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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59화


군림천하 (959)

낙양 동쪽에는 유명한 백마사가 있다. 중앙대로에서 백마사 방향을 향해 일각쯤 걷다 보면 제법 울창한 수림이 나오는데, 이 수림을 끼고 돌면 한 채의 고색창연한 장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가고장(孔家故莊)>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인 커다란 현판이 내걸린 공가장은 이 일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명문(名門) 중의 명문이었다. 비록 최근에는 그 세가 예전보다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낙양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공가장의 당대 장주는 공효(孔曉)라는 인물이었는데, 은인자중하며 좀처럼 외부 출입을 하지 않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진산월은 공가장의 정문이 빤히 보이는 수림의 한쪽 귀퉁이에서 공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 근처의 수림에서 이정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수림에서 나무들이 부러지고 바닥이 여기저기 파여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군데군데 핏자국까지 나 있어 누가 보기에도 이곳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장소의 한쪽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 몇 개가 나 있었는데, 그 발자국은 공가장 방면으로 이어지다가 점차 흐릿하게 사라져 갔다.

그 발자국을 따라온 진산월은 한동안 공가장의 현판을 응시한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공가장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가장은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여 있어 거대한 성채를 연상케 했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담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지붕들만 보아도 공가장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공가장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이런 정도의 장원이라면 당연히 정문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이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 된 일인지 공가장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지키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정문의 문고리를 두드렸다.

땅땅!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소리는 제법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오?”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투박하게 질문만 던지는 것은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귀 장의 장주를 뵙고 싶소.”

“본 장은 당분간 외인을 받을 수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시오.”

문전박대에 가까운 냉랭한 반응에도 진산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귀 장의 장주께서 실망하실지도 모르오.”

문 안의 사람은 의아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본 장의 장주께서 귀하를 기다리고 계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럴 거라 생각하오.”

그 사람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랐는지 한동안 아무 대꾸가 없었다.

삐꺽!

곧이어 굳게 닫힌 정문이 열리며 사십 대로 보이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재빠르게 훑어보더니 다소 미심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장주께 손님이 올 거라는 말씀은 듣지 못했는데, 어디에서 온 고인인지 알 수 있겠소?” 

진산월은 가만히 그를 보고 있다가 품에서 배첩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무심결에 배첩을 받아서 읽어본 중년인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종남파 이십일대 장문인 진산월>

배첩에 쓰인 글자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중년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진산월을 몇 차례나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진산월의 왼쪽 뺨에 나 있는 흉터와 허리춤에 매여져 있는 고색창연한 용영검을 지나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과 마주쳤다.

그는 몸을 가볍게 떨더니 이내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신 신검무적 진 장문인이셨군요. 미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저는 공가장의 집사를 맡고 있는 하원기(夏元起)라 합니다.”

“별말씀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 불찰이오.”

“불찰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제 보니 진 장문인께서는 장주의 손님으로 와 계시는 그 분을 찾아온 모양이군요.”

진산월은 하원기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장주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장주를 뵐 수 있겠소?”

“물론이지요. 장주께서도 진 장문인이 온 것을 아신다면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진산월은 하원기의 안내를 받으며 공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가장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욱 크고 넓었다.

특히 정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원은 어지간한 장원이 통째로 들어가도 남을 만큼 넓은 공간에 형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형형색색의 꽃들과 기화이초, 잘 관리된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터뜨리게 할 만큼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식솔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공가장의 정원에 인적이 하나도 없으니 기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구심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하원기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셋째 아가씨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겨서 식솔들이 모두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주께 귀한 손님들이 오셔서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다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최대한 출입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려. 안타까운 일이오.”

진산월은 공가장의 셋째 아가씨에게 닥친 좋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고, 하원기 또한 그 점에 대해 더 말할 생각이 없는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분이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하시긴 했는데, 설마 그 사람이 진 장문인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덕분에 강호제일검객을 뵐 수 있게 되었으니 저에게는 오늘이 정말 길일(吉)이 아닐 수 없군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주의 손님이 그 말고 몇 사람이나 되오?”

하원기는 진산월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무심결에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그라는 게…”

“당연히 위지 맹주를 말하는 거요. 그의 지위로 보아 혼자 오진 않았을 테고, 몇 사람이나 함께 왔소?”

그제야 하원기는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의 무단주인 사효심 대협과 수하인 네 명의 장한들을 대동하셨습니다. 무림맹주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일행이 단촐하여 의외였습니다.”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소?”

“그분들뿐이었습니다.”

“내 말은 그들 외에 장주의 다른 손님은 없었느냐는 것이오.”

하원기는 진산월의 의중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분 일행 외에는 장주님의 손님은 없습니다. 진 장문인께서는 달리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한 사람 있소.”

“누굽니까?”

“이정문이란 사람이오.”

하원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뼉을 탁 쳤다.

“아! 이정문이라면 혹시 산수재라는 별호로 유명한 강호의 재사(士) 아닙니까?”

“그렇소. 그를 알고 있소?”

“명성은 몇 번 들었습니다. 재주가 비상하고 기략에 뛰어나서 강호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진산월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닌 것 같소?”

하원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싱겁게 히죽 웃었다.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강호의 소문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아는 거지요.

대화를 하는 와중에 그들은 넓은 정원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진산월은 집요하게 물었다.

“이정문이란 사람을 정말 모르오?”

하원기는 다소 어리둥절하고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진산월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의 수하로부터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소.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 나는 그 흔적을 따라온거요.” 

“그 흔적이 본 장으로 이어져 있습니까?”

“그렇소. 그러니 공가장의 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가 모른다면 이상한 일 아니겠소?”

하원기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요. 이정문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에 있소?”

하원기는 눈을 크게 뜨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제가 그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소?”

하원기는 걸음을 멈추고 진산월을 응시한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 장문인은 제가 이정문을 잘 알고 있고, 그를 만났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소.”

“왜 그런 생각을 한 겁니까?”

“당신은 아직 단 한 번도 이정문을 모른다거나 그를 만나지 않았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소. 만약 아니라면 제대로 부인해 보시오.”

하원기는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어서 하원기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하원기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 장문인은 마치 나를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분명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나를 본 건 확실히 오늘이 처음일 거요.”

그 말을 들은 하원기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진 장문인은 나를 본 적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렇소.”

하원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내 기억력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 장문인을 만난 기억이 없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나를 본 적이 없으니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오. 아마 그래서 서슴없이 내게 얼굴을 드러낸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분명히 예전에 당신을 본 기억이 있소.”

“그게 어디입니까?”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사년 전, 대죽이란 마을에서요.”

하원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대죽!”

“그때 당신은 마차를 몰고 있었고, 나는 당신이 모는 마차에 실을 관 속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소. 당신은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관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을 볼 기회가 있었지.”

하원기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이내 가면을 씌운 듯 한 점의 표정도 없는 극도로 무심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겠군?”

그의 말투 또한 어느새 처음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차갑고 냉정하며 거칠기까지 한 음성이었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렇소, 감종간. 아니 쾌의당주라고 불러 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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