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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3화


군림천하 (923)

그 경기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진산월과 전흠이 서 있는 일대의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리며 무수한 솔방울과 솔잎 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낱 충돌의 여파가 이럴진대, 충돌 자체는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이겠는가?

그 순간, 진산월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파앗!

그의 몸은 순식간에 희끗한 잔영만을 남긴 채 우거진 소나무 숲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어엇? 장문 사형!”

전흠이 그의 행동에 놀라 덩달아 몸을 움직이려 할 때, 귓전으로 진산월의 전음이 들려왔다.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전흠은 그 말에 막 솟구치려던 신형을 멈추었다.

독지계가 아닌 진산월의 지시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독지계가 펼쳐져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라도 선뜻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진산월의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보아 독지계는 나무 위까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는 게 분명했다.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독지계의 허점이 너무도 쉽게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땅을 타고 흐르는 독지계의 독기가 살아 있는 나무에까지 파고들었다면 이 일대의 나무는 모두 독기에 휩싸여 녹아 버리거나 시커멓게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주위의 나무들은 다른 곳과 전혀 다름이 없이 생생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지계의 독기가 주변의 나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단숨에 이 점을 꿰뚫어 보았기에 주저하지 않고 나무 위로 신형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전흠은 벌써 까마득한 거리에서 송림 위를 질주하고 있는 진산월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장문 사형은 검법뿐 아니라 신법 또한 어느 사이에 일정한 경지를 벗어난 것 같구나.’

확실히 진산월의 무공은 시간이 갈수록 무섭도록 발전하고 있었다.

누산의 석동을 나올 때만 해도 진산월은 검법을 제외한 다른 무공에 그다지 강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 낙일방에게서 구반장법을 비롯한 소선 우일기의 절학을 전해 받은 뒤로 장법을 비롯한 수공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육천기에게서 취선 하정의의 무공마저 입수한 후로는 그야말로 맨손으로도 능히 강호의 절정 고수로 불리기에 충분한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약점을 보였던 신법에 있어서는 비선 조심향의 무염보를 완성한 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지금은 강호십대신법대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무염보는 단순한 보법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고찰을 담고 있는 최상승의 절학이기에 그 효용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진산월 또한 무염보의 열여덟 걸음을 모두 익힌 후에는 자신이 무공의 또 다른 경지에 새롭게 눈을 떴음을 자각할 정도였다.

전흠이 멀어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일렁이며 한 사람이 가까운 나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고준이었다.

고준의 얼굴은 조금 전에 보았던 여유만만하고 느긋한 모습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굳어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보니 자네의 이름도 묻지 못했군. 자네는 누군가?”

전흠은 이 장여 떨어진 나무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고준을 올려다보며 포권을 했다.

“나는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인 전흠이라 하오.”

고준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다 문득 탄식했다.

“정말 종남파의 고수였군.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자는 역시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인가?”

“그렇소.”

고준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천하의 고인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으니 그야말로 창피 막심한 일이로군. 내 평생 이렇게 낯이 뜨겁고 부끄러운 적은 이번이 처음일세.”

고준은 적어도 염치를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얼굴에는 확실히 당혹스러워하는 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고준은 진산월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다가 씁쓸한 음성으로 넋두리하듯 말했다.

“단숨에 독지계의 단점을 알아차리고 주저 없이 몸을 날리다니, 그것만 보아도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짐작이 가는군.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붙잡고 이야기라도 나누어 볼 걸 그랬나?”

그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동경해 오던 대상을 어렵게 만난 어린 소년 같아서 전흠이 오히려 어리둥절함을 느낄 정도였다.

“고 대협이 본 파의 장문 사형을 그리도 간절하게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구려.”

전흠이 반은 농()이 섞인 음성으로 말하자, 고준은 정색을 했다.

“신검무적의 명성은 중원을 넘어 서장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네. 짧은 시간에 그가 이루어 낸 일들은 가히 신화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지. 나는 중원에 들어오면서 언제고 꼭 그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는데, 막상 대면하고도 제대로 인사조차 나눠 보지 못하고 스치듯 지나가 버렸으니 나의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자네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전흠은 열변을 토하며 진산월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는 고준의 모습에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고 대협이 이곳에 독지계를 풀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요?”

“그건…….”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대답하려던 고준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비스듬하게 걸터앉은 자세를 똑바로 하며 전흠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네가 이쪽으로 온 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가?”

갑자기 표정이 일변한 고준의 태도에 전흠은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으나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우리는 근처를 지나가던 길에 이쪽에서 심상치 않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온 것이오. 고 대협이야말로 우리에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니오?”

고준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신광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전흠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이내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 자네는 이상한 오해를 하지 말게. 내가 자네들에게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으면 이곳에 독지계를 펼쳤다는 것을 밝힐 리가 있겠나? 나는 그저 맡은 일을 확실히 하고자 했을 뿐이네.”

전흠이 재빨리 물었다.

“고 대협이 맡은 일이란 게 뭐요?”

“이 안쪽으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막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이미 장문 사형이 들어갔지 않소?”

고준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내걸렸다.

“신검무적은 나로서는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이니, 그저 천재지변 같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네.”

“내가 들어간다면 막을 셈이오?”

지금까지 부드럽던 고준의 얼굴에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이 감돌았다.

“천재지변은 한 번으로 족하네. 자네는 신검무적이 아니니 같은 행운을 기대하지 말게.”

“그래도 만약…”

전흠이 채 무어라고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고준은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원한도 없는 젊은 사람에게 독수를 쓰기는 싫지만, 내가 맡은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건 더더욱 싫네. 자네는 허튼 생각을 하지 말고 그곳에 가만히 있도록 하게.”

전흠도 아직 진산월의 다른 지시가 없기에 당장 그를 뚫고 들어갈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나 막상 자신을 어렵지 않은 상대로 보는 듯한 고준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욱하는 반발심이 일어났다.

다행히 이제는 그도 순간적인 충동에 일을 그르치는 철부지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고준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주고 말겠다는 각오가 단단히 자리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그런 마음이 보여 줄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계속적으로 들려오던 싸움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싶은 순간에 전흠의 귓전으로 진산월의 전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숲 안의 동쪽 공터로 와라.

그 말을 듣자마자 전흠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동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고준은 설마 하고 있다가 전흠이 아무런 기색도 내지 않고 송림 위로 날아오르자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내 말이 장난인 줄 아는가?”

그의 오른쪽 소매가 한차례 흔들리며 시커먼 흑무(黑霧)가 전흠이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전흠은 몸을 날릴 때부터 고준의 독공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고준이 흑무를 펼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출검했다.

파앗!

새하얀 검광이 무섭게 번뜩이며 흑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전흠의 신형은 어느새 그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고준은 전흠이 이리도 쉽게 자신의 독무를 뚫고 나갈 줄은 몰랐기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과연 종남파의 고수란 말이로군. 어디 이것도 받아 보게!”

고준이 다시 오른 소매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반으로 갈라졌던 흑무가 빠르게 하나로 뭉치며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어 전흠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전흠은 힐끗 돌아보고는 이대로 계속 달려가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발끝에 닿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강적을 가까이 두고 몸을 공중에 띄우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허공에서는 몸을 마음대로 이동시키거나 움직일 수 없기에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전흠은 나뭇가지의 탄력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허공을 날아가는 방향이 고준 쪽이 아니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전방이어서 고준이 당장 다른 공격을 하기가 무척 애매한 상황이었다.

원래 고준은 땅바닥에 펼쳐 놓은 독지계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무 위쪽으로는 별다른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설사 상대가 나무 위로 올라온다 하더라도 위쪽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진산월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이동했기에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이제는 손을 쓰려 해도 오히려 흑무가 방해가 되어 섣불리 다른 공격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약은 수작을 부리는군.”

고준은 입술을 깨물며 왼쪽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쐐액!

그의 손에서 거무튀튀한 철표(鐵)가 튀어나와 빛살 같은 속도로 허공에 떠 있는 전흠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러나 철표가 전흠을 꿰뚫기 직전에 그의 몸이 뒤집히면서 수중의 장검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땅!

철표는 전흠의 장검에 격중되어 숲속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빠르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바람에 전흠은 공중에서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는 듯했으나, 바닥 가까이에 있는 나뭇가지 위로 출렁거리듯 떨어지다가 그 탄력을 이용해 더욱

고준이 다시 암기를 발출하려 했을 때, 전흠은 이미 송림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고준은 예상치 못한 전흠의 민첩한 움직임에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헛! 보기와는 다르게 약삭빠른 친구로군.”

그는 전흠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신검무적이라는 이름에 내가 너무 주눅이 들었나?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했군.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벌써 두 사람이나 들어가 버렸는데 계속 이곳을 지키고 있을 의미가 있을까?”

고준은 고민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숲 쪽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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