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3화
제 332 장 선반출정(2)
팽철영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은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반의 기본 방침은 이미 정해둔상태였다. 다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납득시킬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진산월은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선반의 여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위험하고,때로는 외로우며,무엇보다 거칠고 험한 길이 될 것이다. 그런 여정을 함께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 간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는 숨김없는 솔직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진산월은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번 흑갈방과의 싸움은 단순한 서장 무림과의 전초전이 아닌 그들과의 본격적인 대결이라고 생각하오. 흑갈방의 수뇌들은 실질적인 서장 무림을 이끄는 무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는 사실상의 주축세력이라고 할 수 있소.”
네 사람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선반자체의 힘만으로는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오. 게다가 흑갈방의 수뇌들을 제외한 하부조직은 대부분이 중원인들이니,싸음 와중에 얼마나 많은 중원인들의 희생이 따르게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소. 그렇다고 다른 문파나 세가와 연계하는 것은 자칫 싸움의 무대를 너무 확장하여 강북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지 모르니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하는 일이 팽철영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산월이 검보나 하북팽가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세력과도 공조하거나 힘을 합칠 생각이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흑갈방의 완전 말살이 아닌 그들의 수뇌들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려 하오. 그게 강호의 혼란을 최소화하면서도 서장 무림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팽철영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뜻 납득이 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흑갈방의 수뇌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몇몇 인물들만의 이름이 겨우 알려진 상태일 뿐, 그들의 정확한 거처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흑막에 가려진 부분이 많습니다. 진장문인의 의도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과연 그들의 수뇌들만 선별하여 제거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는군요.”
진산월의 시선이 뚱한 표정으로 한쪽에 앉아 있는 이정문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강호에서 가장소식이 빠르고 정보에 능한 사람이있소. 그 문제는 그 사람이 답해 줄수 있을 거요.”
이정문은 자다가 물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을 치켜뜨다가 진산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둣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팔자에도 없는 부반주가 되었으니 자리 값이라도 해야겠지. 그들의 수뇌 전부는 아니더라도 가장핵심적인 인물 몇의 행방은 알아볼수 있을 거요.”
“핵심인물이라면?”
진산월이 조용히 묻자 이정문은 딱잘라 말했다.
“흑갈방의 방주와 부방주,두 명의 봉공을 말하는 거요.”
“거기에 서장십이기와 십육사의 인물들도 추가하면 되겠구려.”
이정문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 졌다.
“흑갈방에 속해 있는 십이기의 인물이 네 명이고 십육사는 다섯 명이나 되는데,그들의 행적을 모두 조사하란 말이오?”
“숫자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니 그들에 대해 얼추 파악한 모양이구려. 적어도 그들까지는 제거해야 흑갈방에 숨어 있는 서장 무림의 세력을 일소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
“그 정도면 아예 흑갈방을 완전히 궤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요.”
이정문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으나,진산월이 담담한 눈으로 응시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빛이 담겨 있지 않은 차분한 시선인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제길. 이제는 말도 함부로 못 하겠군.’
언제부터인가 이정문은 진산월을 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태도 하나,말투 하나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지금처럼 가벼운 눈빛만 받아도 손끝이 떨려왔다.
그것이 단순히 기세에 눌렸기 때문인지,아니면 실제로 진산월의 몸에서 홀러나오는 무형지기에 억압되었기 때문인지는 이정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앞으로 그를 상대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네 명의 조장들은 신기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산수재 이정문은 그 뛰어난 지략만큼이나 성격 또한 모나고 심술 맞아서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이정문이 유독 진산월에게는 꼼짝도 못 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아한 마음을 가슴 한구석에 묻은 채 팽철영이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소협께서 흑갈방 수뇌들의 행방을 확실하게 알아올 수만 있다면 진 장문인의 말씀대로 일을 진행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 장문인께서는 언제쯤 일을 진행하실 계획이신지요?”
“그건 아무래도 당사자인 이 부반주가 언제까지 임무를 완수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겠소?”
진산월은 일부러 이정문에 대한 호칭을 선반의 지위로 불렀다.
이정문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책무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깨닫고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으나, 지금 당장은 그 책무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홈. 길면 이십 일,짧으면 보름이면 될 거요.”
딴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었으나,진산월은 그다지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길군. 좀 더 줄일 수는 없소?”
이정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흑갈방의 세력이 얼마나 광활한 곳에 퍼져 있는지 진 장문인이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들은 섬서성과 산서성뿐 아니라 감숙성과 하남성, 심지어 하복성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있소. 그 와중에 수뇌들 중 상당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텐데,이십일 내에 그들의 행적을 모두 조사한다는 것도 그동안 계속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거요.”
“그래도 이십 일은 너무 기오. 열흘 이내로 줄이시오.”
진산월이 명령투로 말하자 이정문은 순간적으로 반발심이 치밀어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가능할 거요.”
“아무리 진 장문인이라도 안되는건 안되는 거요. 열흘 이내로 흑갈방의 수뇌들 대부분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건 정말 무리한 일이오.”
이정문이 다시 반박했으나,진산월은 요지부동이었다.
“열흘 내로 할 수 있을 거요.”
이정문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갑자기 입을 다물고 진산월을 가만 히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결코 무리하게 사람을 윽박지르거나 생각 없이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산월이 이렇게 열흘을 주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꼭 열흘이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이정문이 한결 침착해진 표정으로 묻자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조만간 흑갈방의 수뇌들 대부분은 한곳에 모일 거요. 그러니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기에 열홀이면 충분한 시간이오.”
이정문의 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그들이 모두 한곳에 모인단 말이오?”
“그렇소.”
“그들이 왜 ?”
무심코 질문을 던지려던 이정문이 무언가를 느낀 둣 표정이 변하며 나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음. 무림집회가 끝났기 때문이 무림집회가 끝난 다음 중원무림인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리리라는것은 흑갈방의 수뇌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앞으로 전개될 중원 무림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사방에 흩어져있는 수뇌들을 집결시키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려 할 것이다.
이정문은 이 점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머리를 속으로 질책했으나, 진산월의 다음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첫 번째 이유이긴 하오.”
이정문의 머리가 영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한 것이 첫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정문은 이내 다른 이유를 알아냈다.
“그렇군. 그들은 검보와의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군.”
흑갈방은 조만간에 무림맹이나 중원무림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을 향한 공격을 해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검보라는 강적을 뒤에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무림맹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들의 등 뒤에 도사린 후환을 없애려 할 것이다.
진산월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흑갈방의 수뇌들이 당신 말처럼 각지에 흩어져 있다면 그들이 다시 규합되기 위해서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거요. 무림집회가 끝나고 선발대가 조직되었다는 소문이 그들의 수뇌들에게 들어가는 시간이 사일,그들이 사방에 흩어진 무리들을 소집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는 시간이 사 일,그리고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도 그쯤 될 거요. 다시 말해서 열흘에서 십이 일이면 그들이 모두 모이고,그들은 곧장 검보를 공략하려 할 거요. 그래서 늦어도 열흘 후에는 우리가 그들을 먼저공격해야 하오.”
아무리 검보가 힘을 모으고 있다고 해도 흑갈방의 전력이 투입된다면 검보의 멸망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것을 막기 위해 열흘의 시간을 고집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팽철영이 한 결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굳이 사전에 그들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것보다 그들이 검보를 공격할 때 그들의 뒤를 노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검보와 전면전이 시작되면 너무 많은 피가 흐르게 되고,그 피의 대부분은 중원인들의 것일 거요.
그건 무조건 막아야 하오.”
남자답게 각져 있는 팽철영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팽 소협이 사과할 일은 아니오.
그 일은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해볼만한 것이오.”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무거워졌다.
진산월은 최후의 방법이라고 표현했지만,그들은 만약 일이 그렇게 될 경우 선반의 임무는 실패에 가깝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무림맹에서 선반을 조직한 이유는 단순히 중원에 숨어 있는 서장 세력을 제거하고 앞으로 벌어질 서장 무림과의 싸움에서 기세를 얻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중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무림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서장 무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많은 중원인들이 피를 홀리게 된다면 오히려 서장 무림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널리 퍼지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검보 같은 무림의 명문정파마저 서장의 침공에 휘둘리게 된다면 그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할 것이 뻔했다.
진산월의 지적이 있은 다음부터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이정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짜증 어린 빛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번뜩이는 기광과 현기 (玄機) 가득한 눈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칠일만 주시오.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흑갈방 수뇌들의 행적을 알아내고야 말겠소.”
자신에 찬 그의 표정을 본 진산월이 모처럼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산수재다운 모습이 보이는구려.”
모처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정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나다운 모습이 어떤 건데 그러시오? 나는 원래 늘 이 모습이었소.”
진산월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네 명의 조장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얼굴에 신념에 가까운 투지가 번뜩이는 것을 확인한 진산월이 나직하면서도 어느 때보다 힘이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각 조별로 출발하여 육일 후까지 하남성 낙양으로 모이시오. 선반의 첫 임무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거요.”
홋날 서장 무림인들에게는 ‘신검무적의 추자(雄子:송곳)’라고 불렸고,중원 무림인들에게는 ‘중원의 수호자’라고 불렸던 선반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