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56화


군림천하 (956)

제389장 장쟁지종(長爭之終)

흑의 노인과 소마의 대화는 얼핏 듣기에는 모처럼 만난 친구들 간의 평범한 담소 같았다.

“오랜만이로군. 십오 년 만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월이 정말 빠르군.”

흑의 노인은 소마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자네는 조금 변했군. 주름이 더 많아진 것 같아.”

소마의 시선도 흑의 노인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전신의 살기가 많이 지워졌군.”

“자네를 생각하며 지내다 보니 이렇게 되더군.”

“나도 마찬가지일세.”

두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소마가 물었다.

“내가 여기 올 줄은 어떻게 알았나?”

“소문을 들었지. 자네가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자네에 대한 소문임을 알 수 있었다네. 자네 성격에 그 소문을 들었다면 필시 이곳으로 오리라 짐작했지.”

“내 모양이 우습게 됐군.”

소마가 자조적인 미소를 떠올리자, 흑의 노인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네. 지금이 아니라 언제라도 말이지.”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닐세.”

“그럼 무엇인가?”

소마의 주름살 사이에 파묻히듯 잠겨 있는 두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신광이 번뜩거렸다.

“그동안은 자네나 나나 서로에 대한 필승의 확신이 없어서 만나는 걸 피해 오지 않았나? 그런데 자네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이제 나를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흑의 노인의 표정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확신 같은 건 없네. 다만 이제는 우리 사이의 일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네.”

소마는 한동안 묵묵히 흑의 노인을 바라보고 있더니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되긴 했군.

“너무 오래되었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중인들은 그들의 모습에 적지 않은 의혹을 느꼈으나, 무언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에 억눌려 섣불리 끼어들지 못했다.

소마를 향해 일전을 치를 결의를 다지고 있던 낙일방은 돌연한 침입자의 등장과 그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눈앞의 상황에 약간은 당황하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때마침 노해광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낙일방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사숙께선 혹시 저 노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노해광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

“그가 누굽니까?”

“검마다.”

그 말에 낙일방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우내사마 중의 그 검마 말입니까?”

“그렇다. 소마가 필생의 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검마 금옥기뿐이다.”

검마 금옥기!

실로 전설적인 이름이 아닌가?

강호무림에서 검을 차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선망해 마지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신검무적의 등장 이전에 강호인들은 무림구봉 중의 검봉인 화산파 장문인 용진산과 마도제일인 신목령주, 그리고 우내사마 중의 검마 금옥기를 당금 무림에서 검법에 관한한 최고의 고수들로 꼽곤 했다.

원래 검마 금옥기와 소마 신지림은 둘 다 산서성 출신으로, 나이도 똑같았다. 공교롭게도 무림에 출도한 시기도 비슷했고, 명성을 날리게 된 시점도 같아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가 되기도 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상대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주위에서 계속 자신들을 이런저런 일로 비교하자 점차 상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그들은 우연히 섬서성 동관(潼關)의 한 나루터에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원한이나 경쟁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다만 혈기 왕성하고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첫 번째 격돌에서는 서로 부상을 입은 채 싸움을 멈추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육투예를 완성하지 못했던 신지림은 금옥기의 날카로운 검법을 뚫고 접근전을 펼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백여 것이다. 초 만에 얼굴에 일검을 비껴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물러나야 했다. 상처가 한 치만 깊었어도 신지림은 머리가 갈라져 차가운 시신이 되고 말았을

금옥기 또한 신지림의 주먹에 옆구리를 가격당해 갈비뼈가 부러져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둘 다 적지 않은 부상을 당했지만, 부상의 정도로 보아 미세하나마 금옥기의 우위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승패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신지림은 자신이 패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의 결과가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신지림은 거의 오 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스스로의 무공을 가다듬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오 년 후, 자신의 발로 먼저 금옥기를 찾아간 신지림은 오백여 초를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신지림이 박투술 만으로는 금옥기의 검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후로 신지림은 금옥기의 권역 안으로 침투할 방법을 연구했으며, 오랜 각고 끝에 하나의 보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마귀보였다.

마귀보를 완성한 다음에야 비로소 신지림은 스스로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머지않아 그의 이름은 강호무림을 진동하게 되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이름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신지림은 금옥기와 세 번째로 부딪히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두 사람 모두 중년을 코앞에 둔 나이였고, 몸과 마음이 모두 최정상에 올라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승부를 보리라 결심한 신지림이었지만, 금옥기의 검 또한 그동안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여전히 승패는 쉽게 나지 않았고, 초식을 거듭할수록 두 사람의 결투는 치열함을 넘어 처절하게 변해 버렸다. 그들의 싸움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시(午時)에 시작해서 주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놀랍게도 이번에도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신지림이 육투예에 이어 마귀보까지 완성했건만, 그동안 금옥기의 염왕검법 또한 완벽에 가깝도록 가다듬어져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승부가 멈춘 것은 두 사람 모두 부상이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이 의미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신지림은 장성 너머로 가서 칩거에 들어갔고, 금옥기 또한 강호에서의 활동을 극도로 자제한 채 부상을 회복하고 무공을 가다듬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언제가 되었건 또 한 번의 결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승부가 판가름 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물처럼 흐른 후, 서안의 주루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삼십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그들은 꾸준히 싸워 왔으며,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우내사마라는 이름은 그 과정에 부수적으로 얻은 것일 뿐,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상대와의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사위가 온통 무거운 무언가로 짓눌려진 듯해서 중인들은 숨쉬기조차 불편해질 정도였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자, 장내에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분위가 감돌기 시작했다. 

대결은 어느 순간, 아무런 기척도 없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낙일방조차도 눈앞에 무언가 희끗한 것이 번뜩인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악?”

그들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노해광의 뒤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장내를 구경하고 있던 정해가 무심결에 억눌린 듯한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하나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마주 보고 서 있던 두 사람의 위치가 어느새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서로 상대와 자리를 바꾼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들이 언제 그 위치로 이동해 있었는지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낙일방만이 어림짐작으로 대충 상황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서로 일 초를 교환했구나. 오랜만에 만난 인사를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

강렬한 격돌은 아니었다. 낙일방의 생각대로 정말 가벼운 인사를 나눈 것뿐인지도 몰랐다. 단지 그 인사가 너무도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신지림은 오른쪽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려 보았다. 그의 우측 소맷자락과 팔꿈치 사이가 베어져 맨살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이건 내가 알던 염왕검법의 초식과 조금 다른 것 같군.”

“운 좋게도 염왕검법에 몇 초를 더할 수 있었네.”

“좋은 일이군. 축하하네.”

이번에는 금옥기가 자신의 왼쪽 어깨 부근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어깨 부근의 옷자락이 마치 거대한 철퇴에 짓이겨진 듯 잘게 부서져 있었다.

“자네의 무공도 조금 달라진 것 같군. 이렇게 은밀한 수법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도 육투예에 몇 가지 재주를 보충했네. 굳이 말하면 팔투예(八鬪藝)라고 해야 하려나?”

“멋진 이름이군. 기대해 보겠네.”

금옥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신호로 정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낙일방도 눈을 크게 뜨고 안력을 돋우고 있었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좀 더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엔 거의 동시에 움직인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나마 신지림이 조금 먼저 금옥기를 향해 달려드는 형상이었다. 오른쪽 어깨가 아주 살짝 흔들린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의 몸은 유령처럼 공간을 이동하여 금옥기의 왼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낙일방의 눈에 신광이 번쩍거렸다.

‘저것이 바로 마귀보인 모양이로구나.’

마귀보가 아니고서는 눈 한 번 깜박거리기도 부족한 짧은 순간에 몇 장의 거리를 지나 저토록 수월하게 금옥기의 왼쪽 편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금옥기같이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검객에게는 나름대로의 권역(圈域)이 존재한다.

누구의 접근도 허락지 않는 자신만의 절대공간! 그 공간을 깨거나 침범하지 않고서는 승리는커녕 제대로 된 승부를 겨뤄 볼 수조차 없었다.

하나 신지림은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치 허깨비라도 되는 양 순식간에 그 공간을 뚫고 금옥기의 지척까지 접근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온통 시퍼런 검광에 휩싸여 버렸다. 금옥기의 반응 또한 놀라웠다. 금옥기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오른손만을 가볍게 까닥거렸다. 그러자 삽시간에 그의 전신이

파파파팍!

낙일방은 그의 손에 검이 없는 것을 보고 막연히 그가 연검(劍)을 차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막상 그가 연검을 발출하는 광경을 보고는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허리에서 뻗어 나와 주변을 휩쓸고 있는 검광의 위력이 무섭도록 빠르고 위력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귀의 몸놀림, 바로 그것이었다. 금시라도 그 검광에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던 신지림의 몸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하더니 다시 검광과 검광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금옥기의 검은 쉼이 없었다. 발출한 검광 사이로 신지림이 파고들자, 그의 오른쪽 손이 미묘한 움직임을 일으켰다. 그러자 검광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무섭게 확산되었다. 

신지림도 더는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은 어느새 갈고리처럼 오므려져 있었는데, 손가락 끝에 괴이한 기운이 이글거리고 있어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종잇장처럼 찢기고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신지림의 손가락은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폭발적인 기세로 다가오는 검광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따따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신지림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금옥기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의 몸이 어떻게 움직여 반대쪽에 가 있는지는 낙일방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그와 함께 신지림의 손가락이 금옥기의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금옥기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살짝 누이며 검광 한 가닥을 그쪽으로 발출했다.

땅!

손가락과 검광이 재차 맞부딪히며 조금 전과 같은 격렬한 마찰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 몸을 휘청거린 사람은 금옥기였다. 검과 손가락이 마주쳤는데도 오히려 금옥기가 손해를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휘청이던 금옥기의 신형이 옆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손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그 순간 일대가 온통 시퍼런 검광에 휩싸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장내는 뼛골이 시릴 듯한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쳤다.

낙일방은 몰랐지만, 그것은 금옥기가 염왕검법을 펼칠 때 흘러나오는 염왕투기(閻王鬪氣)였다. 금옥기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염왕검법의 절초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