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54화
제 342 장 흉살지계(1)
검단현은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곧게 뻗은 대들보가 방의 이쪽에서 저쪽을 가로질러 놓여 있었고,그 위로 빗살 모양으로 얹힌 서까래가 쭉 이어져 있었다. 제법 크기는 했으나,여느 집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한쪽 귀퉁이에서 거미 한 마리가 길게 늘어진 거미줄을 따라 열심히 위로 올라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검단현은 무심한 얼굴로 그거미가 거미줄을 타고 올라가 서까래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천장과는 달리 굵은 나무로 단단하게 마감한 바닥에는 거미는커녕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쳐든 검단현의 눈에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유등이 들어왔다. 유등 안에 나방 한 마리가 갇혀서 파닥거리는 모습이 방안전체에 묘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검단현은 한참 동안이나 유등 안에서 바동거리는 나방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유등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갯짓을 하는 나방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처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두려운 거냐,검단현? 이제 와서 종남파가 두려워진 거냐?’
그는 마음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두려운 거냐? 하찮게 보았던 그들이 형산파를 꺾었다고 갑자기 무서운 존재로 보이는 거냐? 그래서 이렇게 하루 종일 넋을 잃고 우두커니 있었던 거냐?’
그 중얼거림은 조금씩 커지더니 종내에는 거대한 외침으로 변했다.
‘너는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느냐? 검단현, 대답해라.
너는 정녕 그 정도의 인간이었느냐?’
검단현은 이를 악물었다.
물론 자신은 그런 인간이 아니다.
적이 무서워 꽁무니를 뺀다는 것은 그의 뇌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적이 종남파가 되리라고는 상상으로라도 해 본 적이 없었다.
– 종남파가 무당산에서 형산파를 격파했다!
며칠 전에 들려온 그 소문으로 인해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일대가 완전히 난리법석이 나고 말았다.
검단현은 지금까지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속으로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 그것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문인에게 무기한 폐관을 명 받았을 때도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하늘 같았던 사부 한세일이 소림의 굉수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칩거에 들어갔을 때도 실망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런데 종남파가 형산파를 꺾었다는 그 소문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는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형산파라면 솔직히 화산파의 전력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그들의 오결검객들은 하나같이 정말 놀라운 검술을 지닌 뛰어난 검객들이었으며,화산파의 장로에 뒤지는 인물들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형산파 내에는 강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도 많았다.
화산파에도 물론 화산의 깊숙한 곳에서 수행하거나 칩거해 있는 선배고인들이 적지 않았으나,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형산파는 결코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무서운 상대였다.
그런 형산파가 불과 여섯 명으로 시작한 종남파의 강호행을 막지 못하고 끝내는 그들의 마지막 제물(祭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그자가있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강호제일검객이며, 일 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내에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이 된 사나이!
신검무적!
강호무림 역사상 그와 같이 빠르게 명성을 쌓아올리고 있는 자도 없었고, 그와 같은 나이에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자도 없었다. 실로 공전절후전무후무 (空前絶後前無後無) 란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검단현은 화산파에 있을 때부터 그자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을 들어왔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으나,그가 초가보를 꺾고 종남파를 재건했다는 소식에 비로소 그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초가보는 당시의 화산파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런 초가보를 몇 명 되지도 않는 제자들을 규합하여 물리친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신검무적의 소식을들은 것은 서안의 이씨세가에서 매장원의 죽음을 보고받을 때였다.
매장원은 사부인 한세일이 가장 경계하던 실력자였다. 단순히 무공 실력뿐 아니라 주위를 끌어당기는 기질이나 사람들을 통솔하는 지도력에서 그는 한세일뿐 아니라 장문인인용진산 조차도 꺼려 하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매장원이 신검무적과의 격전에서 비참하게 죽고 신검무적의 화려한 검법만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 되었을 때,검단현은 처음으로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신검무적이 몇몇 제자들을 거느리고 종남파를 떠나 강호행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을 때,이번이 종남파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을 했다. 그가 신산 곡수의 죽음으로 공백이 된 서안의 책임자에 자원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번 기회에 종남파의 세력을 확실히 무너뜨리지 않으면 자칫 그들로 인해 화산파의 존재가 뿌리째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종남파의 비무행으로 온 무림이 술렁거릴 때마다 검단현의 그런 예감은 점점 더 강해졌고,종남파를 향한 마음속의 칼날은 한층 더 예리해졌다.
그가 명문정파답지 않게 흑도의 무리를 이용하고 잔혹한 일 처리를 한것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기질 탓도 있지만,무섭게 커져 가는 종남파의 위상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종남파가 형산파를 꺾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일시지간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맥이 풀린 듯 몸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 안의 기력이 모두 어딘가로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대신 그 자리를 종남파와 신검무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야금야금 채워가고 있었다.
단지 다섯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고도 신검무적은 그 막강한 형산파를 물리쳤다. 만약 그가 다시 종남파로 돌아온다면 과연 화산파는 그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가 돌아오기 전에 종남파와 회람연을 벌이게 된 것은 과연복인가,화(禍)인가?
무당의 집회에 참석한 두 문파의 정예들이 모두 복귀한 상태였다면 당연히 회람연의 무게추는 종남파로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 회람연은 내일로 닥쳐왔고,그들 중 누구도 아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오기 전에 회람연의 승부가 판가름난다면 과연 그들은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가? 회람연의 승자가 화산파로 결정된다면,혹시 신검무적은 종남파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해오지 않을까?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과연 자신과 화산파는 그의 도전을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 형산파에서 최초로 배출한 육결검객조차 물리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화산파에 존재할수 있을까?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던 검단현은 문득 자신조차도 종남파의 우세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닫고 무심결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종남파가 존재하는 한 그들은 언제까지고 본 파의 우환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결국은 결판을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회람연이야말로 그들을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검단현의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내 생각이 맞았다. 처음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도산검림 속에서 살아가는 무림인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던 검단현이 누군가를 부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의 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조심스런 태도로 머리를 조아리는 준수한 청년은 다름 아닌 두기춘이었다.
두기춘은 매장원이 음모를 꾸밀 당시 신산 곡수를 지원하여 제법 커다란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곡수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곡수의 죽음 이후 애매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종남파의 제자 출신이었다는 원죄 때문에 다른 화산파 제자들의 눈 밖에 난 그로서는 든든한 동아줄이 잘려나간 후유증에 시달릴수밖에 없었다.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외톨이가 되어 버린 두기춘은 화산으로 복귀할 것을 청했으나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중책을 맡긴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무위도식을 해야 하는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두기춘이 느닷없이 검단현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두기춘은 검단현이 종남파에 대해 강박에 가까운 중오를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동안 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조심을 해왔다.
그렇기에 그가 종남파와의 회람연전날 밤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부른 저의를 알지 못해 불안한 마음이었다.
검단현은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두기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다행히 두기춘은 속마음을 감추는데 무척이나 능숙한 사람이었다.
검단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는 두기춘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불쑥 입을 열었다.
“명령진기가 팔성을 넘어섰구나.
네가 본 파에 입문한 지가 얼마나되었지?”
명령진기가 팔성을 넘어서면 안광에 은은한 초록빛이 감돌게 된다.
그 빛은 너무 미약해서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것이었지만,검단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두기춘은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 년이 조금 안 됐습니다.”
“그런데 벌써 명령진기를 그 정도 경지까지 익혔단 말이지? 과연 듣던 대로 재질이 범상치 않구나.”
검단현은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에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으로 대면하는 두기 춘에게 선뜻 칭찬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럴수록 두기춘의 불안감은 더욱커져만 갔다.
“명령진기가 팔성을 넘어가면 본파의 다른 신공을 익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융합시킬 수 있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태청강기를 익혀볼 생각은 있느냐?”
뜻밖의 말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두기춘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변했다.
태청강기는 화산파의 제자들이 익힐 수 있는 최고의 신공이었다. 물론 그 위에 자하신공이 있기는 하지만, 자하신공은 장문인을 비롯한 극소수의 선택받은 수뇌부들만이 익힐수 있는 비전중의 비전이라 일반 제자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기춘 또한 태청강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명령진기가 비록 천하의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훌륭한 무공이기는 하지만, 태청강기와 비교하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특히 명령진 기는 수신의 목적이 강해서 위력 면에서 태청강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강호에 나가 높은 명성을 얻는 것을 꿈꾸는 화산파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태청강기를 익히는 것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하나 태청강기는 장로들을 비롯한 수뇌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어서,일반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화중지병일 뿐이었다.
두기춘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검단현의 입에서 불쑥 태청강기에 대한 언급이 나왔으니,두기 춘으로서는 가슴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청강기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무림 최고의 신공 중 하나를 얻는 것뿐 아니라 비로소 화산파의 수뇌들에게 인정받는 실세 중의 실세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두기춘이 너무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과연 자신에게 그런 행운이 선뜻 주어질 수 있을 것인가? 숙적인 종남파의 제자였던 자신에게 과연 화산파 최고의 신공을 익힐 기회를 줄 수 있겠는가?
두기춘의 마음은 기대감과 초조함, 그리고 이유 모를 불안함으로 마구뛰고 있었다.
그런 두기춘의 심정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 검단현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음산하고 괴이한 웃음이었다.
“한 가지 일만 해주면 네가 태청강기를 익힐 수 있도록 지원해주겠다.
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