이 제법 불을 다룰 줄 아는 모양이구나.”
“예……. 인근에서는 그래도 제일 솜씨가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볶음 요리 서너 가지하고 따끈한 탕(湯) 요리 하나만 가지고 오너라.”
“술은……?”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는 점소이의 모습에 홍의 중년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네가 한 번 추천해 보거라.”
뜻밖의 말에 놀란 듯 점소이의 어깨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조그만 음성이 흘러나왔다.
“볶음 요리에는 금존청(金尊淸)이나 적덕취(赤德醉)같이 조금은 독한 술이 어울립니다.”
“그러면 금존청 한 병을 가져오고, 한 사람이 더 올 테니 여분의 젓가락과 술잔도 부탁한다.”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점소이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손님.”
점소이가 몸을 돌리려 할 때 마침 한 사람이 다시 주루 위로 올라왔다. 그는 이목이 청수하고 새하얀 백삼을 입은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백삼 중년인은 한 차례 주루 안을 둘러보더니 이내 홍의 중년인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먼저 와서 기다리다니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백삼 중년인의 말에 홍의 중년인의 흉터로 가득한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는데도 워낙 험상궂은 얼굴이어서 오히려 더욱 무서워 보였다.
“설레어서 말이지. 이번 일은 무척이나 신날 것 같거든.”
백삼 중년인은 홍의 중년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자네의 그런 표정은 모처럼 보는군. 음식은?”
“볶음 요리 몇 개와 술 한 병을 시켰네. 더 시킬 것이 있나?”
“아니. 그 정도면 되겠군. 배불리 먹고 마시는 건 일이 끝난 다음에 하자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점소이는 더 시킬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점소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홍의 중년인이 웃음을 멈추고 돌연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기서 만나자고 했나? 산해루로 직접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백삼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일세.”
“그곳이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도 된단 말인가?”
“틀린 말도 아니지. 철면호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닐세. 알아보니 제법 전력이 화려한 자더군.”
“어떻게 말인가?”
“장성과 산서성 일대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날렸던 모양일세. 수단이 좋고 따르는 자들이 많아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하더군.”
홍의 중년인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런 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할 건 아니네. 그의 손에 당한 자들 중에는 무시 못 할 실력자들도 제법 있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홍의 중년인도 그것까지는 부인하지 못하겠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건 확인해 봤나?”
백삼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중용왕이 그에게 당한 건 사실인 것 같더군. 수중용왕이 워낙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그의 변고가 알려진 게 늦었던 것 같네. 수중용왕뿐 아니라 유화상단의 첫째인 유현상도 그자의 손에 제거되었다고 하더군. 그 때문에 유방현이 앓아누웠다고 하네.”
홍의 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철면호가 수단이 좋은 인물이라고 해도 어떻게 수중용왕을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군. 물 밖에서 싸운다고 해도 그의 도법을 감당할 만한 자는 많지 않을 텐데 말이지.”
“솜씨 좋은 조력자가 있었을 걸세. 알려진 철면호의 무공으로는 수중용왕의 적수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하니 말일세.”
“수중용왕은 정말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조력자가 있다고 해도 그를 쓰러뜨렸다니 아직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러니 우리도 경계해야 하네. 그래서 산해루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보자고 한 걸세. 그런 자라면 필시 자신의 본거지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모든 대책을 세워놓았을 테니 말일세.”
“그를 이쪽으로 유인할 생각인가?”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네.”
“그게 무슨 말인가?”
백삼 중년인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철면호는 서안 일대에서 이미 상당수의 주루를 소유하고 있네. 그런데 그가 그전부터 눈독들이고 있는 한 곳만은 아직 얻지 못했지.”
홍의 중년인은 무언가를 느낀 듯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곳이 여기란 말인가?”
“그렇지. 그래서 철면호는 가끔 이 주루에 와서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네. 주루의 주인을 심적으로 압박하려는 의도도 있고, 주루의 상태를 좀 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백삼 중년인은 턱으로 중앙의 커다란 팔선탁을 가리켰다.
“바로 저 자리가 철면호가 이곳에 오면 늘 앉던 곳일세.”
“하지만 그가 언제 이 주루로 올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철면호는 예전에는 사오 일에 한 번씩은 꼭 이 주루를 찾아왔다고 하더군. 그러다 유화상단과의 문제 때문에 지난 한 달 동안은 꼼짝도 못했으니 이제 슬슬 몸을 움직이려 할 걸세.”
“그 정도로는 너무 막연한데…….”
홍의 중년인이 선뜻 수궁하는 빛을 보이지 않자 백삼 중년인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동안은 유현상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그를 쓰러뜨리고 여유를 찾은 철면호라면 반드시 조만간 이곳에 나타날 걸세.”
“그러니까 그게 언제냔 말일세.”
“산해루에 손님이 많으면 철면호가 아무리 이곳을 탐낸다고 해도 일부러 몸을 빼기는 쉽지 않을 걸세. 하지만 오늘 같은 날씨라면 손님이 많을 리 없으니 한가해진 철면호가 잠시 몸을 움직일 수도 있지 않겠나?”
홍의 중년인의 흉터로 가득한 얼굴에 그제야 밝은 빛이 떠올랐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머지 않아 그자의 모습을 볼 수 있겠군.”
“우리의 운이 좋거나 그자의 운이 나쁘다면 그렇게 되겠지.”
홍의 중년인의 얼굴에 예의 무시무시한 미소가 그려졌다.
“흐흐……. 흑색지령에 이름이 올라간 순간부터 그의 운은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아무튼 기대가 되는군. 수중용왕을 쓰러뜨린 자의 피 맛을 볼 수 있게 될 테니 말일세.”
그때 이층으로 점소이가 양손에 가득 뜨거운 김이 나는 접시를 든 채 올라왔다. 접시에 담긴 요리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내음이 실내에 퍼져나갔다. 그 내음이 어찌나 구수하던지 누구라도 입가에 침이 고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냄새에 취했는지 무심코 점소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백삼 중년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점소이의 뒤편으로 검은 수염을 기른 금포인이 점잖은 모습으로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만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금포인은 다름 아닌 철면호 노해광이었다.
노해광은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중앙의 팔선탁으로 가서 앉았다. 마치 자신의 거처에라도 온 양 그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어서 당당한 위엄을 느끼게 했다.
백삼 중년인과 홍의 중년인이 노해광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 뜨거운 접시를 잔뜩 들고 끙끙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오던 점소이가 뜨거움을 못 참겠는지 경기를 일으키며 세차게 몸을 떨었다.
“앗 뜨거……!”
그 바람에 그의 손에 들린 접시들이 백삼 중년인과 홍의 중년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볶음 요리가 올려져 있을 줄 알았던 접시에는 요리 대신 석회가루가 가득 담겨 있어서 새하얀 석회가 두 사람의 상반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이제 보니 뜨거운 김인줄 알았던 것은 석회가루 위에 놓인 얼음의 결정(結晶)에서 흘러나오는 한기(寒氣)였고, 향긋한 내음은 결정 사이에 놓인 향낭(香囊)에서 풍겨져 나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무공을 지닌 강호의 고수들이었으나,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노해광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느닷없는 점소이의 행동에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석회가루를 머리에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런…….”
석회가루 사이에 무언가 거무스름한 모래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사(毒砂)를 함께 섞은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점소이를 마주 보고 있던 백삼 중년인은 점소이의 행동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피해 석회가루를 절반 정도 밖에 맞지 않았으나, 홍의 중년인은 자신의 등 뒤에서 오는 점소이를 전혀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석회가루에 온 몸이 새하얗게 변했다.
“으으으…….”
석회가루에 뒤섞인 독사가 눈 안으로 들어갔는지 홍의 중년인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몸부림을 쳤고, 백삼 중년인 또한 몸에 박힌 석회가루와 독사를 털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나 독사가 워낙 미세해서 제대로 털어낼 수도 없었을 뿐더러 피부를 뚫고 들어간 독사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지 백삼 중년인의 몸 여기저기에 검은 반점이 수없이 생겨났다.
그들에게 석회가루를 뒤집어씌운 점소이는 어느 새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몸을 피했고, 대신 중앙의 팔선탁에 있던 노해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은 전신에 뒤집어 쓴 석회가루와 자신들이 흘린 피로 인해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홍의 중년인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아직도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백삼 중년인은 피부가 거무튀튀하게 부어오르고 석회가루를 뒤집어 쓴 낭패한 모습으로 이를 악물고 노해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해광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홍설사신 도중환과 소면염라 염조홍은 흉신악살(凶神惡殺)들이라서 지옥의 염라대왕보다 더욱 만나기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하던데, 이제 보니 남들과 똑같이 피를 흘리고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었군. 조금 안심이 되면서도 실망스런 마음이 드는구나.”
백삼 중년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구나.”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조홍이 파면(破面)의 흉측한 몰골이라는 것은 강호에서 조금만 귀가 밝은 자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리고 너와 염조홍이 요 근래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몇 건의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우, 우리가 이곳에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몰랐지. 내가 쾌의당의 인물도 아니고 너희들의 행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그런데 어떻게……?”
“다만 나는 항상 이런 일에 대비해서 몇 가지 준비를 해 두었을 뿐이다. 그러다 운 나쁘게 너희들이 걸려든 거지.”
그제야 백삼 중년인, 도중환은 무언가를 느낀 듯 회 범벅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면 이 주루도 너의 영향력에 있단 말이냐?”
노해광은 갑자기 음성을 낮추어 그에게만 특별히 알려준다는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서안에 와서 가장 먼저 구입한 곳이 바로 이 하선루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하선루를 사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처럼 행세했냐고? 그래야 가끔은 나를 노리는 자들이 이곳을 이용할게 아니냐? 너희들처럼 말이지.”
노해광의 말은 단순했으나, 도중환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복잡하면서도 주도면밀한 심계(心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이 하선루는 노해광이 자신의 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노해광은 자신이 수중용왕을 제거한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쾌의당에서 또 다른 고수들을 파견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것을 대비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하선루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하선루의 장방인 주노육은 하선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면 반드시 그 소식을 즉시 인편으로 노해광에게 전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주노육을 통해 주루에 몇 명의 수상한 인물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노해광은 그들의 인상착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단번에 그들 중 홍의 중년인이 쾌의당의 특급살수이며 강호의 유명한 살성(煞星)인 소면염라 염조홍임을 알아차렸다. 염조홍의 외모는 워낙 특이해서 단순한 인상착의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나타난 도중환은 비록 평범한 인상이었으나, 그와 염조홍이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노해광이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점소이로 위장해 있는 자신의 수하를 이용해 그들에게 독사가 섞인 석회분(石灰粉)을 뒤집어씌운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런 진행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해광은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의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게 하여 점소이의 암습이 성공할 수 있게끔 유도했다.
독사를 섞은 석회분은 낚시 바늘이 달린 쇠그물처럼 노해광이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도구들 중 하나로, 실용적이면서도 그 효과가 탁월해서 무공실력이 뛰어난 수하들이 부족한 노해광에게는 아주 유용한 것들이었다. 독사는 오릉사(五菱砂)라는 것으로, 여느 모래보다 훨씬 입자가 가늘고 날카로워서 몸에 박히면 바로 피부를 뚫고 체내로 침투하여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일단 격중 되면 누구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 효과는 여실히 증명되어서 염조홍은 이미 무력해졌고, 도중환 또한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노해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그 속에 담긴 정교한 수순(手順)과 복잡하고 치밀한 계략은 오랜 동안의 경험과 수없이 많은 연습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심지어 점소이가 석회분을 뿌리는 수법에도 나름대로의 비법이 숨겨 있어서 당하는 사람은 어느 쪽으로 몸을 피하든 석회분의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제 노해광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쾌의당의 특급살수 두 명을 선제공격하여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 수중용왕에 이어 두 명의 특급살수들마저 잃게 된다면 아무리 쾌의당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며, 계속 노해광을 적대시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데 그때, 지금까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던 도중환이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크흐흐…….”
노해광은 순간적으로 그가 웃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도중환은 이런 몸 상태로도 자신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 웃고 있는 사람은 도중환 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던 염조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노해광은 눈을 번뜩이며 염조홍을 살펴보았으나, 그의 눈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가짜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흉터로 뒤덮여서 험상궂은 인상의 염조홍이 피로 물든 얼굴로 웃고 있으니 그야말로 지옥의 염라대왕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워 보였다.
노해광은 약간은 놀라고 약간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지금까지 말없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죽립인이 어느 새 그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죽립인의 한 손에는 일층으로 내려간 줄 알았던 점소이의 목덜미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노해광이 그들 세 명에게 삼각형으로 포위된 형상이 되어 버렸다.
노해광은 죽립인이 그들과 한 패인 것도 놀랐지만, 오릉사가 든 석회분을 뒤집어 쓴 염조홍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더욱 더 의혹을 금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석회분이 눈에 들어가서 장님이 된 줄 알았던 그의 두 눈은 약간 붉은 빛이 어른거리기는 했으나 멀쩡하게 뜨여 있었다.
염조홍은 피 묻은 얼굴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가래침을 뱉었다.
“퉤!”
그가 뱉은 가래침에는 진득한 피와 함께 거무튀튀한 모래가 뒤섞여 있었다.
놀랍게도 염조홍은 자신의 몸을 파고든 오릉사를 입안으로 모아서 뱉어낸 것이다.
“제법 재미있는 수였다고 칭찬해 주지. 이번에는 나도 상당히 놀랐으니까 말이야.”
노해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염조홍과 그가 뱉어낸 가래침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어떻게…….”
“별거 아니야. 석회가루야 눈만 제때 감으면 되는 것이고, 내가 익힌 대마전혼공(大魔轉魂功)에 체내에 들어온 불순물들을 한 곳에 모아서 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이지.”
노해광의 시선이 이번에는 도중환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반점이 가득했던 도중환의 얼굴은 어느 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노해광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도중환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손 중지는 전체가 유달리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해광이 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 손가락은 조금씩 부어오르며 점점 더 붉어지더니 이내 마치 홍옥(紅玉)으로 만든 것처럼 짙은 홍색으로 변해 버렸다. 그와 함께 거무스름한 연기가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그제야 노해광은 도중환이 심후한 순양(純陽)의 공력으로 체내에 있는 오릉사를 손가락 끝에 모아 태워버린 것을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이 정도의 순수한 열양지기(熱陽之氣)를 지니고 있을 줄은 정녕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도중환은 자신의 오른손 중지를 까닥거리며 웃었다.
“어떤 자들은 내 혓바닥이 홍설(紅舌)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 홍설은 이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이지. 어떤가? 혓바닥 같은가?”
아닌 게 아니라 붉은 색으로 변하여 퉁퉁 부어오른 그의 중지는 마치 사람의 혓바닥을 보는 것 같았다.
노해광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이 그들에게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함정에 빠진 건 너희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구나.”
도중환은 히죽 웃으며 비아냥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철면호의 눈치가 누구보다 빠르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노해광은 힐끔 등 뒤의 죽립인을 쳐다보았다.
“저 자도 쾌의당의 고수냐?”
“직접 확인해 봐라.”
도중환의 말이 끝나자 죽립인이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죽립 아래 드러난 얼굴을 보자 노해광의 몸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렸다.
“최동……!”
죽립인은 뜻밖에도 흑선방주 최동이었다. 항상 흑의를 즐겨 입던 최동이 마의를 입고 죽립을 썼기 때문에 그를 잘 알고 있는 노해광도 미처 죽립인이 최동의 변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도중환은 노해광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빙글거렸다.
“철면호는 성격이 담대하고 낯짝이 두꺼워서 좀처럼 얼굴표정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남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군. 왠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군 그래.”
그의 말은 조금 전에 노해광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조롱이 가득한 그의 말에도 노해광은 자신의 뒤를 막아선 자가 최동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중환은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네가 흑선방을 휘하에 부리고 있다는 건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이미 파악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최동을 찾아갔지.”
도중환과 염조홍이 서안에 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쾌의당에서는 수중용왕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마쳐놓은 후였다. 이번 일에 흑선방의 개입이 있었으며, 그들이 노해광의 수족이라는 것을 파악한 두 사람은 즉시 흑선방에 잠입하여 최동을 제압했다. 최동이 비록 서안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는 거물이라고 해도 쾌의당의 특급살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최동은 노해광을 배반하느냐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느냐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고, 그의 선택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흑도의 무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넘어선 충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동의 도움으로 하선루의 비밀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오히려 노해광을 제거할 장소로 하선루를 택했으며, 오늘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먼저 인상착의가 분명한 염조홍이 하선루에 모습을 드러내어 노해광을 유인한다. 노해광으로서는 염조홍의 정체를 알게 되면 반드시 그를 제거하려 할 것이며, 자신이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하려 할 것이다. 최동은 가벼운 변장으로 정체를 숨긴 채 노해광의 퇴로를 차단하고, 도중환이 노해광을 상대하여 그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오릉사가 섞인 석회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석회분이 들어가거나 오릉사의 독기에 중독되는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염조홍은 대마전혼공을 운용하여 체내에 들어온 오릉사를 적시에 몸 밖으로 배출해 버렸고, 도중환 또한 자신의 독보적인 홍염마라공(紅焰魔羅功)을 끌어올린 상태였기에 오릉사를 쉽게 태워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무방비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아무리 그들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토록 수월하게 오릉사가 든 석회분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비록 단순했으나, 철저히 노해광의 함정을 역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함정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는 노해광으로서는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노해광은 철저히 고립된 채 세 명의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의 무공실력으로 특급살수 한 명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현재의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중환의 말이 그런 현실을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란다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이 일대는 이미 최동의 수하들에 의해서 철저히 포위되었으며, 일층에 있는 네 부하들도 지금은 모두 제거되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쯤이면 아래층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올라올 때가 되었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는 것으로 보아 도중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노해광은 암담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창가의 탁자에 앉아 있는 흑의인을 발견하고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 흑의인은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의 자세 그대로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도중환의 일행은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인상착의를 살펴보아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인물도 없었다.
노해광의 시선이 창가에 있는 흑의인에게 가 있자 도중환의 눈길도 그쪽으로 향했다. 흑의인을 보는 도중환의 눈에 냉랭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도움을 줄만한 자가 아직 한 사람 남아 있긴 하군.”
도중환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듯 염조홍이 으스스한 눈으로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흑의인은 여전히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전혀 모르는 지 아니면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도중환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노해광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잠복시켜 놓은 조력자가 아닐까 하여 미끼를 던져 보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다소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도중환은 더 늦기 전에 오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슬쩍 눈짓을 하자 그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던 염조홍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얼굴에 스산한 미소를 떠올렸다.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무시무시한 살소(殺笑)였다. 염조홍이 막 노해광을 향해 손을 쓰려 할 때였다. 노해광의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최동이 갑자기 멱살을 잡고 있던 점소이를 염조홍에게 세차게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비록 점소이의 체구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해도 사람을 공깃돌처럼 집어던지는 최동의 완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염조홍을 향해 날아가는 점소이의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최동의 등 뒤에 매어져 있던 거무튀튀한 철퇴가 쥐어져 있었다. 그때 염조홍은 막 노해광을 향해 살수(殺手)를 쓰려고 하던 상황이었는지라 점소이의 갑작스런 공격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염조홍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자신의 대마전혼공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기에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오는 점소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마전혼공은 세 군데의 사혈(死穴)을 동시에 찔리거나 목이 잘려지지 않는 한 결코 숨이 끊어지지 않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기공(奇功)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점소이의 손에 들려 있던 철퇴가 그대로 터져 버렸다.
파아아……!
수백 개로 부서진 철퇴의 파편들이 그의 전신으로 퍼부어졌다. 뿐만 아니라 철퇴의 파편 속에는 누런 색 가루들이 담겨 있어 그의 몸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파파팍!
파편들에 가격당한 염조홍의 몸이 연거푸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어찌 된 일인지 염조홍은 반격 한 번 하지 않고 그대로 파편의 폭풍 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도중환은 뜻밖의 사태에 놀랐으나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최동을 향해 몸을 날렸다.
“최동! 네 놈이 감히……!”
점소이를 염조홍에게 집어 던진 최동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도중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가 입에서 무언가를 세차게 내뱉어냈다. 그가 뱉어낸 것은 다름 아닌 술안주로 먹고 있던 낙화생이었다. 십여 개의 낙화생이 빛살같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으나, 도중환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이따위 얕은 수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그는 오른손 중지를 앞으로 쳐들었다. 붉은 색으로 물든 그의 중지에서 혈광(血光)이 어른거렸다. 하나 그가 그 혈광을 채 발출하기도 전에 낙화생들이 터지며 누런 색 가루가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워낙 갑작스레 벌어진 일인지라 도중환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그 누런 색 가루들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낙화생을 뱉어낸 최동이 오른 주먹을 앞으로 세차게 내뻗었다.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도중환의 앞가슴이 최동의 주먹에 맞아 움푹 꺼져 버렸다. 그야말로 놀라운 위력의 일권(一拳)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최동이 회심의 절기로 삼고 있는 일권파황(一拳破荒)의 수법이었다. 비록 최동의 주먹이 낙뢰가 떨어지듯 빠르고 위력적이긴 했으나, 강호의 유명한 살성인 도중환이 피하거나 막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의 주먹을 가슴에 허용한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그 유명한 홍설지(紅舌指)를 써 보지도 못한 것이다. 최동의 주먹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도중환의 가슴뼈는 송두리째 부서져 버렸고, 그 여파가 등에까지 미쳐 등뼈가 뒤로 툭 불거져 나오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도중환은 입을 딱 벌린 채 입으로 시커먼 핏물을 꾸역꾸역 쏟아내면서도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최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네놈이……!”
단 일권에 도중환의 가슴뼈를 박살낸 최동은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신에 노해광이 담담한 얼굴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최동의 전력을 다한 일권을 맞고도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니 확실히 쾌의당의 특급 살수는 무언가 남다른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도중환의 시선이 최동에게서 노해광에게로 옮겨졌다. 몸은 그대로 둔 채 벌겋게 충혈된 눈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기괴해 보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독이냐?”
노해광은 그의 몸과 바닥에 수북하게 뿌려져 있는 노란 색 가루를 가리켰다.
“저거 말인가? 저건 독이 아니라 황접(黃蝶)이라는 나비의 날개를 갈아서 만든 분말 가루야. 몸에 좋은 것이지.”
그는 직접 바닥에 몸을 숙여 노란 색 가루를 손가락으로 집어 자신의 입안으로 가져갔다.
“맛은 그럭저럭이지만, 강장(强壯) 효과가 있어서 자기 전에 공복에 먹으면 아침에 개운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어서 나도 가끔 애용하고 있지.”
“그, 그…….”
도중환은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부서진 가슴뼈 때문에 음성이 제대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느냐고? 이 황접분(黃蝶粉) 자체는 사람 몸에 좋은 것이지만, 여기에 백화정분(白花精粉)이라는 특이한 꽃가루를 섞으면 즉효성이 뛰어난 마비산(痲痺散)이 되지. 그 효과는 이렇게 입증되지 않았나?”
노해광은 과장스럽게 양 손을 벌리며 그와 염조홍을 가리켰다. 염조홍은 전신에 부서진 철퇴의 파편이 박힌 채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무리 그의 대마회혼공이 뛰어난 기공이라고 해도 수백 개나 되는 쇠로 된 파편에 격중 된 상태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파편 중 대여섯 개가 그의 사혈에 틀어박혀 있어서 그가 자랑하는 대마전혼공은 이미 깨어져 버린 후였다. 염조홍은 순간적으로 몸이 마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서진 철퇴의 파편에 사혈들이 노출되어 그답지 않게 너무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뜬 채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지옥의 염라가 웃고 있는 것 같아서 소면염라라는 그의 별호에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노해광은 아직도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도중환을 향해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지금쯤은 짐작하고 있겠지만, 백화정분은 석회가루에 섞여 있었지. 다시 말해서 처음에 석회가루를 맞게 되었을 때부터 너희들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그것은 아주 고난도의 이중(二重) 함정이었다. 석회가루에 눈에 띄는 검은 색 오릉사를 섞은 것은 상대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백화정분이었다. 하나 백화정분은 석회가루와 같이 하얀 색이었기 때문에 여간 주의하지 않는 한 석회가루에 섞인 백화정분을 알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염조홍과 도중환은 오릉사에만 신경을 기울여 그것을 해독하는 데 신경을 쏟았지만, 그 때문에 백화정분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백화정분이 몸에 잔뜩 묻은 상태에서 황접분에 살짝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마비산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도중환의 눈동자가 다시 최동에게로 향했다. 최동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을 배신한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해광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너무 그를 원망하지 마라. 그는 나의 이십 년 형제이니, 설사 목에 칼날이 박힌다 해도 나를 배반할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포섭할 상대를 잘못 골랐던 거야.”
그는 지그시 도중환의 사혈을 눌렀다. 도중환은 결국 더 이상 말을 뱉지 못하고 허무하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우뚝 선 채로 차갑게 식어가는 도중환의 시신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던 노해광의 시선이 이내 창문가의 흑의인에게로 향했다. 장내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계속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흑의인도 거듭된 상황에 놀랐는지 안광을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해광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흑의인의 나이는 갓 삼십쯤 되어 보였고, 이목구비는 단정한 편이었다. 하나 눈빛이 차갑고 흔들림이 없는데다 무표정해서 무척이나 냉정해 보였다. 흑의인은 노해광의 따가운 눈빛에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노해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빛만큼이나 배짱이 좋은 친구로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알 수 있겠나?”
흑의인은 여전히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노해광은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빙긋 웃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내 소개가 늦었군. 나는 노해광이란 사람일세.”
그제야 흑의인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열렸다.
“내 이름은 왜 알려고 하는 거요?”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냉정한 음성이었다. 노해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자네가 어느 쪽 사람인지 궁금해서 말이지.”
“어느 쪽 사람이냐니?”
“자네도 보다시피 오늘 이곳에서는 무척이나 흉험한 일이 벌어졌네. 조금만 일이 잘못되어도 당하는 건 오히려 나였을 걸세. 그러니 나로서는 자네가 이런 날 이런 곳에 나타난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必然)인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네.”
노해광은 제법 자상하게 말해주었으나, 그의 말뜻은 분명했다. 네가 도중환 일행과 한 편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으니 의심을 받기 싫으면 정체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노해광이 굳이 흑의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노해광은 이번 일에 대비해서 무척이나 여러 가지 공을 들였다. 최동이 도중환과 염조홍의 협박에 못 이겨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도 계획의 일부분이었고, 흑선방의 살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십절수(十絶手) 강표(康豹)를 점소이로 분장시켜 며칠 째 하선루에 대기시킨 것도 한 부분이었다. 하선루의 방장인 주노육은 눈썰미가 빠르고 박식해서 힐끗 보기만 해도 강호에 어느 정도 알려진 고수들의 정체를 쉽게 파악해 내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주노육은 하선루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알아내어 그중 경계를 해야 할 만한 자들을 노해광에게 통보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 주노육도 흑의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두 번이나 강표를 이층으로 올려 보낸 것이다. 하나 강표 또한 흑의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주노육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올라가서 흑의인을 살펴보고는 ‘정체미상의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노해광에게 알렸다. 자신을 노리는 쾌의당의 두 명의 특급살수들은 처리를 했으나, 그 장소에 있는 유일한 외부인물인 흑의인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노해광은 뒤처리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그로서는 반드시 흑의인의 정확한 신분을 알아야만 했다. 흑의인은 한동안 노해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금조명(琴照命)이오.”
노해광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목숨을 비춘다라… 무척 인상적인 이름이군. 그런데 ‘금(琴)’씨라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금’씨는 흔한 성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성도 아니었다. 하나 노해광은 흑의인의 입에서 ‘금’씨라는 성을 듣자마자 한 사람의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흑의인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혔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노해광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그는 평생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그래서인지 자신의 두 명의 아들에게 각기 혼(魂)과 명(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들었네. 자네 이름을 들으니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나서 말일세.”
흑의인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노해광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심한 시선이었으나,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노해광의 뒤쪽에 서 있던 최동과 강표가 긴장된 얼굴로 그를 쏘아볼 정도였다. 노해광도 더 이상은 그를 도발하지 않았다. 이토록 삼엄한 무형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상대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등 뒤의 두 사람에게 안심하라는 듯 살짝 손을 들고는 이내 흑의인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군.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도록 하세.”
흑의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하무인 같은 태도였으나, 노해광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태연히 몸을 돌렸다. 그가 이층 계단을 막 내려오자 최동이 바짝 다가와서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정체가 확실치 않은데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괜찮겠습니까?”
노해광은 빙긋 웃어 보였다.
“괜찮지 않으면?”
“만만치 않은 실력자인건 알지만, 그래도 애들을 몇 명 풀어서 실력을 확인해 보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연히 애꿎은 수하들을 희생할 필요가 있겠느냐?”
최동은 노해광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빛냈다.
“대형께선 그 자의 정체에 대해 짐작가시는 것이 있으시군요.”
노해광은 종남파의 일대제자였을 때부터 이십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충직한 아우였던 최동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짐작이 맞는다면 우리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야. 그래서 순순히 물러난 것이다.”
“저 자가 대체 누구입니까?”
“금씨 성에 저 정도의 무형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 아들을 둔 자는 이 넓은 강호에서도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 말에 최동의 뇌리에도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좀처럼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아 냉혈호(冷血虎)라고 까지 불리는 최동의 얼굴 표정이 홱 변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마음을 예측이라도 한 듯 노해광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환우사마 중의 검마(劍魔) 금옥기(琴玉璣). 금조명은 금옥기의 둘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