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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20화


366장 이중함정(二重陷穽)(1)

오늘 서안의 석양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조금씩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이 처처히 늘어선 지붕과 처마 사이로 번져 가면 주위는 어느새 화염의 바다를 이루게 된다. 그 불타오르는 화염 사이로 우뚝 솟은 고루거각들과 멀리 보이는 진령(秦嶺)의 산자락은 한데 어우러져서 한 폭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노해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석양이 정말 피처럼 붉군. 이런 날에는 왠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든단 말이야.”

노해광의 뒤에 서 있던 지일환이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제법 당찬 음성을 내뱉었다.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에서 형산파를 물리쳤고, 이제 화산파마저 꺾었는데 누가 감히 종남파에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장안 일대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없을 겁니다.”

노해광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초리에 지일환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늘 입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했거늘 또 함부로 놀리는구나. 넌 언제고 그 입 때문에 호되게 경을 칠 때가 있을 것이다.”

지일환은 찔끔하다가 이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 이곳에는 대형과 저밖에 없는데, 굳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도 대형 앞이니 마음 놓고 떠드는 겁니다.”

“정보를 취급하는 놈은 절대로 입이 가벼워서는 안 된다. 무심코 놀린 입으로…….”

“언제 귀중한 정보를 흘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란 말씀이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할 말을 지일환이 먼저 해버리자 노해광의 눈꼬리가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요새 일 몇 번 잘했다고 칭찬해 줬더니 이놈이 간덩이가 너무 커졌군.’

그렇다고 지일환이 엉뚱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회람연에서 화산파를 격파한 데 이어 종남산에서 벌어진 혈겁 때문에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의 모든 문파들이 종남파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눈치를 보기에 급급해 있었다. 자칫 잘못하여 종남파에 찍히기라도 하면 어떤 참변을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종남파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자칫하면 그들로 하여금 종남파에 반감을 가지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원래 인간이란 잘되는 쪽에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법이고, 특히 자존심이 강한 무림인들은 그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노해광은 이럴 때일수록 처신을 잘해야 앞으로의 일이 수월해진다는 걸 잘 알기에 가급적 주위의 세력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진 검단현을 찾기 위해서라도 서안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검단현이 서안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벌써 며칠째 그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해 노해광은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회람연 이후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 종남파를 등에 업은 노해광의 말을 거역하는 세력은 없었다.

노해광은 서안의 크고 작은 방파에 사람을 보내 앞으로 검단현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는 자는 종남파의 원수가 될 것이며 피의 복수를 당할 것이라는 점을 넌지시 밝혔다. 검단현에 대한 일은 앞으로도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지시켰기에 적어도 서안에 존재하는 세력이나 인물 중 검단현을 숨겨줄 데는 없을 거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또한 적류문이 멸망한 후 서안의 흑도는 흑선방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지금 흑선방은 방주인 최동까지 나서서 서안의 뒷골목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며 검단현의 행방을 알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 일이 지나도록 검단현은커녕 그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으니 노해광이 초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때마침 한 사람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노해광은 들어온 사람이 흑선방의 최고 살수이며 최동의 최측근인 강표임을 알고 눈을 번쩍 빛냈다.

“무슨 일이냐?”

강표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의심스러운 곳 두 군데를 찾아냈습니다.”

“어디냐?”

“한 군데는 용사혈의 십이목(十二目) 부근에 있는 고택입니다. 사흘 전에 상당량의 약재와 광목천이 그곳으로 유입된 것을 알아냈습니다.”

약재상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검단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기에 그를 구출해 간 자가 누구이든 그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약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광목천 또한 피를 흡수하고 상처를 감싸기 위한 물건이었다.

흑선방의 최동은 그동안 수하들을 풀어 은밀히 서안의 약재상과 포목점을 뒤지고 다녔는데, 마침내 처음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 모양이었다.

용사혈은 서안의 뒷골목에 미로처럼 복잡하게 형성된 좁은 골목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수십 개의 길목 사이로 뻗은 수많은 갈림길이 마치 뱀 구멍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노해광은 모처럼 얻은 소식에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신중한 표정이 되었다.

“단순히 약재와 광목천을 구입했다는 것만으로 그곳을 의심하진 않았을 텐데…….”

“약재들이 하나같이 부러진 뼈를 잇게 하고 심맥과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사흘 전에 한 차례 약재와 광목천을 구입한 후에는 누구도 고택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고택의 주인은?”

“이시영(李始榮)이라는 인물입니다.”

“뭐 하는 자냐?”

“젊었을 때는 남전(藍田)에서 관리로 지냈다고 합니다. 십여 년 전에 낙향해서 서안 남로에 살다가 몇 년 전에 그곳으로 왔다고 하더군요.”

“관리까지 했던 인물이 용사혈로 기어들었다는 점이 어쩐지 미심쩍군. 그곳은 누가 지키고 있지?”

“초 대협께서 조일당의 형제들과 함께 그곳 일대를 비밀리에 에워싸고 있습니다.”

강표가 말한 초 대협란 삼묘의 셋째인 소혼묘랑 초희의 오빠인 초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초력은 비록 뒤늦게 노해광의 무리에 합류했으나, 무공이 고강하고 성격이 충직해서 노해광의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조일당 또한 흑선방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 모인 곳이기에 초력과 그들이 지키고 있다면 설사 하늘을 나는 새라 할지라도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다른 한 곳은 어디냐?”

강표는 웬일인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화월루입니다.”

노해광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화월루는 서안에서 제일 큰 기루로, 화대부인이 그 주인이었다. 화대부인은 서안 일대에서 소문난 여걸이었고, 노해광도 감히 무시하지 못하는 실력과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노해광은 그동안 몇 번이나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 화대부인은 서안 일대 귀부인들의 모임인 만방루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서안 최고의 부자인 손노태야와도 친분이 두터워서 노해광으로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노해광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해광은 이미 섬서성 제일의 문파로 급부상한 종남파의 어른이고, 당대 제일의 고수인 신검무적의 사숙이며, 서안의 흑도를 장악하고 있는 최고의 실력가다. 다만 여인들과 문제가 생기면 더없이 시끄러워진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은연중에 그녀를 경원시했을 뿐이다.

하나 그렇다고 그녀와의 다툼을 꺼리거나 피할 리는 없었다.

노해광은 상대가 여인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거나 양보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화월루를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화대부인이 화산파의 집법이었던 곡수와 비밀 회담을 해서 화산파를 뒷배로 삼으려 했던 것은 대형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하지만 곡수가 죽고 난 후 화대부인은 화산파와 일정 거리를 두고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화산파의 인물들과 접촉한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방주께서는 달리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소지가 있는 인물은 무조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확실히 최 방주가 남달리 집요한 구석이 있긴 하지.”

“그동안 방주께서는 적지 않은 인원을 풀어 화대부인을 감시했는데, 이상하게도 이틀 전부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형께서도 아시다시피 화대부인은 그동안 단 한 번도 화월루를 순시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그녀는 자신이 세운 화월루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해서 하루에 한 번은 꼭 주루와 도박장, 기루를 돌아보곤 했지.”

“그런데 이틀 전부터 순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급한 일이 생겼거나 몸이 심하게 아픈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제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방주께서 본격적으로 화월루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대부인이 이틀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말에 노해광 또한 의문을 품었다. 그가 아는 화대부인이라면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서라도 자신의 구역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화월루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젯밤에 방주께서는 직접 화월루를 찾아가 화대부인을 만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기껏 기루를 담당하고 있는 포희만 나왔다고 하더군요.”

기루를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흑도문파였다. 아무리 화대부인이 서안 일대에서 영향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서안의 흑도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흑선방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포희는 무어라고 했더냐?”

“돌아가신 부모님의 제사가 머지않아서 화대부인이 고향으로 잠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포희의 답변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최동이 화월루를 의심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표가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방주께서는 예전에 서안 일대의 유력자들의 신상명세를 최대한 조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화대부인의 부모 제사는 매년 이월 초닷새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유월 하순이다. 그러니 화대부인이 부모의 제사를 위해 고향으로 갔다는 포희의 말은 거짓이 분명하다. 대체 포희는 왜 최동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화대부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최 방주는 어떻게 했느냐?”

“방주께선 알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월루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삼묘 세 분을 모셔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조치로군.”

삼묘는 노해광의 의제들로, 섭혼묘군 가휘와 천면묘객 하응, 소혼묘랑 초희를 말한다. 그들은 각기 한 방면에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어떤 일을 꾸미거나 조사할 때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인물들이었다.

“초삼랑께서 포희의 시녀 한 사람을 유인해 오셨고, 가노대께서 그녀에게 미혼술을 펼쳐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그녀의 말로는 화대부인이 사라지기 전날 밤에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그가 누구냐?”

“체구가 왜소한 노인이라고 하더군요. 시녀도 힐끗 본 게 전부라 더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 노인을 만난 후 화대부인이 모습을 감춘 것이란 말이지?”

“시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노해광은 냉소를 날렸다.

“전형적인 술수로군.”

강표도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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