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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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1화


제 272 장 암천혈야(暗天血夜)

마치 어둠 전체가 그들을 향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인영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막상 그들의 습격을 예상하고 있던 종남파의 고수들조차 당황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무리들이 미친 듯이 구릉 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그들의 살기 어린 눈빛이 때마침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달빛을 받아 이글거리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하고 있었다. 고함도 없이 병장기를 든 채 몰려드는 무리들의 가장 선두에는 누런 황의를 입은 십여 명의 장한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동중산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 듯 진산월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저 앞에 있는 황의인들은 방산동이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황랑대(黃狼隊)의 무리들인 듯합니다. 개개인이 모두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느새 진산월 옆에는 낙일방과 전흠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담담한 모습인 반면, 전흠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만만함과 투지가 결합된 그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듬직함을 느끼게 했다.

진산월은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무리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다가 낙일방과 전흠을 돌아보았다.

“일방이 우측을 맡고, 전흠이 좌측을 맡아라. 그리고 사숙께는 중산과 제자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락중이 진산월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자네가 직접 앞으로 나설 생각인가?”

“밤이 너무 길면 악몽을 꾸기 마련입니다. 속전속결로 그들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오늘 밤을 쉽게 보낼 수 있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성락중은 장문인이 선봉에 나선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나 진산월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자칫 너무 시간을 끌었다가 피아(彼我)가 뒤섞인 난전(亂戰)이 벌어진다면 무공이 약한 제자들이 뜻밖의 참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살기가 가득한 싸움에는 자신보다는 진산월이 훨씬 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자들은 걱정하지 말게.”

성락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진산월은 한쪽에 말없이 서 있는 담옥교를 돌아보았다.

“담 소저를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오. 성 사숙 옆에 있는 다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담 소저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없을 거요.”

담옥교는 고개를 저었다.

“내 한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마세요.”

“고맙소.”

진산월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마지막으로 임영옥에게 시선을 돌렸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으나 임영옥은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임영옥 또한 진산월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산월은 빙긋 웃더니 말없이 앞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그 뒤를 따라 낙일방과 전흠도 각기 우측과 좌측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들을 향해 벌떼같이 몰려오는 무리들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세 사람의 뒷모습은 일견 장중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성락중이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뒤쪽에서 접근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자네는 후방을 경계하게.”

“알겠습니다.”

동중산이 뒤쪽으로 가자 손풍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 뒤를 따르려 했다. 하나 성락중은 이내 그를 불러 세웠다.

“너는 내 옆으로 오너라.”

손풍은 우거지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성락중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는데…….”

성락중은 엄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장문인의 지시를 듣지 못한 게냐? 아니면 면벽 일 년을 그리도 받고 싶은 것이냐?”

손풍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손풍이었으나, 자신을 위해서 열흘이나 모진 고생을 한 성락중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락중은 손풍이 조용히 있자 이번에는 유소응을 슬쩍 살펴보았다. 유소응은 수많은 무리들의 습격에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락중은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모진 고생을 했다고 하더니 그래서인지 나이답지 않게 진중하구나. 무인(武人)으로 대성하기에 좋은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을 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구나.’

성락중의 시선은 다시 임영옥에게로 향했다.

사실 성락중은 임영옥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종남파를 떠날 때 임영옥은 불과 두세 살의 어린 아이였고, 그 뒤로 그가 다시 임영옥을 본 것은 이십여 년이 지난 구궁보에서였으니 그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하나 그녀의 모친인 두란향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두란향은 정말 미인이었고, 조용하고 현숙한 여인이었다. 임영옥의 외모는 그런 두란향을 많이 닮았고, 그 기질은 아버지인 임장홍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락중은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성락중은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녀가 무척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고 있었고, 그녀와 진산월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장내의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과 표정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표정 속에는 진산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성락중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성락중이 한 가지 궁금해 하는 것은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본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평범해 보였으나, 걷는 자세나 사소한 동작에서 가끔씩 드러나는 현기(玄機)를 보면 절정고수에 못지않은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에 버금가는 절정고수라고 생각하기에는 나이도 어리고 기세도 대단치 않았다.

‘동중산의 말로는 사 년 전만 해도 그녀의 검법이 장문인을 능가했었다고 했다. 그녀가 부상을 당하지 않고 계속 검법에 매진했다면 지금쯤 상당한 실력을 보유했을 텐데 정말 아쉬운 일이구나.’

성락중은 절정고수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종남파의 현실 때문에라도 그녀의 상황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성락중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자 그녀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임영옥은 살짝 웃어 보였다. 성락중도 마주 웃어 주었으나,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그녀의 기세를 읽지 못한다는 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가 부상 이후 거의 무공을 상실했거나……’

성락중의 눈에 한 줄기 신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아니면 그녀의 경지가 내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거나…….’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놓았기 때문이다.

“으악!”

시선을 돌린 성락중의 눈에 하얀 검광을 사방으로 날리는 진산월과 그 검광에 격중 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장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피의 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에는 열다섯 명이나 되는 황의인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바닥에는 세 구의 시신이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짧은 격전이었으나 서로 간의 실력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황의인들은 장강십팔채의 총채주인 천교자 방산동 휘하에 있는 세 개의 무력단체중 하나인 황랑대의 대원들이었다. 황랑대와 흑수단(黑獸團), 그리고 방산동의 최측근 수하들인 혈염조(血染組)가 방산동의 삼대 무력단체였다. 그중에서도 황랑대는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들 개개인이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일급 고수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합격진에 능했는데, 지금 그들이 펼친 십팔천멸진(十八天滅陣)은 강호의 절정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어서 적지 않은 실력자들이 이 절진에 갇혀 제대로 실력도 발휘해보지 못하고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하나 진산월은 불과 오 초 만에 십팔천멸진을 뚫고 들어가 진의 중심이 되는 세 명을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때문인지 나머지 열다섯 명의 황랑대원들은 모두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둘러싼 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낙일방이 머리를 산발한 거구의 괴인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산발 괴인은 피처럼 붉은 기운이 도는 장법(掌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패도적인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두 사람의 싸움은 상당히 치열해서 주위에 적지 않은 인원들이 있음에도 누구도 섣불리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전흠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많은 무리들 속을 헤집고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 검은 색 장포를 걸친 인물들이 하나둘씩 늘어서면서 차츰 행동반경이 좁혀들고 있었다. 진산월은 아마도 그 흑포인들이 흑수단의 인물들일 거라고 추측했다.

진산월을 에워싼 황랑대원들은 진산월이 자신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주변의 상황을 살피고 있자 당혹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누구도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는 것은 조금 전에 겪은 환상적인 검법의 무서움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현묘한 몇 번의 칼질에 그토록 완벽했던 십팔천멸진이 너무도 어이없이 허물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진의 주축이 되는 세 명의 고수들이 모두 쓰러졌기 때문에 더 이상 진법을 펼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넷…… 다섯…… 여섯…….’

진산월이 여덟까지 헤아렸을 때, 그의 발밑에서 몇 개의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파앗!

주변의 땅거죽이 송두리째 뒤집히며 여덟 개의 날카로운 섬광이 그의 전신을 찔러왔다. 그 속도와 기세는 맹렬하기 이를 데 없어서 땅속에서의 암습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진산월은 한 차례 몸을 돌리며 수중의 용영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따따땅!

귀청을 찢을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몇 개의 인영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속에 진한 피비린내가 화악 풍겨났다.

그런데도 비명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튕겨졌던 인영들 중 몇이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달려들지 않은 인영들은 허리가 갈라지거나 가슴이 베어진 채 미동도 않고 있는 시신들뿐이었다.

한동안 기합 소리도, 신음성도 없는 침묵 속에 칼날이 스치는 소리만이 주위의 공기를 갈랐다.

사악사악…….

수십 개의 검광이 허공을 수놓고, 핏물이 사방에 자욱하게 뿌려졌다.

마침내 검광이 모두 사라졌을 때, 장내에는 여덟 개의 새로운 시신이 생겨났다.

그 시신들은 온 몸에 짙은 고동색 기름옷을 걸친 인물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손에 두 자 길이의 쇠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교묘하게도 땅속을 파고들어 진산월의 발밑까지 도달한 다음에 암습을 펼쳐왔던 것이다.

진산월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있거나 십팔천멸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면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가 예상보다 빨리 십팔천멸진을 파해하는 바람에 그들의 은밀한 습격이 쉽게 발각되어 버린 것이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누구도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수련을 겪은 자들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몰랐지만, 그들은 장강십팔채의 살수조직인 온서당(瘟鼠堂)의 고수들이었다. 온서당에는 수서(水鼠)와 혈서(血鼠), 비서(飛鼠), 맹서(盲鼠)의 네 개 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 중 맹서일호부터 팔호였다.

진산월이 수중의 용영검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다시 세 개의 인영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산월이 막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주위에 석상처럼 늘어서 있던 열다섯 명의 황의인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던 세 명의 인영들이 재빨리 그들과 뒤섞여 버렸다. 자연스레 중심축이 무너져 와해되었던 십팔천멸진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삼엄한 기운이 진산월을 에워싸 버렸다.

그들의 능숙한 동작과 자연스런 진법에의 합류는 진산월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한 번 무너졌던 진법이 다시 발동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법이란 것은 사전에 치밀하게 짜인 체계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야만 비로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인원을 교체한다고 해서 본연의 위력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뒤에 나타난 세 사람은 너무도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진법의 중심축으로 들어가 진법을 발동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십팔천멸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진산월을 공격할 것처럼 하면서 슬쩍 방향을 돌려 황랑대에 합류하는 신법의 움직임은 가히 절정고수의 그것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그들이 가세하자 진법의 위력이 조금 전과는 천양지차로 강력해졌다. 단순히 세 명의 인원이 바뀌었을 뿐인데 진산월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두 배는 더 가중되는 것 같았고, 진법 속에서 움직이는 황의인들의 동작 또한 훨씬 더 빠르고 민첩해졌다.

진산월은 자신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칼날을 슬쩍 피하며 용영검을 횡으로 쓸어갔다. 방금 전만해도 상대의 공세 속을 유연하게 파고들던 용영검이 멈칫거리며 검의 방향이 살짝 바뀌었다. 열여덟 명의 진기로 형성된 진법의 위력이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검에 실린 기운을 감당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진산월은 대응 방법을 바꾸었다.

다시 하나의 칼날이 가슴 부위를 날카롭게 찔러오자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이번에는 용영검으로 칼날을 후려쳤다.

땅!

칼날이 금시라도 부러질 듯 크게 휘어지며 칼을 잡고 있던 황의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진산월은 그를 향해 바짝 다가섰으나, 어느새 두 자루의 칼이 그의 양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 칼날들이 날아오는 각도가 상당히 예리해서 어느 쪽으로 피하든 한쪽 칼날에 격중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이번에도 번개같이 용영검을 휘둘러 두 자루의 칼날을 후려쳤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두 자루의 칼과 용영검이 부딪친 것이 동시에 일어난 일 같았다.

따당!

격렬한 마찰음과 함께 다시 두 명의 황의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나 그 순간, 진산월의 앞뒤에서 네 자루의 칼날이 각기 다른 방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일단 한 번 칼을 마주치게 되자 계속 검으로 칼을 부딪쳐 물리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피할 수 있는 방위가 모두 상대의 공세 속에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진산월이 다시 용영검으로 네 자루의 칼날을 튕겨내자 이번에는 여덟 자루의 칼날이 폭포수처럼 그의 전신으로 쏘아져왔다. 마치 천지사방이 온통 칼날의 홍수 속에 파묻힌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이야말로 십팔천멸진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계속 피한다면 모르되, 한 번이라도 칼날을 부딪치게 되면 가공할 연환공격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공격이 두 배씩 가중되는 방식이라 뛰어난 무공을 지닌 절정고수라도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고수의 수는 많지만 절정의 무공을 지닌 실력자가 부족한 장강십팔채가 나름대로 고심 끝에 마련한 대일인합격진(對一人合擊陣)다운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서 빠르게 선회하며 용영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파……

사방이 온통 칼그림자와 검광에 휩싸였다. 그와 함께 폭죽 같은 검기가 거세게 휘몰아치며 자욱한 흙먼지가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진산월은 자신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든 여덟 자루의 칼날을 모두 격퇴시켰으나 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하나 그 순간, 눈도 뜨기 어려운 흙먼지 속에서 세 가지의 섬뜩한 기운이 자신의 미간과 심장, 그리고 뒤통수를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유난히 얇고 날카로운 세 개의 면도(緬刀)였다. 종잇장처럼 얇은 그 면도들이 다가오는 기세는 너무도 은밀했을 뿐 아니라 음험하기 그지없어서 진산월이 면도들의 접근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손을 내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진산월이 처음 하나의 칼날을 쳐낸 후 세 번의 연환공격을 받고 다시 세 자루의 면도에 암습을 당할 때까지는 불과 숨을 몇 번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밖에는 흐르지 않았다. 그만큼 숨 돌릴 틈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고 치밀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차례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자 무서운 기세로 앞뒤로 날아들며 금시라도 진산월의 미간과 뒤통수를 꿰뚫을 듯하던 두 개의 면도가 헛되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하나 그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던 마지막 면도는 어느새 그의 가슴에 거의 닿아 있었다.

땅!

날카로운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진산월의 가슴을 뚫어버릴 듯했던 면도는 용영검에 막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와 함께 수직으로 세워져 진산월의 가슴을 보호하던 용영검이 흙먼지 속을 뚫고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전진했다.

막 면도를 날려 진산월의 가슴을 노렸다가 실패한 황의인이 핼쑥해진 얼굴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용영검은 어느새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질 때, 용영검은 다시 우윳빛 검광을 뿌리며 조금 전에 진산월의 이마와 뒤를 노렸던 두 명의 황의인에게 다가갔다.

허공을 마음대로 유영(遊泳)하는 듯하는 용영검의 움직임은 너무도 매끄럽고 신묘했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손에서 움직이는 검이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제 스스로 영성(靈性)을 가지고 살아서 움직이는 미지의 생명체 같았다.

두 황의인은 사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용영검의 예리한 검날은 순식간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그들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들 세 황의인들은 뒤늦게 십팔천멸진을 발동한 인물들로, 실질적인 황랑대의 우두머리인 장강삼랑(長江三狼) 도씨(都氏) 형제였다. 그들은 먼저 수하들을 내세웠다가 상대의 방심이나 빈틈을 노려 십팔천멸진을 재발동하는 수법을 곧잘 사용했는데, 이들의 이런 교묘한 수법에 당해 낭패를 본 고수들이 적지 않았다.

장강삼랑의 신형이 질펀한 피바다 속에 누워 꿈틀거리고 있을 때, 용영검은 다시 허공에서 미묘하게 움직이며 나머지 열다섯 명의 황의인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파파팍!

“크아악!”

눈부신 검광과 시뻘건 혈화(血花)가 동시에 뿜어 나오며 장내에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새하얀 검광이 움직일 때마다 선붉은 핏물이 검은 하늘을 뚫고 사방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은 일견 처절하면서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막 진산월이 마지막 황의인을 베어 넘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산월은 마지막 황의인의 목을 가름과 동시에 용영검으로 그것을 후려쳤다.

따앙!

주위를 뒤흔드는 음향이 터져 나오며 진산월의 신형이 한 차례 살짝 휘청거렸다.

진산월은 용영검이 후려친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손도끼였다. 붉은 색 수실이 달린 그 손도끼는 용영검에 격중 되어 허공으로 튕겨져 오르더니 이내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비쩍 마른 체구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을 지닌 흑의인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색 수실을 지닌 손도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은 왠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어디선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두 명의 인물들이 흑의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진산월을 보고 우뚝 섰다.

한 사람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우람한 체구의 황포인이 있었는데, 허리춤에 두 개의 분수아미자(分手蛾眉刺)를 꽂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추악한 인상의 남의인이었다. 어찌나 많은 상처가 있었는지 원래의 얼굴이 어떠한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남의인의 손에는 기다란 송곳을 연상시키는 쇄겸도(鎖鎌刀)가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시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진산월이 뒤를 돌아보자 그의 뒤편에도 어느새 두 명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각기 짙은 홍의와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은 사십 대 중반의 인물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살벌한 인상에 거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홍의인은 양쪽으로 날이 달린 장창(長槍)을, 화의인은 유성추(流星鎚)를 들고 있었는데, 유성추 끝에 가시가 잔뜩 달린 쇠뭉치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그 가시의 끝에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극독(劇毒)을 바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 다섯 명은 진산월을 에워싼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진산월은 그들이 장강십팔채를 이끄는 수뇌인물들임을 짐작했으나, 각각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무리 보아도 소문으로 들었던 천교자 방산동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자가 없어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알려지기로 방산동은 상당한 거구에 기이하게 생긴 기형도(奇形刀)를 쓴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을 둘러싼 다섯 명은 물론이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와 비슷하게 생긴 자나 기형도를 쥔 자는 보이지 않았다.

“방산동은 어디 있나?”

진산월의 물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살기가 가득 담긴 흉흉한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그들의 살벌한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장내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낙일방과 산발 괴인의 싸움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낙일방은 여전히 두 주먹을 매섭게 휘두르고 있는 반면에 산발 괴인의 장력은 붉은 기가 거의 가셔서 한눈에 보기에도 승패의 판가름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낙일방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산발 괴인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진산월은 이번에는 전흠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흠은 낙일방보다 훨씬 험하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십여 명의 흑포인들이 맹렬한 공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바닥에 대여섯 구의 시신들이 널려 있기는 했지만 전흠의 몸에도 몇 군데의 상처가 나 있어 그다지 좋은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 외에도 적지 않은 무리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으나, 그 무리들 중 특별히 경계할 만한 자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빠르게 장내를 둘러본 진산월은 안도감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다. 전흠이 비록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태였고, 낙일방은 이미 완전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다섯 명의 고수들만 제거하면 오늘 밤의 싸움은 대충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의 우두머리인 방산동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 방산동은 수하들만으로 종남파의 고수들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아니면 습격을 하려다 막상 자신들의 실력을 보고 겁이 덜컥 나서 몸을 피한 것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다른 의도를 품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진산월의 마음을 껄끄럽게 만들었다.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진산월을 둘러싸고 있던 다섯 명의 고수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온통 칼바람과 검 그림자, 그리고 때때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뒤덮여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기만 해도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성락중은 어둠 속에 벌어지는 혈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이나 안력을 돋우어 상황을 살펴보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구나.’

장문인이야 그 실력이 대단함을 알고 있으니 큰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낙일방과 전흠이 혹시라도 신상에 변을 당할까 싶어 내심 우려했던 성락중은 낙일방이 일방적인 우세를 점하고 전흠 또한 하나둘씩 자신을 상대하던 자들을 쓰러뜨리고 있자 조금씩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특별히 전흠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흠이 때때로 상대의 공세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몸의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성락중은 자신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의외로 담옥교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담 소저?”

성락중의 물음에 그녀는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뒤에서 가만히 있으려니 조금 답답한 생각이 들어서요.”

담옥교는 도봉황이라는 별호답게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고수들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강호에 명성을 날리게 된 계기도 강남 일대의 이름난 도객들과 벌인 비무에서 모두 승리했기 때문임을 생각해 본다면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그녀의 손이 근질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성락중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도를 꺼내들고 장내의 싸움에 뛰어들 것처럼 보였는지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달랬다.

“이번 일은 본 파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본 파의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오. 굳이 담 소저께서 도와주시지 않아도 본 파의 힘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담 소저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점잖은 말이었으나, 그 속에 숨은 뜻은 명백한 것이었다. 담옥교 또한 섣불리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로서는 드물게 보는 처절한 혈전에 잠시 무인(武人) 특유의 호승심이 들끓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싸움을 벌이고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을 차례로 바라보더니 이내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때 진산월은 다섯 명의 고수들에 둘러싸인 채 맹렬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싸움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살벌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담옥교는 진산월이 상대하는 다섯 명의 고수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은 아무래도 장강십팔채의 채주들인 것 같군요.”

성락중 또한 진산월과 싸우는 다섯 명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범상해 보이지 않아서 주목하고 있던 참이라 그녀의 말에 급히 반문했다.

“저 자들이 누구인지 아시오?”

담옥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인상착의만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저들 중 일곱 가지 색깔의 도끼를 사용하는 흑의인은 칠색악부(七色惡斧) 정탁(丁卓)일 거예요. 그리고 양손에 분수아미자를 든 황포인은 탈명염라(奪命閻羅) 추해일(秋海溢)이고,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남의인은 파면도부(破面屠夫) 악숭(岳崇)이 분명해 보이는군요.”

그녀는 장강십팔채의 채주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지 다섯 명을 설명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장창을 휘두르는 홍의인은 색명창(索命槍) 탕월(蕩越), 그리고 유성추를 든 화의인은 비류귀견수(飛流鬼見愁) 동일소(童日蘇)일 거예요. 저들 중 정탁과 동일소는 십팔채주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이에요.”

성락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담 소저의 견문이 이토록 넓을 줄은 미처 몰랐구려.”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본 가의 영역 중 상당 부분이 장강을 접하고 있어서 늘 장강십팔채의 무리들을 주시하고 있기에 그들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이곳에 저자들 외에 십팔채의 다른 채주들도 있소?”

담옥교의 시선이 낙일방과 싸우고 있는 홍의 괴인에게 잠깐 고정되었다.

“낙 소협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장강십팔채 중 가장 세력이 큰 혈응채(血鷹寨)의 채주인 패천혈장(覇天血掌) 강태독(江泰獨)이에요. 그는 장력만으로는 능히 장강십팔채의 채주들 중 최고의 고수일 뿐 아니라 강남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인데, 오늘은 아주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군요.”

그녀가 보고 있는 와중에도 강태독은 낙일방의 주먹에 정신없이 밀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얼마 안 가서 그가 쓰러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외에 다른 채주들은 없소?”

그녀는 다시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 외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성락중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열여덟 명의 채주들 중에서 절반이 넘는 인원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총채주인 방산동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이자들은 설마 이들만으로 본 파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계책을 부리려 하고 있는 것인가?’

성락중은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들어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와 이삼 장 떨어진 곳에 유소응과 손풍이 손에 땀을 쥐고 장내의 격전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 옆으로 임영옥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신색은 여전히 담담해서 피가 튀기고 비명이 난무하는 혈전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다시 그들에게서 오 장쯤 떨어진 뒤편에서 동중산이 후위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제법 커다란 구릉의 정상 위였고 숲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몰래 암습을 하거나 접근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위치였다. 성락중은 다시 한 번 이런 절묘한 곳에 자리를 잡은 동중산의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멀리 떨어진 숲의 수풀이 흔들리며 한 떼의 인영이 나타났다.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같이 평범치 않은 기도를 지닌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성락중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채주들이 여섯 명에 다시 여덟이면 모두 열넷이다. 그렇다면…….’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태독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던 낙일방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두 명의 고수들이 가세를 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 바람에 완전히 패색이 짙었던 강태독이 다시 힘을 얻었는지 낙일방에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전흠의 상태는 더욱 위태로웠다. 그럭저럭 흑수단을 상대로 선전을 하고 있던 전흠 또한 새롭게 나타난 두 명의 고수들에게 합공을 당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전흠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산월 쪽으로는 추가로 가세하는 자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나 진산월도 다섯 명의 합공을 짧은 시간 내에 돌파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것은 그들이 진산월을 쓰러뜨리기보다는 진산월을 봉쇄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진산월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나, 특이한 합격술(合擊術)로 진산월의 발길을 묶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았다.

성락중은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는 동중산을 불렀다.

“중산. 자네는 소응과 손풍을 보호하게.”

동중산 또한 새롭게 나타난 자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는지 표정이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숙조께선…….”

성락중은 그 말에는 아무 대답 없이 임영옥을 돌아보았다. 임영옥의 차분한 눈빛을 보자 성락중은 왠지 모르게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너는 괜찮겠느냐?”

성락중의 물음에 임영옥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숙.”

성락중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믿겠다.”

이어 그는 담옥교를 돌아보았다. 담옥교는 그가 바라보는 의미를 알고 있는지 자신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칼집을 두드렸다.

“내 한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으니 성 대협께서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고맙소.”

성락중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단숨에 오 장을 훌훌 날아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여덟 명의 인영들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그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뿌연 검광이 폭죽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덟 명의 인영들은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그들 중 네 명이 성락중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네 명은 성락중을 피해 나머지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듯한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으며, 동작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동중산이 유소응과 손풍을 자신의 뒤로 물러나게 하며 그들을 향해 맞서려 했을 때, 담옥교가 먼저 움직였다.

“비켜서세요!”

담옥교의 외침에 동중산이 몸을 멈추자 담옥교의 신형이 그의 머리를 뛰어넘어 네 명의 인영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그 움직임은 그야말로 한 마리 봉황처럼 우아하면서도 신묘한 것이었다.

네 명의 인영들이 다시 흩어져 그들 중 두 명은 담옥교의 앞을 가로막았고, 나머지 두 명이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담옥교는 자신을 피해 옆으로 움직이는 자들을 제지하려 했으나, 다른 두 명이 교묘하게 앞을 막아서며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일시지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동중산이 다가오는 두 명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한 명의 인영이 동중산의 앞으로 쏘아져오며 그를 상대했고, 다른 한 명이 동중산의 몸을 돌아 앞으로 쏘아져갔다.

그의 전면에는 오직 임영옥,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막 그 인영이 임영옥을 향해 달려들려 할 때,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놈! 면벽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은 내가 상대해 주겠다!”

눈을 부라리며 인영의 앞을 막아선 인물은 다름 아닌 손풍이었다.

인영은 눈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더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풍의 목덜미를 향해 내뻗었다. 갈고리처럼 변한 그의 오른손 끝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려 있는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이얍!”

손풍은 벼락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무릎을 굽혔다가 쭉 펴더니, 두 주먹을 앞으로 번개같이 내찔렀다. 며칠 동안 나름대로 고련을 해온 장괘장권구식 중의 영양괘각이라는 초식이었다.

손풍의 반격이 의외로 날카로웠는지 인영이 내뻗었던 손을 빠르게 거두어들이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손풍은 기세등등하여 더욱 맹렬하게 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그리 넓지 않은 구릉 위는 세 곳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난전이 벌어졌다. 그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사람은 나이 어린 유소응과 임영옥뿐이었다.

두 사람이 장내의 격전을 보고 있을 때, 다시 한 사람이 숲에서 걸어 나왔다.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오는 그 사람은 구 척에 가까운 장신에 허리춤에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기형도를 매단 거한이었다.

거한은 주위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임영옥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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