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68화


군림천하 (968)

제394장 서안소사(西安小事)

서안의 밤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화려한 불빛과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난 조용한 방이었다.

금옥기가 그 방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길쭉한 얼굴이었다.

그는 금옥기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더니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셨습니까?”

금옥기는 다소 초췌해 보이는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며칠이나 지났느냐?”

“이틀입니다.”

금옥기는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소마는?”

“양지바른 곳에 잘 묻었습니다.”

언뜻 금옥기의 얼굴에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금옥기는 천장을 응시한 채 묵묵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 사람은 조용히 침상 옆에 선 채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야 금옥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이 부축하려 했으나 금옥기는 손을 저어 그를 제지하고는 혼자만의 힘으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음.”

침상 위에 앉은 그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누워 있을 때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데, 앉은 자세로 바꾸고 나니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금옥기는 문득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다.

소마 신지림과의 싸움은 예상하고 있던 대로 지독한 사투(死鬪)였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은 승부를 끌고 갈 수 없다는 절박감을 안고 있었던지라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처절한 혈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그 일격!

소마의 합장된 양손에서 뿜어진 기운은 그야말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 기운이 자신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왔을 때, 금옥기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금옥기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혼신을 다해 염왕검법의 최고 절초인 염왕격정을 끝까지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검을 쌓아 온 무인으로서의 끈질긴 집념과 소마에게는 절대로 패할 수 없다는 지독한 승부심 때문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신형이 다소 흔들렸던 소마의 목에 자신의 검이 격중된 것을 인식하자마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소마와의 오랜 승부는 끝이 났지만, 금옥기는 누가 이겼는가 하는 승패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소마가 죽고 자신이 살아난 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승부에 최선을 다했으며,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금옥기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슬쩍 그 사람을 돌아보았다.

유난히 마르고 강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누구는 험악한 인상이라고 두려워했을 것이고, 누구는 잔인하고 인정 없는 얼굴이라고 욕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금옥기는 그 사납고 메말라 보이는 얼굴 안에 얼마나 강인하고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억눌린 분노와 끝없는 성취욕, 해결할 수 없는 절망감과 짙은 자괴감이 복잡하게 뒤섞여 가슴 한구석에 언제 터질지 모를 활화산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금옥기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은거지를 찾아온 그 사람은 불문곡직하고 자신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다. 어처구니가 없던 금옥기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금옥기가 그를 내쫓거나 손을 쓰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의 이글거리는 눈 속에 담긴 깊은 절망감과 끝없는 분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금옥기는 그를 문밖에 내버려두었고,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 사람은 사흘을 버티고 앉아 있었다.

사흘 후 문밖으로 나간 금옥기는 때마침 내리는 눈에 뒤덮인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사람은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제대로 입을 열 수도 없는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말했다.

“예・・・・・・ 예전 이름은 잊었습니다.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금옥기는 푸르뎅뎅하게 굳어 있으면서도 두 눈 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릿발 같은 기상이 마음에 드는구나. 네 이름은 이제부터 금함상(琴霜)이며, 내 세 번째 아들이다.”

그 사람은 억지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서리를 품는다… 마음에 드는 이름…….”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그 사람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그의 본래 이름이 매상이며, 종남파의 제자였다는 걸 금옥기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삼 년 후, 매상이 염왕검법의 전반부를 모두 익히고 강호에 출도를 승낙받을 즈음이었다.

금옥기가 본 매상은 과묵하면서도 마음이 불같아서 행동거지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무어라 입을 열려다 말을 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금옥기는 매상을 향해 물었다.

“할 말이 있느냐?”

매상의 눈이 금옥기의 안색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아직도 핏기가 별로 없이 창백한 금옥기의 얼굴을 본 매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부께서 빨리 쾌차하시기만을 기원할 뿐입니다.”

금옥기는 그런 매상을 힐끗 쳐다보고는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철면호에게 잠시 보자고 해라.”

“알겠습니다.”

매상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난 후, 금옥기는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가 혼잣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끝난 일이지만, 그래도 확인해 보는 게 순리겠지.”

잠시 후에 문밖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험. 철면호요.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곧 노해광이 들어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소. 종남의 노해광이오.”

금옥기는 침상 위에 앉은 채로 가볍게 답례했다.

“산서성 태원 출신 금옥기요.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이런 자세로 맞이하게 된 것을 용서하시오.”

“별말씀을, 금 대협의 상태가 얼마나 위중했는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이틀 만에 일어난 것만 보아도 금 대협의 화후가 얼마나 심한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소.”

“나를 보살펴 주어 고맙소.”

“그냥 남은 침상 하나를 내주었을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그나저나 나를 보자고 하셨다고 들었소.

노해광은 금옥기에게 공치사를 듣는 것이 민망한지 슬쩍 말문을 돌렸다.

금옥기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며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잠시 뵙자고 했소.”

“그게 무엇이오?”

금옥기는 조용한 눈으로 노해광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산해루는 무척 마음에 드는 주루였소. 음식도 맛있었고, 점원들도 모두 친절하더군.”

뜬금없는 말에 노해광은 일순 어리둥절했으나,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제법 신경을 쓰긴 했지만, 금 대협 같은 분이 좋게 보아 주니 그저 감사할 뿐이오.”

노해광의 대답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지 금옥기는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집기나 장식도 모두 깔끔하면서도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전혀 걸리적거리거나 불편한 곳이 없더군. 정말 좋은 주루였소.”

금옥기가 계속 산해루의 칭찬을 하는데도 이번에는 노해광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금옥기의 말 속에 무언가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금옥기의 음성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런 좋은 주루에서 평생의 호적수와 마지막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운이 좋은 일일 것이오. 그래서 나도 내 운이 좋은 줄로만 알았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이 있었소.”

노해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냉엄한 표정이었다. 어찌 보면 철면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반면에 금옥기는 검마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바닥이 조금 이상해서 걸을 때의 감촉이 살짝 딱딱했소. 처음에는 그냥 바닥이 조금 거칠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조금 전에 일어나 소마와의 일전을 가만히 되짚어 보니 한 가지 의혹이 들지 않을 수 없었소. 그래서 당신을 보자고 한 거요.”

금옥기는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노해광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원래 소마와 나의 무공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백중세였고, 그건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마찬가지였소. 그와 일수를 겨루고 난 다음에 나는 그와의 승부가 양패구상이 되거나 결국 동사(同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소마는 쓰러지고 나는 살아남았소.’

노해광은 모처럼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건 금 대협의 운이 그보다 좋았기 때문이오.”

“나도 원래는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마의 마지막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소. 원래대로라면 절정에 달한 마귀보 때문에 그가 공격에 매진하기 직전까지는 그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야 했는데, 바로 그 직전에 그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 바람에 위치가 선명히 드러나고 말았소. 덕분에 나는 그의 목에 일검을 격중시킬 수 있었고, 반면에 그가 발출한 기운은 내 머리에서 살짝 벗어난 곳을 지나치는 바람에 나는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소.”

“소마도 실수할 때가 있었구려.”

“물론 소마도 사람이니 언제든 실수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신의 심력을 다한 절정의 순간에는 아니오. 그런 상황에서 소마 정도 되는 고수는 결코 실수 같은 걸 하지 않소.”

“실수가 아니라면?”

“단지 소마는 발이 미끄러진 거요. 마지막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오.”

노해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실수가 아니고 무엇이오?”

“정상적인 상태에서라면 물론 그건 그의 치명적인 실수겠지. 하지만 만약 바닥에 특별한 장치가 있어서 그의 발이 미끄러지게끔 유도했다면, 그것은 그의 실수라기보다는 누군가의 계책이 통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만약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정말 대단한 계책을 세운 것이구려.”

노해광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금옥기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으나, 노해광은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금옥기는 한참 동안 그를 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철면호라. 정말 이름 그대로의 사람이군. 당신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바닥에 무언가 수작을 부려 결국 그 때문에 소마가 결정적인 순간에 허점을 드러냈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요?”

노해광은 여전히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오히려 되물었다.

“만약 금 대협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그럼 나는 내가 평생 쓸 운을 모두 썼다는 걸 인정하고 이대로 조용히 사라질 거요. 앞으로 두 번 다시 강호에 나올 일은 없겠지.”

“만약 금 대협의 생각이 옳다면?”

“그럼 나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어찌 되었건 덕분에 한 목숨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오. 솔직히 소마와의 오랜 승부를 양패동사로 매듭짓고 싶지는 않았소. 그건 너무 허무한 일이오.”

노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평상시와는 다른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금 대협은 지금 살아 있고, 소마는 죽었다는 거요. 금 대협의 생각이 옳건 그르건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도 이런 일로 금 대협에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거요. 그러니 이번 일은 이대로 조용히 묻어 두는 게 어떻겠소?”

금옥기는 묵묵히 노해광을 쳐다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그 사람에게 한 가지만 물어봐 주시오. 대체 바닥에 무슨 일을 벌여 놓은 거요?”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서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소. 다만 짐작건대 아마도 그 사람은 소마가 사용하는 마귀보의 특징을 역이용한 것이 아닐까 싶소.”

“마귀보의 특징이라면?”

“마귀보는 양쪽 발바닥을 바깥에서 안으로 밀면서 이동하는 무공이오. 그 때문에 순간적인 방향 전환에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지. 그러니 나라면 그 마귀보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해 바닥에 몇 군데의 결을 깎아 놓을 거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금옥기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결을 밟은 상태에서 마귀보를 펼친다면 오히려 그 힘에 의해 미끄러질 수 있겠군.

“그렇소. 그러니 내가 그 사람이라면 소마가 올 시기를 맞춰서 산해루의 바닥에 사방으로 결을 내어 놓겠소. 그 정도로 소마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소마가 정확하게 결을 밟은 상태에서 마귀보를 펼친다면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를 일 아니겠소? 이번처럼 말이오.”

말을 마친 노해광은 급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이란 건 아니오. 노파심에서 말하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금 대협의 말을 듣고 생각해 낸 나의 예상일 뿐이오.”

금옥기는 한동안 가만히 노해광을 응시하고 있다가 결국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 둡시다.”

그제야 안심한 듯 노해광은 모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하하 이를 말이오? 그나저나 누군지 모르지만 참으로 대단한 사람 아니오? 바닥 몇 군데 깎은 것으로 천하의 소마를 해치워 버렸으니 말이오.”


랜덤 이미지