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7화
제 278장 매영위궤(魅影危机)
낭하곡은 한수(漢水)의 지류가 굽이치는 커다란 강 옆에 위치한 협곡이었다. 가파른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살이 한수의 지류에 합류하기에 늘 세찬 격랑이 일어나서 낭하곡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죽음처럼 깊은 밤이었다.
작은 조각달이 내걸린 하늘은 짙은 남색을 띠고 있었고, 그 아래 내비치는 검은 물살은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끝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결이 흘러가는 소리는 세차고 컸지만, 그래서 주위는 더욱 고요했다.
삐익!
갑자기 깊은 적막을 깨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놓으며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십여 개의 검은 그림자가 산등성이에 어른거렸다.
그 그림자들은 야조(夜鳥)처럼 빠른 동작으로 낭하곡의 좁은 협곡 안을 뒤지고 다녔다. 그들 중 하나의 인영이 낭하곡에서도 유난히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계곡의 한 부분을 지나다가 갑자기 한 차례 신형을 휘청거렸다.
“저기다!”
짤막한 외침과 함께 다른 인영들이 벌떼처럼 그쪽으로 날아들었다.
파파팡!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격렬한 마찰음이 거푸 터지며 누군가의 답답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으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살벌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피아(彼我)를 구분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서운 살수를 거푸 펼쳐냈다. 다시 하나의 검은 인영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누구도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서로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일점편월(一點片月) 아래 내비치는 낭하곡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계곡의 그늘 속에서는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시 계곡의 한편에서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놀라운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순식간에 장내의 판도가 판이하게 바뀌어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우윳빛 검광을 뿌리는 사나이의 검법은 가히 가공스러워서 수십 가닥의 검광이 허공을 자욱하게 수놓자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검은 인영들이 베어진 짚단처럼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나머지 인영들이 모두 질색을 하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나 뒤이어 닥친 권풍과 검영에 그들 또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콰앙!
“크아악!”
마침내 무시무시한 권풍에 가슴을 정면으로 가격당한 검은 인영이 폭포수 같은 피를 내뿜으며 허공을 날아 한쪽 구석에 처박히는 것으로 어둠 속의 싸움은 끝이 나 버렸다.
“어…… 어느 고인들이시오?”
검은 인영들의 습격을 받고 악전고투를 벌이다 구사일생한 자들 중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우윳빛 검광을 뿌리던 자가 능숙하게 검을 거두며 별빛 같은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종남의 진산월이라 하오. 제갈세가의 분들이시오?”
검은 인영들과 싸우던 무리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제갈세가 특유의 청삼을 입고 있었다. 그들 중 네 명은 사십 대의 장한들이었고, 한 명만이 육십 대의 지긋한 노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금 전의 싸움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몹시 낭패스런 모습이었다. 아마도 진산월이 조금만 더 늦게 왔었어도 그들은 모두 참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진산월이라는 이름을 듣자 그들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 이제 보니 신검무적 진 장문인이셨구려! 진 장문인의 높은 명성은 익히 들었소. 도움을 주신 것에 진정으로 감사드리오. 나는 제갈가의 둘째 장로를 맡고 있는 제갈풍(諸葛風)이라 하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황급히 포권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자 진산월은 짤막하게 답례했다.
“약수옹(藥手翁)이셨구려. 뵙게 되어 반갑소. 그보다 이곳에 혹시…….”
그에게 무언가 물으려던 진산월이 표정이 변하며 급히 그들의 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곳은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맞닿은 곳으로, 바위들의 틈바구니에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 있었다. 제갈세가의 고수들은 그 공간 앞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간에 두 개의 인영이 누워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그 인영들 중 하나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뇌 대협…….”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있는 그 인영은 다름 아닌 진산수 뇌일봉이었다. 구궁보를 떠날 때만 해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뇌일봉이 불과 며칠 만에 빈사지경에 처해 있는 모습을 보니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뇌일봉의 가슴은 강력한 장공에 격중당한 듯 움푹 꺼져 있었고, 오른팔은 완전히 부러져 그 형체만 간신히 몸통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입과 코에서는 연신 시커먼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급해 보였다.
황급히 진산월을 따라 달려온 낙일방과 동중산도 뇌일봉의 너무도 처참한 모습에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누구보다도 뇌일봉과 가까운 사이였던 낙일방의 표정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제갈풍의 옆에 있던 제갈세가의 중년 고수가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간단히 응급조치를 하기는 했으나 이곳에 오기 전부터 상세가 워낙 위중했습니다. 본 가로 모셔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도 생사(生死)를 장담할 수 없는 판국인데, 저들의 추적이 너무 집요해서 이곳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갈명렬(諸葛明烈)로, 가주를 지척에서 호위하는 수신호위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다른 세 명의 호위들과 이장로인 제갈풍과 함께 제갈도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바닥에 널려진 흑의 인영들을 향했다.
“저들의 정체를 아시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용하는 호각성이 강북녹림맹(江北綠林盟)의 비호각(飛呼角)인 듯하여 강북녹림맹의 무리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북녹림맹?”
뜻밖의 대답에 진산월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동중산이 재빨리 흑의인 중 하나의 시신으로 다가가서 그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보았다.
팔뚝에 기이한 문신(紋身)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그린 그림이었다. 아주 정교한 그림이었는데, 온통 초록색의 숲에 하나의 나무만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동중산이 그 문신을 살펴보고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녹림문(綠林紋)이 있는 걸 보니 강북녹림맹의 인물들이 맞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검은 색 나무가 새겨진 문양은 강북녹림맹의 대표적인 살수조직인 흑림(黑林)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강에 수적(水賊)이 있다면, 산에는 산적(山賊)이 있다.
수적들의 집합체가 장강십팔채라면, 산적들의 집합체가 바로 강북녹림맹이었다. 하나 수상(水上)에서만 위력을 발휘하는 장강십팔채에 비해 육지의 어느 곳에서든 맹위를 떨치는 강북녹림맹의 세력이 훨씬 더 크고 강력했다.
더구나 그들의 전통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그 체계 또한 확실하게 잡혀 있어서 무림의 어떤 세력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특히 당금 녹림의 총표파자(總票巴子)인 십절산군(十絶山君) 사여명(司如命)은 무림구봉에 못지않은 무서운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백도(白道)의 인물이었다면 무림구봉은 무림십봉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난데없이 강북녹림맹의 고수들이 유중악 일행을 습격했다는 사실에 진산월로서는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유중악 일행의 접점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뇌일봉의 옆에 누워 있는 인물에게로 옮겨졌다.
갈포를 입은 사십 대 중반의 사나이였다. 하나 갈포는 갈가리 찢겨져 있었고, 사나이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동중산이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딱딱하게 굳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람은 유 대협의 일행이었던 태행독객 무종휘입니다. 태행산 일대를 주름잡던 일대호걸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진산월은 무종휘의 시신에 난 상처를 잠시 살펴보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중악과 곽자령은 물론이고 이곳으로 먼저 출발했다는 동천표와 제갈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시오?”
제갈명렬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처가 워낙 심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분들은 이곳에 남고 다른 분들은 북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분들의 상처 또한 가볍지 않아서 가주께서는 그분들과 함께 이동했는데, 상황을 보니 그분들의 안위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군요.”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마음을 굳혔다. 생사지경에 처한 뇌일봉을 위해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곽자령만이라도 무사히 구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찾아 북쪽으로 갈 테니, 대신 뇌 대협을 부탁드리겠소.”
제갈명렬은 반색을 하며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렸으나, 옆에 있던 제갈풍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신검무적이 특별히 부탁까지 했는데 혹시라도 뇌일봉의 숨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진 장문인께서 도움을 주신다니 고마운 일이오. 하지만 뇌 대협의 상세가 워낙 심해서 본 가로 모시고 간다고 해도 앞일을 장담할 수 없구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소. 최선을 다해주시면 결과에 상관없이 만족하겠소.”
그제야 제갈풍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알겠소. 뇌 대협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소.”
진산월은 동중산과 전흠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이분들과 함께 뇌 대협을 모시고 제갈세가로 돌아가도록 해라.”
전흠이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진산월이 먼저 엄격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뇌 대협은 본 파에는 더없이 귀중한 분이시다. 이분을 별 탈 없이 무사히 모시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이다.”
전흠은 평소와는 다른 진산월의 냉엄한 모습에 ‘왜 그런 일은 꼭 나에게만 부탁하는 거요?’라고 내뱉고 싶은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이럴 때의 진산월은 질식할 듯한 위엄이 있어서 아무리 성격이 화급한 전흠이라도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진산월로서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세가의 인물들만 보냈다가 혹시라도 강북녹림맹의 고수들에게 다시 공격을 당하면 참으로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흠이라면 그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뇌일봉을 무사히 제갈세가로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중산을 전흠과 함께 보내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공이 뒤떨어지는 그를 위험천만한 일이 도사리고 있을 게 뻔한 앞으로의 여정에 동행시키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동중산도 진산월의 의중을 알고 있기에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믿음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장문인. 뇌 대협을 안전하게 제갈세가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가 내일까지 돌아가지 않는다면 먼저 무당산으로 출발하도록 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믐 전까지는 무당산에 도착하도록 하겠다.”
“무당산 자락 밑에 청연각(靑然閣)이라는 제법 큰 주루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장문인과 낙 사숙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진산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결연한 표정의 낙일방이 말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중인들이 걱정스레 쳐다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신형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둠 속에서 흔적을 찾아 누군가를 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흐릿한 편월이 있다고 해도 산속의 짙은 그늘 속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과 낙일방은 몸을 날리면서도 수시로 주변을 조사해야만 했다. 그러니 속도가 날 리 없었다.
낭하곡의 북쪽 산등성이를 넘어서 어둠 속을 얼마쯤 달렸을 때, 처음으로 진산월은 제대로 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법 커다란 나뭇가지 한쪽에 찢겨진 옷자락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옷자락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다행히 하얀 색이어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옷자락이 걸린 위치나 옷자락의 상태로 보아 누군가가 일부러 걸어놓은 것은 아니고, 급히 나무 옆을 지나치다 찢어진 게 분명해 보였다.
옷자락을 발견한 후 두 사람의 속도는 한층 더 빨라져서 어둠 속을 두 마리 야조처럼 치달려갔다. 간혹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거나 풀잎이 짓밟힌 흔적을 조사하느라 걸음이 지체된 것 외에는 두 사람은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춘 것은 추적을 시작한 지 한 시진쯤 되었을 때였다. 이곳은 얕은 야산의 정상 부근이었는데, 길이 능선을 따라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길 모두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측은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으로 가는 길이었고, 좌측은 무당산 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두 길의 갈림길에서 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빠져 들었다.
두 길을 번갈아 보던 낙일방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제갈 가주가 동행했으니 아무래도 제갈세가 쪽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요?”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나 진산월은 다른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쫓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적들의 예상을 벗어나기 위해 반대쪽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어쩌지요?”
진산월은 이내 마음을 결정하고는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여기서 갈라져야겠다. 너는 우측 길로 가도록 해라. 만일 그들을 찾게 되면 최대한 안전하게 제갈세가로 모시고 가라.”
낙일방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가득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갈세가로 돌아가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한 후 그들과 함께 무당산으로 움직여라.”
“장문사형께선…….”
“나는 좌측 길로 해서 무당산으로 직접 가겠다.”
낙일방은 진산월과 떨어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장문사형께서는 모쪼록 보중(保重)하시기 바랍니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자신이 먼저 좌측의 소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멀어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조금씩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터오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黎明)을 받은 산록은 하나둘씩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낙일방이 진산월과 헤어져 혼자 움직이기 시작한 지 일각쯤 되었을 때였다. 무심히 전면을 응시한 채 달려가던 낙일방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 너머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주위가 지금처럼 조용하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낙일방은 공력을 가득 끌어올려 전력을 다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단숨에 산등성이를 넘자 울창한 송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송림 안에서 한 떼의 인영들이 치열한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의 흑의인들이 몇 명의 고수들을 둘러싼 채 맹공을 가하고 있었다. 빠르게 신형을 날리면서 그들을 훑던 낙일방의 두 눈에 횃불 같은 신광이 어른거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흑의인들과 싸우고 있는 날카로운 외모의 중년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 중년인은 낙일방이 그토록 찾던 팔비신살 곽자령이었다.
곽자령 외에도 호리호리한 체구에 유난히 큰 눈을 가진 장한과 준수한 용모의 흑삼인, 그리고 제갈세가 특유의 청삼을 입은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네 사람은 십여 명의 흑의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는 데다 흑의인들의 공세가 워낙 거칠어서 상당히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곽자령의 상처가 유독 심해 보였다. 그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했던 혈선륜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오른쪽 옆구리와 어깨, 그리고 앞가슴 등 상반신 전체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 옆구리의 상처는 심각해서 얼핏 내장이 내비칠 정도였다.
곽자령은 한 손으로는 옆구리의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부여잡은 채 다른 한 손을 휘둘러 간신히 흑의인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는데,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에 입가로 시커먼 핏물을 흘리는 모습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도 흑의인 중 하나가 송곳같이 예리한 기형검으로 목덜미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자 곽자령은 옆으로 몸을 구르다시피 하여 간신히 그 살인적인 일검을 피해내고 있었다. 하나 그 바람에 상처가 더욱 벌어졌는지 곽자령의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곽자령은 신음을 흘리지 않고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흑의인을 향해 왼주먹을 빠르게 내찔렀다.
흑의인이 뒤로 슬쩍 물러나며 몸을 피하자 다시 또 다른 흑의인이 곽자령의 옆으로 다가들며 수중의 도를 맹렬하게 휘둘렀다. 곽자령은 내뻗었던 주먹을 미처 회수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바람에 그의 앞이 훤하게 노출되었다. 뒤로 물러났던 흑의인이 기회를 놓칠세라 벼락같이 달려들며 곽자령의 미간을 그대로 찔러왔다.
곽자령의 눈에 한 순간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도저히 그 일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멈춰라!”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낭랑한 고함 소리와 함께 사나운 기운이 노도처럼 날아들었다. 그 기운의 강력함에 대경실색한 흑의인이 내뻗었던 일검을 급히 거두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하나 그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듯하던 기운이 급격하게 선회하며 흑의인의 앞가슴을 사정없이 가격해 버렸다.
쾅!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흑의인의 몸이 훌훌 날아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가슴뼈가 완전히 박살난 흑의인은 전신으로 시커먼 피를 쏟은 채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가공할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곽자령은 이제는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나타나 단숨에 흑의인을 격살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새하얀 백의를 입은 준수한 미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장내를 선회하며 맹렬하게 두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곽자령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무시무시한 권법을 펼치고 있는 백의 미남자는 다름 아닌 종남파의 제자, 낙일방이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곽자령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단숨에 십여 장을 날아 장내로 뛰어들며 기형검의 흑의인을 일권에 격살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다른 흑의인을 향해 폭풍 같은 십이권을 거침없이 내질렀다. 기형검의 흑의인과 함께 곽자령을 공격했던 칼을 든 흑의인이 무시무시한 위세로 날아오는 권영(拳影)에 놀라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그 가공할 기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파팡!
“아아악!”
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주먹에 가격 당하고는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백의인이 눈 깜박할 사이에 두 명의 흑의인을 간단하게 격살하자 다른 흑의인들이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흑의인들은 강북녹림맹의 살수조직인 흑림의 고수들로, 하나같이 상당한 무공을 지닌 뛰어난 실력의 살수들이었다. 그들 서너 명이면 어떠한 고수들이라도 감당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도 순식간에 두 명의 동료들이 처참하게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들이 놀라고 당황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웬 놈이 강북녹림맹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흑의인들 중 가장 나이를 먹은 중년인이 전권에서 물러나 낙일방을 바라보며 버럭 노성을 질렀다.
낙일방은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곽자령을 부축했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곽 대협!”
곽자령은 이곳에서 낙일방을 만난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몇 차례나 눈을 깜빡거렸다.
“자, 자네가 어떻게 알고 여기에…….”
“제갈세가를 방문했다가 급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곽자령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은 견딜 만하네. 그보다 자네 장문인은…….”
“곽 대협이 이곳에 계신 줄 알았다면 이쪽으로 오셨을 텐데, 중도에 길이 나눠지는 바람에 장문사형께서는 다른 쪽 길로 가셨습니다.”
낙일방이 아쉽다는 투로 말하자 곽자령은 오히려 정색을 했다.
“아닐세. 그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낙일방이 의아해할 때, 흑림의 중년인이 다시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어느 파의 쥐새끼냐?”
낙일방의 얼굴에 한 줄기 냉엄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곽자령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먼저 주위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낙일방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구름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낙일방의 기세에 놀랐는지 흑의인의 태도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낙일방은 그를 응시한 채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종남의 낙일방.”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흑의인의 얼굴에 한 줄기 낭패스런 빛이 떠올랐다.
“옥면신권?”
낙일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 맹은 종남파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본 맹의 행사를 방해하고 본 맹의 고수들을 살해한 것이오?”
“어째 입을 여는 자들마다 똑같은 말을 하는군. 이분은 본 파의 일족과도 같은 분이시니 이분을 건드리는 건 곧 본 파를 건드린 것과 같소.”
흑의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음산한 음성을 내뱉었다.
“비록 종남파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본 맹도 호락호락하지 않소. 이 일로 본 맹과 척을 지어도 좋단 말이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본 파와 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흑의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낙일방 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그제야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종남파의 이름으로 우리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본 맹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소.”
낙일방은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묵령갑을 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계속할 생각이면 덤비고, 아니면 물러가시오.”
그 말에 흑의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낙일방을 노려보더니 기이한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그러자 세 명을 공격하고 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가 방향을 바꾸어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신검무적이면 몰라도 옥면신권, 너 하나만으로는 우리를 당할 수 없다.”
흑의인의 전신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며 말투 또한 어느새 거칠어져 있었다. 낙일방은 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이 오히려 흑의인을 향해 먼저 몸을 날렸다.
“쳐라!”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드는 광경은 마치 검은 해일이 몰려오는 것처럼 압도적인 것이었다. 낙일방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파파파팍!
살벌한 검기와 도영이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그에 맞서는 낙일방의 주먹이 무서운 기세로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흑의인들의 공세에서 간신히 벗어난 세 사람은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여뢰관이 동천표와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도, 그리고 흑삼객 임지홍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유중악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동천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갈도를 바라보았다.
“휴우! 종남파의 고수들이 자네 집에 와 있었다니 정말 천만다행한 일이군. 자네는 언제부터 종남파와 인연을 맺게 되었나?”
동천표는 큰 부상을 입은 후 제갈세가에서 응급조치를 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안색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조금 전의 싸움에서 상처가 도져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제갈도는 시선도 깜박이지 않은 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싸움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인연은 무슨……. 본 가와 종남파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일세.”
“그런데 그들이 무슨 일로 제갈세가를 찾아왔단 말인가?”
“낸들 알겠나? 그나저나 정말 무서운 권법이로군. 저자가 바로 젊은 층의 고수들 중 권법의 제일인자라는 옥면신권이란 말이지?”
그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두 명의 흑의인이 낙일방의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자신들보다 별로 뒤떨어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던 제갈도와 동천표는 낙일방의 가공할 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네. 나도 이름만 들었지 실력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세. 저 정도 솜씨라면 젊은 층뿐 아니라 당대의 모든 권법가를 합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군.”
낙일방의 주먹은 워낙 빠르고 변화가 무쌍할 뿐 아니라 주먹 하나하나에 무시무시한 힘이 담겨 있어서 흑의인들 중 누구도 그의 일권을 정면에서 받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주먹을 휘두르는 와중에 가끔씩 내뻗는 장법(掌法)은 하나같이 현묘(玄妙)하기 그지없어서 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다시 한 명의 흑의인이 가슴에 정통으로 일권을 맞고 오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이제 남은 흑의인은 열 명 남짓에 불과했고, 그만큼 장내의 싸움은 치열해졌다.
쾅!
“크악!”
벼락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낙일방이 내지른 낙뢰신권에 이번에는 두 명의 흑의인들이 거의 동시에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졌다.
“휘익!”
마침내 우두머리 흑의인이 전권에서 물러나며 긴 휘파람 소리를 내자 나머지 흑의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그들을 뒤쫓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고 있다가 곽자령에게로 돌아왔다. 언제 살벌한 싸움을 했느냐는 듯 낙일방은 숨결도 가빠지지 않았고, 표정 또한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흡사 천신(天神)과도 같은 그 모습에 곽자령의 눈에 경탄 어린 빛이 떠올랐다.
정상적인 몸 상태였다면 곽자령도 서너 명의 흑의인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나 그렇더라도 지금 낙일방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방적인 우세를 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무공이오. 옥면신권이라는 이름만 익히 들었지 설마 이와 같은 실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소. 도움을 주어 고맙소. 나는 제갈도라 하오.”
제갈도가 탄성을 연발하며 먼저 인사를 하자 낙일방도 마주 포권을 했다.
“제갈가주이셨군요. 종남의 낙일방입니다.”
낙일방은 다른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환상제일창 유 대협께서 안 보이시는군요.”
그의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굳어졌다. 특히 임지홍의 안색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두워져서 흡사 부모라도 돌아가신 사람 같았다.
곽자령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청천은 우리 때문에 스스로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갔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곽자령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추적자들 중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자가 있었네. 청천은 그자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음을 알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자를 유인해 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