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0화
제 337 장 고택풍운(3)
중년인이 정자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그들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월동문 앞에 두명의 인물들이 우뚝 서 있었다. 각기 검과 도를 든 매서운 인상의 중년인들이었다.
중년인은 움찔하여 절로 뒤로 주춤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정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자 뒤편의 소로를 따라 서너 명의 인물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또한 하나같이 손에 날카로운 병장기들을 소지하고 있었다.
“어어? 이거……
중년인이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소로에서 나온 네 명과 월동문 앞에 서 있는 두 명이 중년인과 청년의 몸을 사방에서 에워싸 버렸다.
중년인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을 둘러싼 자들을 힐끔거리다가 그중 그나마 인상이 덜 험악해 보이는 백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저 이곳을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인데,우리에게 무슨볼일이라도 있소?”
백의인이 손에 든 장검을 검집째까닥거리며 피식 웃었다.
“한 가지 볼일이 있지.”
막상 이를 드러내며 웃자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순해 보이던 인상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한 마리 이리처럼 섬뜩하고 살벌한 분위기가 짙게 풍겨 나왔다.
중년인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백의인의 목소리는 지옥의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차갑고 음산했다.
“네 목 위에 올려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
중년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온몸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대……대체 무슨 이유로 내 목 위의 물건이 필요하단 말이오?”
“돌무덤을 쌓고 있는데 그 안에 파묻을 게 부족하거든. 순순히 내놓는다면 고통은 별로 없을 거다.”
중년인은 문득 생각난 듯 손핵을 탁 쳤다.
“맞아! 조금 전 밖에서 내가 본 돌조각들이 바로 당신이 말하는 돌무덤이 아니오?”
“그렇다.”
“그 돌조각에 묻은 검은 얼룩이 묻어 있던데 그게 혹시……?”
“그래. 순순히 내놓지 않은 자들의 흔적이 었지.”
“아이구, 그런 안타까운 일이……
중년인은 머리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을 했으나,백의인은 오히려표정이 이릇하게 굳어졌다. 중년인의 행동거지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함을 느꼈던 것이다.
백의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중년인을 쏘아보며 왼손에 든 검을 슬쩍쳐들었다.
“그럼 너는 순순히 내놓겠단 말이지?”
만약 고개를 젓는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온몸을 난자해 버리겠다는 듯 살벌한 기세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중년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내놓을 거요. 별로 중요한것도 아닌데 그런 물건 때문에 피를 볼 수야 없지.”
중년인은 머리에 묶고 있는 두건을 주섬주섬 푸르기 시작했다.
백의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
“보면 모르오? 내 목 위에 있는 물건이라고는 이 두건밖에 없지 않소? 아끼는 것이긴 하지만,그래도 엄연히 군자임를 자처하는 내가 한낱 신외지물 때문에 다른 사람과 시비를 벌일 수는 없지 않소?”
백의인이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에 중년인은 두건을 풀러 아쉬운 둣 만져보더니 이내 그에게로 휙 던졌다.
“찜. 재질이나 색깔이 마음에 들어제법 비싼 돈을 주고 산 것인데……. 가져가시오.”
두건이 채 절반도 날아오기 전에 무언가 희끗한 것이 어른거리더니 두건이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언제검집에서 뽑아들었는지 백의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빛을 뿌리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중년인은 화들짝 놀라며 새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기껏 달라고 해놓고 공연히 시비를 일으키기 싫어 아까운 마음을 무릅쓰고 건네준 물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다니. 당신이 이러고도 사람이오?”
백의인은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놈이 감히 나를 희롱해?”
중년인은 오히려 성난 표정으로 버럭 호통을 쳤다.
“희롱은 지금 누가 하는 거냐? 내가 네놈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아끼는 두건을 내어준 줄 아느냐? 자고로 군자란 소인과 다투지 않는 법인지라 큰 마음 먹고 양보한 것이거늘,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무시하다니. 아, 이래서 옛 선현들께서 소인배와는 말을 섞지 말라고 했던가?”
짐짓 하늘을 올려보며 탄식까지 내뱉는 중년인의 모습을 본 백의인이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시퍼런 검광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오자 중년인이 호들갑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어이쿠! 이 소인배가 군자를 죽이려 하네. 정녕 하늘의 심판이 두렵지 않느냐,이놈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양새와는 달리 중년인은 백의인의 살인적인 공세를 너무도 수월하게 벗어났다.
백의인은 즉시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흥,과연 한 수가 있긴 하구나.
하지만 겨우 그따위 실력으로 나를 희롱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후회는 무슨. 어머니 돌아가실 때 이후로 후회란 해 본 적이 없는 이몸이시다.”
백의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중의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파파파팍!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시퍼런 검광이 폭죽처럼 피어오르며 중년인의 몸을 에워싸 갔다. 그 검광의 속도 와 기세가 너무도 거칠고 난폭해서 금시라도 중년인의 몸이 검광에 난 자당할 것만 같았다.
하나 중년인은 능숙한 솜씨로 보법을 밟으며 검광 사이를 유연하게 헤쳐나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워 보였던지 마치 거센 격랑을 헤치고 나아가는 한 마리 잉어를 보는것 같았다.
백의인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더욱 사납게 검을 휘둘렀으나 중년인의 몸에 일검도 격증시킬 수 없었다.
중년인은 계속 발을 움직이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허,과연 소인배의 검답게 겉으로만 요란하지 실속은 별로 없구나.
이 정도 솜씨로 그렇게 위세를 떨었단 말인가?”
“찢어 죽일 놈!”
백의인은 이를 부드득 갈며 더욱거세게 중년인을 몰아붙였으나,중년인은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그의 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중년인의 몸이 백의인과 위치가 뒤바뀌어 백의인의 옆에 있던 흑삼인의 눈에 그의 등이 흰하게 노출되었다.
그러자 흑삼인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손에 들고 있는 거치도(토齒기)를 불쑥 내밀어 그의 등을 찔러갔다.
막 거치도가 중년인의 등을 꿰뚫으려는 순간,이번에는 중년인의 일행인 청년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일검을 내질렀다.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거치도를 든 흑삼인이 휘청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단 일검에 흑삼인을 물리친 청년이 재차 검을 내뻗어 그를 공격하려는 순간,이번에는 나머지 네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삽시간에 장내는 검광과 도풍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네 명의 장한들이 청년을 막아서는 사이에 거치도를 든 흑삼인은 백의 인과 함께 중년인을 공격했는데,그들의 공세가 마치 자로 젠 듯 정교하면서도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런 식의 연수합격(連手合擊)에 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년인도 조금 전처럼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간혹 흑삼인의 거치도나 백의인의 검에 격중 당할 뻔한 위급한 상황에 처하곤 했는데,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려 그들의 약을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역시 소인배들다운 솜씨로다. 군자는 자신을 믿기에 얼마든지 혼자로 살아갈 수 있지만,소인은 그러지 못해 무리를 짓는다고 하더니 네놈들이 꼭 그 짝이로구나.”
반면에 청년과 네 장한들의 싸옴은 그보다 한층 격렬하면서도 피비린내나는 것이었다.
네 명의 장한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지만,청년한 사람을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청년의 검법은 맹렬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순식간에 장한 중 한 명이 왼팔에 부상을 입은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잘려지지 않았다뿐이지 상처가 워낙 깊어서 앞으로도 왼팔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청년의 솜씨가 예상외로 뛰어난 것을 본 나머지 장한들은 황급히 공세보다는 수세로 전환해서 엄밀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덕분에 당장 다른 장한처럼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나,장내의 주도 권을 그에게 넘겨준 꼴이 되고 말았다.
거치도를 든 흑삼인이 그것을 알아보고 그쪽으로 가세하려 했으나, 지금까지 줄곧 피해 다니기만 하던 중 년인이 수공을 휘두르며 대항하자 쉽게 몸을 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중년인의 수공이 상당히 날카롭고 예리해서 백의인과 합세해도 팽팽한 국면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숫자의 절대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여섯 명의 장한들이 두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질 게 뻔했다.
바로 그때,지금까지 정자에 비스듬히 누워 장내의 격전을 지켜보고만 있던 마의인이 하품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암. 한심한 놈들이군.”
마의인은 몸이 뻐근한 둣 몇 차례어깨를 돌리더니 정자를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느린 걸음으로 싸음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의인은 백의인과 흑삼인이 상대하고 있는 중년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세 명의 장한과 난투를 벌이는 청년을 향해 걸음을 옮기더니 갑자기 오른 주먹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때 마침 청년은 세 장한들의 엄밀한 방어막을 뚫고 다시 한 명의 장한의 몸에 막 일검을 격중 시키려하던 참이었다. 막 장검으로 무방비상태에 놓인 장한의 가슴을 갈라버리려던 청년은 문득 싸늘한 무언가가 자신의 등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이 다가오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청년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등에 거의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청년은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쐐애액!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권풍(奉風) 한 가닥이 그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권풍의 위력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스치기만 했는데도 청년의 옷자락이 부서지며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청년은 갈비뼈에 은은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비틀었던 신형을 그 방향대로 회전시키며 매서운 일검을 날렸다. 그의 반격은 날카롭기 이를데 없어서 권풍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그의 검에서 검광이 발출되는 것이 거의 동시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의인은 자신의 목덜미를 찔러오는 장검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더니 내뻗었던 주먹을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땅!
그의 손은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고 오던 장검의 옆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 바람에 청년의 신형이 한 차례휘청거렸다. 하나 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멈춰 세우자마자 다시 마의 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천지사방이 온통 검 그림자에 휩싸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청년의 검세는 빠르고 매서웠다.
마의인은 낮은 음성을 내뱉으며 주저하지 않고 그 검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너희들은 다른 한 놈을 처치해라.”
그 음성을 들었는지 멍하니 서 있던 세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흑삼인과 백의인에게 합공당하고 있는 중년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 광경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쪽으로 몸을 빼지 않고 마의인을 향해 계속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조금만 방심해도 마의인의 손에 커다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의인 또한 겉으로 드러난 느긋한 모습과는 달리 청년의 검법에 적지 않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전에 검의 옆면을 두드렸던 오른손에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청년의 검에 실린 경력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러오는 청년의 기세는 얼핏 보기에는 난폭한 듯하면서도 무척이나 안정적이었고, 검의 변화 또한 무작정 빠르기만 한게 아니라 체계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의인은 한눈에 청년의 검법이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세가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마의인의 입꼬리에 스산한 미소가 내걸리며 두 눈에 진득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동안 갇혀있다시피 해서 답답했었는데,모처럼 제대로 손맛을 볼기회가 생겼군.”
마의인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청년을 향해 양손을 괴이하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