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10화 (연재 3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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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10화 (연재 334화)


제 335 장 망중한담(1)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노을이 온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당산의 서쪽에 자리한 남암궁 일대는 흐릿하게 몰려오는 어둠에 뒤섞인 홍하(紅露)의 물결 때문인지 한층 더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진산월은 잠시 남암궁의 입구에 서서 서산 너머로 기울어 가는 저녁해를 바라보았다.

석양은 어느 때보다 거대했고,낙조(落照)는 피를 머금은 듯 붉어 보였다. 그 붉게 물든 세상 속에 자기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순간적인 감상에 빠졌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박서산,조불려석(티薄西UU,朝不慮夕 : 해가 서산에 기울어가니,아침에 저녁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진산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시한 구절이 나직하게 홀러나왔다.

원래 이 시구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문인이었던 이밀의 〈진정표(陳情表)〉에 나온 구절의 일부로,이밀은 삼국을 통일한 진의 무제(武帝)가 자신을 부르자 ‘조모께서 해가 서산에 기운 듯 목숨이 위태로워 아침에 저녁 일을 알 수 없으니 조정의 부름에 따를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진산월은 비록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나, 기울어 가는 해를 보자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혼돈스런 자신의 처지를 보는 듯하여 잠시 울적해진 심사를 시구로 표현해 보았던 것이다.

산중의 저녁해는 유난히 빨리 떨어져서 노을은 순식간에 검은 하늘에 자리를 내어주고 산속의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주위가 어두컴컴해지자 진산월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굳게 닫힌 남암궁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천봉팔선자 중 한 사람인 누산산이었다. 누산산은 진산월을 보자 두눈을 살짝 치켜뜨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진 장문인께서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진산월의 신분으로 사전에 별다른 연락도 없이 불쑥 천봉궁의 거처에 찾아온 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다 무심결에 근처를 지나게 되었소. 마침 천봉궁이 내일 무당산을 떠난다는 말이 생각나서 단봉공주께 인사라도 드리려 찾아왔소.”

누산산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산책을 하다 우연히 찾아왔다는 말은 그다지 믿기지 않았지 만,그의 목적이 단봉공주를 만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그 점에 주목했다.

‘진 장문인이 공주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야릇한 설렘과 은근한 기대감,그리고 아주 희미한 불안감이 동시에 그녀의 작은 가슴에 휘몰아쳤다. 그녀는 마음속의 흔들림을 억누르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요. 공주님께서는 이미 이곳을 떠나셨답니다.”

“언제 말이오?”

“어제 오후에 본궁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예정보다 하루먼저 출발을 하셨습니다.”

어제 오후라면 유중악과 대엽진인이 갑작스레 모습을 감춘 다음 날이며, 또한 종남파와 형산파의 비무가 끝난 직후일 것이다. 그녀가 무당산을 떠난 시점이 공교롭기는 했으나,그것만으로 자세한 사정을 예측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산산은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진산월을 힐끔거리고는 그녀답지 않은 다소곳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은 계시지 않지만,큰 언니라도 뵙고 가시겠어요?”

언뜻 진산월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백봉 정 소저 말이오?”

“아니면 여섯째 언니라도…….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그냥 돌아가신다면 섭섭해 하실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진산월은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산산의 얼굴을 무심히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차 대협께 말씀을 여쭈어주시오.”

누산산의 얼굴에 엷은 실망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총관님을요?”

“정 소저는 개인적으로 몇 번 만난적이 있지만,차 대협과는 그런 적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그분과 사사로운 친분을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러시겠지요. 진 장문인은 천하에 다시없을 도덕군자이시니 말이에요. 따라오세요.”

웬일인지 누산산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몸을 휑하니 돌리더니 먼저 걸 어가 버렸다. 진산월은 그녀의 마음을 알 둣 모를 듯하여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차복승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성격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에 주름살 가득한 얼굴,그리고 입가에 떠올라 있는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듯한 엷은 미소까지 며칠전에 만났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진 장문인이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소.”

“원래 단봉 공주를 보려 했는데,그분이 계시지 않다고 하여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다가 차 대협께 문안인사라도 여쯤는 게 도리일 것 같아만남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차복승은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야말로 진 장문인의 헌앙한 모습을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 운지 모르오. 일전에 형산파와의 비무는 잘 보았소. 살 만큼 살아서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날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진 장문인은 물론이고 종남파 고수들의 무위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겸손이 지나치시구려. 이번비무에 나온 형산파의 오결들은 하나같이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소. 더구나 진 장문인이 상대한 자는 형산파에서 최초로 배출된육결검객이 아니었소? 두 사람의 비무는 나로서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가슴 뜨거운 대결이었소.”

“오랜만이시라면?”

차복승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수십 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에 그와 비슷한 싸움을 본 적이 있었소.

그 이후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그런 싸움은 보지 못할 줄 알았는 데,이번 일로 그 예상이 깨어지게 된 거요. 허허!”

진산월은 안면 가득 미소 짓고 있는 차복승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 대협께서 말씀하신 과거의 대결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허허. 진 장문인도 은근히 호승심을 느끼는 모양이구려. 워낙 오래전일이라 진 장문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은 아닐 거요.”

“그래도 궁금하군요. 차 대협 같은 분의 가슴을 뜨겁게 할 만한 대결이 어떤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차복승은 눈처럼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회상하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오래전 일이오. 정말 까마득히 오래된 일이지. 그때의 대결은……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되었소. 두 사람모두 삼십 대의 싱싱한 젊은 나이였고,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 그래서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거요.”

차복승의 주름진 노안은 아득히 먼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아련해졌다.

“그들의 싸음은 정말 치열했소. 상상도 못 했던 절학들이 쏟아져 나왔고,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에도 단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소. 주위의 시선이나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앞으로 벌어질 사태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쓰러뜨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 최고의 고수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실로 놀라운 싸옴이었소.”

그 음성에는 절실함과 아련함,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문득 차복승은 고개를 떨구어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복잡하고 심유한 눈빛이 한참동안이나 진산월에게 고정되었다.

진산월이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차복승은 여느 때보다도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요. 진 장문인도 언젠가는……

진산월은 차복승에게서 그들의 이름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이상의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하나그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단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차복승 같은 인물이 이렇게까지 극찬을 할 만한 고수들은 과연 누구일까? 삼십 대의 나이에 차복승의 입에서 최고의 고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이 벌인 싸옴이 과연 차복승이 말한 대로 경천동지할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진산월은 왠지 차복승이 말한 대로 조만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만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차복승은 다시 예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오래되어서 까마득히 잊은 줄로만 알았었는데,진 장문인 덕분에 다시 떠올랐구려. 진 장문인 덕분에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오.”

“별말씀을. 그런 대단한 분들의 대결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안타깝군요.”

“허허. 강호의 인연이란 건 언제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법이니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진산월의 눈이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말씀이군요.”

“나도 멀껑히 살아있는데, 그들이라고 어련하겠소? 그나저나 나 같은 주름투성이 늙은이보다 젊고 아리따운 여인네들을 보는 게 좋았을 텐데도 진 장문인이 굳이 나를 찾아온건 혹시 내게 달리 할 말이 있기 때문이 아니오?”

진산월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는 차복승의 말에 아쉬움을 느꼈으나,굳이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고 순순히 수긍을 했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차 대협께 여풀 말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차복승의 두 눈에 흥미 어린 빛이 떠올랐다.

“당금 무림을 위진시키고 있는 진장문인이 나 같은 늙은 폐물에게 물어볼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구려.”

진산월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물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차 대협께선 오랫동안 천봉궁의 총관으로 계시면서 현 무림의 누구보다도 강호의 사정에 능통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를 너무 추켜세워주니 민망하오. 대체 진 장문인이 무얼 물으려고 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벌써부터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려.”

“실은 제가 한 사람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요?”

진산월은 차복승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환상제일창 유중악,유 대협이십니다.”

차복승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도 그대로였고,담담한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신창조화 의기천추의 명성은 나도 익히 들었소. 그런데 진 장문인은 그의 행방을 왜 나에게 묻는 거요?”

“유 대협은 며칠 전에 갑자기 거처에서 사라져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 대협이 실종된 날에 이 부근에서 유 대협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어서,혹시라도 천봉궁에서 그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여 고민 끝에 차 대협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흠. 공교로운 일이구려.”

“무엇이 말입니까?”

“실은 진 장문인 말고도 본 궁에 와서 그의 행방을 수소문한 사람이 있었소.”

진산월은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아니라 그녀요. 천수관음의 대제자인 신수옥녀 능 소저가 어제저녁에 본 궁을 찾아왔었소. 그녀 또한 진 장문인처럼 몇몇 선자들에게 혹시 최근에 유중악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는 돌아갔다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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