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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07화


제 362 장 검기무쌍(劍氣無雙) (3)

쏴아아앙!

궁해의 손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괴이한 음향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사방을 무질서하게 휘돌며 움직이던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바뀐 손의 움직임은 가공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난폭했다.

갑작스레 바뀐 움직임만큼이나 위력도 놀라워서 무심코 조금 전처럼 대응했다가는 의외의 낭패를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나 진산월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계속 용영검의 변화를 이어나갔다.

파파파팡!

검기와 경기가 쉴 새 없이 부딪히면서 세찬 파공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진산월은 쉬지 않고 유운검법의 절초들을 펼쳐나갔고, 그에 따라 그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검광들은 세상을 온통 검의 잔영(殘影) 속에 휘감아 놓을 듯했다. 궁해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괴이한 기운들은 그 검광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제대로 뻗어 나가지도 못하고 사그라지기 일쑤였다.

궁해는 천마대산수는 물론이고 자신의 또 다른 절학인 환천멸겁장을 사용했음에도 여전히 우세를 점할 수 없자 눈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타나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한쪽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장내를 지켜보고 있던 공태 또한 표정이 밝지 않았다.

‘궁 형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길(吉)보다 흉(凶)이 많을지 모르겠구나.’

장내에 갑자기 붉은 혈광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궁해의 손에 한 줄기 혈광이 번뜩이더니 그가 뿜어내는 경기 속에도 붉은빛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궁해가 환천멸겁장에 이어 자신의 또 다른 절학인 적혈수마저 사용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적혈수는 궁해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살인적인 위력을 지닌 상승절학이었다. 적혈수의 핏빛 기운에는 호신강기를 으스러뜨리는 위력이 담겨 있어 일단 격중 되기만 하면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적혈기(赤血氣)가 체내에 스며들어 혈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천마대산수와 환천멸겁장, 적혈수의 삼대 절학을 모두 사용하고서야 비로소 궁해는 진산월의 유운검법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진산월의 유운검법은 정말 놀라웠다. 단순히 변화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그 변화 하나하나에 무서운 변초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변할지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기가 어찌나 강력한지 환천멸겁장의 가공할 위력으로도 검기를 뚫어낼 수가 없었다.

궁해는 비로소 강호에 퍼진 신검무적의 명성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절감했으며, 조금 전에 진산월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장내는 두 명의 절세고수들이 펼쳐내는 검기와 장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빛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검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와 무시무시한 장력이 공간을 압축하며 흘러내는 굉음만이 들려올 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싸움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궁해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준수했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이 마치 산발한 것처럼 이마와 목덜미의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게다가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던 두 눈은 기광을 품은 채 무섭게 번뜩이고 있어 흡사 광인(狂人)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손놀림은 더욱 빠르고 매서웠고, 신들린 듯한 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기는 금시라도 진산월의 전신을 찢어놓을 듯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비해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 또한 땀을 흘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얼굴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차분해 보였고 손길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손에 쥐어진 용영검이 부려내는 유운검법의 절초들은 한층 더 기기묘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이 곧 검이고, 검이 곧 구름인 신묘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누가 더 우세한지 모를 팽팽한 격전이 계속되었다.

궁해는 자신의 삼대절학을 모두 펼치고도 좀처럼 진산월에게서 우세를 점할 수 없자 조금씩 초조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수법이라고 해야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혈해반뿐인데, 그것으로 진산월의 검정중원을 꺾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물론 궁해는 혈해반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검정중원이 소문대로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면 확실한 승산은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검무적의 실력이 소문과 다르지 않다는 게 확인된 이상, 검정중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연 혈해반으로 중원무림의 검법 사상 최고의 초식이라고 칭송받는 검정중원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궁해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졌으나, 그의 동작은 여전히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위협적이었다.

진산월의 검초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시종일관 변화무쌍한 유운검법의 초식만을 그려대던 검이 돌연 단순하면서도 훨씬 더 강맹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빠르고 강한 위력은 훨씬 더 강해져서 천하의 어떤 살초(殺招)에 못지않았다. 아니, 다양한 변화는 줄었을지 몰라도 아홉 개로 나뉜 검영(劍影)이 다시 여러 개로 분산되어 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시각적으로는 한층 더 현란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 각각으로 나뉜 검영 하나하나에 담긴 위력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궁해는 그것이 종남파의 최고절학 중 하나인 삼락검 중의 낙하구구검이라는 건 알지 못했지만, 진산월이 비로소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에 경각심이 크게 일어났다.

‘이것이 검정중원인가? 아니면 다른 절학인가?’

생각은 길었지만 궁해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빗발처럼 쏘아져 오는 검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아앗!

옆구리와 어깨의 옷자락이 검영에 스치며 핏물이 튀어 올랐으나, 궁해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양손을 앞으로 세차게 내뻗었다.

콰콰콰콰!

그의 양손에서 거대한 폭포를 연상케 하는 듯한 엄청난 경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경력이 어찌나 거세었던지 그의 전신을 위협했던 검영들이 경력에 휩싸여 맥없이 사그라졌다. 환천멸겁장 중의 최절초인 겁륜천하(劫輪天下)의 놀라운 위력이었다.

진산월은 뒤로 슬쩍 물러서 거리를 벌리며 낙하구구검 중의 절초인 천강은홍과 홍예장공을 거푸 펼쳤다.

쭈아악!

마치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시퍼런 검기다발이 허공을 가르고 궁해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궁해는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내뻗었던 양손을 오므렸다가 다시 세차게 흔들었다. 어느새 그의 왼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흔들어진 양손을 따라 기이한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른손에는 천마대산수의 마지막 초식인 천마강림(天魔降臨)이, 왼손에는 적혈수의 최후 비기인 적혈명(赤血鳴)의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이룬 채 움직이고 있었다.

슬쩍 내밀어진 기운에 진산월이 발출한 검기다발들이 허무하게 소멸하기 시작했다.

하나 덕분에 궁해의 양쪽 소매는 검기의 여파로 갈가리 찢겨 양쪽 팔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궁해는 여세를 몰아 맹렬히 진산월의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고오오…

아직 채 손을 뻗지도 않았는데 그의 전신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공할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기운에 희미하게 붉은빛이 아롱거리는 광경은 보는 이의 가슴에 섬뜩한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전신의 옷자락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양쪽 팔목은 훤히 드러나 있어 다소 낭패스러운 모습이었음에도 궁해는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인 채 진산월의 앞으로 곧장 날아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어서 어지간한 담력의 고수라도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궁해가 마지막 승부를 걸어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보여준 궁해의 무공은 음양신마 복양수에 조금도 못지않은 것이었다. 복양수를 상대할 당시 진산월은 악전고투를 면치 못했었다.

하나 지금 궁해를 상대하면서 진산월은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무공이 복양수와 싸울 당시에 비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거듭되는 절정고수들과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고 실전되었던 종남파의 신공들을 수습한 지금의 상태는 진산월 자신조차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모든 경지가 상승되어 있었다.

아마 지금 복양수를 다시 만난다면 예전 같은 처절한 싸움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궁해는 운이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서장무림의 최고고수인 궁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오고 있음에도 진산월은 두려움이나 압박감보다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궁해를 향해 용영검의 검날을 비스듬히 기울여 낙하구구검의 최절초인 자하천래를 전개해 나가는 손길에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쑤아아아!

진산월의 검은 공간을 가르며 궁해의 목덜미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궁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붉은 빛이 갑자기 진해지며 궁해의 손바닥이 수십 개의 그림자를 뿌려냈다. 그 수십 개의 손바닥들은 빠른 속도로 합쳐지더니 이내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해버렸다.

손바닥의 정중앙에 유달리 시뻘건 반점(斑點)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피로 물든 혈안(血眼)을 연상케 했다.

진산월이 펼쳐낸 검기가 손바닥과 부딪혀 맥없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직후에 손바닥에 박혀 있던 붉은 반점이 앞으로 튀어 나와 진산월을 향해 폭사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궁해가 오랜 고련 끝에 마침내 완성한 혈해반 수법이었다. 장공의 최고 경지라는 장강(掌?)을 응용해 만들어진 이 수법에는 수십 년간 서장무림의 최고고수로 활약해온 궁해의 모든 정수가 담겨 있었다.

이글거리며 다가오는 붉은 반점은 마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태양처럼 거침이 없어 보였다.

진산월은 그 반점이 자신의 코앞에 올 때까지도 자하천래를 펼치던 자세를 유지하고 서 있었다. 그러다 막 반점이 자신의 미간에 닿으려는 순간에 용영검을 앞으로 빠르게 내찔렀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궁해조차도 자신의 혈해반이 진산월의 머리를 격중한 줄로만 알았다.

‘이겼…….’

궁해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려는 순간에 용영검의 검 끝이 정확하게 반점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짱!

거울이 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한 가닥 검광이 번뜩였다 사라진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

조금 전만 해도 검풍과 장영으로 뒤덮였던 장내에 갑자기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궁해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을 오른손의 팔뚝에 댄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앞으로 내찌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가 천천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우윳빛 검광을 발하는 용영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마치 허공을 비상하던 한 마리 용이 자신의 잠자리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 신묘해 보이기까지 했다.

굳게 다물어 있던 궁해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이게 바로 검정중원이냐?”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쉽게도 아니오.”

궁해의 얼굴에 잔 경련이 일어났다.

“검정중원이 아니라고?”

“이건 유운검봉이라는 것이오.”

“설마 유운검법의 초식이란 말이냐?”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운검봉은 유운검법 내에서도 가장 기이한 위력을 지닌 초식이었다.

이 초식은 시전하기에 따라 검봉의 수를 서른두 개까지 늘릴 수 있으며, 그때의 위력은 천하의 어떤 검법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당대 무림 최고의 장공 고수라는 음양신마 복양수조차도 열여섯 개의 검봉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진산월은 놀랍게도 그 서른두 개의 검봉을 다시 합쳐 단 하나의 검봉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궁해가 펼쳐낸 독보적인 혈해반이 맥없이 반으로 갈라지고 만 것도 단순하게 내뻗은 것처럼 보인 일검에 유운삼십이봉의 위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궁해의 얼굴이 사정없이 실룩거렸다.

“내가…… 평생을 거쳐 완성한 내 혈해반이…… 검정중원도 아니고 한낱 유운검법조차 이기지 못했다고?”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궁해의 입가에 시커먼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펼친 혈해반이 깨진 충격으로 그의 심맥은 이미 가닥가닥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혈해반을 꺾은 무공이 알고 싶어 버티고 서 있던 궁해로서는 진실을 알고 나자 더 이상 견딜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 경련을 일으킨 채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궁 형!”

공태가 황급히 다가와 바닥에 닿기 전에 그의 몸을 붙잡았으나 궁해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지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나직한 음성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검정중원이 아니라고……? 대체 난 무엇을 위해서…….”

그는 그 말만을 끝없이 중얼거리다 그대로 숨을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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