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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37화


제 336 장 흑암중광(2)

갑자기 전홈이 낙일방 앞으로 성큼다가왔다.

“네 모습을 보니 기운이 넘쳐서 그런 것 같구나. 나도 마침 몸이 삐근하던 참이니 손이나 한번 섞어보자.”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꼭두새벽에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서로 얼굴을 마주친 것도 어색한 일인데,여기에 투닥거리기까지 한다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하나 전홈의 꽉 다물어진 입술을 보자 이미 단단히 마음먹은 게 분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다가온 전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일방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왔다.

낙일방은 옆으로 반 보 움직여 전홈의 주먹을 피했으나,옆을 스치고 지나갈 듯했던 전흠의 주먹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휘어지며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왔다.

이것은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라 무공의 초식을 사용한 것이어서 조금전처럼 가볍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낙일방은 몸을 반회전하여 다시 주먹을 피했으나,이번에는 전홈의 팔이 반으로 접혀지며 팔꿈치가 날아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무시할 수 없는 날카로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낙일방 또한 보법을 밟으며 몸을 뻘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인 격투가 시작되었다.

주로 공격하는 사람은 전흠이었고,낙일방은 능숙한 보법으로 몸을 피하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만 손을 사용하여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전홈의 공세는 갈수록 빠르고 매서워졌으나,낙일방의 대응은 완벽해서 조금도 위급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

전홈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눈빛을 본 낙일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붉게 충혈된채 살광이 어른거리는 그 눈빛은 도저히 동문의 사형제끼리 대련할 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전흠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 사형……

낙일방이 무언가 불길한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를 부를 때였다.

차앙!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전홈의 손에 시퍼런 빛을 뿌리는 검이 쥐어졌다. 전홈이 어느틈에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장검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맨손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군.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보자.”

“전 사형.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느 ”

아니,나는 오늘 네놈과 결판을 내야겠다.”

전흠의 음성에 담긴 결연함과 단호함에 낙일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그래. 네 주먹이 정말 용선생의 피를 토하게 할 만큼 무서운 것인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전흠의 검이 날카로운 광망을 뿌리며 낙일방의 가슴을 향해 움직였다.

그 검초를 본 낙일방의 두 눈에 횃불 같은 광망이 이글거렸다. 전홈의 초식이 성라검법 중에서도 살초인 잔성희소임을 알아본 것이다. 전흠이 생사를 결할 상대에게만 사용하는 살인적인 검초를 대뜸 자신을 향해 펼친 것을 본 낙일방은 더 이상 참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주먹이 굳게 쥐어지더니 벼락같은 기세로 전흠을 향해 쏘아져갔다. 일단 제대로 싸워보기로 결심하자 낙일방의 주먹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움직임을 보였다.

파팡!

자신이 펼친 검초가 채 절반도 뻗어 나가지 못하고 막강한 권풍에 의해 사그라지자 전홈의 입에서 거친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 그래, 이래야 싸울 맛이 나지.”

전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질풍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성라검법의 절초들이 폭포수처럼 낙일방의 전신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살벌하도록 빠른 변화와 날카로운기세는 동문의 사형제가 아니라 피를 봐야 할 적수를 상대하는 것처럼 흉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낙일방 또한 그에 맞서 낙뢰신권의 투로를 밟아 나갔다.

삽시간에 작은 정원은 두 사람이 뿜어내는 검기와 권풍의 여파에 휩쓸려 황폐해졌다.

잠시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팽팽한 백중세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돌연 전홈의 검초가 한층 더 기묘하고 예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전홈이 성라검법에 남해삼십육검의 초식들을 섞어 사용했기 때문인데,그것은 지금 전흠이 자신의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뇌전을 방불케 하는 강력한 권법을 펼치던 낙일방이 조금씩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광!

두 사람의 검기와 권풍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세찬 경기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전홈은 뒤로 한 걸음물러선 반면 낙일방은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낙일방은 무거운 시선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가슴부위의 옷자락이 잘려져 살짝 드러난 맨살에 붉은 핏물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낙일방은 차마 전홈을 향해 전력을 다할 수 없어 단지 오성(五:成)의 공력만을 사용한 상태였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전홈은 전신의 공력을 거의 모두 끌어올렸던것이 분명해 보였다.

서로 실력 차이가 크지 않은 수준의 두 무인들 간의 싸움에서 한쪽이 전력을 다하고 다른 한쪽이 절반의 힘만을 쏟는다면 그 결과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칫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천만한 상황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더 이상 사형제 간의 대련이나 단순한 비무라고 할 수 없었다.

낙일방은 순간적으로 분기가 치밀어 올랐으나 한 번 더 꾹 눌러 참았다.

“전 사형,이제 이쯤에서 멈추는 게……

하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흠의 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흐르는 그 검초는 한눈에 보아도 전흠의 모든 공력이 담긴 무시무시한 공격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낙일방도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자연히 두눈에 신광이 이글거리며 양손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막강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손을 앞으로 쭈욱 내뻗어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를 향해다가오던 삼엄한 검기의 일단이 허물어지며 얼핏 전홈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흠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미친듯이 검초를 휘두르고 있었는데,검을 잡은 손에 시퍼런 핏줄이 가득돋아 있는 것만 보아도 사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눈을 번뜩이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의 표정은 흡사 필생의 숙적을 만난 듯 비장해 보이기조차했다.

낙일방은 재차 양손을 휘둘러 전홈의 검초에 본격적으로 맞서갔다.

지금 그가 펼치는 것은 구반장법중의 절초였다. 낙뢰신권이나 옥뢰신장 만으로는 전홈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전홈의 검초는 날카롭고 매서운 위력이 담겨 있었다.

전홈의 검에는 성라검법뿐 아니라 천하삼십육검과 유운검법,심지어는 해남파의 남해삼십육검의 변화까지 뒤섞여 있어 그야말로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낙일방은 구반장법의 초식들을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홈의 검세 속을 너무도 여유롭게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전흠도 그것을 알았는지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낙일방의 무공이 예전과는 또 다른 경지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전홈은 사실 그동안 낙일방에 대해 미묘한 경쟁심과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임독양맥을 타통하였을 뿐 아니라 무공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옆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종남산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고 느꼈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을 훌쩍 앞지르더니 이제는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번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낙일방이 보여준 실력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약관을 갓 지난 나이로 강호 무림의 전설적인 존재인 용선생과 맞서 비등한 경지에까지 이르렸으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전홈의 손에는 식은땀이 가득 고였고,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싸움 내내 전홈은 마치 자신이 용선생을 맞서 싸우는 것처럼 긴장과 흥분으로 몸을 멸었다.

낙일방의 분패로 비무가 종결된 후에도 전홈은 쉽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낙일방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경천동지의 싸움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하나 그는 낙일방이 아니었다. 낙일방처럼 싸울 수도 없었고,그러한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가 그것을 뼈저리게 통감한 것은 형산파에서 네 번째 비무자로 올라온 자를 본 직후였다.

그자가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에서도 사납기로 유명한 절영검 비성흔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산취악 당시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던 천치검 하원지를 격파한 인물이라는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자가 바로 며칠 전에 자신으로 하여금 경악과 공포를 느끼게 했던 무시무시한 검기의 주인이라는 점만이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낙일방의 싸음을 보면서 느꼈던 흥분과 설렘,기대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거운중압감과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 그리고 암담한 절망감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스스로의 입으로 상대를 이길 자신이 없다며 출전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 순간은 너무도 치욕스럽고 괴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고,비참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다. 멀리 종남산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을 할아버지의 얼굴은 감히 떠올릴 수 조차 없었다.

그날의 비무는 결국 종남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전흠에게 남은 것은 뼈저린 후회와 죽음처럼 깊은 자괴 감뿐이었다.

그날 이후 전흠이라는 인간은 껍데 기만 남아 있을 뿐,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전흠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인으로서의 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난 며칠간 전홈은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지냈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종남파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전흠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결심이 떠올랐다.

‘종남파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대로 강호를 떠날 것이다!’

도저히 종남파로 가서 할아버지를 될 면목이 서지 않았다. 아니,아예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밤마다 숙소 주변을 서성이다 공교롭게도 낙일방을 보게 되었으니,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처음에는 전흠으로서도 자신의 눈을 의심할정도였다.

능숙한 동작으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낙일방을 보는 순간,전흠의 가슴 속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질시일 수도 있고,분노일 수도 있으며,억울함과 서운함,자괴감과 상실감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감정일 수도 있었다.

전흠은 홀린 듯이 낙일방에게 다가 갔고,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고,고통은 더욱 깊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의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검이 쥐어져있었다. 검을 쥐고 낙일방의 앞에선 다음에야 비로소 전홈은 자신이 이 순간을 너무도 간절히 기다려 왔음을 깨달았다.

낙일방을 향해 검초를 펼치면서 전흠은 자신이 얼마나 검을 휘두르고 싶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를수록 그토록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고통과 비참함이 퇴색되는 것 같았다.

하나 전력을 다했음에도 낙일방의 몸에 제대로 된 칼자국 하나 낼 수 없었다. 전흠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검초들을 펼쳤고,그러면서 그의 검은 자신도 모르게 좀 더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자신을 억압하는 이 미칠 듯한 고통이 가셔지기를 바라면서 검을 휘두르던 전흠은 낙일방의 양손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그 양손의 사이로 검을 찔러 넣던 전흠은 자신의 검에서 홀러나오는 검기가 유달리 투명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낙일방의 양손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춰지며 그의 상반신이 훤하게 노출되었다. 전흠의 검은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낙일방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전홈이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검세에 완전히 노출된 낙일방을 발견하고 검을 멈추려 했으나이미 검은 이미 낙일방의 목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낙일방의 양손이 기이하게 흔들리더니 막 그의 목을 찌르려던 전흠의 검이 그대로 소맷자락에 휘말려 버렸다.

팟!

전홈은 검을 찌르던 동작 그대로 몸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낙일방의 소맷자락에 휘감겨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려 있었다.

전홈은 자신이 하마터면 낙일방에게 치명상을 입힐 뻔했다는 걸 알고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의외로 낙일방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눈으로 전흠을 응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이제 마음이 좀 풀리셨습니까?”

낙일방의 조용한 음성을 듣는 순간,전홈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나,나는……

낙일방은 말없이 전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의 입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음성이 홀러나왔다. 흐느낌 같기도 하고,넋두리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나는 정말 싸우고 싶었다. 정말 미치도록 싸우고 싶었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전홈이 고개를 떨구었다.

낙일방은 묵묵히 그런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이해한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위로의 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소리없이 흐느끼는 전홈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어느새 종남파의 모든 고수들이 나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싸움 소리에 놀라 달려나와서 그들의 격투를 지켜보았던 종남파의 문인들은 두 사람을 놔둔채 조용히 몸을 돌렸다.

어느덧 멀리 동터오는 여명이 주위를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여명의 햇살은 언제까지고 두 사람의 몸을 소리 없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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