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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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4화


제 333 장 정세급변(1)

전풍개가 산해루에 있는 노해광의 거처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서쪽으로 기울고 있는 저녁 무렵이었다.

전풍개는 노해광의 집무실을 날카로운 눈으로 한 차례 둘러보고는 이내 중앙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타의 장소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호화롭고 편안함이 절로 느껴지는 태사의였다.

전풍개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본 노해광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하루의 대부분을 저 자리에서 보내는지라 모처럼 사치를 부려봤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사숙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되어 죄송합니다.”

전풍개는 한 소리를 하려다 노해광의 말을 듣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평생을 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검소하게 살아온 전풍개로서는 안락함의 상징과도 같은 태사의를 보자 순간적으로 울컥 반발심이 치밀었던 것이다.

하나 달리 생각해 보면 서안 최고의 실력자 중 한 사람인 노해광은 사실 저 정도의 사치를 부려도 되는 위치였다. 더구나 그 태사의 외에 집무실의 다른 부분에는 그다지 호화롭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것이 없어서 사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런 위치에 있음에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용서를 구하는 그의 모습에 못마땅했던 마음이 이내 풀어져 버렸다.

전풍개가 태사의 앞에 놓인 평범한 의자에 가서 앉자 노해광이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이쪽 자리에 앉으시지요,사숙.”

노해광이 태사의에 앉을 것을 권했으나,전풍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자에 앉았다가는 허리에 녹이 슬어 버릴 것이다. 노부는 괜찮으니 너나 앉도록 해라.”

“사숙께서 계신데 제가 어찌 감■?j ”

“각자 편한 곳에 앉으면 되지 무슨쓸데없는 신경을 그리 쓰는 게냐?

그보다 노부를 이곳까지 부른 걸 보니 사태가 의외로 급박하게 진행되는 모양이구나.”

전풍개가 바로 본론을 꺼내자 노해광은 어쩔 수 없다는 둣 태사의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전풍개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자 노해광은 비로소 제대로 자세를 잡고 앉으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숙을 그런 자리에 앉히고 제가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걸 남들이 안다면 후안무치한 놈이라고 온갖 욕을 다 해댈 겁니다. 그래도 제 별호가 철면호인지라 낯짝이 두꺼워서 어지 간한 욕쯤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겠지

“네놈이 주위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객쩍은 소리 하지 말고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말해 보거라.”

“일단 화산파를 배후에 두고 있던 적류문은 대충 정리가 되었습니다.

문주인 마강은 놓쳤지만,마강의 동생들인 대부분의 수뇌들을 제거하여 적류문은 껍데기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흑도의 무리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상관없다. 그런데 네 행사가 제법 꼼꼼하다고 들었는데,어떻게 마강이란 놈을 놓치게 된 것이냐?”

적류문을 거의 와해시켰다고 해도 우두머리인 마강이 살아있는 한 후환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노해광은 이런 식으로 후환이 남는 일 처리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의 평소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전풍개로서는 졸개도 아니고 적의 수뇌를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한 것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노해광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적의 방수가 예상보다 무서운 인물이었습니다.”

“흑도의 방수라고 해야 뻔할 텐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악살 장병기였습니다.”

전풍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소문삼살의 그 장병기 말이냐?”

“그렇습니다.”

“흑도의 무리가 어떻게 장병기를 방수로 부릴 수 있단 말이냐?”

장병기가 비록 악명이 자자한 마도의 인물이라고 해도,최고의 실력을 지닌 뛰어난 고수였다. 일개 흑도세력과 연루되기에는 지나치게 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강이 무언가 대단한 걸 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게 무언데?”

“구문백절환(整門百節環)이라는 물건입니다.”

“구문백절환?”

“손목에 차는 팔찌 형태의 기병(奇兵)인데,장병기의 사부인 소마 신지림이 오래전부터 찾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전풍개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신지림이 찾는 물건이라면 천하에 보기 드문 기물일 텐데, 마강 같은 흑도의 나부랭이가 그런 기물을 갖고 있었단 말이냐?”

“자세한 경위는 모르겠습니다만,아무튼 마강이 구문백절환을 보상으로 장병기를 방수로 고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적류문을 사지로 끌어들이긴 했습니다만, 장병기가 보호하는 마강을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흠. 상대가 장병기였다면 오히려네가 위험했을 텐데,용케도 그를 물리쳤구나.”

노해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마침 저희 쪽에서도 쓸만한 방수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냐?”

“금조명이란 사람입니다.”

전풍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조명? 최근에 나타난 신흥고수냐?”

“검마의 둘째 아들입니다.”

전풍개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왔다.

“검마의 0}들을 방수로 썼다고?”

당당한 명문정파인 종남파에서 마도의 인물로 알려진 검마의 아들과 연수했다는 것은 종남파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한 전풍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해광은 전풍개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을 말하거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검마의 아들과 소마의 제자가 충돌한 사실은 조만간 서안 일대에 파다하게 퍼질 테고,머지않아 전풍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저희를 찾아온 셈입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그를 방수로 고용한 사람은 흑선방주인 최동이며,그는 오직 장병기만을 상대할 것입니다.”

노해광의 말에도 전풍개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작은 다른 놈들에게나 써라. 노부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본 파가 한낮마도의 무리들의 힘을 빌리는 일 따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물론 본 파가 화산파를 상대하는데 외부의 힘을 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소마의 제자를 상대하는 데는 오히려 그가 더 적당하다고 봅니다. 흑도에는 흑도의 방식이 있으니,그것을 우리의 방식과 다르다고 무작정 거부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라고 사료되는군요.”

“지금 네가 노부를 훈계하는 것이냐?”

전풍개가 호통을 치자 노해광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감히 사숙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를 방수로 사용하는 것은 흑도 사이의 분쟁에 국한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했을 뿐입니다. 흑도의 일에 본 파제자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풍개는 한동안 사나운 눈으로 노해광을 쏘아보다가 이내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흑도의 일이 언제까지 흑도 사이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건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본 파의 일에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숙.”

“적류문의 일은 그렇다 치고, 화산파와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검단현이 그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전풍개가 화제를 돌리자 노해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검단현도 적류문을 이용해 저의 손발을 묶는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이제는 뒤에서 수작을 부리며 상대의 반응을 떠보는 단계는 지났으니,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전풍개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 검단현은 저를 직접 노릴생각으로 몇 번 사람을 풀어 제 행방을 찾았는데,제가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방법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제가 운영하는 주루들의 영업권을 노골적으로 노리더군요.”

가뜩이나 딱딱하게 굳어있던 전풍개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무리 검단현이 천하의 개자식이라고 해도 어엿한 화산파의 인물인데,그런 추잡한 짓까지 벌인단 말이냐?”

전풍개답지 않은 욕설에 노해광은 살짝 웃어 보였다.

“검단현이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을 작자라는 건 사숙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는 검단현이 두려워 계속 숨어다니다가 주루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다시 집무실에 나타난것이란 말이냐?”

“검단현이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전풍개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정확히 네가 노리는 건 뭐냐?”

;검단현이 제가 운영하는 주루를 들쑤시고 사숙에게 살수를 보내면서 계속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우리 쪽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 오길바라서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본 파와 정면충돌을 하더라도 명분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놈이 명분 같은 걸 신경 쓴단말이냐?”

“검단현은 예전부터 본 파를 철저하게 말살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단순히 힘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명분이 없었기에 지금껏 손을 쓰지 못했던 겁니다. 겉으로는 한없이 무모한 것 같아도,막상 따져보면 행사 하나하나에 누구보다 주도면밀하고 냉정한 자가 바로 검단현입니다.”

전풍개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서 예전에도 그놈만 보면 그렇게 꼬리를 말고 도망쳤느냐?”

노해광은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웃었다.

“그에게 쓸데없는 빌미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피하는 것은 본파답지 않은 일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명분을 제대로 쌓게 해줄 생각입니다.”

“어떻게 말이냐?”

“좀처럼 행적을 드러내지 않던 제가 사숙을 모시고 다시 집무실에 나온 것을 알게 된 검단현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도망만 다니던 놈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면 자신에게 정면으로 대들결심을 한 것으로 생각하겠지.”

전풍개의 비아냥 섞인 말에도 노해광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잘 보셨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검단현은 이제 비로소 본격적으로 본 파에 정면으로 시비를 걸 어올 기회라고 판단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되면 반드시 조만간에 어떤 식으로든 공세를 취해 올 겁니다.”

“본 파와의 격돌을 마다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손을 써올 거란 말이지?”

“제가 아는 검단현의 성격이라면 그럴 겁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냐? 설마 이번에도 꼬리를 말고 몸을 숨기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 제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사숙을 이곳까지 모셔왔겠습니까?”

전풍개의 주름진 두 눈에 번쩍이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반격을 하겠단 말이지?”

노해광은 어느 때보다 자신에 찬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검단현은 가벼운 전초전 정도를 예상하고 있겠지만,저는 전초전은 예전에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는 자신만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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