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87화
제 355 장 작전모의(作戰謀議) (2)
소신승 정화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 시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미 세워둔 복안이 있는 것 같군요.”
이정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정화 스님의 혜안은 정말 피할 수 없구려. 확실히 그들의 수뇌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몇 가지 방책을 생각해 둔 것이 있기는 하오. 하지만 그 방책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나로서도 확신할 수 없소. 워낙 변수가 많고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기 힘들어서 꼭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오.”
듣고 있던 남해일이 눈을 빛내며 열띤 음성으로 말했다.
“신기묘산으로 이름이 높은 부반주께서 세운 계획이라면 적지 않은 효과를 볼 게 틀림없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으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되는 거요.”
“남 소협의 말씀이 옳소. 사실 흑갈방의 세력이 생각보다 너무 거대해서 그들을 어떻게 상대하나 막막했는데, 부반주의 신묘한 계략에 진 장문인과 우리의 힘이 합쳐진다면 능히 감당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드는구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종의까지 나서서 이정문이 세웠다는 방책에 대한 기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내자 이정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를 너무 높이 떠받들어 주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요. 이러다 떨어지면 더 큰 충격을 받을 테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구려.”
그의 엄살기가 담긴 말에 긴장감이 감돌았던 장내의 분위기가 잠시 부드러워졌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이 불망원 안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복호도 팽철영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아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던 중인들은 그의 뒤늦은 출현에 안도하는 모습들이었다.
팽철영은 진산월을 비롯한 선반의 고수들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 한 사람 때문에 여러 군웅들을 기다리게 한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본가의 어른들과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늦고 말았습니다.”
이정문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하북팽가에서 어느 분들이 오신 것이오?”
“제 둘째 숙부님과 막내 숙부님께서 오셨소.”
이정문은 강호정세에 능한 인물답게 단번에 팽철영이 말한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팽가오도(彭家五刀)중 두 분이나 낙양까지 오셨단 말이구려.”
팽가오도는 하북팽가의 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로 이름 높은 뛰어난 도객들로, 팽철영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진산도(震山刀) 팽대형(彭大炯)의 아들이었다.
팽가오도 중 둘째는 오호단문도 팽대회였고, 다섯째는 웅풍도(雄風刀) 팽대집(彭大集)이었는데, 그들 모두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오호단문도 팽대회는 하북팽가의 얼굴과도 같은 인물로, 크고 작은 행사에 팽가를 대표해서 참석하기에 강호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팽대회가 직접 낙양까지 와서 팽철영을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정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어른거렸다.
“오호단문도 팽 대협까지 오실 정도면 필히 중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텐데,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겠소?”
팽철영은 이미 팽대회에게서 어떤 일이 있어도 신검무적과 선반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기에 이정문의 질문에 오히려 기꺼워하며 선뜻 입을 열었다.
“흑갈방과의 마찰이 점차로 심해져서 언제라도 혈풍이 불 수 있을 정도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데, 공교롭게도 이틀 후에 본가에서 분가한 작은 할아버님의 회갑연이 벌어지기로 했소. 본가에서는 그날 흑갈방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려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소.”
“팽 소협의 작은 할아버님이라면 쾌도로 명성이 높은 섬전신도(閃電神刀) 팽도엽(彭道燁) 대협이 아니시오?”
“그렇소. 그분이 본가에 계신다면 다행인데, 몇 년 전에 본가에서 나와 형수에 새로 거처를 잡으셨소.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형수 인근에 흑갈방의 고수들이 곧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본가의 어른들이 불안함을 느끼시는 것 같소.”
형수라는 말에 일행의 표정이 모두 무겁게 굳어졌다.
팽철영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이정문은 흑갈방의 수뇌들이 형수로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팽철영의 낯빛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의 목적은 바로 작은 할아버님의 회갑연일 거요. 그들은 그날 회갑연에 오는 본가의 고수들을 제거하여 본가에 커다란 타격을 주려는 게 분명하오.”
이정문은 흑갈방의 수뇌들이 단순히 팽도엽 한 사람만을 노리고 형수로 모여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팽철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들의 집결지가 검보나 팽가의 본거지가 아니라 형수라고 해서 다소 의아해 했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는 것 같소. 팽 대협의 회갑연에서 팽가의 정예들을 쓰러뜨리고 뒤이어 보정의 검보를 노린다면, 팽가에서는 검보를 도울 여력이 없을 테고 검보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거요.”
“그렇다면 큰일이 아니오? 이미 본가의 고수들 중 상당수는 작은 할아버님의 회갑연에 참석하기 위해서 본가를 나섰을 거요. 아무리 빨리 그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해도 기일 내에 발길을 돌리게 할 수는 없을 거요.”
선반의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침착한 팽철영이지만 가문의 위기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자 불안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정문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복잡한 생각들이 종횡으로 교차되는지 눈빛이 여러 차례 변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형수로 모여드는 흑갈방의 수뇌들을 미리 잠복하여 각개격파할 생각이었는데, 이틀 후의 회갑연이 그들의 목표라면 아무래도 일정이 빠듯하여 그들을 중도에서 제거하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당초 예상보다 이틀이나 앞당겨지는 일정이 어떠한 변수로 작용할지는 모르지만, 원래 세워놓았던 계획보다 훨씬 불리해 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회갑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림에 공표한 회갑연을 흑갈방의 습격이 두려워 취소한다는 것은 팽도엽 본인은 물론이고 하북팽가 전체의 위신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오히려 회갑연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다가 갑작스런 취소에 당황한 군웅들이 흑갈방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일패도지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정문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팽철영을 향해 물었다.
“팽가에서는 몇 분이나 회갑연에 참석할 예정이시오?”
“조금 전에 오셨던 두 분 숙부님 외에 팽가오도의 다른 숙부님 한 분과 그분들의 제종남매, 작은 할아버님의 종제(從弟)분들까지 스물다섯 분 정도가 참석하신다고 들었소.”
팽도엽은 전대가주의 친동생이어서 팽가에서도 항렬이 가장 높은 편이었고, 본신의 무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인물됨이 호쾌해서 따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팽가오도 중에서도 세 사람이나 회갑연에 참석하려는 것이다.
하북팽가가 아무리 고수가 많다고 해도 그 인원이 모두 변을 당한다면 가문의 안위가 뿌리부터 뒤흔들릴게 분명하니, 팽철영이 저토록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팽도엽 본인뿐 아니라 팽가오도의 세 사람이라면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들 외에도 주위의 다른 문파에서도 적지 않은 하객들이 참석할 테니 그들까지 합친다면 아무리 흑갈방이라도 만만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정문은 주위의 여러 가지 상황을 어떻게 하면 자신들에게 이롭게 이용할 수 있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진산월은 아무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얼굴 표정이나 태도가 평상시와 다름이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보자 이정문은 혼자 머리 빠지게 고생한다는 생각에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반주께서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다고 보시오?”
선반을 끌고 있는 책임자로서 느긋하게 구경하고만 있지 말고 좋은 의견이라도 있으면 내놓으라는 뜻이 담긴 물음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팽철영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움찔하는 가운데, 이정문은 눈을 빛내며 재차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요?”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목표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소. 막연히 그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수월해진 셈이오.”
“그렇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만큼 많은 무림인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늘어나는 게 아니겠소?”
“그러니 그러기 전에 그들을 먼저 쳐야 하오.”
이정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말은 쉽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해서 이대로 밤을 지새워 달려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고 먼저 친단 말이오?”
“그걸 알아내는 게 당신의 일이오.”
이정문의 얼굴이 구겨졌다.
“또 이번에도 나란 말이오?”
“당신 외에는 그 일을 할 자가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좀 더 당신의 전력을 다해 보시오.”
“나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렇다고 할 수 없소.”
이정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 진 장문인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이정문을 응시했다. 별다른 빛이 담겨 있지 않은 차분한 시선이었으나, 이정문은 왠지 자신의 몸속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상대의 눈에 드러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육 소저는 지금 어디에 있소?”
뜻밖의 물음에 이정문의 몸이 한 차례 움찔했다.
“갑자기 그녀의 행방은 왜 묻는 거요?”
“육 소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당신의 곁에 있었는데, 최근에는 볼 수가 없구려. 아마도 그녀는 당신의 지시를 받고 다른 곳에 가 있는 모양인데, 혹시 그곳이 형수가 아니오?”
이정문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 장문인은 나보다 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같구려.”
“당신이 얼마나 치밀한 성격인지는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소. 흑갈방의 수뇌들이 형수에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이 형수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아마 당신은 팽 대협의 회갑연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흑갈방에서 그것을 노리고 형수에 집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요. 그러니 이미 그에 대한 대비책도 연구해 두었을 게 분명하오.”
팽철영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 장문인의 말씀이 사실이오?”
이정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강퍅했던 얼굴이 더욱 볼품없게 변했다.
진산월은 일그러진 이정문의 얼굴을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이제 다른 사람의 애를 그만 태우고 당신이 구상한 계획을 말해 보시오. 당신 말대로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지 않소?”
이정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쓰디쓴 웃음을 흘렸다.
“정말 진 장문인은 당해낼 수 없구려. 확실히 나는 팽 대협의 회갑연이 흑갈방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미 그에 대한 계획을 세워 두었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기 전에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진 장문인의 말씀대로 육난음을 비롯한 이십팔숙의 상당수가 이미 형수에 잠입해 있소. 그러니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부지런히 형수로 가서 그들과 합세하면 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