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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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6화


제 267 장 양자회동(兩者會同)

두건의 사나이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누가 너의 사형이란 말이냐?”

그의 음성과 기세가 어찌나 사나워 보였던지 양소선의 몸이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두기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부르르 떨렸다.

두기춘은 새파랗게 질린 양소선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더니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여긴 어쩐 일이시오?”

두건의 사나이는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입꼬리를 말며 괴이하게 웃었다.

“흐흐……. 그래. 그렇게 나와야 너답지.”

화를 내는 듯 하다 갑자기 웃으니 이상할 법도 한데, 두건의 사나이에게는 그런 모습이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왠지 화를 낼 때보다 더욱 살벌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거리 구경이라도 하려고 나섰다가 멀리서 너를 보았다. 평소에는 늘 주위의 시선에 예민하던 놈이 남들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허겁지겁 걸어가길래 또 어디서 무슨 요상한 짓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따라와 본 것이다.”

두건의 사나이는 두기춘의 뒤에 있는 양소선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런데 역시나 여기서 또 예전의 솜씨를 부리고 있었구나.”

양소선의 낯빛이 살짝 굳어졌다. 비록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시비를 걸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 흉악해 보여 순간적으로 겁을 먹기는 했어도 그녀 또한 약간의 호신무공을 익혀서 파락호 한두 명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앞에는 화산파 장문인의 촉망받는 제자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그녀의 귀에 들려온 사나이의 말 속에 꺼림칙한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앞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두기춘의 건장한 등으로 향해 있었다.

‘두 공자는 진정으로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만나러 나와 준 것일까? 그리고 두 공자의 사형이라면 화산파의 인물일 텐데, 왜 두 사람은 이렇듯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일까?’

화산파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두건의 사나이는 지나치게 거칠고 투박했다. 게다가 칙칙한 무복(武服)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깔끔하고 단정하기로 유명한 화산파의 제자답지 않았다.

양소선이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의 등을 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기춘은 평상시의 침착함을 되찾고는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귀하가 신경 쓸 것은 없다고 생각하오. 내게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우리는 이만 가보겠소.”

두건의 사나이의 눈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우리가 용무가 없으면 만나지도 못하는 사이가 되었군. 그깟 용무야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두건의 사나이는 품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두기춘은 자신의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서찰을 가볍게 받아 들었다.

그것을 본 두건의 사나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조금 전에 그는 자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올려 서찰을 던졌던 것이다. 얇은 서찰에 기운을 담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로서는 상당한 연습 끝에 어지간한 고수라도 격상시킬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는데, 두기춘은 너무도 수월하게 그 서찰을 받아버린 것이다.

‘죽일 놈. 장문 사형이 드셔야할 만년삼정을 훔쳐 먹더니 내공 하나만은 확실히 고수가 된 것 같군.’

두건의 사나이는 다름 아닌 응계성이었다. 응계성은 노해광의 비밀스런 지시를 받고 며칠 동안 두기춘의 뒤를 은밀히 쫒고 있다가 오늘 모처럼 기회를 노려 두기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두기춘은 서찰을 펼쳐 보았다. 서찰 위에는 <신산 곡수 대협 친전>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게 무엇이오?”

“가지고 가서 너희 잘난 곡 집법이란 자에게 전해 주어라.”

두기춘은 서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누가 전하는 것이오?”

“본 파의 노해광 사숙이시다.”

두기춘도 노해광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지 표정이 한층 무거워졌다. 노해광은 어느 덧 이름만으로 사람에게 중압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서안의 유력자가 되어 있었다. 특히 쾌의당의 칠대용왕 중 한 명이자 수공의 제일인자라는 황충도 그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는 명숙으로 소문난 강호의 유명한 고수들도 그를 어려워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두기춘은 서찰을 자신의 품에 잘 간직하고는 다시 응계성의 얼굴을 주시했다.

“다른 용무는?”

응계성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 흥겹다기 보다는 사납고 거친 미소였다.

“너에게는 꼭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용무가 있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 용무가 무엇인지는 두기춘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두기춘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이어 그는 자신의 등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양소선을 돌아보았다.

“양 소저. 뜻밖의 일로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오. 오늘은 양 소저를 모실 분위기가 아닌 듯 하니 내가 양 소저의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양소선은 이런 상황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고 있는 두기춘의 준수한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두 공자께서도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 듯하니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나누어도 좋을 것 같군요.”

두기춘은 그녀의 반응이 다소 의외였는지 눈을 번쩍 빛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마침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가 가끔 찾아가는 다관(茶館)이 있으니 차라도 한 잔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

양소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란 마음을 달래기에는 차보는 술이 더 나은 것 같군요.”

“그럼 원래 내가 양 소저를 모시려고 했던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소.”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두기춘은 여전히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었고, 그녀도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멀어지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던 응계성은 거칠게 가래침을 내뱉었다.

“퉤! 마치 내가 선남선녀를 방해하는 악당이 된 느낌이군. 두기춘. 내가 너를 순순히 보내주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너는 어차피 매 사형의 몫이니 매 사형이 돌아올 때까지 너를 건드리지 않는 것뿐이다.”

막상 그 말을 하고 난 응계성의 얼굴에는 살짝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서찰을 너무도 쉽게 받아내던 두기춘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역시 내공이 문제로군. 손노태야에게 영약이라도 달라고 사정해야 하나?”

응계성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도 몸을 날려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 ☆ ☆

노해광은 어떤 일을 계획할 때는 늘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수십 차례의 검토를 하지만, 막상 일이 진행된 후에는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 보다는 혼자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부쩍 누군가와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대상은 바로 정해였다.

정해는 두뇌가 비상하고 언변이 좋을 뿐 아니라, 사태를 파악하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노해광은 그와의 대화가 늘 즐거웠다. 정해 또한 짧은 시간 내에 서안의 막후 실력자가 된 노해광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좋아했기에 그가 부르면 만사를 젖혀놓고 달려오고는 했다.

지금도 두 사람은 산해루의 삼층에 있는 노해광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 그 내용은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곡수가 과연 사숙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정해가 차를 한 모금 맛있게 마신 후 물어보자 노해광은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확률은 반반이라고 봐야지.”

노해광은 요새 수염을 기르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항상 짧은 수염만을 선호하던 그가 제법 탐스러울 정도로 길게 턱수염을 기르는 것은 수염을 기른 그의 인상이 무척 충후해 보인다는 주위의 의견 때문이었다. 이제는 서안의 거물다운 관록이 묻어나오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도 다소 가벼워 보였던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벗어나 좀 더 듬직한 느낌을 주는 외모로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곡수로서는 은밀히 추진하고 있는 일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겁니다. 그래서 이번 투자에 대해 직접 만나서 상담을 하자는 사숙의 제의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치상으로야 그렇지. 그런데 상대가 곡수라는 게 문제다.”

노해광은 총기가 번뜩이는 정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운 지 무거운 음성과는 달리 표정은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곡수는 이런 일일수록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직접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겠지.”

정해는 단번에 노해광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곡수로서는 사숙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던 자신의 속셈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라도 나오려고 할 겁니다.”

노해광은 빙긋 웃었다.

“너는 마치 곡수의 마음속에 들어가 본 놈처럼 말하는구나.”

정해도 따라서 웃어 보였다.

“저라도 그럴 테니 역지사지(易地思之) 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야 워낙 호기심이 많고 잔머리가 비상한 녀석이니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는 게 재미있어서라도 기를 쓰고 나오려고 하겠지. 하지만 곡수는 누구보다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다.”

노해광이 정해의 말에 내심 동조를 하면서도 굳이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정해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은근히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정해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면 사숙께서는 곡수가 회동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저는 곡수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해가 유난히 눈을 빛내며 말하자 노해광은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더니 피식 웃었다.

“내게 내기라도 걸어서 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구나.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거라.”

정해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정말 사숙의 눈을 피할 수는 없군요. 사실은 사숙께 바라는 게 하나 있습니다.”

“네 녀석이 조금 전부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수상해 보였다. 원하는 게 뭐냐?”

“제가 듣기로는 사숙께서는 오랫동안 강호를 주유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한 많은 기물(奇物)도 접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런 편이지.”

“그 기물들에는 물론 내공증진에 도움이 되는 영약도 있겠지요?”

그제야 정해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차린 노해광은 그만 껄껄 웃고 말았다.

“하하! 이 영악한 녀석. 내게 천지유불란(天地幽彿卵)이 있는 걸 알고 있었구나!”

정해는 멋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일전에 하 노형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십여 년 전에 사숙께서 유불란 중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천지유불란을 구해서 소중히 보관하고 계시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해가 말하는 하 노형이란 천면묘객 하응을 말한다. 노해광의 수하들 중에서도 특히 하응과 정해는 서로 죽이 잘 맞아서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입이 가벼운 편인 하응이 술김에 노해광의 비밀 한 가지를 밝힌 모양이었다.

유불란은 이름처럼 무슨 생물의 알 같은 게 아니라 공청석유같은 영약의 일종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래된 심산의 깊은 곳에는 아주 가끔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상충하는 지역이 존재한다. 그런 지역에 종화석(鐘化石)이라고 하는 특이한 성분으로 된 바위가 있다면, 그 바위 속에는 음기와 양기의 성분이 조금씩 쌓이게 된다. 그런 세월이 수백 수천 년을 흐르면 그 바위 안에 음기와 양기의 농축된 기운이 고이게 되는데, 그 형태가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반쯤 굳은 모양으로 형성되게 된다. 그 모습이 마치 계란과도 같으나, 그렇다고 진짜 계란은 아니기 때문에 유불란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음기와 양기가 오랜 세월동안 농축되었기 때문에 내공을 증진하는데 공청석유 못지않은 효능을 발휘하지만, 발견하기가 극히 힘들어 천고(千古)의 기연(奇緣)이 없으면 얻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노해광이 구한 천지유불란은 유불란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좋은 특상품을 말하는 것으로, 노해광도 처음 구했을 때 한 방울만 먹고 나머지는 밀봉해서 소중하게 보관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알아차린 정해가 유불란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끼고 아끼는 유불란이었으나 사문의 귀여운 사질에게 주는 것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나 노해광은 짐짓 눈을 찡그렸다.

“이런 사소한 내기에 걸기에는 천지유불란은 지나치게 귀한 물건이다. 더구나 너는 무공에 별다른 소질도 없어서 효능을 제대로 보지도 못할 것이다. 설마 뒤늦게 무공에 매진할 생각이란 말이냐?”

정해는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너무 무리한 욕심을 부린 것에 충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만 저는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사용하지 않고 썩히고만 있다면 그 존재가치를 잃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유불란을 먹으면 물론 어느 정도 내공 증진에 성과를 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무공이란 내공만 높아진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저도 제 주제를 알고 있는데 언감생심 이제 와서 무공에 욕심을 내겠습니까?”

노해광도 정해가 그렇게 뻔뻔한 성격은 아님을 알고 있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누구를 주려고 한 것이냐?”

정해는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응 사형이 두기춘을 만나고 나서 상당히 고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제야 노해광은 속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기춘이란 놈은 장문인에게 갈 만년삼정을 훔쳐 먹었다고 했으니 필시 임독양맥을 타통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이 특별히 자신의 제자로 발탁했을 정도니 분명할 것이다.’

응계성은 문파를 배신한 두기춘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두기춘이 임독양맥을 타통했다면 그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응계성은 한쪽 발도 불편한 상태가 아닌가?

정해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응 사형도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무작정 두기춘을 다그친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어차피 두기춘은 매 사형의 손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를 내버려 두는 것과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아 덤비지도 못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더구나 응 사형은 여러 가지 풍파에 휩싸여 본 파의 제자들 중에서도 내공이 약한 편이라 그 점에 대해 더욱 아쉬워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흠.”

노해광의 뇌리에 얼마 전에 보았던 응계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동안 노해광은 응계성을 몇 번 스치듯 보기는 했으나, 가까이에서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깐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노해광은 응계성이 말로 듣던 것보다 더욱 뜨겁고 과격한 성정(性情)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번들거리는 눈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입을 열 때 흘러나오는 투박한 말투는 노해광에게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때 노해광은 그가 한쪽 다리가 불구라는 사실에 진한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였다. 다리가 불구가 된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임독양맥을 뚫고 화산파 장문인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는 자의 상대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그가 느꼈을 좌절과 고통을 노해광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해광은 가만히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원래 그는 천지유불란을 소지산과 방취아에게 줄 계획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장문인이 자리에 없는 현 상황에서 종남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특히 소지산은 무공에 대한 재질이 뛰어나고 기질이 비범하여 노해광도 기대하는 바가 무척 컸다. 두 남녀에게 한 방울의 유불란만 전해져도 두 사람의 진경(進境)은 훨씬 더 탁월해질 것이 분명했다.

‘남아 있는 유불란은 다섯 방울 정도다. 소지산과 방취아 외에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유소응과 단리상에게 한 방울씩 주면 딱 한 방울이 남기는 하는데…….’

그 한 방울은 정말 꼭 필요할 때를 대비해 비상으로 남겨 놓거나 아니면 점차로 기력이 쇠잔해 가는 전풍개에게 줄 생각이었다.

유불란이라고 만능은 아니다. 공력을 증진하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체질을 개선시키거나 탈태환골을 시키지는 못한다. 병든 몸을 낫게 할 수도 없고, 심각한 내상을 고치지도 못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유불란의 효과를 크게 보기는 어려웠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기재가 뛰어난 어린 아이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내공의 기초를 잘 닦은 어린 소년에게는 한 방울의 유불란이 다른 어떤 영약보다도 뛰어난 효능을 발휘할 것이다.

무작정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한 방울을 초과하는 유불란은 그저 몸에 좋은 영양제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약효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달 가량은 정양하면서 오직 연공(練功)에만 힘을 쏟아야 한다. 그래서 노해광도 처음 구입할 때 한 방울만 먹고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노해광은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그래. 필요할 때 쓰는 것이 진정 물건의 가치를 지키는 길일 것이다. 사숙께는 죄송스럽지만, 본 파의 미래를 위해 쓰인 것을 아신다면 기꺼이 용서해 주시리라.’

노해광은 짐짓 엄격한 눈으로 정해를 응시했다.

“만약 내기에서 진다면 너는 무엇을 내놓겠느냐?”

정해는 노해광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감격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해광의 말은 정해가 내기에서 이긴다면 유불란을 내놓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는 노해광을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진다면 앞으로 십 년 동안 사숙의 뒷수발을 들겠습니다. 저를 종처럼 부리셔도 기꺼이 감당할 것입니다.”

노해광은 혀를 찼다.

“십 년이란 너무 긴 세월이다.”

“천지유불란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봅니다.”

노해광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정해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너는 물건의 가치를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놈이구나. 내기는 성립되었다.”

이틀 후.

곡수는 두기춘만을 대동하고 노해광의 거처인 산해루에 나타났다.

산해루의 지배인인 종표는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삼층으로 안내했다.

삼층에는 노해광과 정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노해광은 두 사람을 정중하게 대했다. 둘 중 한 사람은 종남파의 오랜 숙적인 화산파의 수뇌부 인물이며, 다른 한 사람은 한때 자신의 사질이었던 종남파의 배반자였음에도 노해광은 두 사람을 대하는 것에 예의를 잃지 않았다.

정해 또한 말없이 곡수와 두기춘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곡수가 회동을 받아들인 것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두기춘을 데리고 온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회동의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곡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과거 종남파의 제자였던 두기춘만을 대동하고 왔다는 것은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두기춘을 데려와서 노해광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는 수작 일수도 있고, 그만큼 두기춘의 위상이 올라간 방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곡수와 두기춘을 대하는 노해광과 정해의 표정은 차분했고, 접대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네 사람이 자리에 앉자 종표가 차를 가져다 놓고는 방을 벗어났다.

곡수는 느긋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바로 장안을 막후에서 지배한다는 철면호의 집무실이구려. 과연 허례허식을 배제하여 지극히 실용적이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는 실내 분위기가 노 대협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소.”

노해광은 턱 밑으로 제법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저 꾸미는 게 귀찮아서 내부 장식에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뿐이오. 워낙 볼 품 없는 방이라 곡 대협을 이곳으로 모시면서도 내심 불안한 생각이 들었소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자고 했으면 실망했을 거외다.”

노해광은 짐짓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렇소?”

“장안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이 이곳에서 논의된다고 들었소. 장안 최고 실력자의 방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보고 싶지 않겠소?”

“자꾸 나를 장안의 실력자니 막후의 지배자라고 하시는데, 참으로 듣기 민망하오. 내가 비록 장안의 한쪽 귀퉁이에서 쥐꼬리만한 이름을 얻고는 있지만, 장안 전체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애송이나 다름이 없소. 곡 대협이야말로 화산파의 실세 중 실세이니 나같이 허명(虛名)만 날리는 존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목이시오.”

곡수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거목이라니 당치 않소. 본 파에 어른들이 얼마나 많이 계신데 나 같은 게 실세겠소? 노 대협이야말로 배분으로 보아도 종남파의 최고 어른 중 한 분이시고, 실력으로 보아도 현재 장안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것으로 증명하고 계시지 않소?”

“하하. 이거 이러다 끝이 없겠소. 서로 우리 얼굴에 금칠은 그만 하기로 합시다.”

노해광이 웃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분 소협은 처음 뵙는 것 같구려. 소개해 주시겠소?”

노해광이 천연덕스럽게 두기춘을 바라보며 말하자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안하는 곡수조차도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상대하기 만만한 인물이 아니로군.’

곡수가 이 자리에 굳이 두기춘을 데리고 온 것은 물론 두기춘의 위상이 올라간 탓도 있지만 노해광을 비롯한 종남파 인물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두기춘의 활용도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단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나 곡수는 실망하지 않았다. 저렇게 태연한 것이 오히려 그만큼 그들이 두기춘을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을 동요케 하지 않더라도 두기춘은 본인의 역량만으로도 이 자리에 참석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쪽은 본 파 장문인의 직전제자로, 나를 지척에서 돕고 있는 사람이오. 두 노제, 인사 올리게. 요즘 장안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른 철면호 노해광 대협 이시네.”

곡수의 말에 두기춘은 노해광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두기춘이라 합니다.”

노해광은 실낱같은 안광을 번뜩이며 두기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네. 자네가 바로 요즘 들어 화산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화산옥룡(華山玉龍)이로군.”

화산옥룡은 두기춘에게 붙은 별호였다. 준수한 용모와 무공에 대한 탁월한 재질이 합쳐져 그러한 별호가 붙게 된 것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화산독응 유장령과 비교하기도 했으나, 아직 그러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의 미래가 화산파의 어떤 제자들보다도 활짝 열려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곡수의 시선이 노해광의 옆에 앉아 있는 정해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정해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저는 정해라 합니다. 곡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곡수도 노해광처럼 정해의 전신을 한참 살펴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조금 전 노해광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내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검무적에게 두뇌가 비상하고 계산이 빠른 사제가 있다고 들었네. 자네가 종남파의 지낭(智囊)이라는 궤령낭군(机靈郎君)이로군.”

‘궤령’은 영리하고 총명하다는 뜻이지만 그 속에 은근히 약삭빠르고 교활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썩 좋지만은 않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정해는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별호입니다.”

“아닐세. 자네에 대한 소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들어왔네. 짧은 기간에 종남파의 문세가 이토록 급격히 커지게 된 것이 모두 자네의 비상한 능력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네.”

“당치 않습니다. 저의 알량한 재주로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모두 여기 계신 노 사숙께서 힘쓰신 덕분이었습니다.”

곡수는 더 이상 그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쨌든 종남파가 현재 강호에서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파임은 주지의 사실이니 말일세.”

곡수의 말을 듣고 있던 노해광이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허허……. 아무리 그래도 화산파에 비할 수야 있겠소? 귀 파가 일전의 비극적인 사태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오히려 문세를 확장하고 있는 건 모두 곡 대협의 공이라고 알고 있소. 본 파야 이제 겨우 몸을 일으킨 상태이니 이러다 영원히 귀 파의 뒤꽁무니만 따라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구려.”

노해광이 말한 ‘일전의 비극적인 사태’란 이씨세가에서 벌어졌던 매장원의 반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매장원의 죽음과 그가 일으킨 일은 화산파에 엄청난 충격을 전해 주었고, 적지 않은 인명의 손실을 끼치게 되었다.

문파의 실질적인 이인자가 비밀리에 다른 조직에 가입하여 문파의 제자를 살해하고 문파에 치명적인 해를 입혔으니 여타의 문파라면 그 혼란을 수습하는 일만으로도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몰랐다. 하나 그로부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화산파는 그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문호를 정리하고 새롭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니 그 끝없는 저력에 강호인들은 경외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해광이 은근히 화산파의 예민한 부분을 살짝 건드려 보았으나 곡수는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종남파가 본 파를 따라오다니 당치 않소. 신검무적의 위명이 온 천하를 뒤덮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단 말이오? 본 파는 그저 종남파의 위세에 눌려 앞뜰마저 내주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뿐이오.”

곡수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종남파를 한없이 치켜세우는 것 같아도 그 속에는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민감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노해광은 당장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귀 파의 앞뜰이라니 어디를 말하는지 모르겠구려. 본 파가 화산 근처에서 일을 벌인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소만.”

“장안은 오랫동안 본 파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이었소. 장안의 구석구석까지 본 파 제자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거요.”

“화산파 제자들이 그토록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소. 본 파의 제자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잘 돌아다니지를 않아서 말이오.”

노해광이 살짝 비꼬는 어조로 말했으나 곡수는 쉽게 경동하지 않았다.

“종남파의 제자들이 돌아다니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맞는 말 같소. 내가 화산파에 들어온지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장안에서 종남파 제자들을 본 것은 최근의 몇 달 외에는 거의 없었소.”

“화산파의 제자들이 그토록 뻔질나게 장안을 돌아다녔는데도 장안의 누구도 장안이 화산파의 앞뜰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 정말 신기한 일 아니오?”

“지난 수십 년간 장안에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한 곳이 본 파라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거요.”

“원래 호랑이가 없으면 늑대가 주인 행세를 하는 법이오.”

“그렇다면 장안이 종남파의 앞뜰이란 말이오?”

몇 차례의 설전이 오간 끝에 곡수가 날카롭게 묻자 노해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장안은 장안 사람들 것이지 어느 특정 문파의 것이 될 수 없소.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역사적으로나 거리 상으로나 귀 파 보다는 본 파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소?”

곡수의 눈이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노해광의 말마따나 화산에서 서안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종남산에서는 산을 내려오기만 하면 바로 서안의 성문이 코앞이었으나, 화산에서는 반나절은 말을 달려야만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워낙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종남파와 서안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백 년 전에 종남파가 천하제일문파로 군림했을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과 인식이 오랜 세월동안 굳어져 버린 것이다.

화산파가 서안에서 종남파를 누르고 득세한 것은 불과 몇 십 년도 되지 않았으며, 그것도 종남파가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후로는 세간의 인심이 급격하게 종남파로 기울고 있었다. 화산파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더 늦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그 흐름을 바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곡수는 이내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앞뜰이라는 표현은 조금 지나쳤던 것 같소. 하지만 본 파에서 종남파의 최근 행보에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건 사실이오.”

노해광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본 파의 어떤 행동이 귀 파의 우려를 사고 있단 말이오?”

“종남파가 오랫동안 장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인들의 상권을 뒤흔들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소.”

“아마도 내가 유화상단과 사소한 다툼을 벌인 일이 와전된 모양이오.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그 일은 유화상단에서 먼저 나를 도발한 것이며, 그 다툼의 영역 또한 본 파가 아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일에 국한된 것이오.”

“유화상단 뿐 아니라 전장과 포목점, 주루 등 다방면에 걸쳐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모두 노 대협 혼자만의 일이라는 거요?”

노해광은 느긋한 태도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요즘 내 목소리가 조금 커지다보니 여기저기서 시비가 끊이지 않는구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그 일들은 모두 나로 인한 것일 뿐, 본 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곡수는 물끄러미 노해광의 얼굴을 보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 대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겠소.”

“그래서 말인데…….”

노해광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 귀 파에서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소. 그 일을 위해서 몇몇 전장들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손노태야의 손가전장과 내 거래처인 방보당도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곡수는 노해광이 어디까지 알고 자신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기는 했소. 하지만 지금은 이미 투자처를 결정하고 모든 조사를 철회한 상태요.”

노해광은 혀를 찼다.

“벌써 투자할 곳을 정했단 말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겠소?”

“양해하시오. 그 사안은 본 파의 중대한 일인지라 외인에게 발설할 수 없구려.”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투자처로 결정된 곳이 손가전장이나 방보당은 아닐 거로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렸소?”

곡수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밝힐 수 없소.”

“내 질문이 경솔했던 것 같소. 그런데 말이오. 내가 요즘 제법 놀라운 소문 하나를 들었소.”

곡수는 노해광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노 대협이 장안제일의 소식통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그 소식이 무엇이기에 노 대협을 놀라게 했는지 궁금하구려.”

노해광의 목소리는 더욱 은밀해졌다.

“오대전장 중 하나인 천무장이 두 개로 갈라질 거라는 소문이오.”

곡수의 눈꼬리가 슬쩍 움직였다.

“천무장이 말이오?”

천무장은 서안 일대에서 가장 큰 열 개의 무관이 공동출자하여 세운 전장이었다. 열 개의 무관은 하나같이 나름대로의 전통을 지니고 있고, 배출된 문하생들도 적지 않아서 어지간한 방파(幇派)보다도 탄탄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자리 잡으면서 서안 일대의 토호세력들과 혈연(血緣)이나 지연(地緣)으로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어서 단순히 무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기보다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무력집단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그래서 무관 하나하나의 힘은 거대문파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열 개 무관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한 천무장은 오대전장은 물론이고 서안의 어느 방파에도 뒤지지 않는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천무장의 가장 큰 장점이자 중요한 요소가 열 개 무관의 단단한 결속력이었기 때문에 천무장이 두 개로 갈라질 거라는 노해광의 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천무장의 분할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오대전장으로 확실하게 정립되었던 서안의 전장업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릴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무장을 지탱하는 두 축(軸)인 백인장(白人場)과 관중일관(關中一館)이 서로 반목하여 다툼이 심해지자, 나머지 여덟 개의 무관들도 각기 이해관계에 따라 양쪽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오.”

“백인장과 관중제일관은 그동안에도 항상 천무장 내의 주도권을 놓고 팽팽히 맞서던 사이로 알고 있소. 아무래도 이번에는 노 대협께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게 아니오?”

곡수가 이견을 제시하자 노해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하오. 원래 백인장과 관중일관은 오랜 동안의 경쟁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백인장주의 아들과 관중일관주의 딸을 혼인시키기로 했는데, 얼마 전에 백인장에서 관중일관에 일방적으로 파혼 통보를 했다고 하오. 그 통보를 받아든 관중일관의 관주가 노발대발하여 파혼장을 찢어버리고 백인장에 비무첩을 보냈다는 소문이오.”

원래 무관들 사이에서 다른 무관에 비무첩을 보낸다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상대 무관과의 비무에서 패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관으로서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제야 곡수의 얼굴에도 진지한 표정이 감돌았다.

노해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백인장과 관중일관의 다툼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천무장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안이 될지도 몰랐다. 그 일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백인장주인 도지곤(都地昆)은 냉정하기로 유명한 인물인데, 왜 이번에는 그토록 성급하게 일처리를 했는지 모르겠구려. 노저(怒猪)에게 파혼장을 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오.”

관중일관의 주인인 노호공(怒虎公) 장력패(張力覇)는 성격이 불같이 급하고 사소한 원한도 잊지 않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는 그를 노호공이라고 추켜세워 주었으나, 뒤에서는 모두들 성난 멧돼지, 즉 노저라고 불렀다.

그가 조금만 더 침착하고 주위의 신망을 얻는 성격이었다면 진즉에 관중일관이 다른 무관들을 누르고 서안 제일의 무관이 되었을 거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만큼 관중일관의 세력과 그들의 기본 무공은 다른 무관들보다 탁월했다.

그에 비해 백인장주인 교군(蛟君) 도지곤은 누구보다 냉정하고 두뇌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의 일처리는 때로는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고 비정해서 뒤에서 그를 냉혈교(冷血蛟)라고 수군거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장력패와 도지곤은 판이한 성격만큼이나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어서 다른 관주들을 압도하고 있기에 천무장은 그들 두 사람을 주축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무방했다.

“우리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거요.”

노해광의 말에 곡수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노해광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알지도 못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소.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보다는 그들의 비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를 궁리해 보는 게 더 효율적이 아니겠소?”

곡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시오. 노 대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누가 이기든 천무장이 크게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소. 다만 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결과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할 거요.”

“어떤 차이 말이오?”

“관중일관은 대대로 서안에 뿌리를 내려온 무관이라 지지기반이 무척 탄탄한 편이오. 그래서 설사 이번 비무에서 패한다 할지라도 망신살이 뻗치기는 하겠지만, 무관을 보존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을 거요. 아마 그는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 천무장을 나와서 새로운 전장을 차리려고 할 거요.”

“관중일관이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백인장은 도지곤이 이십 년 전에 단신으로 서안에 들어와서 혼자 힘으로 세우다 시피한 곳이오. 그러니 일단 패하게 되면 다시 일어서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오. 아마 도지곤을 지지하던 다른 무관들도 장력패에 머리를 숙이고 그의 밑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소. 그럴 경우 천무장은 여전히 존속하게 될 거요.”

“다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장력패가 실질적으로 천무장을 좌지우지하게 되겠구려.”

노해광은 씨익 웃었다.

“그렇게 될 거요. 아니면 도지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해서 전장업에 뛰어들지도 모르고.”

곡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노해광을 바라보았다.

“노 대협께서 이런 중요한 정보를 나에게 알려주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오.”

“곡 대협이라면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거요.”

“내가 짐작하는 것과 노 대협의 의중이 서로 다를 수도 있지 않겠소?”

곡수가 집요하게 계속 묻자 노해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차례 수염을 쓰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화산파가 이번에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해서 이번 일이 안정될 때까지 만이라도 투자처를 정하는 걸 보류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소.”

곡수는 가만히 노해광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 대협은 본 파가 투자를 빌미로 이번 일에 어떤 식으로든 뛰어들지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래서 아예 사전에 본 파가 개입할 여지를 없애려 하는 것이구려.”

노해광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이번 일이 장기화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소. 요즘 들어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장안의 상계(商界)가 이번 일로 송두리째 뒤집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말이오.”

곡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소란에 노 대협께서 단단히 일조를 하지 않았소?”

노해광도 가벼운 웃음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하하. 그 점은 나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소. 그래서 이렇게 어렵사리 곡 대협을 모셔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소?”

곡수는 노해광의 넉살좋은 모습에 피식 웃고 말 뿐이었다.

노해광은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정보가 귀 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오.”

“물론이오. 노 대협의 말씀대로 그 비무의 승자가 결정되기 전에는 섣불리 투자를 결정하지 않겠소.”

“정말 현명한 선택을 하셨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후 곡수는 두기춘을 데리고 노해광의 집무실을 떠났다.

두 사람이 산해루를 벗어나는 광경을 삼층의 집무실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노해광이 정해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해의 두 눈이 영활하게 빛났다.

“사숙의 짐작대로라고 생각합니다. 도지곤에게 사주해서 장력패에게 시비를 걸도록 한 것은 곡수의 솜씨인 것 같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철저하게 잇속을 따지는 도지곤이 평소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던 장력패에게 덤벼들려면 화산파같은 거대문파의 암중지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물어보는 것은 곡수가 앞으로 할 행동이다.”

정해는 질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지 어느 때보다 표정이 무거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두 무관의 비무에 쏠려 있을 때 일을 벌이려 할 겁니다.”

“역시 방보당인가?”

“그렇다고 봅니다. 손가전장을 직접 노리기에는 지금 장안에 들어온 화산파 고수들의 숫자가 부족한 편입니다. 곡수는 우리가 그 비무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방보당을 접수하려 할 겁니다.”

만에 하나 방보당을 빼앗긴다면 방보당을 주거래처로 삼고 있는 노해광은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서안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종남파에 대한 지원도 끊기게 될 것이다.

“시기는?”

“곡수가 말한 대로겠지요.”

노해광의 눈에서 날카로운 신광이 번뜩거렸다.

“비무의 승자가 결정된 직후이겠군.”

정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백인장과 관중일관의 비무가 언제 벌어지기로 했지?”

“삼일 후 미시(未時)입니다.”

“그렇다면 그날 저녁이겠군.”

노해광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화산파와 피를 보게 되는구나. 곡수는 정말 이번 일에 확실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산해루를 벗어난 곡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산해루의 삼층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자신들을 내려 보고 있는 노해광의 모습이 얼핏 드러났다.

곡수는 다시 고개를 내려 두기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짐작하고 있을까?”

두기춘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거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부러 집법님을 보자고 하여 백인장과 관중일관의 일을 거론했을 리가 없습니다.”

곡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수가 너무 얕았나?”

곡수는 이번에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법을 사용했다. 두기춘으로 하여금 만방루를 건드리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도지곤을 부추겨 장력패에게 비무첩을 보내도록 했다. 도지곤에게 비무에 대비하여 화산파의 속가 고수 몇 사람을 지원해 주기로 했고, 비무가 끝난 후에는 도지곤이 천무장을 장악하는 것에 확실한 힘을 실어주기로 약조한 것이다.

곡수는 그 모든 일이 서안 최고의 정보통인 노해광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 노해광은 만방루의 일이 함정이고, 사실은 화산파에서 천무장을 노리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 비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할 것이다. 그때 노해광의 주거래처인 방보당을 습격하여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었다.

상당히 치밀한 이중(二重)의 함정이었으나, 곡수의 우려대로 노해광을 완전히 속이기에는 부족한 것 같았다.

곡수는 이내 눈을 번뜩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두 번째 계획으로 간다.”

두기춘의 준수한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괜찮겠습니까? 손가전장은 방보당과는 달리 쉽게 무너뜨리기 힘든 곳입니다.”

곡수는 어느 새 평상시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 파에서 이미 두 분의 장로와 매화사절(梅花四絶)이 내려와 있다.”

두기춘은 흠칫 놀랐다.

“장로님 두 분과 매화사절 네 분이 모두 오셨습니까?”

“그렇다. 이번 일을 위해 어제부터 상인으로 변장하여 유화상단의 지점에서 지내고 계시다.”

고매한 화산파의 장로들과 일대제자들 중 최고의 고수들인 매화사절이 변복(變服)까지 하고 숨어있다니 화산파에서 이번 일에 얼마나 심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 두기춘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곡수는 두기춘의 굳어진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냐?”

두기춘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저로서는 그 분들의 노고에 그저 머리가 조아려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러지 않고서는 안될 만큼 본 파로서는 중대한 기로에 있다는 말이다.”

곡수는 멀리 보이는 종남산의 산봉우리를 한동안 묵묵히 바라보고 있더니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 분명하게 종남파의 예봉을 꺾어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본 파는 종남파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지 모른다. 내 대(代)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일만큼은 기필코 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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