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58화
군림천하 (958)
제390장 공가고장(故)
낙양의 여름은 서안과는 조금 달랐다.
서안은 분지 형태라서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무척 높게 올라갔다. 게다가 습도가 높아서 가만히만 있어도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무더워지곤 했다.
그에 비해 낙양은 서안보다 덥지는 않았지만, 오월부터 우기(雨期)가 시작되어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었다.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조금씩 오더니 지금은 상당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보이는 우중(禹中)의 낙양 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빗속에 잠긴 낙양의 모습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거리는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빗소리에 섞여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봐 조심하라고.”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놀란 경호성이 연거푸 귓전을 두드렸다.
히히힝!
“어이구, 저런!”
“에구머니나!”
진산월은 말의 거친 숨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로 가깝게 들려오는 것을 알고는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휙!
단숨에 객잔을 지나 낙양의 거리에 내려선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 너머로 말 한 마리가 쏟아지는 비를 뚫고 세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질주하는 말을 피하랴 내리는 비를 막으랴 거리는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진산월은 길의 한복판에 가만히 선 채 질주해 오는 말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앗? 위험하오, 피하시오!”
말이 달려오는 방향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여기저기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진산월은 내리는 비를 맞으며 미동도 않고 있었다.
비를 뚫고 달려오는 말의 모습이 급격하게 커지며 말의 거친 호흡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얼핏 말 위에 누군가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런……!”
그가 금시라도 말발굽 아래 짓밟히리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말이 지척에 다다른 순간, 진산월은 슬쩍 손을 내밀었다.
히히힝!
그러자 그토록 세차게 달려오던 말의 몸이 한 차례 흔들리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놀라 보니 어느새 진산월의 손에는 말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의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토록 세차게 달려오던 말이 갑자기 멈춘 것도 놀라웠지만, 그 과정에서 말이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거나 날뛰는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모두 진산월이 무형의 경력으로 말의 움직임을 극도로 억제시켰기 때문이었다.
끊어진 것 같았다. 진산월은 말의 안장에 얹히듯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을 붙잡았다. 비에 잔뜩 젖은 채 말 위에 축 늘어져 있는 그 사람은 얼핏 보기에는 이미 숨이
진산월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를 말에서 내려 맥문을 잡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무거운 표정으로 그의 몸을 안아 들더니 훌쩍 몸을 날려 자신이 나온 객잔의 후원으로 돌아갔다.
그 표홀하고 신묘한 움직임에 사방에서 탄성과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이내 내리는 빗소리에 잦아들었다.
진산월은 안고 온 사람을 침상 위에 내려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사람의 몸을 몇 군데 빠르게 가격했다.
파파팍!
가벼운 동작이었음에도 그 사람의 몸은 작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세차게 퍼득거리더니 이내 자잘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잦아들었다.
진산월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쏴아아………….
속절없이 내리는 빗소리만이 방 안에 울리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적막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잠시 후, 시체처럼 아무 움직임이 없던 그 사람이 한 차례 진저리를 치더니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사람의 눈이 힘겹게 뜨여졌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다시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지, 진 장문인…….”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바로 나요.”
그 사람의 안색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고, 입가로는 가느다란 경련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두 눈에는 한 줄기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나를 찾아온 거요?”
진산월의 물음에 그 사람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힘겨운 음성을 토해 냈다.
“부, 부탁을..”
그 사람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으나, 진산월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전의 부탁을 들어 달라는 거요?”
그 사람은 대답할 여력도 없는지 힘없이 눈만 감았다가 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파운수 추동생이었다.
추동생은 성숙해의 이십팔숙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고수일 뿐 아니라, 이정문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수많은 난관을 함께 헤쳐 온 노련한 인물이었다. 진산월은 그를 몇 번이나 보아왔기에 이정문이 얼마나 그를 중시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추동생이 금시라도 숨이 끊어질 듯 처참한 모습으로 진산월을 찾아온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공자는 아직 살아 있소?”
추동생은 무어라고 중얼거렸으나, 너무도 나직한 목소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에 귀를 가까이 했다.
추동생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직은……… 하지만…… 머지않아…….”
토막토막 잘린 말이었으나, 진산월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이정문은 아직 살아 있으나,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게 분명했다.
진산월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그를 가만히 내려 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은 당신의 몸에 남은 마지막 잠력(力)을 격발시킨 상태요. 당신의 상처는 너무 심각해서 나로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구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말해 주시오. 당신들이 쫓고 있는 인물은 누구이며, 이 공자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소?”
어찌 보면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으나, 추동생은 이미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 한 차례 마른침을 삼키고는 있는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쾌, 쾌의당주……. 그를 추적하다 발각당해. 그를 추적하다 발각당해……………. 이 공자는 중상을 입은 채 쫓기고 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거론되자 진산월은 머릿속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공자가 쫓고 있던 인물이 쾌의당주였단 말이오?”
추동생은 더 말을 할 기력도 없는지 미약하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산월은 몇 가지 의문이 뇌리에 떠올랐으나, 지금 당장은 추동생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동생의 호흡이 급격하게 느려지며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본 진산월은 급히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공자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은 어디요?”
추동생은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며 간절함과 염원이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동쪽, 공가장 근처 수림.. 꼭 이 공자를 구…….’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진산월은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눈을 부릅뜬 채 식어 가고 있는 그를 가만히 내려 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당신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소. 이제 남은 일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진산월은 추동생과 특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충직하고 과묵한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나, 원래 강호인들이란 목숨줄을 검 끝에 매달고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추동생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이정문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것이며, 진산월은 그에게 이정문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었다.
이정문이 상대를 두려워하면서도 발각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추적하던 인물이 쾌의당주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쾌의당주는 그동안 강호에 소문만 무성했을 뿐,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신비의 인물이었다.
탈혼검의 고수로, 무림 최고의 살성으로 불리면서도 강호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대체 이정문은 어떻게 힐끗 본 것만으로 그가 쾌의당주임을 알게 된 것일까?
진산월은 겉옷을 입고 용영검을 허리춤에 차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끊이지 않고 이어 나갔다.
이정문은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재차 확인하려 한 것일까?
그리고 왜 자신이 의심한 인물이 누구인지 진산월에게 밝히지 않은 것일까?
이정문같이 신중하고 의심 많은 인물이 극도로 조심했음에도 결국 발각당해 오히려 상대에게 쫓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과거 오촌의 낙빈루에서 이정문과 나누었던 대화를 머릿속으로 한 장면 한 장면 되새겨 보던 진산월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공자가 마지막으로 쫓기던 장소가 공가장 부근이라고 했지?’
참으로 공교로운 일 아닌가?
공가장은 위지립이 수하인 사겁을 이용해 자신을 유인하려는 장소였다.
쾌의당주에게 쫓기던 이정문이 그 근처에 있다는 건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우연 따위는 없다.’
진산월은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느끼고 있던 의혹 한 점을 확실하게 해소시켰다.
추동생은 숨이 거의 끊어져 가는 몸으로 용케도 진산월이 머무르는 곳까지 말을 달려왔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진산월은 강호의 일이란 게 단순히 운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추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흉수는 그가 진산월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을 남겨 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추동생은 진산월에게 최후의 부탁을 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흉수의 진정한 의중은 과연 무엇일까?
진산월은 싸늘히 식어가는 추동생의 시신을 다시 한 차례 바라보고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의문은 많고 상념도 많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내막이야 어찌 되었건 더 늦기 전에 이정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