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5화
제 329 장 양공지비 (1)
밤은 점점 깊어져 가고 있었다.
이정문이 떠난 후 진산월은 홀로 객청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삼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진산월은 한 사람의 선객이 와 있음을 알았다.
주인도 없는 방에 혼자 들어와 있던 그 사람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너무 늦었군. 자네를 기다리느라머리가 백발이 될 지경이었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십절산군 사여명이었다. 아니,강일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진산월은 전혀 놀라지 않고 강일비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방의 주인다운 자연스런 태도였다.
강일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 숙원인 형산파와의 싸움을 승리한 사람의 얼굴치고는 고민스러워 보이는군. 아직 젊은 나이에 무슨 고민이 그리도 많은 건가?”
진산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한 눈으로 강일비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강일비는 한 차례 살짝 몸을 떨더니 이내 평정을 회복한 듯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서운 시선이로군. 자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애써 찾아온사람을 대하는 눈빛으로는 너무 사나운 게 아닌가?”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강일비를 응시하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약속을 지키러 온 거요?”
“그렇다네.”
며칠 전 강일비는 진산월에게 종남파의 실전된 절학들 중 무염보와 난 화지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승리하게 되면 남은 두 가지 절학인칠음진기와 염화옥수에 대한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임영옥이 음기의 격발로 인해 생명이 경각에 달한 지금, 칠음진기에 대한 내막을 안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진산월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은 것은 고사를 빙자하여 자신에게 이런 정보들을 조금씩 알려주는 강일비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십 년전에 사문인 종남파를 등지고,친형인 강일산마저 내팽개친 그가 느닷없이 불쑥 찾아와 아무도 알지 못했던 문파의 오랜 비밀을 밝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강일비는 대체 어떻게 이런 비밀들을 알게 된것일까?
그가 밝히는 비밀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이며,그가 밝히지 않은 비밀은 또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될 칠음진기의 비밀은 과연 임영옥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숱한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지금 당장 진산월이 할 수 있는 것은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듣는 것 뿐이었다.
“말해 보시오.”
진산월의 심중을 짐작이라도 한 듯 강일비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어느 사연을 먼저 듣고 싶나? 칠음진기인가,염화옥수인가?”
진산월은 지금 그와 쓸데없는 머리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칠음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오.”
강일비도 더 이상은 시간을 끌지 않고 칠음진기의 비밀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칠음진기는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 아주 특이한 위치에 있는 무공일세.
종남파 유일의 음공이며,또한 이백 년 전의 비선 조심향 이후 누구도 완벽하게 익힌 적이 없는 절학이기도 하지. 더욱 놀라운 것은 비선 이전에도 그 무공을 어느 수준이상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일세. 다시 말해서 칠음진기는 비선 이외에 그 누구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그야말로 묘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란 뜻이지.”
칠음진기가 무염보와 함께 비선 조심향의 최고절학임은 진산월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 외에 아무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비선 조심향이 비록 당시 여중제일인이라 불렸던 절세의 인물이기는 했으나,종남오선 중 누구도 그녀보다 뒤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종남오선조차도 칠음진기를 익히지 못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칠음진기는 종남파 최고의 절학인육합귀진신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무공이었다. 그렇다면 종남오선은 대체 어떻게 육합귀진신공을 익힐 수 있었단 말인가?
다행히 강일비는 곧 이런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물론 구결을 익히는 것으로 칠음진기에 입문(A門)하는 것은 어렵지않네. 하지만 삼성 이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네. 설사 종남오선이라도 말일세. 물론 비선은 제외일세.”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비선 외에는 아무도 칠음진기를 대성하지 못한다는 것이오?”
“그건 바로 칠음진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꼭 한 가지 필요한 게 있기 때문일세.”
“그게 무엇이오?”
강일비의 다음 말은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은 진산월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칠음진기를 대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음신맥의 소유자여야 하네.
비선이 칠음진기를 익힐 수 있었던것은 그녀가 바로 태음신맥을 타고 난 여인이기 때문일세.”
“태음신맥?”
“이백 년 전에 그 대단한 종남오선조차도 칠음진기에 겨우 입문에 그치고 만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지. 육합귀진신공을 익히는데 칠음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누구도 굳이 칠음진기에 입문하려하지 않았을 걸세. 그만큼 칠음진기는 익히는 조건이 까다롭고 절정에 이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무공일세.”
진산월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음신맥은 임영옥에게는 하나의 천형과도 같았다. 무공에 대한 최고의 신체라는 태음신맥이었지 만,구음향에 중독된 후 그녀의 인생은 태음신맥의 격발된 음기를 다스리는 일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 었다.
뿐만 아니라 태음신맥의 음기를 치유하기 위해 진산월은 사랑하는 그녀를 남에게 보내야 했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속의 가장큰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태음신맥이 칠음진기를 익히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었다니 장난이라면 참으로 짓궂은 악마의 장난이고,운명이라면 실로 야릇한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일비는 칠음진기가 이러한 특수성을 띠게 낸 내역을 설명해 주었다.
“칠음진기의 원형은 옥시음의 선녀진향신공(仙女眞香神功)이네. 옥시음은 종남파에 여인들만을 위한 내공이 없는 것을 알고 선녀진향신공을 만들어냈지. 그 신공은 비록 뛰어난 절학이었지만,종남파의 다른 신공들에 비하면 위력면에서 약간의 손색이 있었네. 그래서 비선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 그 신공을 수정 보완한 끝에 마침내 최고의 위력을 지닌 음공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지. 그런데 칠음진기를 완성한 후 그녀는 칠음진기에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것이구려.”
“그렇다네. 비선은 이내 그 원인을 알아냈지. 그녀는 선녀진향신공을 뜯어고치면서 자신의 몸에 맞게 변형을 시켰는데,그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태음신맥이 아니면 제대로 익힐 수 없는 반쪽짜리 신공이 되어 버린 것일세.”
“그녀는 왜 칠음진기의 단점을 고치지 않았소?”
비선이 옥녀진향신공을 칠음진기로 발전시켰다면,칠음진기의 단점 또한 수정할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사귀던 검선과 다툼이 있었고,검선이 모습을 감추자 그녀도 또한 종남파를 떠나고 말았네. 종남파로서는 정말 아쉬운 일이지.”
강일비가 입맛을 다셨으나,진산월이 느끼는 아쉬움에 비하면 백 분지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왜 모든 일의 끝에는 비선과 검선의 치정문제가 연결되는 것일까?
“비선이 사라진 후 칠음진기 또한 사라져 버렸네. 심지어 비선의 후예들조차 칠음진기를 익힌 사람은 없었네. 그들 중 누구도 태음신맥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임영옥을 회복시키는데 칠음진기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던 진산월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낙심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비선 이후 칠음진기를 익힌자는 아무도 없단 말이오?”
강일비의 얼굴에 의미를 알기 어려운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지는 않네.”
진산월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물었다.
“그럼 당대에 칠음진기를 익힌 자가 있단 말이오?”
“딱 한 사람 있지. 내가 알기로 비선 이후 칠음진기를 대성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일세.”
“그가 누구요?”
강일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일세.”
진산월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강일비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강일비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태음신맥의 비밀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일세.”
일전에도 그는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비선의 후인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때 진산월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으나, 지금은 임영옥의 생사가 걸린 예민한 문제라서인지 순간적으로 그의 먹살을 잡고 대답을 듣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어났다. 진산월은 하마터면 마음의 평정을 쩔 뻔했으나,용케도 흔들리려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칠음진기를 대성한 자가 그의 말대로 한 사람뿐이라고 해도,그 구결을 알고 있는 자가 그 사람뿐일리는 없다. 칠음진기의 구결만 구할수 있다면 사매로 하여금 칠음진기를 익혀 태음신맥의 음기를 제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일비는 금시라도 화를 폭발할 줄알았던 진산월이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새삼 나이답지 않은 그의 평정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자신도 하려고 마음먹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지난 백 년간 태음신맥을 지니고 태어난 여자들의 수는 열 명도 되지 않지만,그들 대부분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재인박명(才人薄命)이랄까? 정말 아쉬운 일이야.”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었으나,진산월의 귀에는 다른 어떤 말보다 섬뜩하게 들렸다.
태음신맥의 소유자들이 요절한다는것은 단순한 속설일 수도 있지만, 진산월은 왠지 그 안에 또 다른 곡절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강일비는 더 이상의 추론을 막으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염화옥수의 비밀을 이야기할 차례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