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19화
제365장 강호비사(江湖秘史)(3)
이북해는 다시 용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인중용왕은 칠대용왕 중 유일하게 그동안 강호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나 이북해는 오랜 조사 끝에 그가 칠대용왕 중에서도 가장 강한 무공의 소유자이며, 쾌의당주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쾌의당의 이인자라는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쾌의당에서 칠대용왕과 이대영주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로, 각기 자신만의 세력을 가지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네. 그래도 그중에서 굳이 우열을 가르자면 인중용왕이 한발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칠대용왕 중의 첫째로 꼽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세. 심지어 오만하고 도도한 칠대용왕의 다른 사람들도 그가 자신들의 가장 앞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했네.”
강호의 무림인들은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했고, 쉽게 남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약세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족속이었다.
칠대용왕 정도 되는 고수들이라면 그 자존심과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칠대용왕 중에는 무림의 최고고수들인 무림구봉에 속해 있는 인물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누구도 인중용왕이 칠대용왕의 수좌(首座)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인중용왕이 그들을 압도하는 실력의 소유자임을 나타내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중용왕은 쾌의당에 가장 늦게 합류했네.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무시하거나 그에게 의혹을 가진 자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는 그런 주위의 우려를 단숨에 씻어 버렸네. 바로 양천해와의 일전을 통해서 말일세.”
인중용왕의 등장은 칠대용왕을 비롯한 쾌의당의 수뇌들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 갓 중년에 접어든 듯한 나이에 한 자루 검을 손에 들고 있을 뿐인 그 검객은 양천해의 가공할 구절마도를 완벽히 막아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번갯불 같은 반격으로 그를 격퇴시키기까지 했다. 당시 그가 사용한 검법은 그야말로 빛살처럼 빠르고 강력했으며, 몸놀림은 한 마리 비응(飛鷹)을 보는 듯 현묘하고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양천해는 조익현과 쾌의당주와의 비무에서 연거푸 패하며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잡고 무공 수련에 미친 듯이 매진해 자신의 도법에서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구절마도의 최절초인 오선절(五仙截)을 육선절(六仙截)로 발전시켜 자신의 무공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오선절은 양천해가 가장 자신하는 일섬절을 다섯 번 연거푸 펼치는 수법으로, 조익현을 만나기 전만 해도 양천해는 강호에서 이 초식을 감당해 내는 고수를 본 적이 없었다. 하나 조익현과 쾌의당주에게 연패하면서 이를 보강할 필요성을 느끼고 상당한 기간 동안 고련한 끝에 마침내 하나의 변화를 더 추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양천해의 육선절은 정말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중년검객의 섬전과도 같은 검법과 신묘한 몸놀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육선절마저 무너진 후 심기일전하여 고련에 고련을 거듭해 온 양천해가 다시 두 개의 변화를 추가하여 팔선절을 완성한 것은 그로부터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양천해는 팔선절로 네 명의 절정고수들을 연파하면서 자신의 도법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결국 마지막 순간에 신검무적의 검정중원에 꺾이고 말았다.
“인중용왕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그가 사용한 무공이 무엇인지는 누구나가 쉽게 알아보았지. 강호에서 그처럼 빠르고 사나운 검법과 표홀하면서도 예측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신법을 가진 문파는 오직 하나뿐이니 말일세.”
이북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점창파로군요.”
“그렇다네. 양천해를 꺾을 때 그가 사용한 것은 바로 사일검법과 응조칠식경공이었지.”
이북해의 뇌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십여 년 전에 혜성처럼 강호에 나타나 뭇 고수들을 연파하여 무림을 경동시키고 홀연히 사라진 절세의 검객. 일부 사람들에게는 점창파 사상 최고의 고수라고까지 불렸던 희대의 풍운아!
“십방랑자 사효심……!”
이북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같은 음성에 용선생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바로 그였네.”
인중용왕의 정체가 사효심이라는 것은 침착하고 냉정한 이북해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사효심이 강호에 다시 나타나 무림맹의 무단을 맡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 그가 사실은 쾌의당의 용왕 중 한 명이라고 하니 아무리 용선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할지라도 쉽게 믿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북해는 과거에 사효심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사효심은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재질과 뛰어난 기상을 지닌 인걸(人傑) 중의 인걸이었다. 누구라도 그를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적지 않은 강호의 미녀들이 그에게 연정을 품기도 했다.
그런 사효심이 막상 강호에서 활약한 시기는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효심의 명성이 너무 갑작스럽게 상승한 것을 경계한 점창파 일부 고수들의 시기와 한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그의 방랑벽을 경계한 점창파 수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에게 갑작스러운 소환령이 내려진 때문이었다.
그 소환령 이후 사효심의 모습은 더 이상 강호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소환령을 받아들여 점창파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소환령을 피해 강호의 외진 곳으로 숨어들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해서 누구도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이북해 또한 사효심의 그 후 행적이 궁금하여 비밀리에 알아본 적이 있었다. 하나 점창파에까지 사람을 파견하였지만 사효심이 있는 곳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자신에게 소환령이 떨어진 것을 알아차린 사효심이 끝내 점창파로 돌아오지 않고 잠적했을 거라는 게 당시 그의 행적을 조사하던 자의 최종의견이었으나, 이북해는 사효심에게 무언가 그만의 깊은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단 한 번 만났을 뿐인 사효심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사효심이 실로 오랜만에 무당파에서 다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무림맹의 가장 중추적인 핵심인 무단의 단주를 맡게 되었을 때, 이북해는 몇 번이나 그를 찾아가려 했다. 하나 결국 동행하고 있던 야율척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용선생의 입을 통해 그가 쾌의당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자 이북해는 왠지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듯한 기분에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북해는 칠대용왕을 비롯한 쾌의당 수뇌들의 정체를 모두 알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그런 절세의 고수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끌어모은 조익현의 능력이 두려워졌고, 그의 의중에 짙은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익현이 선배님을 비롯한 고수들을 모아 쾌의당을 만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북해의 물음에 용선생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늘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협의체를 만들었는지 궁금했네. 그래서 한번은 그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지.”
“그가 무엇이라고 답했습니까?”
용선생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라더군.”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작은 조각상이라고 했네.”
이북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취와미인상 말이로군요.”
용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야 우리도 알게 되었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네. 나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고민과 불면의 나날을 보내게 만든 것이 기껏 조각상 하나를 얻기 위해서였다니 어찌 그러지 않겠나? 나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마음속으로는 적지 않은 불만과 의혹을 느끼고 있었을 걸세. 한참 후에 그 조각상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의문이 풀렸지.”
쾌의당에 가입한 고수들은 대부분이 조익현과 쾌의당주가 펼치는 대라삼검의 가공할 위력을 뼈저리게 느낀 인물들이었다. 뒤늦게 조익현이 찾고 있는 취와미인상이 그러한 대라삼검의 절학을 담은 것임을 알게 되자 그들은 크게 경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틀림없이 취와미인상에 욕심을 가졌을 걸세. 하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거나 훼방 놓는 자는 없었지. 그건 조익현에게는 일종의 역린(逆鱗)과도 같은 것이어서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의 노여움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네.”
용선생은 물론이고 쾌의당의 수뇌들은 모두 조익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조익현은 비록 몇 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가 얼마나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이며 치밀한 심계와 잔인한 손속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두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제자인 쾌의당주 또한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중 무공으로 쾌의당주를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와미인상은 모두 세 개가 있으며, 하나는 조익현이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석동에게 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취와미인상은 조익현의 동생인 철혈홍안 조여홍의 수중에 있었다.
조여홍은 취와미인상을 천룡궤에 담아 놓았고, 그 천룡궤를 열기 위해서는 봉황금시가 필요했다.
자연히 쾌의당의 이목은 두 물건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강호에 얼마나 많은 소요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졌던가?
“최근에 조익현이 천룡궤를 열고 그토록 원하던 세 번째 취와미인상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네. 백 년에 걸친 그의 숙원(宿願)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지.”
이북해는 임영옥이 가지고 있던 봉황금시가 강일비를 통해 조익현에게 전해진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용선생의 그 말에 적지 않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하나 그가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묻기도 전에 용선생의 묵직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취와미인상이 조익현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섭리라고 할 수 있네. 시기상의 문제였을 뿐, 그것은 결국 그의 손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중요한 건 앞으로 쾌의당이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것일세.”
이북해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쾌의당은 조익현이 취와미인상을 얻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물론 쾌의당의 수뇌들은 각기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겠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조익현의 원래 목표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앞으로 쾌의당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은 강호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칠대용왕 중 상당수와 천살령주까지 없어진 마당에 쾌의당이 지금과 같이 활발한 활동을 할 수는 없을 걸세. 하지만 조익현과 쾌의당주가 멀쩡하고 야심이 많은 몇몇 용왕들이 건재한 한 언제든 강호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킬 가능성은 존재하네. 인중용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그 증거일세.”
“용 선배의 말씀은 사효심이 다시 등장한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인중용왕은 칠대용왕 중 유일하게 조익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인물일세. 나는 그가 십여 년의 은둔을 깨고 강호에 다시 나타나 정식으로 무림맹의 중책을 맡은 것에는 조익현의 입김이 닿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네.”
“……!”
“조익현과 쾌의당주는 칠대용왕 중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는 와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네. 그런 그들이 천살령주마저 사라진 지금 인중용왕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네. 그들에게는 반 토막이 난 쾌의당을 활용할 새로운 복안이 있는 게 틀림없네. 자네는 그 점에 주목해야 하네.”
그 말을 할 때의 용선생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없이 진지하면서도 결연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강호 무림의 앞날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가득 안고 있는 무림명숙(武林名宿) 본연의 모습이었다.
용선생은 이북해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익현은 취와미인상을 얻기 위해서 쾌의당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네. 누구보다 야심이 크고 심계가 치밀한 그가 단순히 취와미인상 하나 때문에 쾌의당을 조직했을 리는 없네. 그가 수십 년 동안 장악해 온 서장을 떠나 중원으로 온 것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일세. 나는 그것이 그가 쾌의당을 만든 진실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네.”
이북해는 용선생의 마지막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진산월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지금까지의 쾌의당이 칠대용왕과 이대영주의 무대였다면, 앞으로의 쾌의당은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쾌의당주와 인중용왕이 전면으로 나서는 전혀 다른 무대일세. 또한 그들의 배후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조익현이 이제 비로소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신호탄이기도 한 셈이지. 그들의 행적에 대해 자네는 더욱더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하네.”
용선생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두 마친 이북해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진산월과의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야율척이 나에게 용선생과 조익현의 관계에 대해 알려준 것은 바로 조익현의 이러한 의도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오. 야율척과의 세력 경쟁에서 밀린 조익현이 쫓기듯 서장을 떠나 중원에 자리 잡기 위해 쾌의당을 만들었으며, 이제 대라삼검을 모두 완성한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떨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한다는 걸 나에게 경고하려 했던 것 같소.”
이북해의 마지막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진산월의 귓전에 꽂혔다.
“그것은 또한 진 장문인에게 전하는 경고일 수도 있소. 강호에서 쾌의당과 가장 큰 원한을 맺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 장문인이 아니오? 조익현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진 장문인을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