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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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7화


제 334 장 고검출세(1)

주루 일 층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 데도 막상 노해광이 서 있는 계단일대의 분위기는 잔잔했다. 확실한 승기를 잡고 노해광을 사지로 몰아넣은 검단현이 느긋한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었으나,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는 노해광의 표정이 의외로 차분한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단현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자네 얼굴을 보니 아직도 무언가 믿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군. 어디숨겨 놓은 패가 있으면 꺼내 보도록하게. 기꺼이 감상해주지.”

사실 검단현이 노해광을 대수롭지 않은 상대로 표현했지만,그것은 그만큼 그가 노해광을 만만치 않은 적수라고 생각하는 방증이기도 했다.

진짜 하잘것없는 상대였다면 검단현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직접 이 자리까지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도 무공실력은 대단치 않았으나 심기나 사람을 상대하는 면에서는 탁월한 구석이 있는 노해광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변변치 않은 실력을 지닌 자라고 폄하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은근히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이십 년 만에 다시 돌아온노해광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안을 암중에서 호령하는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나는 종남파의 위세를 생각해 본다면 더 이상 예전의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단현은 노해광을 완전히 구석으로 몰아넣고 절대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평온한 안색을 보이는 노해광을 보자 불현듯 마음 한구석에 묘한 불안감이 도사리기 시작했다.

그런 검단현의 심리상태를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노해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야릇하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괴이 한 미소였다.

“숨겨 놓은 패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남에게 내보일 만큼 대단한 건 아닐세. 그래도 꼭 구경하고 싶나?”

검단현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노해광의 패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들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이제와서 고개를 내젓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과연 숨겨둔 한 수가 있단 말이지? 어서 보여주게.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실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워낙 변변치 않은 수라서 말일세.

일단 일 층을 자세히 봐주게.”

검단현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자세히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칼바람과 비명 소리가 요란했던 일층의 형세는 어느새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비명 소리는 거의 그쳐 있었고,약간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외에는 조금 전의 아수라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용해지고 있었다.

벌써 모든 손님들이 제거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일 층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 전과 상황이 많이 달라져 보이는 이유를 검단현은 즉시 알아차렸다. 일 층의 손님들을 도륙하고 있던 마강과 그의 수하들이 오히려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강의 수하들은 사실 대부분이 위장한 화산파의 속가제자들이었다.

적류문의 고수들 중 쓸 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은 이미 마안거에서 대부분이 희생되었기에 검단현은 부득이 강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속가제자들을 그에게 붙여주었던 것이다.

속가제자라고는 해도 검단현이 고른 인물들인 만큼 그들 개개인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닌 자들로,적류문의 흑도무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고수들이었다. 그들이라면 산해루의 일개 손님들 정도는 눈을 감고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

증로 채 정리

하기도 전에 오히려 자신들이 손님들의 손에 제압당하고 있었다. 검단현은 일 층을 빠르게 둘러보고 이내사정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 층의 손님들 대부분은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피를 뿌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고,나머지는 우왕좌왕하며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들 중 일부가 속가제자들의 곁을 지날 때마다 매섭게 칼을 휘두르던 속가제자들이 힘을 잃고 비틀거리거나 허무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하나,둘,셋, 넷……. 모두 네 명이구나. 그런데 저놈들은……?’

예리한 눈으로 손님들 틈에 섞여있는 이질적인 존재들을 파악하던 검단현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덩치 큰 두 명의 손님들 사이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인물.

그는 화산파의 제자가 검을 휘두를 때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가 일어났는데,그가 지나간 옆에는 검을 휘두르던 화산파 제자가 옆구리를 움켜쥔 채 쓰러지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오른손이 빗살처럼 날아검을 내뻗던 화산파 제자의 옆구리를 가격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손이 거무스름하게 변해 있는 것으로 보아 흑살장 종류의 수공을 익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반대로 우람한 체구에 수염을 기른흑의인 한 명은 자신을 쫓아오는 화산파 제자에게 당황한 얼굴로 양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대항했는데, 그 어설퍼 보이는 주먹에 턱을 가격당한 화산파 제자가 일 장 밖으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검단현은 한 눈에 그 흑의인이 휘두르는 주먹이 상당한 현기를 지닌 뛰어난권격술임을 알아보았다.

세 번째 인물은 걷기만 해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은 외모와는 달리 요리조리 날렵하게 화산파 제자들을 피해 사람들 틈에 숨어다녔는데,무심결에 그를 쫓던 화산파 제자 하나가 목을 움켜쥔 채 쓰러지는 광경이 검단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검단현은 그 중년인의 손이 움직일때 한 줄기 실선이 그려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그 중년인이 보기 드문 암기의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은 마강을 상대하는 자였다. 마강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칼을 쓰는 도법의 고수였는데, 혈음도라는 별호답게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살벌하기 그지없어서 적어도 일대일로는 서안일대의 흑도들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강이 한 사람을 상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매다가 결국 십여초 만에 왼쪽 가슴에 시뻘건 피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를 쓰러뜨린 사람의 손에는 길쭉한 쇠꼬챙이 모양이 특이한 병기가 쥐어져 있었다. 두 자쯤 되어 보이는 그 쇠꼬챙이는 평상시에는 그 사람의 허리 뒤춤에 꽂혀 있기에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으나,일단 허리춤에서 나와 그 남자의 손에 쥐어지자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여 혈음도 마강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검단현은 그 남자가 조금 전에 노해광에게 추궁을 받던 소궁이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소궁뿐만이 아니었다. 흑살장을 익힌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비삼이었고,우람한 체구의 권격 고수는 변일호라는 자였으며,뚱뚱한 몸집의 암기 고수는 적대롱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모두 산해루의 단골들로, 검단현이 이번 일을 위해 산해루에 자주 출입하는 손님들을 포섭하려했을 때 제일 먼저 목표가 되었던 인물군에 속해 있는 자들이었다.

검단현은 자신의 수하들 중 눈이 빠르고 수단이 좋은 장표에게 일을 맡겼는데,장표는 검단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해광의 눈을 피해산해루의 단골들 열다섯 명을 완벽하게 포섭해 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들 중 네 명은 이미 그전부터 노해광의 수족들이었던 것이다.

장표가 철저히 뒷조사를 했음에도 그런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런일에 대비하여 산해루의 단골 행세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검단현조차도 지금 자신의 눈으로 직접보고 난 후에야 그들이 노해광의 수 하들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그들의 행사가 얼마나 은밀하고 정교했는지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반신이 온통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시뻘겋게 물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마강이 숨을 거두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 층의 싸움도 끝이났다. 제법 고르고 뽑은 자들이었건만, 속가제자들 중 누구도 그들의 손을 피하지는 못했다.

마강과 속가제자들을 모두 쓰러뜨린 네 명의 장한들은 한 명씩 차례로 노해광의 뒤로 와서 우뚝 섰다.

노해광의 뒤에 병풍처럼 늘어선 그들을 노려보던 검단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확실한 한 수가 있었군. 이런 실력의 고수들을 미처 몰라봤으니 창피막심한 일이군. 어느 방면의 고인들인가?”

마강을 쓰러뜨린 쇠꼬챙이의 사나이,소궁이 피 묻은 쇠꼬챙이를 다시 허리 뒤편에 꽂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인은 무슨. 나는 소일광(蘇一光)이라는 무명소졸이오.”

“소 일광?”

검단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소일광의 말마따나 그런 이름의 고수를 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단현의 시선이 소일광의 옆에 서 있는 우람한 체구의 흑의인에게로 향했다.

노해광이 변일호라고 불렀던 흑의 인은 검단현의 시선을 받자 히죽 웃었다.

“내 이름은 변후라 하오. 철혈매화 나으리 같은 고귀한 분이 아실 리 없을 테니 너무 머리 굴리지 마시오.”

검단현은 비아냥 섞인 그의 말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다시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삼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비쩍 마른 흑살장의 고수는 비적신이라 했고,뚱뚱한 몸집의 암기 고수의 본명은 적마흠이었다.

그들 네 사람의 이름은 확실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나 검단현은 그들의 외모와 그들이 사용한 무공들을 곱씹어 본 결과 이내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검단현이 이윽고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일전에 산서성 오대산(五:

臺0J) 일대에서 한때 반짝 활약하던 네 명의 살성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나는군. 하나같이 무서운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는데,때마침 오대파(五:臺派)와 시비가 붙었다가 오대파를 피해 모습을 감추었다고 하던데,그들 이름이 추혼사절(追魂ra 絶) 이었나?”

소일광을 비롯한 네 사람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검단현은 얼음장처럼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각기 철조와 흑수,폭권(暴奉),엽도(葉刀)의 고수라고 하던데, 당신들을 보니 그들이 생각나는군. 오대파에서 이 사실을 알면 꽤나 반가워 하겠는걸?”

소일광이 조금 전보다 한층 굳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확실히 철혈매화답군. 알릴 테면 알려 보시오. 우리는 기꺼이 감당할자신이 있으니.”

“과연. 종남파를 등에 업고 있다면 아무리 오대파라도 일대제자가 죽은 원한 정도는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겠지.”

“그 일은 오늘 일과는 상관이 없

“그래. 상관이 없겠지. 오대파에서도 그렇게 믿어줄지 모르지만.”

검단현은 계속 오대파를 거론하며 그들을 자극하려 했으나,그때 노해광이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자네의 이런 모습은 정말 모처럼 보는군.”

검단현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이런 모습이라니?”

노해광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황하면 쓸데없는 일로 화제를 돌리는 모습 말일세. 남들은 자네의 겉모습만 보고 철혈매화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냉정한 인물이니 하고 떠들어댔지만,나는 자네도 예상에 어긋나는 일을 만나면 당황하고 허둥댄다는 걸 알고 있었지. 단지 그걸 지금처럼 다른 방식으로 표출해서 남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

검단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와 함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한층 더 차갑고 싸늘해졌다.

“감춰둔 한 수가 성공했다고 기고 만장해 날뛰는군.”

“누가 그러던가,한 수뿐이라고?”

노해광은 조금 전에 검단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 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노해광처럼 검단현의 표정도 살짝 굳어졌다.

“또 다른 한 수가 있단 말이지?”

노해광은 여전히 느긋했다.

“일단은 그렇지.”

“일단?”

“그게 한 수가 될지 두 수가 될지,아니면 몇 수가 될지 그걸 누가 알겠나?”

검단현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항상 극도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노해광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쯤은 얼마든지 옭아멜 수 있다는 광오한 허풍으로 들릴 수도 있고,이미 모든 일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자신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으로 들릴수도 있었다. 그리고 검단현은 왠지 후자일 것 같다는 불길함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노해광이 자신에게 일 층을 바라보라고 했을 때도

‘일단’이라는 단서를 붙였음을 기억해 냈다. 그 말은 곧 다른 숨겨진 수법이 더 있다는 확실한 의미가 아니 겠는가?

조금 전과는 달리 굳어진 검단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해광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귀를 기울여 보게.”

검단현의 표정이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해광이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무엇이 이상한지 여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위층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언제부터인지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비명 소리가 없다면 하다못해 신음성이나 싸우는 소리라도 들려야 하건만,쥐죽은 듯 고요해서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산해루의 삼 층과 사 층에 머물러있는 자들이라면 노해광의 수하들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일것이다. 비록 두 명의 장로와 네 명의 일대제자라 해도 일체의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다.

믿고 있던 자신의 가장 큰 수 하나가 커다란 암초를 만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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