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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21화


366장 이중함정(二重陷穽)(2)

화산파의 고수인 검단현의 행적을 찾을 때 하필이면 화산파와 친분이 있는 화대부인이 모습을 감추어서 주목을 받고, 우연히 시녀가 그 광경을 보게 되고, 화대부인의 실종에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시녀를 찾아가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까지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노해광은 확률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건 누군가가 짜놓은 함정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함정이 너무도 알기 쉽고 노골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의심이 드는군. 이건 마치 여기 함정이 있으니 어서 찾아오라고 손짓해 부르는 격이 아닌가?”

노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최동 또한 이 일에 의구심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강표를 보내 노해광에게 자세한 사정을 알리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지시받고자 한 것이다.

화대부인의 실종에 검단현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나, 실종된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고 화대부인이 화산파와 상당 기간 밀착 관계에 있었기에 의심해 볼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용사혈의 고택 또한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으로, 약재와 광목천을 구입하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등 전후 사정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해 있던 노해광은 문득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닷새 동안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두 군데의 의심스러운 장소가 나타났다.

한 곳은 서안에서 가장 복잡하고 후미진 뒷골목이고, 다른 한 곳은 서안에서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기루였다. 이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일 뿐일까?

‘우연 따위는 없다.’

노해광은 이번 일에 누군가의 흑심이 개입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선택하라는 거군. 둘 중 어느 곳을 택할지 나보고 결정하라는 거야.’

선택을 한다면…… 그곳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자신을 그곳으로 유인하는 누군가의 진정한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노해광의 전신에는 짜릿한 감흥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다가올 위험에 대한 인간 본연의 본능일 수도 있고, 살기에 반응하는 무림인의 천성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검단현의 행방을 몰라 짜증이 가득 찼던 노해광의 온몸에서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활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노해광의 입가에 한 줄기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나를 유인하여 사냥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가? 과연 누가 사냥감이고 누가 사냥꾼이 될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화월루의 후원에는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처처히 늘어서 있었다. 그중 상당수가 다른 곳과 시각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별채들이었다.

짙은 어둠이 천지사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이경(二更) 무렵.

화월루의 별채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야월각(夜月閣) 앞에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중앙의 인물은 준수한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태도나 자세에서 당당한 여유와 자신감을 느낄 수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신분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오른쪽 옆에는 비쩍 마른 말상의 중노인이 따르고 있었고, 왼쪽으로는 험상궂은 얼굴에 사나운 눈빛을 지닌 흑의인이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이 야월각의 앞까지 다가와서 잠시 어둠에 잠긴 야월각을 올려다보았다.

야월각은 모두 이 층으로 된 작은 누각이었는데, 크고 작은 창문 십여 개가 누각을 에워싸듯이 뚫려 있어 날씨가 좋을 때면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누각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야심한 시각인지라 창문들이 모두 닫혀 있고, 중앙에 뚫린 출입구마저 문이 굳게 닫혀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할지라도 몇 개의 유등(油燈)이 켜 있을 텐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이지 등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어 주위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어찌 보면 기루가 아니라 인적이 끊긴 폐가(廢家)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중앙의 중년인이 창문조차 잠겨 있는 야월각을 올려다보고는 냉소를 날렸다.

“흥! 초대치고는 너무 성의가 없군. 사람을 불러놓고 불조차 켜두지 않다니 이건 그냥 돌아가라고 부추기는 격이 아닌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야월각이 훤하게 밝아졌다. 출입구에 두 개의 유등이 내걸렸을 뿐 아니라, 야월각 안에도 적지 않은 수의 등이 켜졌는지 창문 사이로 환한 불빛이 흘러나와 어둠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등불들로 밝아진 야월각은 아름답게 단장된 처마와 창문의 정교한 장식이 그대로 드러나 서안 제일의 기루에 있는 후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년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담담한 눈으로 밝아진 야월각을 바라보고 있더니 다시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 정도를 성의라고 할 수 없지. 어렵게 이곳까지 걸음을 했는데, 그래도 안내하는 사람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굳게 잠겨 있던 야월각의 정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자 침착하기 그지없던 중년인은 물론이고 그의 양옆에 있던 자들까지 모두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나타난 사람이 뜻밖에도, 그토록 이를 갈고 찾아 헤매던 철심혈수 검단현이었던 것이다.

서안 일대를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던 검단현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건만 중년인은 오히려 믿기지 않는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단현을 쳐다보기만 했다.

검단현은 아직도 부상의 후유증 때문인지 혈색이 창백하기 그지없었고, 살짝 드러난 소맷자락 사이로 보이는 팔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한 자루 검을 보는 듯 날카로웠고, 자세 또한 꼿꼿해서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검단현은 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의미를 알기 힘든 그 동작에 중년인의 눈썹이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중년인은 검단현이 사라진 야월각의 입구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결심을 한 듯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양옆에 있던 자들도 그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야월각의 입구는 커다랗게 입을 벌린 정체 모를 괴물처럼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실내의 광경이 들여다보일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밖에서는 안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환하게 밝혀진 몇 개의 유등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유등의 그림자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왠지 기괴스러워 보였다.

야월각의 입구에서 중년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안에서 검단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보러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닌가? 이제 와서 망설이다니 철면호답지 않군.”

그 음성을 듣자 중년인은 질끈 입술을 깨물고는 서슴없이 야월각의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들어서자 화려하게 단장된 넓은 대청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청의 사방에는 여러 개의 유등이 걸려 있고, 한쪽에는 몇 개의 탁자와 의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청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실내로 들어오는 중년인 일행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의 모습이 실로 대조적이었다.

한 사람은 왜소한 체구에 머리가 유난히 큰 중노인이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더벅머리에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해, 얼핏 보기에도 나이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의 혈색이나 표정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싱싱해 보였다.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반대로 우람한 체구에 흑발의 중년인이었다.

얼굴 전체에 수염이 덥수룩해서 용모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은 강렬하기 이를 데 없어서 거칠고 사나운 성격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체구나 외모뿐 아니라 얼굴의 표정과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까지 판이해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중년인 일행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왠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중년인은 그들을 잠시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검단현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조금 전에는 그의 목소리까지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년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왜소한 체구의 괴노인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흐흐. 찾을 거 없네. 자네가 원하는 사람은 이 층에 있으니 말일세.”

그의 말마따나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 뒤편에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문제는 이 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년인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기 위해서는 두 분을 넘어서야 되겠구려.”

괴노인은 여전히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눈치가 빠른 친구로군. 과연 서안을 주름잡고 있는 철면호다워.”

“두 분은 나를 알고 있는데 나는 두 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니 면목이 없소. 두 분의 고명한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듣던 대로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내 이름은 별로 고명하지 않네. 대형, 대형은 자신의 이름이 고명하다고 생각하시오?”

괴노인이 묵묵히 앉아 있는 흑의 중년인을 향해 묻자 흑의 중년인은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고명은 무슨 얼어 죽을. 이름이란 그저 그놈이 염라대왕 앞에 갔을 때 자신이 누구 손에 뒈졌는지 알려 주는 데 필요한 것일 뿐이야.”

거칠고 투박한 음성만큼이나 그 안에는 살기가 흘러넘치고 있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중년인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흑의 중년인이 괴노인의 윗사람인 것을 알게 되자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괴노인만으로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흑의 중년인은 더욱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괴노인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 정말 옳은 말씀이오. 대형의 말은 하나같이 정말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명언들뿐이구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어서 후딱 일이나 마무리 짓도록 하자. 밤이 길면 어차피 뒈질 놈들이라도 헛된 꿈을 꾸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역시 멋진 말씀이시오. 기꺼이 따르겠소.”

괴노인은 다시 한 차례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중년인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두 분은 혹시 소문삼살 중의 괴살 도인수와 막살(莫殺) 적화승(狄火承)이 아니오?”

군림천하 (899)

괴노인이 의외라는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용케도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차렸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무슨 일을 할지도 알고 있겠구나? 크하하!”

괴노인, 도인수는 잔주름 가득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살기로 범벅이 된 그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 떨리도록 무섭고 잔인해 보였다.

소문삼살은 마도의 최고고수인 우내사마 중 일인이며 천하제일살성으로 알려진 소마 신지림의 제자들이었다. 그들 중 막내인 악살 장병기는 얼마 전에 종남파를 습격하는 무리에 섞여 있다가 한 줌의 고혼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악살 장병기는 물론이고 둘째인 괴살 도인수도 사용하는 수법이 하나같이 잔인하고 괴기해서 무림에 악명이 자자했지만, 소문삼살 중 강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는 첫째인 막살 적화승이었다.

닥치는 대로 살겁을 일삼는다고 해서 막살이라는 별호가 붙었을 정도로 적화승은 피에 굶주린 살인마였다. 그래서 혹자들은 그의 사부이자 천하제일살성인 소마에 못지않다고 하여 소소마(小笑魔)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마 신지림이 웃으면서 사람을 살해하는 데 비해 적화승은 웃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들 사제 사이에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인수와 적화승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지 않을 무림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년인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도인수가 금시라도 달려들듯 질펀한 살기를 흘리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막 중년인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도인수가 중년인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라지 않는군. 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단 말인가?”

중년인은 정색을 했다.

“충분히 놀라고 있고, 두려움도 느끼고 있소. 다만 철면호라는 이름처럼 내 얼굴이 남들보다 두꺼워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오.”

도인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상해. 마치 우리가 이곳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느긋한 표정이야. 지금 너와 네 옆의 두 머저리로는 우리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전혀 당황하거나 겁을 먹고 있지 않아.”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 낯짝이 두꺼워서…….”

“게다가 농담까지 지껄일 정도로 여유가 있군. 확실히 이상해. 대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도인수가 계속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불쑥 묻자 적화승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목 위에 달린 머리통을 떼어버리면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뒈진 놈은 수작 따위를 부릴 수 없으니 말이다.”

도인수는 세 번째로 손뼉을 탁 쳤다.

“역시 대형의 말씀은 예리하기 그지없구려. 이 아우는 대형의 혜안에 그저 탄복할 뿐이오.”

도인수가 성큼 중년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의 전신에서 맹렬한 살기가 꿈틀거리며 피어올라 점점 더 주위를 잠식해 들어갔다.

그럼에도 중년인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오히려 그의 양옆에 서 있는 중노인과 흑의인이 한발 앞으로 나와 중년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모습은 얼핏 보기에 중년인을 보호하려는 것 같았는데, 도인수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도인수의 눈이 가늘어지며 섬광같이 예리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내 초마기(焦魔氣)를 뚫고 앞으로 나섰단 말이지. 너희들 단순한 철면호의 수하들이 아니로구나?”

도인수가 뿜어낸 살기는 그가 익힌 초마신공(焦魔神功)의 기운을 유형화한 것이어서 상당한 실력의 고수라 할지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력했는데, 두 사람이 오히려 그 기운을 뚫고 몸을 움직였으니 그것은 도인수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두 놈의 인상착의가 철면호의 의제인 가휘라는 놈과 흑선방의 방주인 최동이라는 놈과 비슷하여 그놈들인 줄 알았는데……. 설마 놈들의 무공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도인수는 소문삼살 중에서도 두뇌가 뛰어나고 계산이 빠른 인물이었다. 그래서 오늘 철면호 노해광을 제거하기 위해 함정을 파는 과정에서 노해광의 측근 세력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노해광의 세력은 다양한 계층에다 재주가 비상한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지닌 절정고수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노해광 본인도 절정고수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노해광은 몇 번이나 주위의 도움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그 약점을 보완하고는 했다. 장성제일검객인 나력지와 마검 조일평, 풍시헌 사제가 그들이었다. 최근에는 소마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검마의 제자들도 노해광의 편에서 힘을 보탠 적이 있었다.

하나 도인수는 그들에 대해 별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력지는 자신들의 사부인 소마와 비슷한 항렬이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신들의 일에 개입하려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라는 마검 조일평이나 풍시헌은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설사 검마의 제자들이 나타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검마 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그들 중 누구도 적화승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도인수가 우려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노해광의 수하들 중에는 천면묘객이라는 자가 있었다. 변장술의 천재로 알려진 그의 존재가 도인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천면묘객의 분장술은 그야말로 뛰어나서 겉으로는 전혀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노해광은 약삭빠르고 잔머리가 뛰어난 인물이기에 이번 화대부인의 실종이 누군가의 함정임을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노해광이 위험천만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게 뻔한 화월루로 자신 말고 다른 자를 분장시켜 내보낼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수하에 천면묘객 같은 분장술의 고수가 있다면 그럴 확률은 더욱 높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 도인수는 노해광이 나타난다 해도 그가 진짜 노해광인지 아니면 천면묘객의 분장인지를 알아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기껏 함정을 파고 노해광을 유인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인수는 눈앞의 노해광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말로만 듣던 노해광의 모습 같았으나, 그렇다고 노해광이라고 믿고 무작정 살수를 쓰기에는 왠지 망설여졌다. 특히 노해광의 최측근이라는 천면묘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신경 쓰이기도 했다.

노해광의 양옆에 있는 자들은 삼묘의 우두머리인 섭혼묘군 가휘와 흑선방주 최동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천면묘객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눈앞 노해광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기에 도인수는 계속 살기만 뿌려댈 뿐 본격적으로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짜 노해광이라면 함정이 있을 게 뻔한 이곳에 단지 수하 두 사람만 대동하고 왔을 리는 없었다.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숨겨둔 수를 드러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가짜 노해광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숨어있던 진짜 노해광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노해광은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도인수도 언제까지나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짜든 가짜든 일단 눈앞의 이놈을 해치워야겠다. 세 놈 모두 제거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겠지.’

마음을 결정한 도인수가 앞으로 성큼 나서며 잔뜩 오므린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쿠아악!

마치 살쾡이가 우는 듯한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주위의 공기가 격하게 요동치며 노해광의 목덜미 쪽으로 빠르게 움직여갔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이 회오리치며 날아드는 듯한 이 무공은 날표탐조(辣豹貪爪)라는 수법으로, 소마의 절학인 탈명조 중의 한 초식이었다.

노해광은 눈앞의 허공이 일그러지며 세찬 경기가 몰아쳐 오는 광경을 보면서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대신에 그의 오른쪽에 서 있던 비쩍 마른 노인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손을 세차게 앞으로 내뻗었다.

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거센 경력이 사방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도인수는 우뚝 선 채 자신의 발 앞을 내려다보았다. 먼지가 수북 쌓인 바닥에 발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놀랍게도 조금 전의 격돌에서 도인수는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던 것이다.

도인수의 눈자위가 거세게 실룩거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노해광의 앞을 막아서 있는 중노인을 바라보았다. 중노인 또한 도인수와 마찬가지로 한 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자신과 팽팽한 한 수를 교환한 인물이 한낱 노해광의 수하일 리가 없었다.

“너는 섭혼묘군인지 하는 놈이 아니구나.”

도인수의 씹어뱉는 듯한 음성에 중노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인수는 한동안 사나운 눈으로 중노인을 쏘아보다가 노해광을 돌아보며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었다.

“그래, 이 정도 한 수는 숨기고 있을 줄 알았지. 이제 알겠다. 너는 진짜 철면호로구나.”

노해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철면호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 싱거운 말이로군.”

도인수는 노해광의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짜라면 굳이 이런 고수를 옆에 대동할 필요가 없겠지. 네 정체가 분명해진 이상 넌 오늘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자꾸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구려. 오늘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자가 누구인지는 내일이 되어봐야 아는 거요.”

“흐흐.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두고 보자.”

나직한 괴소와 함께 도인수는 노해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연히 노해광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중노인이 그에 맞서게 되었다.

파파팡!

도인수와 중노인은 번개 같은 속도로 십여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내뻗은 경력 하나하나가 상당히 위력적이어서 노해광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차례 공기가 일렁이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가공할 경력이 그의 옆에서 몰아닥쳤다.

그 경력이 어찌나 갑작스럽고 빠르게 다가왔는지 노해광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경력이코앞까지 다가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몸을 잡아 당기며 앞으로 주먹 하나를 내뻗었다.

노해광은 물러나는 자신의 목뒤에서 커다란 주먹이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향해 몰아쳐 오는 경력과 정면으로 마주쳐 가는 광경을 그저 두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아야만 했다.

콰아아앙!

폭풍 노도 같은 경기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며 주위를 폐허처럼 만들어 버렸다.

노해광은 경기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었지만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뒤로 다섯 걸음이나 더 물러나야 했다.

“으음.”

그 격돌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한쪽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도인수와 중노인마저 손을 멈춘 채 이쪽을 쳐다보았다.

노해광의 앞에는 어느 새 흑의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적화승이 어깨를 들썩이며 거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흐흐! 정말 짜릿하군.”

적화승은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손목을 주무르며 붉게 상기된 얼굴에 살기로 물든 안광을 번뜩거렸다.

“내 금마선(禁魔禪)을 단 일권으로 막아내다니 강호에 이런 권법의 고수가 있었던가?”

흑의인은 여전히 노해광의 앞을 철탑처럼 우뚝 막아선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적화승의 두 눈은 시뻘건 핏발이 이리저리 곤두서있어 심약한 사람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살기가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적화승은 그런 눈으로 흑의인을 노려보다가 이내 다시 괴소를 날렸다.

“흐흐. 어설프게 변장을 했군. 최동이란 놈은 아닌 것 같고, 졸장부가 아니라면 이름부터 밝혀라. 내 손으로 찢어 죽일 놈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의 충돌로 인해 흑의인의 얼굴 일부가 벗겨졌는데, 그 사이로 한결 새하얀 피부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도인수의 얼굴에 한 줄기 낭패 어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도인수는 자신이 한 가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천면묘객이 진정한 변장술의 고수라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변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다.

‘변장한 자는 노해광이 아니라 양옆의 두 놈이었구나.’

흑의인은 찢어진 자신의 피부를 만져보더니 이내 천천히 얼굴에서 한 장의 얇은 가죽을 벗겨냈다. 험상궂게 생긴 중년의 모습이 사라지고 눈부시도록 빛나는 젊은 얼굴이 드러났다.

주위가 갑자기 훤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젊고 준수한 모습에 적화승은 물론 도인수마저 순간적으로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흑의인의 입에서 당당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종남의 낙일방. 당신을 염라대왕에게 보내줄 사람의 이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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