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4화
제 265장 검성면오(劍聖面晤)
모용봉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인 술시(戌時) 무렵이었다.
“공자님께서 진 장문인을 뵙고자 하십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비매 냉옥환이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무심한 표정을 유지해 온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냉정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진산월은 그녀를 대청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의관을 정제한 후 방을 나서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침상 밑에 숨겨 두었던 천룡궤를 꺼내 들었다.
모용봉은 외유 중인 모용단죽이 자신의 생일에는 구궁보로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모용봉은 모용단죽을 만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가 자신의 방을 조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천룡궤를 몸 밖에 떼어 놓는 것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구궁보를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에게 구궁보는 절대로 안전하고 마음 편하게 있을 장소가 아니었다.
숙소를 벗어난 두 사람은 어둠에 잠겨 있는 구궁보의 화원을 나란히 걸어갔다. 달빛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그늘 속 어둠은 그만큼 깊어졌다. 소로를 따라 길게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싶은 순간, 그녀가 문득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진 장문인은 모용 대협을 만나게 될 거에요.”
진산월은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정면에 고정되어 있는 두 눈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유난히 짙은 속눈썹이 살짝 그녀의 눈 부위에 음영(陰影)을 만들어내서 가뜩이나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기도 했다.
진산월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냉옥환은 여전히 시선을 앞에 둔 채 다시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모용 대협은 지난 삼 년간 외부인을 만난 적이 없어요. 모용 공자조차도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그 분을 만나지 못했죠. 다시 말해서…….”
냉옥환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지며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진산월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냉옥환은 진산월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진 장문인은 모용 대협을 정식으로 만나게 되는 정말 모처럼 만의 무림인인 셈이지요.”
모용단죽이 구궁보의 깊숙한 곳에 칩거해 있다는 말은 이미 진산월도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소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냉옥환이 굳이 이런 자리에서 그에게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진산월의 뇌리에 순간적인 의문이 스치고 지나갈 때, 냉옥환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래서 진 장문인에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말해 보시오.”
“모용 대협께 ‘서풍(西風)에 날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봐 주셨으면 해요.”
진산월은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의아한 마음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서풍에 날리는 것?”
냉옥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대협께서 어떤 대답을 하시든 그걸 제게 알려달라는 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또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궁금하면 그녀가 직접 모용단죽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닌가?
그녀가 비록 시비의 신분이라고 해도 강호제일의 여고수인 천수관음의 고제자(高弟子)이기도 했다. 모용봉을 지척에서 모시는 그녀의 처지로 볼 때 모용단죽을 만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 질문을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진산월에게 부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는 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진산월은 순순히 승낙을 했다. 굳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없거니와, 오히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이 알지 못했던 이번 일에 관련한 숨은 뜻을 알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겠소.”
그제야 비로소 그녀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한 줄기 미미한 훈풍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나 그 훈풍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미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쳐드는 그 짧은 순간에 그녀의 얼굴은 어느 새 처음의 무심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냉옥환이 예고한 대로 모용봉이 진산월을 부른 이유는 모용단죽 때문이었다.
“늦은 밤에 오시게 해서 죄송하오. 조부께서 조금 전에 도착하셔서 진 장문인을 찾으시기에 급히 진 장문인을 모셔오게 했소.”
막상 모용단죽이 구궁보에 왔다고 하자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진산월의 가슴도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강호의 전설을 보게 될 순간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모용봉의 시선이 냉옥환에게로 향했다.
“냉 소저. 수고하셨소. 진 장문인은 내가 안내해 드릴 테니 이제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오.”
냉옥환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떠났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모용봉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흐음.”
진산월이 돌아보자 모용봉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냉 소저 같은 강호의 여협(女俠)을 일개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으니 강호의 동도들이 나를 뭐라고 욕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구려.”
“내가 듣기로는 그녀가 자청한 일이라고 하던데 소문이 잘못된 거요?”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사대신녀 같은 일대의 기녀(奇女)들을 한낮 시비로 쓰고 있으니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말이오.”
“본인이 원한 것이라면 시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리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리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도 당신답지 않은 일 같소.”
“나답지 않은 일이라…….”
언뜻 모용봉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나답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라도 내 입장에 서게 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비평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진산월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용봉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 무림의 제일 고수가 자신의 후계자로 공공연히 지목한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여서 지난 십 년간 무림인들의 입에 제일 많이 오르내린 이름이 ‘모용 공자’였을 정도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무림인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고, 수많은 소문과 전설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자연스레 그는 서장 무림에 맞서는 중원의 유일무이한 수호자처럼 인식되었고, 강호에 이름을 날리기를 원하는 모든 무림인들의 목표이자 지표(指標)가 되었다.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어느 새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모든 상황이 꼭 그의 마음에 들었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몰락한 문파의 장문인 자리를 맡게 된 자신만 해도 주위의 기대와 주어진 사명에 너무도 힘겨워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모든 중원 무림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모용봉이라면 그가 느끼는 중압감과 부담감이 어떠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산월은 문득 모용봉에게서 동병상련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월광이 두 사람 사이를 비추었을 때, 모용봉은 문득 고개를 들어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진 장문인에게 한 가지 청(請)이 있소.”
진산월은 참으로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냉옥환도 모용단죽을 만나러 가는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더니 모용봉 또한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부탁이라고 해도 좋고, 제안이라고 해도 좋소.”
“무엇이오? 듣고 판단하리다.”
“오늘 진 장문인은 조부님을 만나게 되면 천룡궤의 일을 매듭지을 수 있을 거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진 장문인은 더 이상 본 보와의 용무가 없게 되는 셈이오.”
“……!”
“그러니 조부님을 뵙고 나면 바로 본 보를 떠나주기 바라오.”
진산월의 눈에 냉엄한 빛이 감돌았다.
“나 보고 오늘 모용 대협을 만나고 나오면 바로 구궁보를 떠나라는 말이오?”
“가급적이면 그래 주었으면 하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진산월은 모용봉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모용봉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어서 진산월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매는 나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소.”
이번에는 모용봉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의 입을 주시했다.
“사매와 함께라면 아무 때고 구궁보를 떠날 수 있소. 당신이 막아서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모용봉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그의 타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월광 아래 비쳐서 유독 하얗게 빛나는 그의 얼굴은 왠지 음울해 보였으나 또한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한참 후에야 모용봉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이내 모용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조부님을 뵈러 갈 시간이오.”
진산월은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그의 뒷등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매와 함께 떠나겠다고 하면 그가 반대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트집을 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도 수월하게 승낙하자 오히려 불쑥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그는 애초부터 사매가 구궁보를 떠나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동안 그의 언행으로 보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산월은 마음 깊숙한 곳에 한 줄기 의문이 솟구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하나 그가 채 생각을 굴리기도 전에 저만큼 걸어 나가던 모용봉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조부님을 기다리게 할 생각이오?”
진산월은 마음을 굳힌 채 그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용봉이 그를 데려간 곳은 모용봉의 거처인 망천정의 뒤쪽에 나 있는 좁고 긴 회랑이었다. 회랑의 너비는 장정 두 사람이 간신히 어깨를 맞대고 걸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해서 두 사람은 앞뒤로 서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십여 장이나 되는 좁은 회랑을 따라 걸어가자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길이 나타났다. 모용봉은 주저하지 않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을 얼마쯤 걸어가니 작은 숲에 둘러싸인 아담한 뜨락이 나타났다. 뜨락의 중앙에 불이 켜진 초막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강호 무림의 제일인자로 군림해오던 절대자의 거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촐하고 소박한 곳이었다. 뜨락의 한 가운데 서니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 때문인지 한결 아늑해 보였다. 달빛이 그 좁은 뜨락의 구석구석을 훤히 비춰주고 있어서 더욱 그러한 느낌이 강했다.
초막 앞에 선 모용봉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부님. 봉(峯)이옵니다.”
초막 안에서 맑고 청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진 장문인은 들게 하고 너는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예.”
모용봉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모용봉은 말없이 진산월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 그들의 몸이 엇갈릴 때 진산월의 귓전으로 모용봉의 전음이 들려왔다.
“조부님께는 곧 떠난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진산월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모용봉의 몸이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교교한 월광이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작은 뜨락은 한없이 포근하고 온화해 보였다.
하나 진산월의 마음은 그와는 반대로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진산월은 굳게 닫힌 초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산월을 뜨락에 남겨둔 채 막 처소로 돌아가던 모용봉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망천정으로 들어서는 회랑의 끝부분에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허리춤에 장검을 찬 삼십 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나이를 먹고, 중년인 치고는 젊은 나이였으나 달빛에 비치는 그의 눈빛은 묘한 연륜을 느끼게 했다. 그는 쌍포사절 중의 태관(泰關)이라는 인물로, 태씨(泰氏) 형제의 맏이였다. 쌍포사절의 다른 한 쌍의 쌍둥이는 광씨(匡氏)로, 태씨 형제보다는 열 살쯤 많은 나이였다. 외부적인 행사에서는 주로 광씨 형제가 모용봉을 수행하고, 태씨 형제는 보다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일을 맡고 있었다.
모용봉은 그가 있을 것을 짐작이나 하고 있었던 듯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짤막하게 물었다.
“모두 왔느냐?”
“두 사람은 도착해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고, 한 사람은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모용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천정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랑의 다른 쪽 통로로 들어섰다. 태관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회랑의 다른 쪽 통로 끝에는 한 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면에 나 있는 작은 문 하나를 제외하고는 창문이나 다른 출입구를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형태의 건물이었다. 달빛도 그 건물이 드리우고 있는 짙은 어둠을 밝히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작은 문 앞에는 태관의 쌍둥이 동생인 태정(泰鼎)이 서 있다가 모용봉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모용봉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널따란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다가 안으로 들어서는 모용봉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들이었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인지 아니면 낯이 서먹해서인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었다.
모용봉은 중앙의 의자로 가서 앉으며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일이 있어서 조금 지체하게 되었소.”
둘 중 백의를 입은 청년은 냉랭한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이 없는데 비해, 화의(華衣)를 입은 청년은 고개를 내저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용봉은 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소. 두 분은 서로 인사를 나누셨소?”
백의 청년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고, 이번에도 화의 청년만이 대답을 했다.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야 진즉부터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저 분 형장께서 저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럴 리 있소? 다만 그 사람은 워낙 과묵하고 낯을 가려서 쉽게 다가서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일 뿐이오.”
자신을 은근히 놀리는 듯한 모용봉의 말에도 백의 청년은 짙은 눈꼬리를 한 차례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화의 청년의 시선이 백의 청년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백의 청년의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여서 자기보다도 대여섯 살쯤 많은 것 같았다. 외모는 다소 강퍅했고, 허리춤에 평범한 철검 한 자루를 차고 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나 비쩍 마른 얼굴에 있는 두 개의 눈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어 그의 성정(性情)이 어떠한 지를 대충이나마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화의 청년은 백의 청년의 차갑게 번뜩이는 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구양수진이라 합니다.”
백의 청년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에게로 향했다. 뼈골이 시릴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 화의 청년의 준수한 얼굴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화의 청년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백의 청년의 살인적인 시선을 받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의 청년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가 백지장처럼 얄팍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이제 보니 구양가에서 보물처럼 아낀다는 막내 공자였군. 구양가의 깊숙한 곳에서 검만 닦고 있다고 하더니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 그래.”
조롱 섞인 백의 청년의 말에 구양수진의 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뭐라고 대꾸라도 할 줄 알았건만 그는 오히려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 구양수진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 이름을 밝혔는데, 당신은 밝히지 않는군요. 당신처럼 무례한 사람은 정말 모처럼 봅니다.”
말과는 달리 그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고,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백의 청년의 입술에서 다시 차갑고 냉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던지.”
구양수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오른손이 살짝 움직이더니 한 줄기 빛살 같은 섬광이 백의 청년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갔다. 그 섬광이 어찌나 빠르고 날카로웠는지 백의 청년의 미간에 금시라도 시뻘건 구멍이 뚫려버릴 것만 같았다.
백의 청년은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장난처럼 슬쩍 오른소매를 빠르게 휘둘렀다. 그 소맷자락에는 은은한 청색 기운이 어려 있었다.
팟!
섬광이 그가 휘두른 소맷자락에 닿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섬광의 정체는 구양수진이 발출한 지공(指功)이었다. 구양수진은 자신이 날린 지공이 허무하게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태청강기. 당신은 화산파의 제자였군요. 내 쇄벽지(碎劈指)를 완벽히 막아낸 것으로 보아 태청강기가 절정에 달한 게 분명한데…….”
구양수진의 두 눈은 줄곧 백의 청년의 메마른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산파에서 당신 정도의 나이에 그런 실력을 지닌 자는 몇 사람 되지 않죠. 게다가 나는 일전에 당신 같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화산독응 유장령이지요?”
백의 청년, 유장령은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말 많은 놈이로군. 구양가에 처박혀서 수다 떠는 것만 배운 모양이지?”
유장령의 험악한 말에도 구양수진은 입가의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본 가는 상인 가문이라 대화하는 법을 가르치긴 합니다. 하지만 나는 본 가의 대화술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걸 익혔죠.”
구양수진은 자신의 허리춤을 두드렸다. 그의 허리춤에는 금빛이 어른거리는 허리띠가 매어져 있었다. 하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단순한 허리띠가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연검(軟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장령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구양가에서 배운 그 알량한 검술을 내 앞에서 뽐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뽐내는 법 같은 건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구양수진의 부드러워 보이는 두 눈에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일단 검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봐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래서 말인데…….”
구양수진의 시선이 유장령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 검을 뽑고 싶다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길 권해드리겠습니다.”
그때 유장령의 오른손은 습관처럼 자신의 철검의 손잡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구양수진의 말을 듣자 유장령은 충동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하나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그 순간 모용봉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잊지 마시오.”
금시라도 검을 뽑아 휘두를 것 같던 유장령의 동작이 멈춰지더니 냉기가 풀풀 날릴 정도로 차가운 시선이 모용봉에게로 향했다.
“구궁보라는 이름으로 나를 억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모용봉은 고개를 저었다.
“구궁보가 아니라 나요.”
유장령의 얼굴에 한 가닥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모용봉은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내가 연공(練功)을 하는 곳으로, 심인당(尋人堂)이라 하오. 이곳에서 병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오.”
유장령은 잠시 그 자세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모용봉 또한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장내의 기운이 요동치며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나 그 기운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유장령은 손잡이를 움켜잡았던 손의 힘을 풀고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갔다. 구양수진 또한 자신의 허리띠에 올라가 있던 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팽팽하던 주위의 공기가 가라앉자 모용봉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로의 솜씨를 보기 위해 만난 자리가 아니오. 오늘 두 사람이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았기를 바라오.”
유장령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고, 구양수진은 자리에 앉았다.
잠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청을 밝힌 몇 개의 유등(油燈)만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을 뿐,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는 듯했고, 태관 또한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 유장령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오?”
모용봉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한 사람이 오지 않았소.”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그가 와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소.”
“그 대단한 작자가 누구요?”
모용봉의 시선이 유장령의 두 눈에 향했다. 유장령은 그 시선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요?”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을 잊지 마시오.”
“무얼 말이오?”
“이곳에서는 나 외에는 누구도 병기를 쓸 수 없다는 말.”
유장령은 물론이고 구양수진의 얼굴에도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그 자가 누구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태관이 한 사람을 대동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태관의 뒤에 있는 사람은 짙은 자색 유삼을 걸친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다.
그를 보자 유장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백자목(白紫木)!”
강호의 모든 마도인들이 굴복한다는 신목령의 주인인 신목존자의 대제자인 신목일호(神木一號) 백자목은 유장령을 보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년만이로군. 그동안 실력이 좀 늘었나?”
아주 조용하고 아늑한 방이었다.
벽에는 별다른 장식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는 흔한 융단조차 깔려 있지 않았지만, 단촐한 나무 탁자와 의자로만 이루어진 방안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탁자 위에서 흔들리는 촛불 하나만이 방안을 외롭게 밝히고 있어 전체적으로 어둡다는 것도 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진산월은 문을 열고 들어선 채 한동안 방안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촛불의 일렁거림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가 마치 지금 그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천하제일인의 거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볼품없는 방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진산월은 마음에 들었다. 흔들리던 그림자가 점차로 움직임을 멈추었고, 그도 안정을 찾았다.
방안에 달랑 두 개뿐인 의자 중 하나에 한 사람이 앉은 채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물처럼 고요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한없이 깊었다. 그 시선을 보자 진산월은 문득 사천성에 있다는 깊은 우물에 대한 전설이 떠올랐다. 그 우물은 어찌나 깊었는지 누구도 그 우물의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그 우물의 물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지만, 그만큼 깊은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어서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인생의 오묘한 맛도 함께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진산월을 바라보는 그 시선도 사천성의 우물처럼 맑고 깊었다. 그리고 짙은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깊은 시선의 주인은 눈빛만큼이나 깊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 사람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미소였다. 웃을 때 그의 눈은 유난히 주름이 많이 잡혔는데, 평소에 자주 웃었던지 아니면 눈을 찌푸리는 일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자네가 바로 그 진산월이로군.”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듣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진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으나, 진산월은 한 줄기 기이한 감흥이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천하제일고수에게 그는 단순히 ‘진산월’이 아니라, ‘바로 그’ 진산월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닌 특정한 사람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자신이 계속 주시하고 관심을 가져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떤 것이든 그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진산월도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가 바로 그 진산월입니다.”
노인의 주름진 눈에 더욱 많은 주름이 잡혔다. 진산월은 그가 젊었을 적에는 저 눈웃음만으로도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모용단죽일세.”
모용단죽!
단순한 네 글자의 이름이었으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이 이름을 듣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 또한 마음이 가볍게 격동되는 것을 느꼈다.
지난 세월 동안 이 이름은 모든 무림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믿음과 존경을 받아왔다. 그동안 그가 행한 업적은 한 개인이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무림인들의 지지와 성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천하제일의 고수 이전에 중원 무림인들의 표상(表象)이며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신화와 전설로 뒤덮인 인물을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아무리 담대하고 침착한 진산월이라도 가벼운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단죽은 진산월의 전신을 유심히 쓸어보고는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몸과 마음이 모두 절정으로 닦여 있군.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네.”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모용단죽이 한 말과 비슷한 말을 예전에 들은 것 같았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일전에 석가장에서 잠깐 보았던 철혈홍안 조여홍에게서도 그와 유사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두 절대고수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비슷하다는 것에 진산월은 한편으로는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모용단죽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게.”
진산월은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나 막상 강호의 전설인 모용단죽과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대하니 진산월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순간적으로 막막해졌다. 다행히 그의 그런 심정을 짐작이나 한 듯 모용단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노부를 만나려고 상당히 먼 길을 왔다고 들었네. 쉽지 않은 여정(旅程)이었을 텐데, 어려운 걸음을 했네.”
많은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진산월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와야 할 길이었습니다.”
진산월의 말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모용단죽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한동안 가만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름진 눈에 번뜩이는 물처럼 깨끗한 시선은 그의 마음 깊숙한 속까지 들여다보려는 듯 한없이 투명했다.
“그래, 노부를 만나려고 한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나?”
진산월은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거무튀튀한 광택이 나는 상자였다.
“석가장의 석곤 장주께서 이것을 모용 대협께 전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모용단죽의 시선이 검은 상자로 향했다. 상자를 응시하는 모용단죽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흥분도 없고, 의문도 없으며, 관심도 없어 보였다.
모용단죽은 손을 내밀어 상자를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
“천룡궤라고 들었습니다.”
“천룡궤라……. 천룡이란 말이지?”
뜻을 알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던 모용단죽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천룡궤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물건은 잘 받았네. 석 장주를 만나면 고맙다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모용단죽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에 실망감이 들 법도 하건만 진산월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 하나 때문에 그동안 적지 않은 시련을 겪고 험한 난관을 헤쳐 와야 했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보답이나 감사의 말도 듣지 못했다. 하나 진산월은 그에 대한 보답은 이미 한 잔의 차로 받았고, 예상보다 험한 일에 대한 대가는 열두 발자국의 걸음으로 충분히 치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홀가분함에 절로 표정이 밝아졌다. 천룡궤에 얽힌 사연이나 비밀은 지금의 그에게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또한 석곤이 모용단죽에게 천룡궤를 전해 주라고 한 이유도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물론 모용단죽이 알려준다면 기꺼이 듣기는 하겠지만, 모용단죽의 표정을 보니 그 또한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가장 중요한 일을 너무도 수월하게 끝냈기 때문인지 진산월은 평상시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평소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로 했다.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모용단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게. 노부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말해 주겠네.”
진산월의 별처럼 빛나는 시선이 모용단죽의 물처럼 고요한 두 눈에 고정되었다.
“야율척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는 어떤 인물입니까?”
모용단죽의 주름진 눈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자네도 무림인이니 그 점이 궁금하긴 하겠지. 당금 무림에서 야율척을 직접 상대한 사람은 우리 두 조손(祖孫)뿐이니 말일세.”
야율척이라는 이름은 강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막상 그에 대해 얼마쯤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진산월은 중원에 몸을 담고 있는 무림인으로서, 그리고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로서 어쩌면 반드시 부딪히게 될지도 모르는 야율척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모용단죽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흠! 한두 마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이라고 해야겠지.”
“어떤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그는 어떻게 보면 순진하고, 어떻게 보면 노회(老獪)하며, 또 어떻게 보면 한없이 열정적인 인물이지. 반면에 극도로 냉정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고 있네. 아난(阿難)이 그를 찾아낸 것은 정말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던 게야.”
그는 마치 아난대활불을 오래된 친구처럼 불렀다. 진산월은 묵묵히 모용단죽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용단죽의 눈은 무언가를 회상하듯 가늘게 뜨여져 있었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는 묵직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무공에 대한 재질은 놀랍도록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간(世間)에 알려진 것만큼 고금절세(古今絶世)의 독보적인 수준은 아니네. 다만 집념과 투지가 뛰어나고 신체 조건이 워낙 좋아서 싸움에 대한 감각만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절대 기재라고 할 수 있지. 다시 말해서 그는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는 남을 상대하는 데 더 강점을 가지고 있네.”
“…….”
“그래서 혹자들은 그를 천재(天才)라기보다는 귀재(鬼才)라고 부르기도 하더군. 그보다 빨리 무공을 배우는 자는 있을지 몰라도 그보다 빨리 남과 싸워 이기는 법을 터득하는 자는 없을 게야.”
모용단죽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그토록 싸움을 잘하는 자가 무공을 익히는 것이 미흡할 리가 없지. 결국 강호에서는 잘 익힌 자가 강한 게 아니라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강한 법 아닌가?”
그 말을 할 때 모용단죽의 눈은 어느 때보다 가늘어졌고, 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시선에 미묘한 파동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그의 말을 음미하느라 그의 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모용단죽은 이내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무튼 그는 싸움에 관한 한은 절대적인 존재일세. 그가 아난의 눈에 띈 지 팔 년 만에 천룡사의 최고 고수인 사대불법존자를 꺾은 것은 단순히 그의 무공이 그들을 능가해서가 아닐세. 말 그대로 그는 싸움으로 그들을 이겼네. 단순한 무공의 고하(高下)를 가르는 것이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대결을 했고 결국 그의 승리로 끝이 났네.”
“모용 대협께서는 어떠셨습니까?”
모용단죽의 입가에 다시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그와 어떻게 싸웠는지 묻고 있는 건가? 그때는 그의 실력이 나와 차이가 났지. 그의 그 가공스러운 격투 감각으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분명한 차이가 있었네. 그럼에도 나는 그를 간신히 이겼지. 아주 미세한 승부였네. 그래서…….”
모용단죽은 뒷말을 마치지 않았지만, 진산월은 그의 마지막 말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공 실력이 월등히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도 모용단죽은 간신히 야율척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 야율척은 아난대활불의 제자로 들어간 지 겨우 십여 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모용단죽은 다시 십 년이 지난 후의 야율척을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단죽도 그것을 알고, 야율척도 알았다.
그 뒤로 모용단죽은 구궁보에 칩거한 채 모용봉을 키우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로부터 벌써 십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야율척이 어떠한 존재로 성장했을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진산월은 가슴이 떨려 왔고,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그것은 단순히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무인(武人)으로서의 본능과 투쟁심이 마음 한구석을 불태웠던 것이다.
모용단죽은 그의 그런 마음을 짐작이나 한 듯 깊은 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를 상대하려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야 하네. 다시 말해서 그를 꺾고 싶으면 처음 붙은 상태에서 이기는 게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방법일세.”
진산월의 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그 말씀은…….”
“자네도 그를 상대하고 싶겠지?”
진산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모용단죽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했으나, 그 안의 내용은 어떤 청천벽력보다 더욱 크게 들렸다.
“그렇다면 먼저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하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놀라움 이전에 의문을 먼저 느꼈다.
육합귀진신공은 이제는 사라진 종남파 비전(秘傳)의 신공으로, 종남파 영광의 상징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이백여 년 전 종남오선이 천하를 풍미하고 있을 때 육합귀진신공 또한 찬연한 빛을 발했으나, 태을검선이 사라지고 종남오선이 차례로 모습을 감춘 후 종남파에는 더 이상 육합귀진신공을 익힌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종남오선 이후 종남파에서는 육합귀진신공을 되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은 실패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조차 희미해지고 말았다. 작금에 와서는 육합귀진신공이 단순한 하나의 무공이 아니라 여섯 가지 신공을 합친 것이라는 점 외에는 제대로 알려진 내용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모용단죽의 입에서 이제는 진짜로 존재했는지도 의심스러운 과거의 신공절학이 거론되었으니 진산월로서는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을 비롯한 몇몇 사람 외에는 종남파에서조차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육합귀진신공을 모용단죽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야율척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합귀진신공을 익혀야 한다는 그의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진산월의 마음속 의문을 짐작하고 있기라도 하듯 모용단죽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육합귀진신공은 종남파에서도 오래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고 있네.”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 육합귀진신공은 종남파의 모든 무공의 근간(根幹)이 된다고 하더군. 다시 말해서 육합귀진신공을 익힌 상태에서만 비로소 종남파 무공의 본연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들었네.”
모용단죽의 물처럼 투명한 시선이 진산월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자네가 종남파의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지만,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종남파 무공의 끝을 보았다고 할 수 없네. 그리고 적어도 그 정도가 되어야만 야율척과 승부를 겨루어 볼 수 있겠지.”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의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심정이 있었다. 육합귀진신공이 종남파 무공의 근간이라는 모용단죽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걸 익히지 못했다고 하여 종남파 무공을 완성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여섯 가지 신공 중 두 가지가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사라져 버린 육합귀진신공을 무슨 수로 익힌단 말인가? 모용단죽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영원히 종남파의 무공을 완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야율척과 검을 겨루어 볼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마음속의 불만과는 상관없이 진산월의 음성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본 파의 무공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군요. 모용 대협께서 본 파에 대해 이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종남파는 한때 천하제일을 구가했던 문파일세. 비록 오랜 세월이 흘러 과거의 영광이 퇴색되었다고 해도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지.”
모용단죽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걸 보게.”
진산월의 시선이 그의 손에 고정되자 모용단죽은 오른손을 슬쩍 쳐들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손의 움직임은 금세 끝이 났지만, 진산월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몸을 굳힌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항상 냉정하고 침착했던 그의 얼굴은 경직된 채 굳어 있었고, 의지견정했던 눈빛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놀라게 한 것일까?
“알아보겠나?”
모용단죽의 물음에 진산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본 파의 구반장법 중 대연여환(大衍如環)이라는 초식 같군요.”
놀랍게도 모용단죽이 펼친 것은 종남파의 무공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었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낙일방에 의해 복원된 구반장법 중의 절초였으니 진산월이 경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뜻밖에도 모용단죽은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이건 오십 년 전 명성을 날렸던 천왕수(天王手) 왕동해(王東海)의 성명절기인 천왕십이절수(天王十二絶手) 중의 미몽천왕(迷夢天王)이라는 초식일세.”
진산월은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모용단죽의 다음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자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닐세. 이 초식은 종남파의 구반장법과 아주 흡사하지.”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같은 무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솔직히 진산월은 조금 전에 모용단죽이 펼친 것이 대연여환이 아니라는 것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변초나 투로가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이것도 한 번 보게.”
모용단죽은 오른주먹을 살짝 쥐고는 앞으로 내뻗었다. 그 주먹을 본 진산월의 입에서는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일점천뢰…….”
그다지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 초식은 분명 종남파의 절세 무공인 낙뢰신권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초식 중 하나인 일점천뢰였다.
“이건 장성 근처의 낙성보(落星堡)에서 자신들의 비전절학이라고 자랑하는 낙성철권(落星鐵拳) 중의 성락일경(星落一驚)이라는 초식일세.”
“……!”
“짐작했겠지만 이 초식들은 모두 종남파의 무공을 보고 만든 것일세. 천왕십이절수와 낙성철권 중 상당수의 초식들이 그런 경우일세. 비단 그것뿐이 아닐세. 찾아보면 의외로 적지 않은 문파의 무공 중에서 종남파 무공과 유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네.”
진산월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당혹스러움과 혼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공이라는 것은 단순히 흉내 내거나 모방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 안의 복잡한 변화와 운기(運氣)하는 방법을 모르면 초식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모용단죽이 펼친 초식들은 그 투로가 종남파 무공들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가 내공도 일으키지 않고 최대한 천천히 펼쳤기에 그 속의 진정한 오의(奧義)까지 함께 담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그 유사성만으로도 진산월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원인은 두 가지일세. 첫째는 이백 년 전에 종남오선이 천하를 주름잡을 때 그들의 무공에 경탄한 자들이 자신이 인상 깊게 본 종남파의 무공을 모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일세. 그들 중 대부분은 단순히 흉내를 내는 것에 그쳤지만, 극히 일부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얼핏 보기에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타 문파의 무공을 모방하거나 훔치는 것은 엄연히 무림의 금기(禁忌)인데, 그들이 감히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모용단죽의 얼굴에 아주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너무도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한 미소였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누구도 그런 짓을 하지 못하지. 특히 천하를 석권하고 있는 문파의 무공을 베낀다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일세.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고 할 수 있지. 그 뒤에 종남파가 어떻게 되었나?”
진산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모용단죽이 말하는 의미를 너무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종남오선 이후 종남파는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하여 종내에는 몰락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종남파가 두려워서 몰래 무공을 익히고 있던 자들도 점차로 종남파를 껄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종남파에서 그 무공들이 완전히 실전된 것을 확인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무공이라고 공개적으로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위도 괘씸하지만, 그 무공들이 자신들의 무공을 베낀 것인지도 알지 못했던 종남파의 무능은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모용단죽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진산월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종남파 내부에 있네. 오래전에 종남파의 장문인이 자살을 하고 장경각이 불에 탄 적이 있네. 그때 상당수의 비급들이 외부로 유출되었는데, 그중 일부가 다른 문파로 흘러 들어가 그들의 무공으로 둔갑했을 것이네.”
그 일은 종남파의 십오 대 장문인인 풍운신룡 담명의 시대에 벌어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사(秘史)였다. 당시 담명은 뛰어난 재질을 지닌 촉망받는 장문인이었으나, 문파의 부흥이라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자신의 거처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뚫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담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때 장경각도 원인 모를 화재에 휩싸여 많은 비급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하나 그 진실은 한층 더 추악한 것이었으니, 화재로 소실된 비급은 얼마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장문인의 자살에 실망한 제자들이 문파를 등지면서 가지고 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종남파는 도저히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으니, 담명은 결국 자기 손으로 본인뿐 아니라 종남파의 명운(命運)마저 끝장내 버린 셈이었다.
모용단죽이 말한 두 가지 일들은 충분히 납득이 되면서도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로서는 참으로 듣고 있기 힘든 참혹한 사실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더 이상 격동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느 때보다 굳건하고 결연함이 담겨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과거의 잘못된 일은 차차 고쳐나갈 것이고, 어긋난 일은 하나씩 바로잡을 것입니다. 본 파에게는 비록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 어려움을 극복하고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이상 머지않아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골이 깊었던 만큼 날아오르는 데 필요한 공간은 충분히 남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모용단죽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되길 바라네. 자네가 듣기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그만큼 과거 종남파가 강호에 끼쳤던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여러 군데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네.”
“별로 바람직한 흔적은 아니로군요.”
“흔적이 어디 그런 것뿐이겠나? 아직도 무림의 명숙들 중에는 과거 종남파의 무공을 연구하는 자들도 있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세.”
진산월의 시선이 모용단죽의 주름진 눈에 고정되었다. 눈웃음을 짓는 듯 주름 가득한 모용단죽의 얼굴은 어찌 보면 장난꾸러기 소년의 치기 어린 모습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노회할 대로 노회한 늙은이의 속을 알 수 없는 모습 같기도 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외부인이 자신의 문파의 무공을 연구하고 있다는 말에 무작정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모든 무림인들에게 오랫동안 천하제일의 고수로 공인된 전설적인 인물이라면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대체 모용단죽 같은 인물이 뭐가 아쉬워서 몰락한 지 이백 년이 되어가는 문파의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무공을 연구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아주 단순한 동기일세. 종남오선 시절의 종남파는 강호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강대한 문파였네. 그들 이후 아직 그와 같은 성세를 누린 문파는 없었네. 그러니 그들이 대체 왜 그렇게 강했는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겠나?”
“하지만 당시의 무공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고, 본 파는 오랫동안 암흑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네. 그토록 강하고 무림을 완벽하게 호령했던 문파가 어째서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져 갔는지 궁금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 아무튼 나는 이백 년 전의 종남파, 특히 종남오선의 무공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네.”
“종남오선은 모두 다섯 분입니다.”
언뜻 모용단죽의 눈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관심을 가진 건 그들 중 한 사람일세.”
진산월은 짤막하게 말했다.
“태을검선.”
“바로 그렇다네.”
현재의 천하제일고수가 과거의 천하제일고수에게 관심을 갖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모용단죽의 입으로 직접 그런 말을 듣게 되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것은 자신이 은밀하게 가지고 있던 꿈을 다른 누군가가 먼저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 소년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모용단죽의 눈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왠지 심술 맞아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진산월의 심정이야 어떻든 모용단죽은 특유의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태을검선은 평생 적수를 만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고수였네. 사람들은 나를 ‘천하제일인’이라고 부르지만, 적어도 그분처럼 남들 위에 월등하게 존재해야만 비로소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
“종남오선은 하나같이 당시 무림의 최고수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태을검선은 더욱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네. 최고의 재질을 지닌 인재들이 같은 문파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는 너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던 것일세.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태을검선이 다른 종남오선보다도 압도적으로 강할 수 있는 원인을 조사했네.”
“원인을 아셨습니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더군.”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태을검선 본인의 자질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는 것일세. 그는 날 때부터 천재였고, 특히 무공에 관한 한은 가히 천고(千古)의 기재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네. 누구도 그의 자질에는 근접할 수 없는 완벽한 무인(武人)이었다는 말이지.”
그것은 진산월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가 알고 있기로도 종남오선뿐 아니라 당시 천하의 어떤 고수도 자질 면에서 태을검선을 능가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무공 사부라고 할 수 있는 혈선 정립병조차도 태을검선의 기재(器才)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나 무공이 어찌 자질만으로 판가름 나겠는가? 자질이 좋다는 건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본 조건에서 남들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자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본인의 노력이며, 또한 어떤 사부를 만나서 어떠한 무공을 어떻게 익혔는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종남오선의 다른 네 사람은 결코 태을검선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태을검선은 늘 그들보다 몇 발자국이나 앞서서 걷고 있었다.
그리고 모용단죽은 자신이 파악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두 번째는 태을검선이 익힌 무공에 있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을검선이 익힌 육합귀진신공에 있다고 해야겠군.”
진산월은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우두커니 그를 쳐다보았다. 육합귀진신공이 지금은 비록 실전되었다고는 하나 이백 년 전이라면 종남오선을 비롯한 적지 않은 종남파의 고수들이 익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태을검선이 익힌 육합귀진신공만이 특별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자네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는가? 종남파 최고의 신공이라고 칭송받던 육합귀진신공이 왜 종남오선의 실종 이후 급격히 존재감이 사라져서 결국에는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는 신비의 무공이 되었는가 하고 말일세.”
“저도 그 점은 늘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종남오선 외에도 육합귀진신공을 익힌 분들이 상당수 계셨을 텐데, 갑작스럽게 그 맥(脈)이 단절되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종남오선 중 유일하게 죽을 때까지 종남파에 남아 있던 취선 하정의는 육합귀진신공을 복원하기 위해 평생 동안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졌다. 하나 그는 결국 실패했고, 육합귀진신공은 익히는 방법조차 사라진 채 단지 종남파의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 부분은 오래전부터 종남파 무공을 연구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란(論難)거리였네. 많은 가설(假說)들과 낭설에 가까운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누구도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했네. 그도 그럴 것이 이백 년이란 세월은 진실을 파악하기에는 지나치게 길고 장구한 시간일세. 종남오선의 시절에 벌어진 일을 지금 알기에는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었지. 하지만 논리적으로 몇 가지 짐작을 해 볼 수는 있네.”
모용단죽이 육합귀진신공이 실전된 이유를 말하는 모습을 진산월은 복잡야릇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그동안 진산월은 육합귀진신공이 실전된 것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종남파의 무공 중 실전된 것이 어디 육합귀진신공 하나뿐이겠는가? 수많은 신공절학들이 사라져 버렸고, 비인부전(非人不傳)으로 은밀히 전해지던 운용법들도 명맥이 끊긴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겨우 몇 가지 절학들을 되찾고 비전(秘傳)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실전된 무공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 많은 실전 무공들 중 육합귀진신공만을 특별하게 취급할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강호 무림의 제일가는 고수가 유독 육합귀진신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연구해 왔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은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고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단죽은 복잡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진산월의 얼굴을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육합귀진신공은 종남파에서 가장 뛰어난 여섯 가지 신공의 장점만을 규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알고 있네. 처음 그 원리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이론을 바탕으로 여섯 가지 신공을 하나로 합쳐서 궁극의 진기(眞氣)를 만들어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군. 그리고 처음으로 육합귀진신공을 이룬 사람은 종남파의 십일 대 장문인인 유백석이란 분일세.”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조차 알지 못했던 육합귀진신공의 내력이 종남파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모용단죽의 입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백석이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한 후에야 비로소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앞서 나갈 수 있었네. 그리고 그가 키워낸 종남오선의 시절에야 비로소 강호의 수많은 문파들을 누르고 그들 위에 우뚝 설 수 있었지.”
“…….”
“하나 종남파의 전성 시절에도 육합귀진신공을 터득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종남오선이 활약하던 시대에도 육합귀진신공을 익힌 자는 다섯 명을 넘지 않았네. 심지어 종남오선 중에도 세 명 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더군.”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종남오선 중 말인가? 태을검선과 소선, 그리고 혈선이라는 인물일세. 그들 중 소선은 유백석의 뒤를 이어 종남파의 십이 대 장문인이 된 분으로 알고 있는데, 혈선에 대해서는 나도 거의 아는 바가 없네.”
모용단죽의 고요한 시선이 진산월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자네는 혹시 알고 있나?”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으나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 말도 특별히 없었다.
혈선 정립병은 태을검선 매종도의 필생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나, 강호에서의 활약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도 그가 신분을 숨긴 채 활동했던 혈삼객이라는 별호가 더 널리 알려졌을 정도였다. 그것도 이미 이백 년 전의 일이었으니, 지금은 혈선은 물론이고 혈삼객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전무한 형편이었다. 반면에 태을검선은 강호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것이 일인자와 이인자의 차이였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절대적인 일인자였던 태을검선의 이름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은 반면에 그에 미치지 못했던 혈선 정립병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문파의 장문인도 아니고 최고수도 아닌 이백 년 전의 인물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나 정립병을 무공에 관한 마음속의 사부로 생각하고 있는 진산월로서는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용단죽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긴……. 자네는 종남파의 장문인이니 종남오선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군. 아무튼 육합귀진신공은 그처럼 당시에도 익힌 사람이 별로 없는 그야말로 비전(秘傳) 중의 비전이었네. 아니,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군.”
모용단죽은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육합귀진신공은 배우기는 쉬워도 완성하기는 극도로 어려운 무공이었네. 심지어 종남오선 중의 두 사람도 육합귀진신공에 입문(入門)했으나 결국은 익히지 못했고, 그것은 유백석의 여러 사형제들도 마찬가지였네. 결국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한 사람은 종남파에서도 유백석과 종남오선의 세 사람에 불과했으니, 그들이 모두 사라진 후 그 무공이 절전(絶傳)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비선 조심향이나 취선 하정의는 비록 종남오선의 가장 말석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당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었고, 또한 누구나가 첫 손가락에 꼽는 기재 중의 기재들이었다. 대체 육합귀진신공이 어떠한 것이기에 그런 그들이 유백석이라는 최고의 스승 밑에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신공을 완성시키지 못했는지 의아함을 넘어 기이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육합귀진신공이 특별한 조건을 갖춘 상태가 되어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네.”
“특별한 조건이라면?”
“특이한 체질이나 특수한 연공법, 혹은 어떤 깨달음 같은 걸 필요로 하는 무공일 거라는 추측이지.”
진산월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렇다면 종남파에서도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했을 텐데, 제대로 익힌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건 아무래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 어떤 무공을 토대로 익혔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일지 모르고.”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군요.”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일 뿐이네. 육합귀진신공이 여섯 가지의 각기 다른 신공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중 중심이 되는 신공이 있을 것이네. 처음부터 동시에 여섯 개나 되는 신공을 익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일세.”
“그렇겠지요.”
“내가 조사해 본 바로는 종남오선의 다섯 사람은 각기 다른 신공을 기본공(基本功)으로 익혔다고 하네. 그래서 혹시 어떤 신공을 먼저 익혔는가, 혹은 어떤 신공을 기본공으로 익혔는가 하는 것이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걸세.”
진산월은 모용단죽의 의견이 상당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의 짐작대로라면 똑같은 스승 밑에서 같은 문파의 무공을 배운 종남오선이 사람에 따라 육합귀진신공을 익히고 익히지 못한 차이가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둘 중 어느 게 더 타당한지는 나도 알 수가 없네. 아니 이런 추측 자체가 사실일지도 의문스러운 상황이지. 어쨌든 이백 년 전의 일이고, 지금은 누구도 확인해 줄 수 없는 일이니 말일세.”
“…….”
“그런데도 내가 자네에게 육합귀진신공을 익히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자네라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어떤 가능성 말입니까?”
“육합귀진신공의 구결은 비록 사라졌지만, 여섯 가지 신공 중 몇 가지는 종남파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아네.”
“그렇습니다.”
“자네는 그중 몇 가지를 익혔나?”
진산월은 가만히 모용단죽을 응시하고 있다가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가지입니다.”
진산월은 태을신공을 기본공으로 익혔고, 정립병이 남긴 비급에서 태진강기를 얻었다. 그리고 낙일방이 소선 우일기의 유해에서 천단신공을 찾았고, 최근에는 성락중이 어렵게 복원한 현청건곤강기를 전해 받았다. 비록 그중에서 십이 성 완성한 것은 태을신공뿐이었으나, 가장 최근에 익히기 시작한 현청건곤강기까지 포함하여 그가 모두 네 가지의 신공을 익히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모용단죽의 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에 한 줄기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하군.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 가지뿐이로군?”
“그렇습니다.”
종남파에 남아 있는 전설로 비추어 보건대, 여섯 가지의 신공을 모두 모았다고 해서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육합귀진신공을 익히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게 되는 셈이었다.
모용단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중 한 가지를 찾는 것에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도 같군.”
진산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종남파의 절학 중 사라진 신공 한 가지는 남해로 흘러갔을 것이네.”
남해라고 하자 진산월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여섯 가지 신공 중 사라진 칠음진기는 종남오선 중의 비선 조심향의 절학이었다. 그녀 이후 칠음진기를 제대로 익힌 사람은 종남파에서 나오지 않았다.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종남파에는 적지 않은 여고수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칠음진기는 물론이고 칠음진기로 펼칠 수 있는 수많은 신공절학마저 익힌 사람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그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하나둘씩 종남파를 떠났고, 나중에는 그 무공의 구결들마저 모두 사라져 버려 익히고 싶어도 익힐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칠음진기는 조심향을 끝으로 종남파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린 셈이었다.
평생 태을검선의 종적을 찾아 헤맸던 태을종객 장하민은 <성심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심향의 행적이 세 군데 중 하나일 거라는 자신의 추측을 적어 놓았다. 그중 그가 가장 먼저 고려했던 장소가 바로 남해 보타산의 청조각이었다. 청조각의 당시 주인이었던 남해신녀(南海神女)가 조심향의 오랜 친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락중이 겪었던 기이한 일을 생각해 보면 청조각의 무공이 종남파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런 점들을 취합해 본다면 떠오르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혹시 모용 대협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남해 청조각이 아닙니까?”
진산월의 물음에 모용단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이미 그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군?”
모용단죽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모용 대협께서는 본 파의 신공 중 하나가 청조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러 가지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네. 정확한 건 자네가 확인해 봐야겠지.”
물론 그렇다. 하나 진산월로서는 짙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모용단죽이 육합귀진신공에 이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종남파에서조차 제대로 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던 육합귀진신공에 대해 그는 어떻게 조사를 계속할 수 있었는가?
그는 과연 자신이 육합귀진신공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진산월에게 모두 밝힌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수십 년간 비밀스럽게 연구해 왔던 육합귀진신공의 비밀을 지금 진산월에게 밝힌 이유는 무엇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숨기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지금의 진산월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늦기 전에 남해 청조각을 직접 방문하여 정말로 조심향의 비전이 그곳에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뿐이다.
모용단죽은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더니 의미 모를 말을 내뱉었다.
“누가 아는가? 좋은 일은 모여서 온다고 했으니 그걸 찾게 되면 육합귀진신공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말일세.”
진산월은 다시 고개를 들어 모용단죽을 바라보았으나 모용단죽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진산월은 모용단죽이 그 말이라도 해 준 걸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원망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나 더 이상 모용단죽에게서 육합귀진신공에 대한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던 진산월은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모용단죽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모용 대협께서 본 파의 잃어버린 신공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모용단죽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할 것 없네. 그저 내가 예전에 호기심에 찾아본 내용을 알려준 것에 불과하니 말일세. 자네가 나를 찾아 먼 길을 와 준 것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소소한 접대라고 생각하게.”
진산월이 다시 무어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그때 모용단죽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밤이 깊은 모양이군. 오늘의 만남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세.”
명백한 축객령에 진산월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막 방을 벗어나기 직전에 진산월은 문득 몸을 돌려 모용단죽을 향해 물었다.
“서풍에 날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감았던 모용단죽의 눈이 떠지며 실낱같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묻는 것인가?”
“갑자기 떠오른 질문입니다만, 모용 대협이시라면 그럴 듯한 해답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되어서 말입니다.”
모용단죽은 한동안 진산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를 놀라게 할 생각이라면 성공했군. 서풍이라……. 어감이 좋은 단어로군. 바람에 휘날리는 건 아무래도 여인의 치맛자락이겠지. 서풍이라면 녹색 치마 정도가 어울리겠군.”
“녹상(綠裳)이라…….”
진산월은 입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용단죽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시구가 있었던 것이다.
- 진한 이슬은 붉은 뺨을 적시고,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초록 치마를 날리네(濃露濕丹臉, 西風吹綠裳)…….
그것은 송(宋)대의 진여의(陳與義)가 읊은 ‘거상(拒霜)’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었다.
냉옥환은 모용단죽의 입에서 이 싯구를 듣고 싶어서 진산월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일까?
순간적으로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진산월은 모용단죽에게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풍에 날리는 녹색 치마라. 정말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흥미로운 질문이었네. 잘 가게.”
진산월이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나는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모용단죽은 그의 몸이 완전히 방을 벗어나자 허공을 올려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부용(芙蓉)이라……. 그래, 그녀를 잊고 있었군.”
‘거상’은 부용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용화는 초목이 다 시드는 늦가을에 피는 꽃이라, 서리가 내린 후에도 무성하다고 하여 거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동안 조용히 허공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던 모용단죽은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그러자 외롭게 방안을 비추고 있던 촛불이 꺼지며 짙은 어둠이 그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